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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385호 | |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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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수량 | 1동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1483년 창건, 1616년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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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명정문[1] |
[clearfix]
1. 개요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정문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와 옥천교를 건너면 바로 보인다.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있는 경복궁과 비슷하지만, 경복궁엔 중문이 있고, 창경궁엔 없는 것이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정궁인 반면, 창경궁은 애초 대비궁의 개념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이름은 당연히 ‘명정전의 문’이란 뜻이며, ‘명정(明政)’ 자체는 ‘정사(政)를 밝힌다(明)’는 뜻이다.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2] 서거정이 지었다.[3]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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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동궐도〉 명정문 |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불탄 뒤 1616년( 광해군 8년)에 중건했고, 몇 차례 수리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있다. 즉, 명정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전의 정문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따라서 홍화문, 명정전과 같이 17세기 초 한옥 양식을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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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명정문 | <colbgcolor=#bf1400> 창경원 시절 명정문[5] |
3.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며 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6] 장대석으로 쌓은 4단의 기단에 7단의 계단이 건물 전면에 설치되었다. 그 위에 원형으로 된 주춧돌 위에 원 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창방[7]과 평방[8]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했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 양식으로 했고 모든 기둥과 기둥 사이의 중간에 2개의 공포를 두었으며 이를 주간포라 부른다.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 훨씬 높게 세웠다. 다른 궁궐과는 달리 협칸과 어칸의 너비 차이가 거의 없으나 어칸이 30cm 정도 더 길다.
-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고 합각머리 밑의 엮음을 쪽천장으로 가렸으며, 쪽천장의 얽음은 우물천장으로 했다. 단청은 모로단청[9]으로 했고, 문짝은 나무 판으로 되어있으며 중앙 열에 달았다. 그리고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colbgcolor=#bf1400> 홍화문, 옥천교, 명정문, 명정전의 축 |
4. 여담
- 12대 임금 인종이 유일하게 이 곳에서 즉위했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기간에 즉위식이 이뤄지는 것이라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슬픈 분위기에서 했기 때문이다. # 단, 정궁도 이궁도 아니기 때문에 인종 이전과 이후에는 즉위식이 열리지 않았다.[10]
-
1755년(
영조 31년) 4월에 영조가 당상관에게 뜬금없이 “오늘 당장
시골
사람인데
서울에 머물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궁궐로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당상관이 급히 나가 서울에 머물고 있는 시골 사람 60명을 명정문으로 데리고 갔다. 시골
백성들을 만난 영조는 시골의
날씨 및
농사 현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백성들에게 이르는 말을 남기고 딱한 사정에
눈물 흘렸다고 한다.
#
난 백성들에게 따뜻한 왕... 하지만 내 자식에겐 차갑겠지...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 [3] 정확히는 명정전의 이름을 지은 것. [4] 이는 창경궁 전체 축이 그렇다. [5]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 [6]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 [7]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 [8]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 [9]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 [10] 사실 인종도 선왕인 중종이 창경궁에서 승하했기에 여기서 즉위한 것이다.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 [3] 정확히는 명정전의 이름을 지은 것. [4] 이는 창경궁 전체 축이 그렇다. [5]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 [6]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 [7] 공포가 구성되는 목조 건축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건축 부재. [8]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 [9]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 [10] 사실 인종도 선왕인 중종이 창경궁에서 승하했기에 여기서 즉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