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7-25 09:03:15

창경궁 경춘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사모정 미확인 건물지 집춘문
대온실 관덕정
창덕궁 춘당지 관풍각 국립어린이과학관
병경문 성종 태실 앙부일구
풍기대
관리사무소 월근문
함양문 건극당 세답방 수궁
영안문 환취정 자경전 장고 요화당 통화전 명광문
건인문 통명전 양화당 정일재 집복헌 영춘헌
여휘문 여휘당 채원합 소주방 연희당 연춘헌 천오문 만입문 보정문 통화문
정양문 연경당
경춘전 환경전 소주방 장방 수문장청
순역헌
풍순헌
함인정 공목합 수랏간
함안각
교태문 영군직소
취명문 빈양문 명정전 명정문 옥천교 홍화문
보화문 협문 숭문당 문정전 문정문 영군직소
주명문 누국 오위도총부 고문관 주자소 영군직소
낙선당 일영대 수문장청
저승전 진수당 군옥재 계방 등룡문 선인문
춘방 사주문 내사복시
시민당 종묘 수문 암문
※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3호 창경궁
<colbgcolor=#bf1400> 창경궁 경춘전
昌慶宮 景春殿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와룡동)
건축시기 1484년 (창건)
1616년 (중건)
1833년 (중건)
파일:창경궁 경춘전.png
파일:pal_ckk_pct09_ori.jpg
<colbgcolor=#bf1400> 경춘전[1]
1. 개요2. 역사3. 구조4. 여담

[clearfix]

1. 개요

창경궁의 침전이다.

창경궁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경춘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 등을 볼 때, 대체적으로는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된 듯 하다.

이름은 성종 시기 창건할 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이 지었다. # ‘경춘’은 글자 그대로 풀면 ‘햇볕(景) 따뜻한 봄(春)’이라는 뜻이다. 순조는 후술할 《경춘전기》에서 ''경(景)'은 큰 것을, '춘(春)'은 장수함을 뜻하니 옛날과 지금에 걸쳐 축복하는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썼다. #

2. 역사

1484년( 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지어졌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처음으로 거주했고 여기서 생을 마감했다. #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으며 다른 창경궁 건물과 달리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다. 인조 때는 소용 조씨 장남 숭선군 부인 간택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

숙종 시기엔 왕도 머물렀고 #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폐비되었다 복위된 후 잠시 이곳에서 거주하다 승하했다. #

영조 때는 효장세자 숙종의 세 번째 왕비 혜순대비(인원왕후)가 거주했고, 나중에는 혜경궁 홍씨가 살면서 여기서 의소세손 정조를 낳았다. 정조는 즉위 후 어머니를 자경전으로 옮겨 모셨고 자신이 태어난 이곳을 수리하면서 탄생전(誕生殿)이란 편액을 붙였다. 순조 즉위 후 혜경궁은 다시 경춘전으로 돌아왔고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정조와 순조는 생모와 친할머니가 주로 머물던 경춘전을 굉장히 각별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경춘전의 역사와 부모에 대한 효성 등을 담은 《경춘전기》를 지었다.

이후 효명세자 부부가 사용하였으며, 세자빈 조씨(신정왕후)가 헌종을 이 곳에서 낳았다. #

1830년( 순조 3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834년(순조 34년) 3월에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 창경궁 창경원이 되면서 유물 전시실로 쓰여 내부와 외형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2000년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파일:동궐도 경춘전.png }}} ||
<colbgcolor=#bf1400> 〈동궐도〉 경춘전
1830년 화재 이전의 모습은 〈 동궐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모습과 크게 다른 것은 없으나 몇 가지 차이를 보인다. 측면에 3칸 짜리 가퇴를 놓고 가퇴와 건물 주위에 쪽마루를 두었으며 쪽마루를 받치기 위해 하단부에 기둥을 두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하였다. 계단도 돌이 아닌 나무 사다리로 되어있으며 정면 뿐 아닌 측면에도 놓였다.

동궐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주위에 나무 판장과 행각, 등으로 독립된 영역을 구성하였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에 이른다.

4. 여담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경궁관리소.
[2]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 [3] 모양의 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