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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 ||
<colbgcolor=#bf1400> 창경궁 시민당 昌慶宮 時敏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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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와룡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와룡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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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487년 (창건) 1611년 이전 (중수) 1780년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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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시민당 터 추정지[1] |
[clearfix]
1. 개요
창경궁의 동궁이다. 왕세자의 공부방이자 공식 의례를 행하던 곳이었다.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정확한 위치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 동궐도》에 따르면, 지금의 낙선재 권역에 있는 수강재의 동남쪽, 창덕궁과 창경궁이 만나는 영역에 있었다.
이름 시민(時敏)은 ‘때(時)에 민첩(敏)하기를 힘쓴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의 열명(說命)[2] 편에서 유래했다. 즉, 세자가 배울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하고 민첩하게 공부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 # 참고로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의 그 김시민 장군의 이름자와 한자까지 같다.
2. 역사
창덕궁을 세운 것은 1405년( 태종 5년)이지만, 처음부터 세자궁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성종 시기 원자 이융이 세자를 책봉한 후 창덕궁에 세자궁이 필요하자[3], 1485년( 성종 16년) 1월에 창덕궁의 동문인 건양문 밖에 동궁을 지었고 시민당도 이 때 건립했다. 창덕궁의 동궁으로 지었으나, 위치 때문에[4] 창경궁 영역으로 들어갔다.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탔다. 이후 언제 다시 지었는 지 알 수 없으나 1611년( 광해군 3년)에 왕세자 가례 행사의 일부를 이 곳에서 했다는 기록을 볼 때, 그 이전에 재건한 듯 하다. # 이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으로 창경궁이 불탔으나 시민당은 무사했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잃어버린 세조의 영정을 잠시 여기에 모셨고, # 인조가 임경업을 이 곳에서 직접 친국하기도 했다. #
1647년( 인조 25) 8월에 당시 세자[5]가 머물던 임시 처소에 흉물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돌아 동궁의 처소인 저승전(...)을 다시 지었는데, 공사 중에 저승전 뿐 아니라 시민당 처마 아래의 섬돌에서도 흉물이 발견되어 궁 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다. # 그리고 이 사건을 강빈 옥사 관련사건으로 조작하기도 했다. #[6]
숙종 때는 복위된 단종 - 정순왕후와 민회빈 강씨의 신위를 이 곳에 잠시 모셨다. 숙종 말기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면서 정사를 돌보고 조회를 여는 정당(正堂)으로 활용했다. # 숙종이 죽은 후에 숙종의 혼전[7]을 문정전으로 정하면서 문정전에 있던 인현왕후의 혼전을 여기로 옮겼다. 경종은 왕이 된 이후에도 이 곳에서 나랏일을 보았고 #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 사도세자 역시 대리청정을 할 때, 이 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8]
사도세자 사후 세손이던 정조는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즉위 후 창덕궁, 창경궁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세자가 없어 시민당은 비어있었다. 그러다 1780년(정조 4년)에 불탔다. # 바로 다시 지으려 했으나, 막 흉년을 벗어난 어려운 시기였기에 공사를 취소했고 # 끝내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재건하지 못했다. 시민당 이후 창덕궁, 창경궁의 동궁 정당 역할은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중희당이 대신했다.
순종 때 제작한 《동궐도형》을 보면 시민당 터에 창고가 있었다. 이마저도 일제가 철거했고, 지금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이 들어섰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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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동궐도》 시민당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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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시민당야대지도》 | <colbgcolor=#bf1400> 《시민당도》 |
4. 부속 건물
4.1. 진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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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동궐도》 진수당 | <colbgcolor=#bf1400> 《동궐도형》 진수당. '房'은 온돌방, '廳'은 마루방, '退'는 툇마루이다.[11] |
시민당 영역에 있는 건물로 남향이었다. 시민당, 저승전과 같이 성종 연간에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광해군 때 재건했고, 이후 임금과 세자가 신하들을 불러서 만나 정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했다.
1728년(영조 4년) 11월에는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가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 7칸, 측면 3칸의 총 21칸으로, 지붕은 팔작 지붕이다. 남쪽 전면에 퇴간이 7칸 있고 가운데 3칸은 대청이다. 그 뒤로 동, 서 양 쪽에 온돌방이 각각 있으며 온돌방은 대청 쪽으로 큰 방 하나와 쪽방 2개이다. 시민당과 달리 20세기 초반까지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4.2. 장경각
昌慶宮 藏經閣서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진수당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서향이었다. 《 동궐도》와 《동궐도형》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총 3칸으로, 지붕은 맞배 지붕이었다. 시민당과 달리, 진수당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까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1]
사진 출처 - 카카오맵.
[2]
원래
발음은 ‘설’이나 이 때는 ‘열’로 읽는 것이 맞다.
[3]
당시
성종은
창덕궁에 거주했다.
[4]
위에 언급했듯,
창덕궁 건양문 밖에 지었는데,
창경궁이 생기면서 건양문 밖은 창경궁 영역이 된다.
[5]
여기서 말하는
세자는
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었던 훗날의
효종이다. 소현세자는 1년 전에
사망.
[6]
당시
강빈은 멸칭 ‘역강(逆姜, 역적 강씨)’으로 불렸다.
[7]
왕과
왕비의 신위를 임시로 모시던
전각.
[8]
하지만
질병을 핑계로 일을 안할 때가 훨씬 많았던데다, 그나마도
영조가
사도세자를 세워놓기만 하고 자기 맘대로 다 했기 때문에 실제로 정무를 본 적은 별로 없다.
[9]
세자시강원은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찬선은 그에 속한 정3품
벼슬이다.
[10]
왕이 밤 중에
신하를 불러
공부하는 비정규
경연이다.
[11]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