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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15:56:31

천거

1. 개요2. 역사3. 한계와 결과4. 현재

1. 개요

薦擧

천거란 어떠한 조직에서 구성원이 그 조직의 리더에게 인재를 발굴해서 조직에 가입시켜 직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낙하산 인사라고 볼 수도 있는데, 시험이 아닌 소개를 통해 등용되는 것을 천거라 한다. 물론 그로 인해 자신을 천거해 준 사람의 라인에 자동으로 들어가 영원히 뗄 수 없는 인맥이 된다.

2. 역사

현대에는 대체로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 방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세계 대부분 문화권에서 인재 등용은 세습 아니면 천거 방식이었다. 예외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중세부터 과거 제도라는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았지만, 동아시아 역시 고대에는 천거가 일반적이었다.

2.1. 중국사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에게 인재를 추천해서 등용하게 했는데 이 때는 추천한 사람이 일종의 보증을 서게 되어 있었다. 천거 대상자의 업무능력이 무능해도 상관없긴 한데, 어차피 가만히 그 직함만 갖고 있기만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문제는 천거 대상자가 천거된 이후 모반을 일으키거나 큰 사고를 칠 경우 그 사람을 천거한 사람도 같은 처벌을 받는다는 점이다.[1]

후한 말기에는 이게 엄청나게 범람했고, 그래서 유력 군벌이 관직임용 대상자를 먼저 임명부터 하고 나서 나중에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 허락을 받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안량 문추 원소에게 나중에 천거하는 형식을 취하고 일단 임시로 임명되어 장군이 되었는데 이후 여포가 원소의 객장으로 들어왔을 때 여포 본인은 동탁을 사살한 공으로 황제에게 직접 관직을 받은 상태에서 안량과 문추를 '원소가 임명한 관리'라는 이유로 비웃고 못살게 굴었다. 결국 그 이유 때문에 여포는 원소의 휘하에 더 있지 못하고 추방당했다.

당시 태수에게는 1개월당 1인씩 효렴으로 천거하는 게 가능했는데 손견 환계를 천거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환계는 이걸 눈물나게 고마워했고 그래서 손견이 사망한 후 죽음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찾아가서 손견의 영구를 찾아왔다. 실제로도 이렇게 천거가 어렵다보니 천거한 사람과 천거받은 사람간에는 끈끈한 인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조 역시 천거에 반드시 필요한 월단평을 허소에게 획득하기 위해 허소의 친척이자 자신의 친구인 허유에게 그렇게 매달렸고 결국 허소로부터 태평지간적, 난세지영웅이라는 칭호를 획득해낸다. 조조는 '난세지영웅'이라는 저 말 한마디에 엄청나게 기뻐했다.[2]

삼국시대로 접어들어도 인재 등용의 기본틀은 천거였는데 위나라에서 실시된 구품관인법은 천거의 권한이 지방관리에서 중앙관료로 바뀌었지만 천거 자체는 유지되었다...만 천거의 권한이 중앙관료인 중정에게 넘어가다보니 천거 자체가 지나치게 중앙관료들의 손에 휘둘렸다. 덕분에 말만 천거로 흘러가버리게 되었다.

800~1000년을 거슬러올라와 북송시대 중국에서도 신법당인 왕안석도 재상 증공량의 천거로 지방관 -> 중신 -> 당상관 ->대신이 되어 신법당의 대표로 떠오르게 되었다.

2.2. 한국사

신라 화랑은 보통 청소년 수련 단체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랑의 매력으로 인재를 모으고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의 공동생활로 결속력을 다지고 교육해 그 중에서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문무관직에 부임시키는 역할이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도 고국천왕이 천거를 통해 안류 을파소를 등용한 바 있다.[3]

과거 제도가 정착한 후에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배치했지만 조선 시대에도 천거가 있었는데 류성룡이 장수 3명을 천거했다. 그 대상자로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었는데[4] 원균만 유일하게 류성룡의 얼굴에 먹칠했다.[5] 나머지 두 장수 이순신과 권율은 류성룡이 자기 이름을 걸고 천거한 값을 확실히 해냈다.

다만 조선시대는 과거 제도가 정착한지라 천거가 공식 제도화되진 않았다. 그래도 천거를 공식적인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없던건 아니라서 조광조는 현량과라는 천거제도를 도입하려고 했고 이익, 박제가 등도 천거를 제도화하자고 주장했다.[6]

3. 한계와 결과

하지만 천거제는 태생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천거하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은 아예 천거될 수 없었다. 때문에 천거제 시스템 하에서는 천거받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천거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의 주변 사람의 눈에 띄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뇌물과 부정부패는 당연히 따라오는 일로 무슨 짓을 해도 천거하는 이와 천거받는 이가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으며 권력 그나마도 중국의 경우 향거리선제는 그나마 견제장치라도 있어 천거에 주의를 가지기라도 했지 그런 것도 없던 구품관인법은 개판 그 자체가 되어 위나라, 서진, 동진 그리고 남조국가들을 말아먹는다.

결국 이러한 천거 시스템과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문벌귀족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켰고 귀족이 되고 말고는 황제가 간섭할 수 없고 귀족들만이 결정할 수 있다든가 황제의 가문이 한미하다고 귀족들이 얕잡아보는 일까지 발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제도가 쉽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결국 수나라 때에 가서야 과거 제도의 전신격인 제도가 마련되어 과거 제도의 시작을 알리지만 그 후에도 그 잔재는 많이 남아[7] 송나라 때에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로 바뀐다.[8]

물론 천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위의 예시처럼 조선에서도 천거란 흔했다. 단지 그것이 주가 아니었을 뿐. 다만 조선에서도 이런 천거 시스템을 다시 제도화하려는 주장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중종때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를 주장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과거 제도의 문제점과 폐단을 지적하며 과거 제도와 천거제의 병행이나 혹은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천거제로의 회귀를 주장했으나 아무래도 천거제의 태생적 문제점이 과거제보다도 심한지라 현량과는 실패했고[9] 실학자들도 "좋은 인재들을 잘 선발해서 천거해야~" 수준의 주장만 할 수 있었지[10] 어떻게 천거 시스템이 잘 돌아가게 할 지는 내놓지 못했다.

분명 천거제는 장점도 있다. 천거하는 사람의 역량이 뛰어난 경우 누가 봐도 "어? 이 사람은 아닌데?" 라고 할 사람이지만 정작 앉혀놓고 보니 제대로 된 사람인 경우도 있다. 앞서 말했듯 유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순신은 너무 특진이라고 유성룡과 동기 겸 같은 당파인 김성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렇게 천거제는 능력은 있지만 어떤 사정으로 인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던 사람을 발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장점은 단점이 되는게[11] 부지기수인 것이 한계였고 결국 중국과 한국에서는 과거 제도에 그 자리를 내주고 기껏해야 '이 사람을 어떤 자리에 앉힐 것인가' 정도의 일에 활용될 수 있었다. 안량과 문추가 천거제의 부작용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증거가 없다.[12]

4. 현재


[1] 때문에 천거는 상당히 신중을 기해서 해야 했으며 심지어 "본인은 부덕하고 무능하여 주변에도 천거할 인재가 없어 감히 천거를 할 수가 없다"라고 겸손한 멘트를 내세워 천거를 거부하기도 했다. [2] 당시에는 향거리선제가 반쯤 무력화되었고 대신 중요해진 것이 명사들의 인정이었다. 명사들이 자신을 좋게 평가해주면 다른 명사들, 혹은 명사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능력이든 뭐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주거나 할 것이니 그런 인정이 정말 중요했던 것. 그나마 조조같은 경우는 인정을 받아내서 덜 고생했지 유비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쌩고생 해가며 경력을 쌓아야 했고 원소의 경우에도 얼자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6년상이라는 고행을 치러야 했다. [3] 대신들에게 처음 천거받은 사람은 안류였으나 안류가 을파소를 재천거했다. 안류의 안목은 정확해서 을파소는 진대법( 환곡제도의 전신)을 시행하는 명재상이 되었고 안류도 을파소를 천거한 공을 인정받아 대사자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다. [4] 물론 이들은 아예 생짜 일반인은 아니었고 다들 과거에는 합격해서 작은 관직을 하고 있다가 류성룡에게 천거된 것이다. [5] 그리고 류성룡은 이게 정말 분했던 것인지, 본인도 원균이 노답이라고 생각했는지 본인의 저서인 징비록에서 원균을 비판했다. [6] 다만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모두 과거 제도에 비해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천거 제도를 내세운 것이지만 조광조의 현량과는 처음부터 끼리끼리 해먹을 수 있다는 단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익이나 박제가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 [7] 기본적으로 북주 때부터 형성된 관롱집단이 당나라 중기까지 세를 떨쳤고 당나라 말기에는 환관들이 강해져 과거제가 활성화될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측천무후나 당현종 같은 이들은 과거 급제자들을 어느정도 써줬다. [8] 송나라 시기에 본격적으로 과거제가 꽃피울 수 있던건 반쯤 주전충 때문이다. 주전충은 당을 멸하는 과정에서 환관, 문벌귀족 등 기존 당나라 체제의 지배층을 대거 학살했고 오대십국시대가 열리며 무장들의 권력이 강해졌지만 정작 이 무장들은 송나라 건국 후 아주 평화롭게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결국 환관도 없고 문벌귀족들도 없고 무장들도 없으니 자연스레 과거제가 꽃피워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9] 실패해도 대실패로 끝났다. 어느 정도냐고? 전국에서 33명을 뽑는데 '우연히도' 모두 서울 출신의 명문가 자제에 정승인 안당의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며 무엇보다 조광조 세력만 뽑았다. 천거제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겠다. [10] 이런 건 아무나 다 한다(...) 하다못해 향거리선제와 구품관인법도 취지는 이런 것이었다. [11] 갑툭튀가 벼슬에 앉을 수 있으니 천거하는 사람 눈에만 잘 띄면 자기가 능력이 없어도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12] 문추는 그렇다쳐도 안량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저 상대를 잘못 만났을 뿐 딱히 무능했다거나 삽질을 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 [13] 노무현과 함께 동료 문재인에게도 김영삼이 정계 입문을 제의했지만 당시 거절했다고 한다. [14] 정계 입문은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3당 합당에 반발해 탈당하고 일명 꼬마민주당으로 갔다. [15] 다만 정치생명까지 잃지는 않았다. 쫓겨난 후 개혁신당을 창당하여 22대 총선에 뛰어들었고 신생정당과 소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두 양당후보를 모두 제치고 당선되었다. 본인 말고도 비례대표로 2명이 더 당선되어서 22대 국회에서 개혁신당 의석수는 3석으로 많이 적긴 하지만 어차피 제3지대 정당은 대부분 망했다는걸 감안하면 그정도면 감지덕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