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가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익히 다룰 줄 아는 사람으로 어느 책이나 모르는 것이 없고 성품은 아주 꿋꿋해서 그들 측에서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 (강항의
간양록)
藤原惺窩[1]1561년 ~ 1619년 (향년 58세)
1. 개요
센고쿠 시대 후반기에서 에도 시대 초반기의 성리학자. 일본 최초의 성리학자라고 할수 있다.2. 생애
1561년( 오기마치 덴노 4년), 시조로부터 27세손이고 공가(公家)에서 4등급인[2] 우림가(羽林家)인 레이제이 다메즈미(冷泉爲純, 1530 ~ 1578)의 셋째 아들로서 하리마노쿠니(播磨國) 미키노코오리(三木郡) 이사카와 장원(지금의 효고현 미키시)에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교토로 가서 쇼토쿠지(相國寺)[3]에 들어가 선승(禪僧)이 되어 유교(儒敎)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 유학가려고 시도했지만 갑자기 병을 얻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그 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붙잡혀온 조선의 유학자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그때까지 교토의 승려들 사이에서 교양의 일부이기도 했던 유학을 체계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학풍은 성리학을 기조로 하면서도 양명학(陽明學)도 수용하는 등 포용 분야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묘주인(妙壽院)의 승려로 있을 때 강항을 만났고, 그래서 그는 강항을 만나자 유학자로서 궁금했던 질문을 쏟아내는데 간양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신에게 우리 나라의
과거 보는 절차 및 춘추 석전(釋奠)과
경연,
조정 등의 절목을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석하여 듣지 못했다' 라고 하였고, 단지 과거, 석전 등의 대개를 알려주었더니, 중은 매양 실심하여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5]
이런 상황으로만 보더라도 성리학에 대한 그의 집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항의 존재는 세이카에게 거의 구세주 급. 이 때, 강항의 나이 32세였고, 세이카는 38세였다. 그가 유학자가 되면서
승적을 벗고 이름을 슈쿠(肅), 자는 렌부(斂夫), 호를 세이카(惺窩)[6]로 바꾸었다.'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5]
또한 강항과 조선 선비 포로들에게 주자학을 이해할 수 있게 육경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은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에 보조하게 하였다. 이들이 저서한 것은 주자의 주석에 따라 일본식의 해석본을 표시한 사서오경 일본어판이었다.
세이카는 강항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강항을 끌고온 다이묘를 설득하여 훗날 강항이 조선 귀국 허락을 받아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이카는 강항과 헤어진 뒤에도 홀로 성리학을 연구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이는 일본 주자학에 큰 기틀을 마련한다. 그의 제자 중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년 ~ 1657년)이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이 된 후 도쿠가와 이에츠나에 이르기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시강이 되었다.[7]
3. 창작물에서
효게모노에서 등장한다. 조선 양반풍의 심의에 복건을 착용한 유자의 모습으로 이에야스를 수종하며, 주인공 후루타 시게나리의 일본을 재밌고 즐거운 나라로 만들자는 인본적, 전위적 예술 사상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엄근진으로 요약할 수 있는 유교 중심의 전체주의적, 강압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하려는 야심을 가진 냉철한 인물로 등장하며 일본은 결국 그의 사상에 부합한 길을 걷게 된다. 등장은 짧지만 에도 막부의 지배사상을 구축한 인물인만큼 포스가 대단하다.
[1]
제목에는 후지와라 세이카라고 하였지만
후지와라는
우지기 때문에
の를 빼서 부르는 건 격하나 다름없으므로 사실 오류다. 굳이 얘기하자면 후지와라노 세이카라고 해야 맞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그의 우지를 묘지처럼 부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우지를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 시대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표기하는 것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똑같이 우지를 사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도요토미노 히데요시라고 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2]
공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후지와라 분가 중 가장 격이 높은
섭관가는 코노에, 이치죠, 니죠, 쿠죠, 타카츠카사 가문이다.
[3]
현재의
도시샤대학 북쪽에 있는 선종 사찰
[4]
전국시대 임제종 승려 닌조슈교(仁如集堯, 1483-1574) 등의 승려를 통해 주자학을 처음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5]
問臣以我國科擧節次及春秋釋奠經筵朝著等節目 臣答以草茅之人 未及豫聞 但告以科擧釋奠等大槩 惜乎吾不能生大唐 又不得生朝鮮 而生日本此時也
[6]
이 이름도 강항이 그의 서재 편액 내력을 적은 '성재기(惺齋記)'와 '시상와기(時尙窩記)'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7]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자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신호탄이 된 호코지 종명 사건을 뒷받침한 어용문인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