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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실학자)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white><tablebgcolor=#fff,#1f2023> 파일:문화부 심볼.svg 이달의 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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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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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성호 이익.jpg
이름 <colbgcolor=white,#2d2f34>이익(李瀷)
출생 1681년 11월 27일 조선 경기도 안산군
사망 1764년 1월 19일 (향년 82세) 조선 한성부
본관 여주 이씨
자신(自新)
성호(星湖)
가족관계 증조부 익헌공(翼獻公) 소릉(少陵) 이상의(李尙毅/1560-1624)
종조부 청선(聽蟬) 이지정(李志定/1588~1650)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1601-1657)
아버지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1628~1682)
어머니 후부인 권씨(權氏)
큰형 청운(靑雲) 이해(李瀣)
둘째 형 섬계(剡溪) 이잠(李潛/1660~1706)
셋째 형 옥동(玉洞) 이서(李溆/1662~1723)
첫번째 부인 고령 신씨(高靈 申氏)[1]
두번째 부인 사천 목씨(泗川 睦氏)
내재종형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2]
아들 이맹휴(李孟休/1713~1751)[3]
손자 이구환(李九煥/1731~1784)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조선 후기 숙종-영조대의 문신, 성리학자, 실학자.

2. 생애

재야의 학자로 머무르면서 실용적인 학문을 할 것, 한전론, 호포론, 개병제, 양반의 생업 종사 등을 주장하였다. 이익의 둘째 형인 이잠은 1706년 노론 대신들이 당시 세자였던 경종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상소를 올렸다가 옥사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동생 이익은 벼슬길이 막히고 말았다.

일부 문벌 가문의 자제들이 쉽게 급제할 수 있는 과거 제도의 실태를 지적하고 여론과 평판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를 주장했다.[4] 또한 과거제도, 노비제도, 문벌제도, 잡술, 승려, 게으름을 나라를 좀 먹는 여섯 가지 폐단이라고 주장했으며 검소함을 장려했다.

현대의 시각으론 다소 황당한 폐전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유통 경제의 확산이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니 그런거 하지 말고 화폐를 없애버리자는 주장. 붕당론에선 양반이 너무 많아서 문제니까 과거 주기를 3년에서 5년으로 늘리자면서, 더 큰 부작용이 나올게 뻔한 천거제를 병행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육두론에서 노비제를 비판했지만 노비제 폐지를 주장하진 않은 점 역시 짚어야할 부분.

허목의 학통으로 이잠, 이서우의 문인이며 반계 유형원을 사숙하였다.[5] 저서는 《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 등이 있다. 학맥으로는 성호학파 문서 참조.

3. 기타



[1] 죽헌 신필청(申必淸/1647-1710)의 딸이다. [2] 그 유명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지은 대학자이자 실학자이다. 이익의 증조할아버지인 익헌공 이상의의 외증손자로, 유형원에게는 이익이 외가 6촌 동생이 된다. 그러나 이익은 1681년에 태어났으므로 이익이 태어난 시점에 유형원은 이미 고인이었다. 6촌 간인 두 사람의 나이차는 무려 59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증조할아버지와 증손자 뻘이었다. [3] 두번째 부인 사천 목씨(泗川睦氏) 소생(所生) 이다. [4] 유의해야 할 것은 당시 조선은 두번의 대기근을 통해 제도가 엉망이어서 양반들도 죽어나갔다. 부족한 관료들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부정청탁이 있었다는 것이 씁쓸한 현실. [5]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는 의미. [6] 무로마치 막부 시절은 이런 수작이 극에 달해 명나라로부터 대놓고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았는데, 이는 사실상 정권의 명분을 천황이 아닌 중국에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 에도 막부 시절은 중국과 공식적인 교류가 없어서 이런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민간교류가 활발하여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은 당시 일본 내 제1의 외국인 거주지였다. 이외에 류큐 왕국을 침략해 속국으로 만들고 류큐 이름으로 중국과 조공 무역을 하기도 했는데 간접적인 방식이라 중국과 격을 따질 문제는 전혀 없었다. [7] 메이지 유신 자체를 예견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이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은 대정봉환과 보신 전쟁보다도 '대정봉환을 명분으로 세우고 보신 전쟁을 거친 뒤에 근대화에 성공한다'는 것에 있다. [8] 다케우치 시키부가 천황과 공가를 상대로 존왕론을 강의하다가 막부한테 박살이 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호우레키 사건이다. [9] 남옥, '일관기(日觀記)' 권10, 황계. 참조 [10] 유학에서 이르는, 명분 없이 무력이나 권력, 권모술수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 [11] 유학에서 이르는, 인(仁)과 덕(德), 왕도(王道)로써 명분에 맞게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 한국 한자음 기준으로 혼동할 수 있으나, 왕의 아들인 '왕자(王子)'가 아니다. [12] 후마 스스무(夫馬進) '천황의 역사 6권-에도시대의 천황' 편 참조. [13] 성리학적 도덕론에 따라 명분이 옳으므로 이길 것이라는 막연한 말이 아니다. 명목상 왕조국가인 일본에서 임금이 직접 정치하겠다고 나선다면, 최소한 명분상으로는 신하인 쇼군이 막을 방법이 없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런 문제 때문에 대권을 선제적으로 반환하는 대정봉환을 감행하였고 이후 보신 전쟁 동안에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천황에게 저항하면 역적이라는 논리가 먹혀서 군사들의 사기도 바닥이었다. [14] 이것 때문에 '서계 거부 사건'이 터지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다. 이 문제는 강화도 조약 내내 조일 양국이 팽팽하게 대립한 끝에 조선 측에 유리한 쪽으로 매듭을 지었는데, 조약을 '조선 국왕'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가 아닌 '대조선국'과 '대일본국'의 이름으로 체결했다. 이렇게 되면 이익이 지적한 것과 같은 수직적인 '황제와 왕'이 아닌 수평적인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된다는 논리. 실제로 조일 양국은 실상이야 어쨌든 이후로도 경술국치 그 순간까지 위계상으로는 대등한 국가로서 교류하였다. 다만 그 이외의 조항들이 시망이라 조선이 멸망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15] 신숙주가 이미 해동제국기에서 천황의 계보를 자세히 적어 두었고, 용재총화에는 당시(15세기~16세기) 조선에서 딱히 쥐뿔도 없으면서 괜히 떠받들어지는 존재를 두고 "니가 왜황이냐"라고 놀려 부르는 말도 있었다고 언급될 정도다. 조선에서 천황을 '왜황(倭皇)'이라는 굳이 일본이 그토록 컴플렉스로 느끼는 '왜'라는 단어를 가져다 조어를 만든 것만 봐도 조선이 일본 천황의 존재를 얼마나 같잖게 봤는지 알 수 있다. [16] 가마쿠라 막부 멸망(1333) 이후 남북조 합일(1392)까지 일본 내정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발생했고, 그 왜구 진압을 통해 이름을 쌓고 인망을 얻어 개국의 단초를 마련한 인물이 조선의 창업주 이성계였다. 징비록에는 신숙주가 사망할 때 성종에게 "부디 일본과의 화의를 잃지 마시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마냥 일본에 굽히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본의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여기에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조선이 얻은 경험이 반영되어 있었다. [17] 심지어 전국 시대의 시작이라고 평가되는 오닌의 난이 발발한 당시 조선은 세조 치세였고, 신숙주 역시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18]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는 천황 막부를 무너뜨리고 친정을 행했지만 워낙 정치와 괴리되어 살던 탓에 제대로 된 통치 경험이 없어 결국 몇년 안 가서 말아먹고 도로 막부가 세워진 전례도 있었고 말이다. [19] 그 메이지 유신으로 수립된 신정부마저도 완벽하게 천황이 주도하는 정권은 아니었다. 제국 초반기는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이신을 이끈 관료들이, 중반기는 의회 내각이, 후반기는 군부가 천황의 상징적 권위를 빌어 실권을 행사했으며 패전 뒤에는 말 그대로 상징의 지위밖에 없이 모든 걸 잃고 GHQ가, 그리고 내각의 총리가 실제 일본의 국정을 주도했다. [20] 그나마 패전 이전의 히로히토 덴노가 어느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서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휘두른 천황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이마저도 절대왕정하면 생각나는 그것이기는 커녕 조선시대에서 신권이 가장 강했던 세도정치 시기의 왕들보다 실권이 적었다고 한다. [21] 4만석 [출처] 이익, <성호사설> 상3. 다만 이익이 남인이었고 당시 남인은 율곡 이이를 모시던 서인 계열 붕당인 노론과 정치적 마찰이 있었음을 감안하자. 다만 그렇다고 이익의 주장이 합리적인 얘기가 아니라는것도 물론 아니다. 당시 조선은 주변국 가운데서도 유독 1인당 곡물 섭취량이 많은 국가 중 하나였고 따라서 타국보다 군대를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갔던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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