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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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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용어에 관하여
2. 배경3. 조선에서4. 내용
4.1. 이기론4.2. 심성론(성정론)4.3. 수양론4.4. 내세관
4.4.1. 귀신의 유무
5. 비판과 반론
5.1. 성리학은 과도하게 비현실적이다5.2. 성리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5.2.1. 반론
5.3. 지배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5.3.1. 반론
6. 의의7. 성리학자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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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리학(, Neo-confucianism)은 유교의 '종주 민족'이었던 한족 송나라 시기에 불교 도교의 사상을 유교에 섞어서 만들어낸 유교의 한 학파이다.

당 제국 말과 오대십국시대에서의 혼란을 초래한 무관에 대한 불신으로 문관 제일주의로 인하여, 한족의 군사역량이 약해졌다. 그에 반하여 거란족 통일 여진족 통일 등으로 북방유목민족들이 강성해져서, 문명 지역이라고 자부하던 한족이 북방민족들에게 처참한 패배를 입고 굴욕외교를 하게 됨으로 인하여, 오랜시간 한족사회를 지탱하던 훈고학[1]에 대한 비판의식이 돋아나고, 북방민족에게 굴종하게 된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성리학이 탄생하게 되었다.[2] '도학(道學)', '송학(宋學)', '송명이학(宋明理學)', ' 주자(주희)학', '정주학[3]'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세워져 한족 원나라를 몰아낸 이후, 비현실적이고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고, 당대 새로운 학파인 양명학에게 밀려서 도태되어 사라졌고, 한국에서는 경술국치 일본 제국에 나라를 빼앗겨 일제강점기가 된 이후에 유림이 몰락하면서 한국 유학계와 함께 무너졌다.

1.1. 용어에 관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고 쓰는데 성리학이나 송명이학이나 어디까지나 현대 철학 용어로서 만들어진 조어이며 기본형은 이학(理學), 도학(道學)이다.

이것이 현대 철학 용어로 조어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용어가 정착됐고, 중국, 일본에서는 송학(宋學), 송명이학(宋明理學), 주자(주희)학, 정주학, 신유학 등의 용어가 일반화됐다. 성리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원래도 쓰이던 ' 성명의리의 학문(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인 성리지학(性理之學), 성리(性理)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국사에서는 여말선초 이래로 이학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한국 한정으로는 전통적인 표현이다. 이에 KISS, DBPIA, 그리고 우리역사넷 등 여러 한국 학술 사이트에서도 보편적으로 성리학이 공식 용어로 사용된다.[4] 서구권에서는 신유학(Neo-Confucianism)으로 불린다.

사실 중국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는 표현이 주류지만 이는 송명대 유학에 영향을 받아 한국 및 일본에서 발전 전개된 신유학 전통은 은근히 배제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한국에서 쓰이는 성리학 용법과는 차이가 있다. 즉 한국에서 쓰이는 '성리학'이라는 표현은 한국이나 일본 이학 역시 이 학문사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며, 나아가 한국이 독특하게 한국만의 이학으로 정립시킨 학문사조 그 자체를 일컫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도 송명이학이라는 용어에서 송, 명은 말 그대로 송나라와 명나라를 가리키며 이는 정몽주를 원류, 비조로 삼는 동방이학(東方理學, 조선이학) 같은 중국사 외의 이학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리학은 근본적으로 주자의 학문이라고 하여 '주자학'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도 '주차철학은 송명이학의 大宗임은 확실하다.'라고 서술한 논문도 있어 송명이학이라는 용어 사용을 아예 배제하진 않고 있다.

'송명이학의 과학적 해석의 해석' #이라는 대만 서적에 따르면, 중화권에서는 송명이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송명유학의 발전은 선진의 유학에서 '심즉리(心即理)'를 강조하여 '성즉리(性即理)'라는 설로 바꾸어, '요존을 위하지 않고 걸왕을 멸하지 않는다'는 천리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희는 유학 제2기 발전의 집대성자로, 먼저 여조겸과 북송 4자의 사상을 정리하고 《근사록》을 편찬하였으며, 《주역본의》를 혼자 힘으로 완성하여 진회(陳抟)의 《용투역》을 권두에 두고 《사서장구집주》를 편찬하여 선진 유학을 《내용이 스스로 조화롭고 앞뒤가 일관된》의 문화시스템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서는 송명유학=이학처럼 쓰고 있다. 명나라에서는 양명학의 발전으로 송명유학=이학이라고만 볼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송명이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송명유학의 주된 사조를 이학으로 이해하고 있음도 나타난다. 따라서 송명이학 역시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용어는 아니며 편의상 사용되는 조어임을 알 수 있다.

2. 배경

북방유목민족 한족을 넘어선 시대라는 한족 역사상 최대의 위기라는 환경 때문에, 당시 '배운사람'이라고 불리려면 당연하게 배웠어야했던 동북아시아 학문의 근본인 유교에서 '자아성찰'과 '현실부정'으로 인하여, 동아시아 최대 종교이자 유교와 동급이었던 철학인 불교 도교로부터 가르침을 빌려와서 탄생할 수 있었다.

은나라부터 춘추전국시대 초까지 발전했던 원시 유교는 상당히 단조로운 학문체계였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유교는 법가, 명가 등의 실학들을 받아들여서 제왕학 원시적 행정학의 성격을 가진 실용적인 학문이 되었다. 하지만 법가를 중시한 진나라 진시황 유학을 사문난적으로 생각[5]했고, 분서갱유를 일으켜 유교를 말살하려고 했다. 손실된 유교경전을 복원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현대까지 존재가 확인된 최초의 학파인 훈고학이 탄생했다. 한나라 시기부터 당나라 시기까지 훈고학은 유교의 몸통이자 뿌리로써 유학의 주류였다. 이러한 훈고학은 성현의 말씀을 답습하는 학문이라는 한계에 부딛혀서 확일화되고 형식화된 학문으로 전락했다.[6] 이렇게 더이상 연구가 없이 무의미한 답습만 계속되자 당나라 말부터 시작된 혼란상에서 유교는 주요한 역할[7]을 하지 못했다. 당나라의 황실마저 유학을 포기하고 도교를 끌어오는 등, 유교계에는 위기감이 불어닥쳤고, 유학계는 북방유목민족에 의한 패배감으로 계속해서 귀족 평민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던 불교 도교의 학설을 배워 차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형식화, 획일화된 유학에 대한 문제의식,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일으킨 불교와 도교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여러 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유학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유학을 불교와 도교에 비해 우위를 갖는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형식화와 획일화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송나라 시기 주돈이ㆍ장재ㆍ소옹ㆍ정호ㆍ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유학자들이 구체화하였고 이를 주희가 집대성하여 이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다른 한편 당대 중국의 정치 상황 등 외적인 요소에 주목을 하는 시각도 있다. 이를테면 전한 이래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북중국 중심주의가 의 북중국 정복 때문에 깨지자, 남송의 성리학자들은 이(理)와 기(氣)를 분리하여 정신적인 측면과 명분을 강조하는 '이'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8] 그리고 이것을 국가 단위의 논리로 발전시킴으로써 '지정학적인 중심과 정신적인 구심점은 다를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프로파간다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송나라의 관료제 문치주의의 영향에 문화가 크게 발전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리학이 탄생하였다는 시각이 있다.

3. 조선에서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이다. 조선 초 유학자들이 주희에 열광한 이유 중에는 주희 불교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이 있었다. 주희가 설파한 귀신론의 핵심 중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으나,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긴다.'는 것이 있다. 즉 도교나 불교의 존립기반인 내세ㆍ영혼ㆍ환생 등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단호히 부정함을 골자로 한다. 이는 정도전 불씨잡변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후 조선 성리학사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것은 이기론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이다.[9] 이를테면 이기불분(理氣不分)과 이선기후(理先氣後)가 공존하는 등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면모를 두고, 이이는 이기불분을 강조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承一途說)을 주장했고, 이황은 이선기후를 강조해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안한 것이 유명하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탄 것"으로 요약되는 한편,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은 "기가 발하면 이는 탈 뿐이며, 이가 단독으로 발하는 일은 없음"으로 정리된다.[10]

16세기에 성립된 조선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뿐만 아니라 북송의 소옹(召雍)과 장재(張載)의 성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고,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의 학문[11] 양명학[12] 또한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 강항 등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등으로부터 시작되는 에도 막부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본에서 성리학은 가마쿠라 막부시기에 유입되었으나, 외래 사상이 처음 들어올 때 대개 그렇듯 이해가 부족하였다.[13] 17세기에 와서 조선 성리학과 교류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은 본격적인 발전을 맞이한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유림이 사회적 영향력을 많이 잃고 서구화 및 근대화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성리학도 위축되었다. 하겸진(1870-1946)은 1943년 저술하고 1970년에 출판한 《동유학안(東儒學案)》으로 조선 내 성리학 학자들과 학파의 연원을 집대성했다. 하겸진은 성리학적 이념을 의심 없이 고수하였다. 그의 노력 역시 맥이 꺼져가는 성리학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 땅에서 전통적인 성리학은 하겸진과 그 제자 세대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맥이 끊겼다.

하겸진의 제자로는 대표적으로 '진주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성환혁(成煥赫)이 있다. 위당 정인보가 동생처럼 매우 아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에도 상투를 자르지 않고 유생의 옷차림 그대로 다녔으며,[14] 해방 이후에는 해인대학( 경남대학교의 전신)에서 한문 강사로 잠시 있었다. 성환혁은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한학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어했으나, 학생들의 소양 부족과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서 다음 말을 남기고 강사직을 사임했다.
아이들은 을 달라고 하는데 내겐 줄 것이란 밖에 없다.

얼마 안 가 성환혁은 정인보의 납북 소식을 듣고 생의 의욕을 잃어,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 김창숙도 세상을 떠나면서 유림은 더 이상 단일하고 가시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

4. 내용

4.1. 이기론

성리학의 핵심은 세상(物)과 마음(心)을 모두 ()와 ()의 두 가지로 규정하는 것이다. 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는 우주의 원리인 것. 현대과학에 비유하자면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합쳐 '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이 서로 조응하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 법칙이 '리'라고 하겠다. 예컨대, 해, 달, 바람, 비, 눈, 서리, 이슬, 천둥, 번개 등의 현상들은 '기'에 해당하며,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까닭으로 작용하는 원리나 물리법칙 등은 '리'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이기론은 도가와 불교의 문제의식을 포용한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구절인데, '무극'과 '태극'의 관계를 규정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자는 무극을 무한한 궁극자, 태극을 존재의 거대한太 궁극자로 읽어 무극=태극이라는 주장을 했다. 반대로 무극에서 태극이 발생한다는 해석은 '도대체가 없는데서 있는게 만들어진다니 불교적 냄새가 난다'며 거부했다. 참고로 이 해석을 수용하는 게 육구연과 그를 계승한 왕양명 양명학이다. 이것 때문에 성리학에게 '양명학은 귀신놀이하는 불교랑 똑같다'라는 비난을 받은 것.

이 태극이 움직이면서 음양을 낳고 음양이 오행을 낳으며 만물을 만들게 되는데, 주돈이는 여기서 태극이 리理이고 음양오행이 기氣라고 주장한다. 이를 송나라의 다양한 학자들이 해석하며 이기론의 기초를 낳았다. 주돈이의 제자였던 정호 · 정이 형제는 천리와 각각 이기이원론과 기일원론을 주장하고, 장재는 기를 주인공으로 '태허에 기가 있었다'는 태허지기太虛之氣를 주장한다.

이런 이론적 흐름을 주희가 종합해, 주자는 리를 비교적 더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기를 만물의 다양한 요소로 산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모든 사물의 개별적인 이는 보편적인 이와 같다'는 정이의 이일분수理一分殊를 가져온다. 주자는 그러나 여기에 "이와 기는 섞이지 않는다"는 이기불상잡과 "이와 기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기불상리를 더하면서 기를 이에 꿀리지 않은 조연으로 끌어올려 이기이원론을 완성한 것이다.

성리학이 전개되며 주자가 정립한 '이가 살짝쿵 더 중요한 이기이원론'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이가 확실히 더 중요하다'는 주리론이나, '기가 확실히 더 중요하다'는 주기론이 아래의 심성론 논쟁이 심화되면서 조선에서 중요해지고, 아예 '둘 중 하나가 먼저다'라는 일원론을 주장하는 흐름 역시 중국에서는 적지 않았다.

여담으로 기를 중시했던 이이가 유물론적, 이를 중시햇던 이황이 관념론적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와 기는 차설 존재와 의식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단순히 치환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두 유학자의 성향이 다른 만큼 이이는 이와 기가 같다는 이기일원론을 이황은 이와 기가 분리되어 있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것이 두 학통을 이어받은 서인(이이)와 남인(이황)의 입장 차와 예송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15]

4.2. 심성론(성정론)

성(性)은 타고난(生) 마음(心), 즉, 태어날 때 부터 생기는 마음을 말하며 '이성(도덕성-인의예지)'과 '본능'(욕망)[16]이 있다.

정(情)은 본디(靑) 마음(心), 즉, 본심. 솔직한 마음. 감정을 말하며 '사단'(동정심, 의협심, 공경심, 분별심)과 '칠정(희노애락)'이 있다.

'어떤 감정에서 도덕성(이성)이 발현되느냐?, 사단의 감정과 칠정의 감정은 분리 가능한 문제인가?, 이기론에 해당되는 바는 무엇인가?'가 성리학의 심성론, 성정론, 사단칠정을 만들어 내었다.

주자는 이기론을 사람의 마음에 적용해 성리학은 심(心, 마음)의 두 측면인 성(性, 본성)과 정(情, 감정)을 분리하며, 마음은 성과 정을 주재한다(심통성정心統性情)고 주장했다. 주자는 심과 성은 같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지만 섞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심과 성과 리가 같다고 주장하는 양명학과 갈리게 되는 것.

주자는 성과 리가 같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다. 성性을 순수한 이인 본연지성과 이기가 섞인 기질지성의 두가지로 보는데,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 원리(인의예지)인 본연지성本然之性를 형성하고, 다만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에 따라 현실로 구현된 성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사람마다 달라져 사람들의 개성,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 점이 인간끼리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시킬 여지가 있어 근대 중화권의 신분제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17] 주의할 것은 이게 모든 성리학 학파에서 동의한 것은 아니라, 이이 같은 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수양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변화시켜 도를 익힐 수 있다는 교기질론을 제시해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을 내포한 학자들도 매우 많다. 여기서 비롯된 신분 사상이 양인 내의 법적 신분 구별을 없애고 양인과 천인만을 두는 양천제로, 중국은 당나라 (실질적으론 송나라) 대부터[18], 한국은 조선부터 실시되는 것. 그렇지만 유학은 반대로 가정 내의 신분질서, 또한 학식에 따른 신분질서를 부정하지 않아 조선 중기에 반상제가 대두된다.[19]

문제는 정情에 대해서는 학파마다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위에서 적었듯이 정은 인간의 기질에 따른 감정과 욕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맹자는 우리에게 윤리의 원리인 사덕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사단四端, 즉 인의 단서인 측은지심, 의의 단서인 수오지심, 예의 단서인 사양지심, 지의 단서인 시비지심의 네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주자는 사단이 정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은 성처럼 이기가 섞여있나? 아니면 그저 기일 뿐인가? 쉽게 말하면, 인간의 감정도 우주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조선 성리학의 문제의식이 시작한다. 이황의 학파는 사단은 이이고 칠정은 기이다고 주장하며, 이이의 학파는 칠정이 사단을 포함해 모두 기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정치까지 불어나면서 동인 서인으로 갈리고 현실정치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

4.3. 수양론

성리학의 학문적 실천방법은 거경궁리(居敬窮理)와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있다. 거경궁리를 거경과 궁리로 따로 해석해 보면, 거경은 궁리를 임할 때의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아 하나에 몰입하는 것을 뜻하며, 궁리는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궁리는 격물치지이며, 격물치지는 사물에 대하여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히는 것(치지)이다. 이는 인간의 기질을 우수하게 하기 위한 학문적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마음이나 사물에 몰입한 후 그 이치를 성실히 연구해서 알고, 그 이치를 실천함으로써 사람의 도덕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거경에 대해서 좀더 부연설명하자면, 주희는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희노애락이 크게 발하기 전의 고요한 마음 상태(미발, 未發)를 관찰하는 주경함양(主敬涵養)을 이야기했다. 이는 이미 희노애락이 발하였고 의식 위로 떠오른 상태에서(이발, 已發) 그 이치와 작용을 탐구하는 격물치지와는 구분된다. 즉 주희는 잠에서 막 깨어나 마음에 생각이나 감정이 활성화되기 전인 미발 상태에서도 수행이 계속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주경함양을 위해서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를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수양론은 불교의 지관법(사마타+ 위빠싸나)과의 유사점을 많이 주목받아 왔다. 현대에는 심리치료에서 성리학적 주경함양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4.4. 내세관

따라서 주자의 사상은 철학적인 바탕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희가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 후레자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때문에 주희가 조상에 대한 제사에 대해서만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중론이다. 타협했다고는 해도 주자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차례나 제사를 지낼때 조상의 영혼이 밥먹으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자손이 모임으로서 흩어져있던 조상의 기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귀신을 모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을 기리는 행위 자체가 본질인 것이다.

4.4.1. 귀신의 유무

성리학에서는 세상을 이기론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이기론에 입각하여 불교나 도교 등이 '허황된 설을 주장한다.'고 하며 거부했다. 그런데 만약 불교 등이 허황되고 귀신이나 윤회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제사를 지내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성리학도 유교인 이상 제사라는 형식 그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었고, 제사가 무용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귀신이 존재한다면 성리학의 기본철학과 어긋나고, 그렇다고 없다고 하자니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는 딜레마에 빠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서로 다른 설명을 제시했다.

이황도 이 문제를 의식하면서도 다루기를 어려워한 듯하다. 그래서 문집을 살펴보면 시간에 따라 생각이 조금씩 바뀐다. ' 귀신의 일처럼 알기 어려운 것은 논의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를 회피하기도 했고, 사람이 죽으면 기가 흩어지는데 어찌 귀신이 있겠냐고 부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사람이 죽어도 기가 바로 흩어지지 않고 아직 뭉쳐 있을 때가 있으니, 그때까지는 귀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만약 귀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옛 성인들은 망자의 가족들을 위로하고자 거짓으로 의례를 제정하였다는 뜻이 된다. 성리학도 유학인 이상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율곡 이이도 귀신이 있다고 말하지도, 없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있고,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없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했다. 또한 기가 아직 흩어지지 않은(죽은 지 얼마 안 된) 조상을 제사 지내면 후손의 정성에 따라 기가 감응하고, 기가 이미 흩어진(죽은 지 오래 된) 조상을 제사 지내더라도 조상을 이루었던 '이'가 감응하기 때문에 제사는 무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송시열도 이러한 설명에 동의했으나, 이런 설명을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미수 허목은 정말로 귀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허목의 주장에 따르면, 옛 성인들이 제사를 정한 것은 귀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이 지나도 기가 흩어지지 않은 귀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윤휴도 귀신이 기본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임금이 백장의 어버이자 귀신을 주관하는 자로서 제사 등 예법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왕권중심적 사상과 연결지었다. 김원행은 기존 성리학계의 설명이 귀신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걸쳐 있으며, 제사를 경솔히 지내게 하는 폐단을 부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김원행은 귀신이 기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주나 위패를 만들어 깃들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호 이익은 처음에는 정말로 귀신이 있다는 입장이었으나 훗날에는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5. 비판과 반론

5.1. 성리학은 과도하게 비현실적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도교 불교의 지나친 이상 추구와 비현실성이 나라를 망친다는 비판의식 아래 생겨난 사상이 성리학이라는 것이다. 원래 유교는 우주론에 관심없이 춘추전국시대의 아수라장을 해결하려고 철저하게 현실에 치중한 윤리학이자 정치철학이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유교가 속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했던 가려운 부분을 도교와 불교가 시원하게 긁어 주면서 위진남북조시대 당나라(한국의 경우 고려)의 학문을 휘어잡았다가, 지도층들이 현실에는 관심없이 내세에만 치우치면서 정치를 말아먹는 꼴을 지켜본 사대부 계층이 불교와 도교의 요점만을 수용해 현실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 유학적인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 바로 성리학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황 이이의 이론적 전성기 직후 하필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재난을 겪은 탓에 공학과 같은 실용학문들은 연구자가 죽거나 일본에 납치되는 등 인적 기반이 무너졌다. 그 결과 조선식 성리학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시작하며 종국에는 과도한 이론성만 남아 현실과 점점 괴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노론이니 소론이니 당파싸움을 거치며 유학의 교조화까지 일어나다 보니 결국 유학이 비판했던 불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즉, 조선 성리학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데에는 조선이 그 동안 겪었던 난리통이 치명타였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성리학이 처음부터 형이상학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국가의 정치와 도덕을 관할하는 가치관이 형이상학을 도외시할 수 있는가? 현대의 민주주의 체계와 인본주의 철학은 형이하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다.

중국은 반대로 명나라 대에 양명학이 등장하며, 성리학은 '세상을 극한까지 탐구해 이치를 얻어내라'고 한다면 양명학은 격물치지를 '마음만 이해하고 실행하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명학도 결국 인간의 마음에 대해 내놓은 분석은 엿장수 마음대로였다는 점에서 단순히 무엇이 더 형이상학적이라 주장하긴 어렵다. 청나라 대에는 고증덕후스럽게도 문자의 옥을 거치며 성리학이든 양명학이든 황제의 심기를 건들 것 같아서 '유교 경전이 고증부터 틀린 것 아니냐?'라는 의문 아래 고증학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결국 성리학이나 양명학 학자들의 연구를 건륭제 문자의 옥으로 탄압하자 두려워져 심기를 건들 만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학문으로 도피해 버렸다는 점에서 고증학 역시 비현실적 학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고증학 연구로 진짜 고증이 틀린 부분들을 실제로 찾아냈고, 그러면서 공자처럼 현실로 돌아가자는 흐름이 생겼다는 점에서 공자 때의 유학처럼 다시 현실로 집중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5.2. 성리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5.2.1. 반론

흔히 성리학(주자학)에서 과도하게 형식에 집착한다고 비난받는 부분은 사실 성리학 체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가 살아있던 당시의 관혼상제의 문제였다. 송대의 가례(家禮)가 과도하게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현실적인 예법을 보급하려는 것이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의 의도였다. 하지만 이 주자가례도 현실적으로 모두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주자 본인조차도 이 가례는 원리원칙일 뿐이니까 상황에 맞게 응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특히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당대 상황과 관계없이 성리학을 절대화, 종교화시키는 바람에 학문의 취지를 훼손시켜버린 것이다.

예송 사건에서 성리학을 상대해석 하려는 윤휴 박세당 사문난적으로 몰아낸 송시열과 그 추종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5.3. 지배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성리학의 사상이 당초부터 신분 차별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대상은 달라도 이치는 하나"라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개념은 윤리학적 개념으로 시작해 주자가 우주론으로 확대 적용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하나의 리로부터 기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이기론적 주장을 응축하는 단어인데, 개념의 방점이 '이치는 하나'에 찍히기도 '형태는 여럿'에 찍히기도 한다. 문제는, 신분제에 있어서 이 개념이 "이치는 하나지만 대상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는 방식으로 적용되어 인(仁)과 같은 보편 윤리를 차등적으로 행하는 것을 정당화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범주에 신분의 귀천을 포함했다는 것.[20]

사실 성리학의 근간인 유학 자체가, 주나라의 봉건제 질서를 이상향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신분제를 긍정한다. # 설령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군주는 바뀔지언정 상하계급 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처럼, 한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인 것이고, 한번 신하는 영원한 신하인 것. 이는 유학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로, 유학에 뿌리를 둔 성리학 역시 이를 피해갈 순 없었다.

5.3.1. 반론

충효(忠孝)를 이용해 백성을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는 일도, 성리학에서 비로소 나타난게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유서 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충효 사상을 가르치는 도덕 선생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보다도 오히려 역성 혁명을 긍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주희 시대의 신유학적 정치 관점이었다. 한 왕조 이후 천 년 이상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되던 맹자를 다시 주요 경전에 포함시킨 것도 주희의 업적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맹자'의 사상은 매우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데, 걸핏하면 정치를 제대로 못하고 인성이 글러먹은 왕은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당장 군군신신부부자자부터가 그런 이야기다. 위에서는 "군주는 영원한 군주"라는 뜻으로 신분제를 공고히하는 사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세상이 평안하다"라는 뜻으로, 바꿔 말하면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갈아치워라"라는 뜻이다.

송나라 때는 군주의 전제 정치가 약화된 시기였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민 계층이 형성된 시기였던 것이 이같은 진보적 관점을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과 반달리즘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중국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유교가 다시 자리 잡는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물론 남송 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천과 의지를 중요시하는 자기 개발서 비슷한 관점이 명대의 주류가 되었지만...

또한 성리학이 신분제도 강화를 옹호하고 지배층의 수탈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도 있는데 이는 왜란과 호란 후에 생긴 사회혼란으로 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리학을 변질적으로 해석하여 생긴 부작용이지 성리학이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과 지배층의 횡포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당시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성리학을 악용한 지배층 잘못이 크다. 이는 전근대 사회의 한계라고도 볼 수는 있다.

애초에 당시에는 신분제와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으니. 그리고 처음에는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후에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오용되거나 변질되는 경우도 살펴봐야 한다. 당장 불교나 기독교 등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이후 권력자들이 자신들 통치와 지배 이데올로기 정당화로 써먹은 걸 떠올려보자. 이러한 현상은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목격될 수 있는 현상이라 성리학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6. 의의

한편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개혁적 열망은, 성리학을 도입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몰아내는 지식인들의 거대 프로젝트로 결론이 내려지고 군부의 쿠데타와 협력하여 조선 왕조가 세워지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의 논의는 구 고려 왕조 시대의 종교적 생활 방식을 타파하는데 있었다. 성리학이 윤리적, 경제적 생활 이념으로 완전히 체화된 것은 퇴계와 율곡이 등장한 16세기 후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일단 명 중기부터 양명학이 인기를 끌었다. 다만, 명 멸망 이후에는 일단 사상계에서 명나라 멸망은 양명학 때문[21]이라는 보수적 경향, 그리고 청나라의 문자의 옥 크리 등으로 인해 유학 연구가 사장되었다.[22]

하지만 성리학이 내내 주류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나 에도 막부에서도 정부의 공식 이념 및 주류를 차지한 사상 체계는 성리학이었고, 그 위상은 축소된 바가 없었다. 일본 성리학은 에도 막부 시절 발달되었고, 한국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에도 막부는 대놓고 양명학을 탄압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송나라에서 창시되었으나 조선에서 재발견되고 발전되었다. 혹은 또 다른 학문으로 재탄생된다. 이이와 이황의 추종자들은 이이와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보는데,[23] 이건 순수하게 한국 유학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주론까지 나가는 개념은 원래 주희의 성리학에는 없던 개념이다. 이 때문에 해동 성리학이나 조선 성리학으로 별도로 분류되기도 한다.

7. 성리학자

학자로서 성리학을 연구, 발전시키는데 전념한 인물이나 유명인들 위주로 게시가 되어있으나, 사실상 남송(南宋) 이후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던 중국 명나라나 한국 조선 왕조의 관리들이 대부분 성리학자에 해당한다 할 수있다. 또한 조선의 경우 충무공 이순신같은 무관(武官)들도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배웠으므로 하술된 인물들이 문관(文官)위주로 작성되었음을 참고바람.

8. 여담



[1] 훈고학은 분서갱유로 인하여 삭제된 공자, 맹자, 순자 등의 성현의 말씀을 복원하고 연구하는 학파였다. 즉 과거를 답습하려는 성향이 대단히 큰 학파였다. [2] 일종의 허무주의적 성격을 가진 학파였다고 볼 수 있다. [3] 정이,정호 형제+주자 [4] 그 외에는 학문의 주요 창시자를 따지는 관점으로 보아 북송대의 정이, 정호 형제와 남송대의 주자의 학문을 합쳐 정주학이라고 부르거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한국사에서의 주자 선호 경향을 고려하여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사에서 정주지학이나 주자지학이라는 표현이 없지는 않았지만 성리지학에 비해서는 오히려 보기 드문 편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명나라에서 이학을 성리대전(性理大全)이라는 책으로 집대성한 영향으로 생각된다. [5] 한나라를 거치면서 법가의 성격을 많이 수용했지만 그 이전에는 법가보다는 도가의 성격이 더 강했다. [6] 당나라 때 공영달이 저술한 오경정의가 출판되었는데, 당나라가 유학을 관학화 하는 과정에서 이 도서를 기준으로 획일화, 형식화해버렸다. [7] 안사의 난, 황소의 난, 오대십국시대에서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공부에 불과했던 훈고학은 국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교 자체가 철학적 성격이 강했지만 훈고학은 철학적 성격이 심한 성리학보다 더욱 철학에 가까운 학문기 떄문에 도움이 되기 힘들었다. [8] 위진남북조시대에 도교와 불교가 유행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5호의 침략과 이로 인한 화북지방 상실로 인해 한족 우위를 강조하는 화이사상이 깨지게 되자 현실도피 차원에서 문벌귀족들이 도교와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9] 주자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성리학의 경세론은 오늘날 관점에서도 보수적이지 않았으며,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균등한 부의 재분배를 위한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또 국가의 지나친 개입을 지양해야 한다고도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조선시대의 경세정책은 화폐 도입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에서도 보이듯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자 나름 노력은 했으나 백성을 교화해야할 무지한 아이와 같은 존재로 여긴 탓에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자주 보였다. [10] 유학자들은 이러한 이와 기의 관계를 각각 사람 나귀에 대응시켜 설명하곤 했다. 조선시대 그림에 나귀를 탄 선비 그림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나귀는 그냥 두면 마구 날뛰지만, 사람이 고삐를 잡아주면 온순하게 원하는 곳으로 간다. 이황의 설명대로라면, 사람이 처음부터 나귀를 몰고 가는 것은 사단에, 나귀가 마구 달려가는데 사람이 뒤늦게 올라타는 것은 칠정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이이는 그런 구분을 굳이 할 필요 없이, 사람이 나귀에 처음부터 올라타 나귀를 몰 뿐이며, 이때 고삐를 얼마나 당기냐 늦추냐에 따라 사단과 칠정이 갈린다고 본 것이다. [11] 이이의 학설은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12]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양명학의 양지(良知)가 가질 수 있는 능동적 실천성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양명학이 갖는 문제 의식이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으로서 이 이론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13] 불교를 처음 접한 서양 사상가 중에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처럼 불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었고, 중국인들은 불교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인도로 유학을 갔으며, 일본인들은 유럽의 사상과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한자어를 번역어로 고안해냈다. [14] 그러면서도 용모가 워낙 청아해서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15] 예송논쟁으로 치면 간단히 말해서 죽은 왕을 장남 대우를 해줘야 하냐 마냐의 논쟁으로 유교에서 적법한 계승자는 적장자이며 부모보다 적장자가 먼저 죽으면 부모는 3년복을 입는다. 그리고 그 며느리의 경우는 1년복을 입는다. 그런데 효종은 적자이긴 했지만 장자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정통성 논쟁이 있어왔고 이것이 효종의 사후와 인선왕후 사후에 상복 문제로 터지고 만 것. 이기론의 대립이 영향을 주었다는 관점에서는 서인의 1년복, 대공복은 이와 기가 같으므로 왕가라고 해도 예에서 예외가 있을 순 없으니 장자가 아닌 효종은 당연히 3년복을 입을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남인의 3년복, 1년복은 왕가는 특별하므로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관점이므로 따라서 적장자가 아니었지만 효종은 적장자가 이을 수 있는 왕이었으므로 적장자와 마찬가지로 3년복을 입을 대상이다. [16] 다만 맹자는 사람의 타고난 마음(性)이 선하다고 생각했으며, 타고난 마음(性)에 본능과 욕망을 두지 않았다. 성리학은 맹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본능과 욕망을 타고난 마음(性)이라고 보진 않았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같이 나열하였다. 순자의 성악설에서는 욕망(이기심)이 타고난 마음(性)에 해당된다. [17] 전근대 시기에는 인간과 동물의 차별은 종종 있었지만, 인간의 차별에 반대하는 사상이 적지 않았다. 불교는 모든 사람이 불성을 가진다고 주장했고, 동아시아 사상은 아니지만 기독교는 죄에 대한 구원은 모든 인간이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에 반대하는 사상이 전근대에도 많이 나오고는 했다. 조선의 하류층도 그래서 자신의 소망을 지지하는 불교, 무속, 후기에는 기독교 등에서 위안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러한 평등 사상을 주장하는 철학 등에서도 훗날의 권력자는 차별을 정당화할 논리를 만들거나 그러한 평등 사상을 탄압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8] 청나라에 들어서선 만주족 무사였던 팔기군에서 비롯된 기인이 등장하며 다시 제도적 신분이 등장한다. [19] 다만 조선 후기에 가선 양반 질서가 전락하며, 양반의 기준에 따라 1.9%에서 심하면 전체 인구의 70%가 양반이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런 동아시아 신분제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봉건성/신분성은 항상 첨예한 논쟁거리다. 양반 항목 참고. [20] 이승환, 리일분수 담론의 사회 현실적 의미과 기능 - 성리학의 신분제 정당화 문제를 중심으로 [21] 명 중기는 사상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웠던 시기인데 이를 일종의 퇴폐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의 가톨릭에 대한 인식과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인식과 현대 한국의 유교에 대한 인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건 보편적 현상이다. [22]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23] 이황의 대표작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마인드 맵 열 장으로 쌈빡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공부에 쓰라고 임금(구체적으로는 선조)에게 바친 책이지만, 내용이 좋아 선비들도 애독했다. [24] 당장 한국 초대 영부인이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만 해도 남편 이승만에게 과잉내조라 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아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