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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20:08:48

숭덕제

청 태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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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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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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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청 제2대 황제
숭덕제 | 崇德帝
파일:清_佚名_《清太宗崇德皇帝朝服像》.jpg
출생 1592년 11월 28일
건주여진 퍼아라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즉위 1626년 10월 20일
후금 성경 선양고궁
(現 랴오닝성 선양시 위훙구)
사망 1643년 9월 21일 (향년 50세)
성경 선양고궁
(現 랴오닝성 선양시 위홍구)
능묘 소릉(昭陵)
재위기간 제2대 황제
1626년 10월 20일 ~ 1643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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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83e><colcolor=#00386a> 성씨 중국식 : 아이신줴러(愛新覺羅)
만주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한국식 : 애신각라
중국식 : 황타이지(皇太極)
만주어 : 홍타이지(ᡥᠣᠩ ᡨᠠᡳᠵᡳ)[1]
한국식 독음: 황태극
부모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효자고황후
형제자매 16남 8녀 중 8남
배우자 정비 - 원비 뉴호록씨
계비 - 계비 오랍나랍씨
정후 - 효단문황후 박이제길특씨
후궁
12명 [ 펼치기 · 접기 ]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
민혜공화원비 박이제길특씨
의정대귀비 박이제길특씨, 강혜숙비 박이제길특씨
측복진 예허나라씨, 측복진 찰노특박이제길특씨
소복진 납라씨, 소복진 찰합이기뢰씨
소복진 안찰씨, 소복진 이이근각라씨
소복진 새음낙안씨, 소복진 극이극륵씨
자녀 11남 14녀
신장 175cm[2]
한호 만주어 : 고신 온초 활랴순 언두링어 한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칸호 몽골어 : 아구다 오루시옝치 나이람다구 복다 칸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묘호 태종(太宗)
시호 한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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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만주어 : 겅옌 슈 황디(ᡤᡝᠩᡤᡳᠶᡝᠨ ᠰᡠ ᡥᡠᠠᠩᡩᡳ)
연호 1626년 ~ 1636년
한자식 : 천총(天聰)
만주어 : 수러 한의 해(ᠰᡠᡵᡝ ᡥᠠᠨ ᡳ ᠠᠨᡳᠶᠠ)
1636년 ~ 1643년
한자식 : 숭덕(崇德)
만주어 : 워시훈 어르더뭉거(ᠸᡝᠰᡳᡤᡠᠨ ᡝᡵᡩᡝᠮᡠᠩᡤᡝ)
}}}}}}}}} ||

1. 개요2. 생애
2.1. 한에 오르기 전2.2. 한에 오른 후
2.2.1. 내치2.2.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2.2.3. 명나라 공격과 송산 전투
3. 이름4. 평가
4.1. 일반적 평가4.2. 한국의 역덕계에서의 평가
5. 가족
5.1. 조상5.2. 비 및 후궁5.3. 자녀
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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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숭덕제보다는 청 태종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역사를 좀 안다는 사람들도 "청 태종"이라 하면 알아도 "숭덕제"라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다. 이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다른 황제들을 연호를 딴 칭호로 부르고, 묘호로는 잘 부르지 않기 때문에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 청 태종보다도 홍타이지로 더 많이 언급된다.[3][4]

누르하치와 더불어 묘호보다는 홍타이지로 더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5] 한국에서도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홍타이지"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좀 더 과거에는 "황태극"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2. 생애

2.1. 한에 오르기 전

청 태조 누르하치의 8남으로 태어났으며 이후 후계자가 되어 후금의 제2대 군주로 즉위했다. 첫째가 아닌데도 후계자가 된 것은 홍타이지의 모후가 당시 해서여진 예허부의 수장 양기누(yangginu)의 딸이었던 몽고 저저(monggo jeje)였기 때문으로, 혈통이 좋았으며 홍타이지 본인의 운과 노력도 뒤따랐다. 부황인 누르하치는 개인의 능력으로 여진 제부족들을 통합했지만 그 집안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정책적인 면에서 예허부의 명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후처로 예허부의 공주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누르하치의 장남 아이신기오로 추연은 누르하치에 의해 실각하며[6], 추연의 후손은 맏이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청대 내내 무시당했다.[7] 특히 홍타이지도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누르하치 바로 다음인 4대 버일러 자리를 얻었다.[8]

또한 다른 3명의 대버일러 중 2대 버일러인 아이신기오로 아민(amin)은 누르하치의 조카였으며, 3대 버일러인 아이신기오로 망구르타이(manggūltai)는 죄를 지은 어머니를 죽인 일로 누르하치한테 찍혔고, 성격 좋은 암바(大) 버일러 다이샨(daišan)이 후계자로 유력했으나 이쪽은 성격만 좋지 아버지 살아있을 때엔 사생활이 난장판이어서 누르하치에게 실망만 안기던 불효자였다. 결국 4대 버일러라고는 하지만 다른 3명의 버일러들이 다들 크나큰 결점을 갖고 있었기에 후계 구도는 자연스럽게 홍타이지에게로 기울었다.

여기서 다이샨의 사생활에 대해 부연하자면, 한번은 도르곤의 모친 아바하이와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다가 아비의 여자를 탐하는 패륜아라는 논란으로 번져 집안 망신을 시키기도 했고, 또 한번은 다이샨의 조강지처 소생의 둘째 아들 쇼토(šoto)가 명나라로 도망(!)가려다가 걸려서 할아버지 누르하치 앞에 끌려왔는데 "아빠가 새 엄마(예허나라씨)한테 정신팔려서 형(요토)이랑 나는 조강지처 아들들인데도 신경도 안써요ㅠㅠ" 하며 서럽게 울자 할아버지가 아비한테 구박받는 손자를 도리어 안쓰럽게 여겨 직접 키우겠다며 거두고는 제 친자식을 반역자라고 죽이겠다 노발대발하는 다이샨을 불러다가 혼쭐을 내는 일도 있었다. 한마디로 성격만 좋지 사생활은 그야말로 아비 망신시키고 다니는 난봉꾼이었던 것이다. 괜히 누르하치가 황위 계승에서 제외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난봉꾼 다이샨의 사생활 덕에 누르하치가 직접 거둔 손자들은 누르하치의 늦둥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숭덕제 홍타이지 사후 후계 경쟁에서 누르하치 늦둥이 3형제 중 최고의 실력자였던 도르곤의 지지세력이 되었고, 다이샨 역시 나이가 들어서는 황실의 최연장자로서 도르곤을 섭정왕으로 밀어주게 된다.

2.2. 한에 오른 후

2.2.1. 내치

창건자이며 전쟁 영웅 아버지와 천고의 명군이라는 손자에 가려 저평가를 받고, 조선 및 이를 이은 현대 한국에서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문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여담으로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 역대 황제 중 유일하게 조선 땅을 밟은 황제가 되었다.[9] 병자호란의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순한 외교 방문이 아니라 친정으로 내려온 것이기에 이 역시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론 문과 무를 두루 갖춘 인내심 있고 유능한 명군이었다.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가진 그는 누르하치를 이어 즉위하여, 내정으로는 전임인 누르하치의 방침을 이어받아 한족 관리를 중용했다. 또한 숙적인 명나라의 제도를 참고해 정부와 법률을 도입하고 과거를 열어 인재를 모았다. 그리고 중국식의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여 황권을 강화했고[10] 정묘호란 때 활약한 아민을 견제하여 황제 독재 체제를 공고히 다졌다. 한편 딱히 견제할 생각은 없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명군에게 패배하고 추태를 보였을 때 과거 공적을 생각하여 유배형으로 봐준다. 지르가랑은 조금 더 봐주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귀족들도 있으니 황권을 위해서는 지르갈랑 처벌은 무리였다. 유학을 장려했으며 유목민의 형사취수제 순장 순사를 엄금하고 엄벌에 처했다. 하지만 순장과 순사는 근절이 되지 않아 도르곤과 세조 순치제가 각각 죽을 때도 누군가가 따라 묻혔다. 결국 성조 강희제의 치세에 와서야 근절되었다. 또 농업을 장려하고 무역에 힘써 경제 성장에 집중했다. 그리고 여진족[11]이란 족명을 금지하고 만주족으로 고쳤다.

2.2.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친명과 배금의 기조를 내세우며,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홍타이지가 한으로 등극할 무렵 아민은
"그대는 즉위한 후 내가 외번으로 나가 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는 조건을 제안한 바 있었고, 아민은 조선 침공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1627년 후금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홍타이지는, 아민을 조선 침공의 선봉으로 위임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정묘호란) 아민의 이탈 시도는 버이러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천연두 등으로 흐지부지되었고, 정묘화약이 성사되면서 광해군 말기, 국서의 발송까지 진전된 양국 관계가 다시 복구되었다.[12]

정묘화약으로 성사된 양국의 국교는, 상충되는 입장과, 관계 유지의 상이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지점을 통해 점차 안정화되었고 범월, 세폐, 개시, 동강진 등의 현안들은 교섭을 통해 합의점에 도달했다. 이 같은 추세에서 1633년 조선은 정벌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후금의 제장들은 조선이 스스로 귀부하거나 언제든지 쳐서 복속할 수 있다고 했으며, 설령 조선이 화약을 잘 지키지 않더라도 경제적 교역을 유지하는 등 화호를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13]

동몽골 차하르(찰합이)부의 잔류 세력을 흡수하고, 북방의 흑룡강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후금에서는 홍타이지의 존호를 쟁점으로 체제 전환의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후금은 조선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흑룡강과 동해 연안에 대한 세력 확장과, 차하르 세력의 복속 그리고 명나라의 심(양)•요(양)와 송산 공략 사실을 자랑함으로써 조선에게 결단을 시사했다. 1635년 10월에는 차하르부의 칸의 옥새를 조선 사신에게 과시했으며, 1635년 12월부터 '봉서'(奉書)와 '치서'(致書)를 빌미로 인조에게 형인 한, 즉 홍타이지에 대한 공경을 요구했다.[14]

이듬해인 1636년 정월 홍타이지는 존호 문제에 대해 조선 국왕의 동참을 요구할 것을 지시했다. 후금의 대신들과 몽골족 버이러들은 조선에 들어와 존호례에 인조가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그간 조선은 명나라 황제를 위로 두는 전제하의 '형제'라는 명분으로 화친을 정당화했었다.[15] 때문에 홍타이지의 '칭제'라는 쟁점으로 그 전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화호를 유지하는 명분을 확보하기는 어려웠고, 전쟁을 불사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사절단은 귀국길에 인조의 절화교서를 탈취했다. 칭제를 인정할 수 없는 조선의 태도를 홍타이지는 용인할 수 없었다.[16]

조선은 주전파가 득세하고 있었으며, 도저히 청나라와는 화의가 불가능하다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최명길 및 몇몇 현실론자들은 그래도 청나라와 화친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1636년 가을에 온 사절에게 최후통첩성 발언을 했으나 조선측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1636년 12월 8일 조선을 침공했으며,( 병자호란)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인조와 조선 조정은 농성 50여 일도 안된 1월 21일 대청의 연호와, 표문의 형식을 갖춘 봉표 칭신의 예를 이행했다. 이후 홍이포의 위협과 신하들의 압박, 그리고 군심의 이반이 심화되는 가운데 왕족들이 피난을 간 강화도가 단 하루만에 함락됐다는 최악의 소식이 전해지자, 1월 30일 인조는 쪽색 옷을 입고 서문으로 출성하여 홍타이지를 대면하고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17]

삼전도의 치욕적인 항복의식으로 인해 인조의 권위가 근본부터 훼손되었다. 이에 척화파 배척과 친청 행보를 보였으며, 소현세자를 비롯한 인질로 인해 지배층의 정치, 사회, 경제적 손상과 혼란이 초래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한 사실로 인해, 대일관계에서 임진왜란 이후 강력한 대일정책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18]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해 승리했으나, 당시 조선에서 유행한 천연두를 염려하여 조선을 멸망시키는 대신 자국의 대외적인 권위만 확립했다. 만주족은 유전적인 특성상 조선인이나 중국의 한족보다 천연두에 훨씬 취약했는데, 숭덕제 홍타이지도 천연두를 앓지 않아서 면역이 없었다. 특히 최근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청태종실록》숭덕 2년 7월 5일(1637년 8월 24일) 2번째 기사에서 홍타이지 자신이 직접 병자호란 때 피두선귀(避痘先歸)[19]했음을 언급했다면서 전쟁이 단기간만에 종전한 이유는 천연두였음을 고증했다. [책마을] 병자호란의 미스터리…전쟁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 만약 천연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남한산성은 약 30,000명 중 20,000여 명이[20] 전사나 아사 등으로 죽은 대릉하성 전투와 같은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인조도 퇴위당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굴욕에서 삼궤구고두례가 끝난 후 숭덕제가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히도록 하라."
고 명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만주인 고관들 조선에 칙사로 파견되었던 일들이나 예친왕 도르곤과 인조가 서로 나눈 대화 등을 보면, 자국의 연호를 따르게 하고, 군신 관계의 예우를 명나라에게 하던 시절과 거의 똑같이 한 것은 단지 조선을 신하로 만든 것만이 아닌, 명나라 시절과 같은 청나라 중심의 군신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의도였다.

한편, 청군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최대 600,000명이라는 추정치가 있는데, 한국에서 그 숫자를 그대로 믿는 국내 학자는 요즘엔 거의 없다. 당연하지만, 저 숫자는 정확히 조사하고 집계한 숫자가 아닌 조선 측에서 '대충 60만 명 정도 끌려갔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호왈일 뿐이다. 특히 과거에는 과장해서 기록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기에 기록을 모두 믿을 수가 없다.

애당초 당시 후금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600,000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 당시 청나라의 상황이란 경제난과 식량난에 포로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마저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저 600,000명이라는 숫자부터가 청나라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실제로 구범진 교수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0,000~600,000명에 달했다는 통설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출처 당시 청나라 인구가 한족, 만주족, 몽골족 등을 모두 포함해서 최대 130만~24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인 포로가 그렇게 잡혀갔다면 조선인들이 청나라 내에서 최대의 인구 집단이 됐을 거라는 얘기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군의 전략이 속전속결이어서 포로 사냥에 열중할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과 당시 조선 내에 천연두가 유행하는 상황속에서 조선인들 중 누가 천연두에 걸렸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인데 대규모로 포로들을 데려간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병자호란 당시 조선인 포로들이 최대 50만~60만 명이라는 주장은 객관적인 근거는 전혀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있었고 그 수가 적지 않았으며, 조선 조정이 이들을 소환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미흡했다는 것, 그들 가운데 어찌어찌 자력으로 고향을 찾아 돌아온 사람들조차 이런저런 멸시와 차별에 시달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환향녀 문제가 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는 조선의 큰 사회문제가 되어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는 의례상 직접 강간 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사대부들은 들을 생각이 없었고 그녀들을 내쳤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기생도 아닌 창부를 하게 되었다.

2.2.3. 명나라 공격과 송산 전투

홍타이지는 오래전부터 베이징을 취하는 것은 큰 나무를 베는 것과 같아서 먼저 양변을 도끼로 패면 큰 나무가 스스로 넘어간다고 말하곤 했다. 그 양변은 몽골과 조선이었으니 명나라에 대한 공격이 무르익었던 셈이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1634년에 내몽골의 링단 칸에 대해 완승을 거두고 내몽골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내몽골을 평정하고 원나라의 잔여 세력으로 명나라를 위협하던 북원을 정복하여 원조 옥새를 얻었으며, 원조의 정통을 잇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복다 칸의 칭호를 받아들여 명목상 칭기즈 칸의 후예인 몽골의 대칸에 올랐다. 그리고 국호를 금(aisin)에서 대청(Daicing)으로 고치며 관온인성황제(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 숭덕(Wesihun Erdemugge)으로 칭제건원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계속해서 반발하는 조선을 신속하게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고(정축하성), 복종하게 만들어 후방의 위협을 없앰으로써 청군이 대명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공고히 만들었다.

이후 반간계를 이용해 명나라의 의종 숭정제로 하여금 명장 원숭환을 참혹하게 죽이게 한 뒤 계속 명나라를 공격했다. 1638년엔 명나라 내부 깊숙이 쳐들어가 산동성 제남을 공략하여 200,000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고 덕왕 주유추를 사로잡았다.

1641~42년, 명나라와의 결전인 송산 전투에서 홍승주의 명나라 대군 140,000명을 전멸시켰고 산해관 외성들을 모조리 함락시켰다. 1642년 11월 초 홍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도록 했다. 청군은 연전연승을 거둬 명나라는 국토가 휩쓸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후 중원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얼마 못 가 1643년 51세라는 한창 나이에 급사했다.[21]

사실 홍타이지는 송산 전투 때 군을 지휘하며 코피를 심하게 흘렸는데 이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청의 중국 대륙 정복은 아직 어렸던 아들 아이신기오로 풀린의 섭정을 맡은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호쇼이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愛新覺羅 多爾袞)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이름

참고 자료
  • 몽골 제국 시대의 칭호
    • 카안(ᠬᠠᠭᠠᠨ; 大汗):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황제의 칭호(emperor).
    • 노욘(ᠨᠣᠶᠠᠨ; 國王): 몽골 제국의 속국 군주의 칭호(king).
    • 저넝(ᠵᠢᠨᠤᠩ; 晉王/濟農): 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황태자의 칭호(crown prince).
    • 칸 후우(ᠬᠠᠨ ᠬᠦᠦ; 皇子): 황자의 칭호(prince).
    • 미르자(米爾扎): 페르시아어로 황자의 칭호(prince).
  • 북원 시대의 칭호
    • 카안(可汗): 몽골 제국과 북원의 황제의 칭호(emperor).
    • 칸(汗): 몽골의 군주의 칭호(king).
    • 저넝(ᠵᠢᠨᠤᠩ; 濟農/晉王), 몽골 제국 및 북원의 황태자 칭호(crown prince). 15세기부터는 그냥 세습 작위가 되었으며, 황태자를 독점적으로 가리키던 호칭으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 홍타이지(ᠬᠤᠨᠲᠠᠶᠢᠵᠢ; 渾台吉): 자신만의 영지를 가진 칭기즈 칸의 후손인 군주의 칭호(prince). 황태자(皇太子)에서 유래.
    • 타이지(ᠲᠠᠶᠢᠵᠢ; 台吉): 칭기즈 칸의 후손의 칭호(royal family).
    • 왕(王): 자신만의 영지를 갖고 있었던 칭기즈 칸의 형제의 후손인 군주의 칭호(royal king).
    • 타이시(ᠲᠠᠢᠱᠢ; 太師): 자신만의 영지를 가졌으나 보르지긴씨는 아닌 군주의 칭호(lord).

휘에 관해 논란이 있다. 숭덕제의 는 흔히 홍타이지(皇太極)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홍타이지'는 휘가 아니라는 가설이다. 나무위키 내의 준가르 항목을 보면, 홍타이지는 "칸"과는 다른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작위 중 하나이며 서몽골 오이라트 계열 준가르족의 우두머리의 호칭이 홍타이지라고 서술되어 있다. 준가르 항목의 "기원"과 그 주석 참고. '칸'은 칭기즈 칸의 후예인 보르지긴씨만 칭할 수 있는 것이였기에 초원의 지배자들은 다른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준가르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분명한 사실은 '타이지'라는 단어가 몽골족 세습 귀족 관리의 작위 또는 명칭인 '일반명사' 비슷한 것으로, 몽골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주 나오는 명칭이라는 것이다. 당장 아버지 누르하치가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박살난 후 만났다는 몽골 귀족 역시 훵 타이지라고 불리는 인물이었으니... 이전에는 몽골 작위 타이지의 어원이 중국의 태사(太師)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 부분은 틀렸다. 타이지는 칭기즈 칸의 자손만이 칭할 수 있었던 직위로 한자로는 台吉(태길)이라 썼다. 그에 비해 타이시는 보르지긴씨가 아닌 자들이 칭하던 칭호였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타이시'로는 토목의 변을 일으켰던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가 있다. 즉 타이지와 타이시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이 숭덕제의 휘인 홍타이지의 타이지는 台吉(태길)도 太師(태사)도 아닌 太極( 태극)이다.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타무라 타이스케(三田村 泰助)는 태종 홍타이지의 본명을 '허칸'이라 제시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청 태종 숭덕제의 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분명하지는 않다. 아바하이(阿巴海)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건 그 당시 홍타이지의 천총 연호를 만주어로 번역한 압카이 수러(압카이( 만주어로 하늘) - 아브카이 - 아바하이)를 러시아인들이 이름으로 잘못 읽고 이것이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이었다. 그 외에 '홍'일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

이외에도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숭덕제 호칭이 '홍타이지'라거나, 극단적으로는 그저 우연히 발음이 겹쳐서 커져버린 논란일 수도 있다. 작위명을 이름이나 성씨(사마씨, 윤씨)로 사용한 사례는 흔하다.

또한 홍타이지로만 읽히는게 아니라 Hong Taiji를 한어병음처럼 읽어 중국어 국립국어원 표기에 따라 훙타이지, 황태극을 한어병음 표기를 한 Huang Taiji, 즉 황타이지라고 읽는 등 바리에이션이 나온다. 실제로 여러 언어에서의 위키백과의 표제어를 비교해보면 Hong Taiji와 Huang Taiji로 분분한 편이며, 심지어 표제어가 표제어다보니 홍이나 황이 성씨이고, 이름이 타이지인줄 아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자 표기도 황태극(皇太極) 뿐만이 아니라 홍대시(紅歹是), 홍대시(洪大時), 홍태극(洪太極), 홍태주(洪太主), 홍태시(洪佗始), 홍태시(洪台時), 홍타실(洪他失) 등으로 분분하다.

사실상 보통 중국사 유목민족사를 접할 때 홍타이지라는 명칭은 이 청나라 숭덕제의 대명사이기에 홍타이지를 숭덕제로 알고 있어도 문제는 없으며, 따라서 홍타이지로도 이 문서에 올 수 있다. 사전에서도 홍타이지는 청나라 태종 숭덕제로 나온다.

4. 평가

4.1. 일반적 평가

창업자 누르하치 못지 않은 능력으로 만주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던 청나라를 중화제국으로 변모시킨 명군으로 꼽힌다.

만주족의 통일은 전적으로 누르하치 개인의 역량이었다. 이런 위대한 창업자가 후계자를 잘못 정해 무능한 후계자가 갓 창립한 사직을 말아먹고 단명한 왕조는 중국사뿐만 아니라 유목왕조사에 상당히 많다.[22]

하지만 홍타이지는 17년의 재위기간에도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 실책이 거의 없었다.[23]

일단 누르하치의 후계자 답게 화북 평정과 금나라 재건이라는 누르하치의 유지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와 마찬가지로 명나라 항장들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거두어들여 만주족의 힘을 배가시켰다. 누르하치 시절에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은 주로 하급무장들이었으나, 홍타이지 시절에는 대신급의 명나라 장수들이 이민족인 청나라에 항복한다. 병부상서를 지낸 홍승주가 대표적이다.[24]

홍타이지는 아버지 누르하치가 금나라의 장점만 생각한 것에 비해 홍타이지는 금나라의 문제점도 철저히 반면교사로 삼아서 국가를 운영하였다. 금나라의 문제점은 주변국들을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패망한 요나라 및 송나라 잔당들을 흡수하는데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홍타이지는 원숭환과 휴전기간을 이용하여 주변을 복속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명나라와 대결하기 위해 먼저 주변국들인 몽골, 조선을 복속한다는 전략[25]을 세워놓고, 결과적으로 성공시켜 만주족의 역량은 그 이전보다 몇배로 불어났다. 이렇게 주변국을 평정한 후 명나라와의 대결에 집중해서 요동반도를 완전히 석권하고 산해관 이북을 모두 손에 넣었다. 비록 본인이 산해관을 넘어가지는 못하고 사망했으나, 그의 치세에 청나라의 군사력은 몽골과 조선을 합쳐 그 이전보다 몇배로 불어났고, 결국 그는 청나라의 대륙 석권의 초석을 놓았다. 자신들의 선조 금나라는 주변국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서 반쪽짜리 제국에 그친 것을 생각하면 일단 홍타이지의 전략 자체는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금나라는 당시 주변국이라고 볼 수 있는 카마그 몽골,[26] 고려, 서하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서 항상 이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 때문에 자신들이 멸망시킨 송나라 잔당들이 남송을 세워도 전력으로 들이쳐서 제압하지 못하고 대륙을 남송과 분할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미 주변국들을 제압해서 후방의 위협을 말끔히 제거하였고 홍타이지 사후 청나라의 남은 과제는 산해관을 넘는 것과 명나라 잔당들이 세운 남명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명나라 항장 출신들을 토사구팽하는 것으로 사실상 세 가지 과제만이 남았으며, 섭정이자 실질적인 후계자였던 유능한 도르곤에 의해 세 가지 과제 중 두 가지는 손쉽게 해결되었으며, 마지막 남은 과제는 청나라 최고의 성군 강희제 마무리하게 되어 청나라는 대륙 통일을 완전히 달성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홍타이지 즉위 초반의 후금의 칸은 유목민족 특유의 분권형 지배체제 때문에 팔기군에서 자기 부대를 지위하는 4대 버일러(대추장)들과 군신관계가 아니라 동업자 관계였을 정도로 황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27], 홍타이지는 이를 깨닫고 끊임없이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몽골에 직접 친정하여 대원전국옥새를 얻어 황제자리에 오르고, 직후에 조선원정( 병자호란)에서 승리하여 여진족이 상국으로 모셨던 조선에게 상국 대접을 받게 됨으로써 청나라 황제의 권력이나 권위는 청나라 내에서는 신성불가침이 되었다. 이렇게 신장된 황권을 바탕으로 산해관을 넘어간 청나라군은 명나라 멸망기의 혼란을 일사불란하게 수습하고 농민반란으로 피폐해진 화북을 안정시켜 대륙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4.2. 한국의 역덕계에서의 평가

한국에서는 한때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이 주도한 숭덕제 홍타이지 미화에 의해 숭덕제가 조선에 대해 엄청난 자비를 베푼 대인배 침략자로 평가되어 왔으나,[28] 현재는 숭덕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그러지 못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만큼은 아니어도 냉혹한 침략자로 평가하는 의견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병자호란 당시 피해를 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후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을 엄청나게 수탈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일본 제국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억지로 미화되었을 뿐, 실제 당대 조선인들이 오랑캐 임금이라고 비하했던 것은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닌 셈이다.

이런 조선에 대한 강경한 태도[29]는 당대의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충신을 비롯한 압록강을 여러 번 건너서 다녀본 사신, 무관, 간첩들은 다들 홍타이지의 야심을 경계하면서도 잘 꼬드겨서 조선 편으로 만들어보면 좋을 것이라는 몹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특히 아이신기오로 다이샨 등은 상대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4대 버이러들의 내부 갈등과 청나라의 4개, 8개 깃발군의 기주들이 누군지 등을 주기적으로 보고하며 정세 분석에 열을 올리는 기록이 전해진다.

청 태종의 치세 동안의 조선 시대 당시 병자호란을 다룬 고전소설인 《 박씨전》, 《임경업전》 등에서도 청 태종을 비하한 묘사는 별로 없으며 매우 대범하고 유능한 군주로 나온다. 고전소설인 《사명대사전》에서 사명대사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수뇌부를 실컷 농락한 것과 비교된다. 이는 홍타이지가 비록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사대로 섬기는 청나라의 시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을 비판했다가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비판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전》에서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인물인 타타라 잉굴다이 등을 포함한 대부분 홍타이지의 부하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것은 아마도 홍타이지에 대한 비판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으로 보인다. 《박씨전》에서도 '금'이나 '청'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오랑캐국을 뜻하는 '호국'(胡國)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며 홍타이지도 이름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저 '호왕'(胡王)으로만 나온다. 이는 《 임진록》에서 대놓고 평수길이라는 이름을 표기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도 《박씨전》, 《임경업전》 등 병자호란을 다룬 조선시대의 고전소설들은 단순히 숭덕제를 대범하고 유능한 군주로 묘사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식민사관과 같은 수준으로 숭덕제를 엄청나게 미화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최소한 조선 후기 사람들은 숭덕제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이 거의 없다시피 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애초에 숭덕제를 비판하는 내용은 아닐지언정 숭덕제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작품들이므로 해당 고전소설들이 집필될 당시 조선인들은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비판하면 비판했지 미화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박씨전》이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미화하는 작품이었다면 청나라를 '호국'으로, 숭덕제를 '호왕'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오랑캐를 뜻하는 한자인 '되 호'(胡)가 들어가는 명칭 자체가 자신들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대 조선의 창작물에서 숭덕제와 청나라를 대놓고 각각 오랑캐 임금과 오랑캐의 나라로 취급했다는 것 자체가 병자호란 당시의 숭덕제 개인 및 청나라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조선 후기 사람들의 인식이 그야말로 최악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군사를 보낸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 명나라 황제로서는 폭군이자 암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관련해서 긍정적인 야사가 많이 남아있는 것과 달리, 숭덕제는 청나라 황제로서는 명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관련해서 긍정적인 야사가 사실상 없다시피 한 점[30] 또한 숭덕제를 미화하던 기존의 역사관에 대한 반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현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의 청나라 미화,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있었는데 광해군도 최근에는 내치에서의 실정이 재조명되어 부정적인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인조에 대한 필요 이상의 폄하로 인해 홍타이지에 대한 미화가 생기는 것도 겹쳐 있다. 후금을 포함한 청나라 초기 인물들 중 조선의 입장에서 그나마 대인배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홍타이지보다는 아버지인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이복형 아이신기오로 다이샨, 이복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신하인 타타라 잉굴다이였다. 홍타이지는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켰으며, 잦은 예방전쟁으로 조상인 여진족을 탄압한 조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복을 하고 싶어도 그랬다가 오히려 장기전으로 이어져 본인들이 불리해지고, 최악의 경우 도리어 청나라의 멸망만 앞당겨질 수도 있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큰 보복을 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청나라의 지배 민족인 만주족 자체가 1911년 신해혁명 당시의 만주족 학살과 청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비참하게 몰락하여 현재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한때의 적이었던 한국인들에게조차 동정받는 감이 있는데, 이러한 점 또한 현대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청나라가 미화되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31]

최근 들어서는 환빠 만선사관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만행이 재조명되면서 숭덕제를 악랄한 침략자라고 욕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민족 침략자판 조선 세조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한반도의 옛 권력자(군사정권/일본 제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미화된 영향으로 한때 한국 내에서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했으나 후대의 부정적인 재평가에 의해 한국 내에서 이미지가 악화된 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숭덕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인 재평가가 비교적 늦게 이루어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승만 정부 장면 내각 시절에는 일제강점기의 후유증으로 인한 각종 혼란 탓에 숭덕제를 부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역사관이 자리잡을 여유가 없었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사정권 자체가 일본 제국의 영향을 진하게 받다 보니 숭덕제 미화 등의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으며, 그 후에도 표면상으로나마 자신들이 청나라의 후신이라고 주장하는[32]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숭덕제를 비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역사스페셜[33]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한다는 논리로 대놓고 금나라 청나라를 신라인 후손이 만들었으니 금나라와 청나라가 한국사라고 보는 환빠적 시각이 자리를 잡았으며,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대한민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는 것을 광해군[34]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한 것을 노무현의 동북아 운전자론에 빗대어 높이 평가하고 보수정권의 친미외교를 인조의 친명외교에 빗대어 비판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인조만 비판하고 숭덕제는 절대로 비판하지 않던 식민사관이 더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그리고 역사스페셜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다고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게 신라인이라고 선전해서 이로 인한 국수주의적 환빠들이 대량으로 양산되자 그 영향으로 만주족에게 동족의식을 가지는 한국인이 많아지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삼국통일전쟁이나 후삼국통일전쟁처럼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 정도로 여기는 역사관 또한 널리 퍼졌다. 오히려 조선이 같은 민족인 만주족을 억압하고 중국 명나라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조선과 인조정권을 증오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보면 처음에는 북방 이민족이 세운 요, 금, 원, 청을 중국사에서 제외해서 한국사[35]를 침탈해서 반토막내려는 중국에게 대항하려는 나름 선한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게 과열된 양상을 띠면서 청나라와 숭덕제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로 변질된 것이었다. 한국사를 반토막내려는 중국에게 똑같이 중국사를 반토막내려는 맞불작전의 성격도 있는데 중국에게 니들이야 말로 이민족에게 지배나 당하는 한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프레임으로 맞선 것이다.

그러다가 상술한 것처럼 환빠 및 만선사관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만주족에게 동족의식이 없는 한국인이 다시 늘어나고, 시진핑 정권의 한국에 대한 갑질을 숭덕제 정권의 조선에 대한 갑질에 빗대어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숭덕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예전만큼 관대하지는 않게 되었다. 기존에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삼전도비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던 역사관 또한 삼전도비를 교차검증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삼전도비를 숭덕제 미화를 위한 선전물로 여기는 역사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인들 중 현재까지도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숭덕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정작 진짜로 조선에 대해 관대했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고 기껏해야 그 세 황제의 치세가 청나라의 최대 전성기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전부다. 이들은 강희제 치세부터 조청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는 경우가 사실상 없다시피 하며, 오히려 조청관계 개선이 숭덕제 본인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진짜로 조선에 대해 관대했던 청나라 후대 황제들을 놔두고 굳이 조선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숭덕제를 띄워주는 셈이다. 친일·극우 성향 한국인들로 치면 그들이 일제강점기 중 그나마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이 덜했던 일제강점기 중기( 다이쇼 시대)를 놔두고 굳이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일제강점기 초기( 메이지 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 말기( 쇼와 시대 초기)를 미화하는 것과도 같다.

사실 현 시점에서는 만주족의 입장에서도 마냥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결과론적인 평가이지만, 숭덕제가 청나라의 중원 입관의 초석을 다진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는 원인을 제공한 꼴이 되었고, 더 나아가 오늘날 만주족이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지 못한 채 중국의 피지배민족으로 전락하는 나비 효과로 이어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들이 중원을 정복하지 않고 계속 만주에서 살아갔다면 후손인 자신들은 한국과 일본의 경우처럼 중국과는 별개의 나라로 잘 지냈을지도 모른다며 안타까워하는 만주족이 적지 않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정복왕조인 원나라를 세웠고 훗날 청나라 치하에서 만주족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몽골족이 비록 외몽골의 할하인 한정이지만 20세기에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워 현재까지 이어지는 점 또한 현대 만주족의 그런 안타까운 감정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결국 현대 만주족의 입장에서 숭덕제 홍타이지는 자기 민족을 탄생시킨 위인이면서 동시에 자기 민족이 한족에 동화되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한 딜레마적인 인물인 셈이다. 비록 결과론적인 관점이지만, 만약 숭덕제가 중원 정복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저 청나라를 고구려 발해 포지션의 나라 정도로 만드는 데 그쳤다면 현대 만주족의 운명은 실제와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족들의 경우, 중국 정부에서는 중국의 여러 이민족 왕조들을 중국 역사로 인정하는 차원에서 숭덕제를 중국의 명군으로 여기며 중국의 일반 한족 국민들 중에서도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아닌 사람들은 숭덕제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반면 한족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간접적으로나마 명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에 오랑캐의 잔재가 많이 남게 만든 원흉으로 여겨져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몽골족들의 경우,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족들은 조상들을 만주족 못지않게 잘 대해준 몽골의 위대한 정복왕조 명군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36], 독립국가인 외몽골의 몽골족들은 몽골 문화권을 분열시킨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몽골족과 별개의 정체성을 가진 다른 몽골계 민족들의 경우, 다우르족은 청나라 치하에서 괜찮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숭덕제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며, 토족· 부랴트인· 칼미크인· 모골인은 숭덕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역사 때문에 숭덕제에 대한 평가가 중립적인 편이다.

5. 가족

5.1. 조상

5.2. 비 및 후궁

숭덕제는 4명의 정실 부인과 3명의 측비, 2명의 측복진과 6명의 서복진을 두었다. 강혜숙비를 제외한 모든 부인들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으나, 요절한 황자, 황녀들이 여럿 있었다.

숭덕제의 부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

5.3. 자녀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는 11남 14녀의 친자녀들과 2명의 양녀를 가졌으며, 자녀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6. 대중매체에서

후금 청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다. 만주족이 현대에 자신들만의 독립 국가를 세웠다면 중국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며, 이 경우 중국 드라마에서는 철저히 악역으로 나오고, 만주족 독립국가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나왔을 것이다.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악감정이 많이 희석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만주족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락하는 걸로 모자라 한족에 동화되었을 정도로 비참하게 몰락했기 때문이다.

중국 드라마의 단골인 것은 홍타이지의 가정사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암바 푸진(大福晉)[38]인 저르저르(哲哲)[39]와 측복진(福晉)[40] 하르졸(海蘭珠)[41], 붐부타이(布木布泰)[42] 자매는 고모와 조카 관계이다. 고모와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 셈이다. 황제인 홍타이지에게는 수많은 비빈이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하르졸 한 명이다. 이들의 로맨스는 아들인 세조 순치제 동악비의 로맨스와 매우 유사하며 함께 청나라 시대의 가장 유명한 로맨스로 꼽힌다. 이들과 첫 아내 애처가였던 성조 강희제 및 고종 건륭제, 진비를 총애한 덕종 광서제 등으로 인해 현대 중국인들에겐 청대의 황제들은 사랑꾼이 많다는 이미지가 있다. < 보보경심>에선 "아이신기오로 남자들은 사랑에 정열적"이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홍타이지의 또 다른 아내인 붐부타이는 하르졸의 친동생인데, 붐부타이는 홍타이지 생전 언니에 밀려 많은 총애를 받지 못했지만 그 아들이 순치제로 등극하여 황태후가 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붐부타이는 섭정왕인 시동생 도르곤과 연인 관계였다고 한다. 이러한 흥미로운 스토리 때문에 홍타이지, 하르졸, 붐부타이, 도르곤 4명의 사각 관계를 다룬 작품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효장비사>, <산하련>, <대옥아전기>, <독보천하> 등에서 홍타이지와 그의 여인들의 러브 스토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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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어이 나의 적이 되어 거듭 거스르고 어긋나 환란(患亂)을 자초하니, 너의 아둔함조차도 나의 부덕일진대, 나는 그것을 괴로워하며 여러 강을 건너 멀리 내려와 너에게 왔다. 너는 살기를 원하느냐? 성문을 열고 조심스레 걸어서 내 앞으로 나오라. 내가 다 듣고 너의 뜻을 펴게 해 주겠다. 너는 나와서 두려워 말고 말하라. 너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너는 싸우기를 원하느냐? 하늘에 보름달이 차는 날. 내가 너의 돌담을 타 넘어 들어가 하늘이 내리는 승부를 알려주마.
파일:칼부림_홍타이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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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淸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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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권 「아합출등전(阿哈出等傳)」
아합출 , 석가노 맹가불화 이만주 완자독 맹가첩목아 범찰 동산 탈라 탈원보 불화투, · 왕고 , 왕올당,
223권 「만등전(萬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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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권 「장황언등전(張煌言等傳)」 225권 「액역도등전(額亦都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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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권 「장혁덕등전(蔣赫德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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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권 「오문용전(吳文鎔等傳)」 397권 「육건영등전(陸建瀛等傳)」
오문용 · 반탁 · 등이항 육건영 · 양정문 · 청린 · 숭륜 · 하계청
399권 「여현기등전(呂賢基等傳)」
여현기 · 추명학 · 대희 · 장비 · 황종 · 도정걸 · 풍배원 · 손명은 · 심병원 · 장석경
400권 「하계진등전(何桂珍等傳)」 401권 「상영등전(向榮等傳)」
하계진 · 서풍옥 · 온소원 · 김광저 · 이맹군 · 조경현 상영 · 화춘 · 장국량
402권 「오란태등전(烏蘭泰等傳)」
오란태 · 등소량 · 주천수 · 요문선 · 문서 · 팽사거 · 장옥량 · 노점오 · 유계삼 · 서쌍래 · 구등룡 · 왕국재 · 호곤원 · 대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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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보 · 탁명아 · 진금수 · 덕흥아 승격림심 · 서통액 · 항령 · 소극금 · 하건오 · 전순 · 사영춘 · 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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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권 「황익승등전(黃翼升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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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권 「원갑삼등전(袁甲三等傳)」 419권 「낙병장등전(左宗棠傳)」 420권 「한초등전(韓超等傳)」
원갑삼 · 모창희 유장우 · 유악소 · 잠육영 한초 · 전흥서 · 증벽광 · 석보전
421권 「심조림등전(沈兆霖等傳)」
심조림 · 조육영 · 허내보 · 조광 · 주준 · 이함 · 장상하 · 나돈연 · 정돈근 · 방종로
422권 「왕무음등전(王茂廕等傳)」
왕무음 · 송진 · 원희조 · 문서 · 육록 · 서계여 · 왕발규 · 염조윤 · 뇌이함 · 도양 · 오존의 · 은조용
423권 「종직진등전(宗稷辰等傳)」 424권 「오진역등전(吳振棫等傳)」
종직진 · 윤경운 · 왕증 · 목집향아 · 유백천 오진역 · 장량기 · 모홍빈 · 장개숭
425권 「이혜등전(李僡等傳)」 426권 「왕경운등전(王慶雲等傳)」
이혜 · 오당 · 영한 · 유용 · 교송년 · 전정명 · 오원병 왕경운 · 담정양 · 마신이 · 이종희 · 서종간 · 왕개태 · 곽백음
451권 「이조의등전(李朝儀等傳)」
이조의 · 단기 · 정수창 · 증기봉 · 저유립 · 서철산 · 계중행 · 유함방 · 진횡거 · 유지개 · 이용청 · 이금용 · 김복증 , 웅기영 사복가, · 동조용
452권 「홍여규등전(洪汝奎等傳)」
홍여규 · 양종렴 · 사박 · 사극관 · 심보정 · 주기앙 , 주기조, · 종원한 · 서경장 · 서진 · 괴광전 · 진휼성 · 반민표 · 엄작림 · 당석진 · 누춘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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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욱 · 당형 · 하경 · 장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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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권 「좌보귀등전(左寶貴等傳)」 461권 「송경등전(宋慶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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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휘에 관해 논란이 있다. 아래의 이름 문단 참조. [2]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장신에 속한다. [3] 명, 청은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을 쓰는 일세일원제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연호를 말해도 그 연호를 사용한 황제를 지칭할 수 있는 것인데, 청 태종은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바꿀 때 연호도 같이 바꿔 그의 치세에 사용한 연호가 두 개다(천총, 숭덕). 그래서 연호보다는 묘호로 부르는 것. [4] "홍타이지"라는 이름은 몽골의 관직인 "ᠬᠤᠩ ᠲᠠᠶᠢᠵᠢ"(khong tayiji)에서 유래했다. 이 몽골 관직은 원래 중국어 "皇太子"(huáng tàizǐ, 황태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5] 창업군주나 창업군주급의 업적을 쌓은 군주의 경우, 묘호보다 이름으로 자주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한나라의 유방부터 해서 삼국시대의 유비, 조비, 손권, 당나라의 이연, 이세민, 송나라의 조광윤, 명나라의 주원장 등이 그 예시이다. 국내의 경우도 고려의 왕건, 발해의 대조영, 조선의 이성계 이방원이 있다. [6] 유폐 이후 사망했다. 그런데 추연이 누르하치에게 숙청당한 것은 맞지만 예허부 공주와 관련되어 숙청당한 것은 아니다. [7] 하지만 아예 무시당한 것은 아니고 추연의 장남 아이신기오로 두두(dudu)는 병자호란에서도 활약했으며, 최강자는 아니어도 어쨌든 권력자로서 건재했다. 니칸 역시 섭정왕 도르곤과 친하게 지내며 친왕까지 올라 잘 먹고 잘 사는 등 그 아들 일곱 중 다섯에게는 모두 작위가 있었다. 다만 추연의 공에 비하여 박한 대우를 받은 것은 맞다. 참고로 이 추연의 장손 두르후(杜爾祜)로 이어지는 종갓집 이야기가 왜 100년 후의 황제인 세종 옹정제의 평전에 나오냐면, 옹정제의 황8자당 숙청 작업에서 이 집안 황족들의 천주교 입교(!)가 폭로되면서 일가의 수많은 이들이 유형 생활 끝에 순교하다가 멸문지화를 겨우 모면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8] 홍타이지가 유목민들의 문화인 말자 상속제를 적용받아 즉위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낭설이다. 그런 논리라면, 누르하치 붕어시에 10대였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나 아이신기오로 도도, 아니면 16남인 "말자" 아이신기오로 피양구가 물려받는 게 맞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8남으로 전혀, 말자가 아니었다. 나무위키를 비롯해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말자 상속제를 절대적 원칙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자 상속은 장자 상속과 마찬가지로 유목민들에게는 선택지이지, 법이 아니었다. 왕조의 아골타 - 오걸매 계승, 몽골 제국 몽케 칸 - 쿠빌라이 칸 계승, 여러 돌궐 카간들의 사례처럼 형제 상속도 많았고, 왕조의 야율아보기 몽골 제국 구유크 칸처럼 장자가 이어받는 경우 또한 많았다. 실질적으로 정복 왕조에서 말자가 상속한 사례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다. [9] 기존의 이민족계 정복왕조인 원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원 혜종이 황태제 시절에 고려 대청도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쪽은 숭덕제와는 반대로 한민족의 입장에서 굴욕인 게 아니라 원 혜종 본인의 입장에서 굴욕이었던 케이스다. [10] 초기의 청나라는 유목민족의 부족제 전통이 남아있어 중앙집권이 되어 있지 않아 황제의 힘이 약했다. [11] 만주어로는 주션(Jušen)이라고 불린다. [12]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中國史硏究》 54, p. 167~172;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3] 蔡弘秉(2019), <丁卯盟約(1627) 以後 朝鮮의 對後金 關係 추이와 파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57;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269~303. [14] 송미령(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中國史硏究》 54;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5] 홍타이지도 종종 명나라 황제보다 자신을 하위에 두는 등 대외적으로는 상위로서 명나라 황제를 인정하기도 했다. [16] 장정수(2020),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 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7]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2020),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東洋史學硏究》 150. [18] 김경록(2008), <조선의 對淸關係 認識과 外交體系>, 《이화사학연구》 37, p.155. [19]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환 [20] 《청태종실록》 천총 5년 11월 2일 1번째기사 [21] 뇌출혈로 사망했다. [22] 티무르 제국, 아이유브 왕조가 대표적이다. [23] 전통적인 병자호란에 대한 관념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부 인조옹호론자들이 병자호란을 홍타이지가 벌인 실책이라는 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의 방어전략을 간파하고 조선의 허를 찔러서 병자호란에서 완승했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군이 보여준 여러 기만전술 및 속도전, 그리고 조선측이 예상하지 못했던 강화도 공략을 보면, 청군은 이런 이런 수정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운빨에 기댄 것이 아니라 보다는 오히려 조선측이 어떻게 나올지 철저히 연구하고 나서 침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4] 물론 이는 숭정제의 의심병으로 인한 것이 컸다. [25]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제외한 다른 주변국들을 건드리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26] 몽골제국의 전신 국가로 나중에 금나라를 멸망시켰기에 금나라 입장에서는 이들을 제압하지 못한게 재앙으로 다가온 셈이다. [27] 누르하치는 물론 대단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이는 전적으로 누르하치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한 것이었으며, 후계자가 누르하치같은 카리스마를 보이지 못하면 후금도 후계자 잘못 골라 망한 여러 왕조의 뒤를 밟을 수도 있었다. [28] 이는 만선사관의 일환으로, 일본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만주 역시 일본에 역사적으로 속한다는 주장을 대외적으로 어필하고 싶었고, 이를 만주와 한국사의 역사적 연결고리들을 통해 '조선인이 일본인이 된 만큼, 조선과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던 만주 역시 일본제국의 일부' 라는 주장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선사관에 의해 숭덕제가 미화된 영향으로 숭덕제가 주연급 인물로 나오는 중화권 사극이 한국에서 아무 문제 없이 방영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연급 인물로 나오는 일본 사극이 한국에서 일체 방영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9] 숭덕제를 옹호하는 한국인들의 경우, 그런 태도를 자국 정치용에 불과했다며 옹호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건 당시 조선인들의 입장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숭덕제 입장만을 생각하는 잘못된 옹호이다. 숭덕제의 반조선 성향이 진심이든 아니든 간에 일단 표면상으로나마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30] 물론 《국당배어》 등의 경우처럼 관점에 따라 간접적인 숭덕제 미화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야사는 존재하지만, 그런 야사들조차 숭덕제가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든지 조선을 다시 세워줬다는 등 삼전도비와 같은 수준으로 숭덕제를 엄청나게 미화하는 내용은 아니다. 병자호란의 책임을 숭덕제의 신하들에게 돌리는 내용의 야사는 많아도 삼전도비마냥 병자호란 자체를 대놓고 정당화하는 야사는 사실상 없는 셈이다. [31] 비슷한 이유로 아즈텍 제국 준가르 또한 피지배민족 및 주변국에 매우 가혹한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처참하게 멸망한 것 때문에 한때 동정과 미화의 대상이 된 바 있다. 더군다나 피지배민족 및 주변국에 대한 악행의 정도로만 따지면 아즈텍 제국과 준가르 쪽이 훨씬 심하다. 아즈텍 제국은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에 비해 인신공양의 스케일이 엄청나게 컸으며, 준가르는 청나라와 달리 피지배민족 및 주변국에 대해 철저히 강압책만 썼기 때문이다. [32]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화인민공화국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동북 3성, 내몽골 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자치구를 계속 지배할 명분 및 양안통일을 목표로 삼을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33]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한국역사에 대한 침탈을 시도하자 이에 대항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여진족/만주족에 대한 동족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이며, 중국역사를 이민족들에게 지배나 당하는 하찮은 역사로 깎아내리는 의도도 있었다. 이른바 맞불작전으로 나간 것이었다. [34] 광해군 미화는 2003년 10월에 SBS에서 왕의 여자라는 사극으로 미화한 게 최초였는데, 이때 대통령을 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니라 노무현이었다. [35] 고조선, 고구려, 발해 [36] 한족들의 입장으로 치면 숭덕제 본인의 손자인 강희제와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다. [37] 정확하게는 서장자로 황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이유는 생모가 홍타이지가 稱帝하기 전에 이미 폐출되었고 기존에 계비 우라나라씨가 누르하치에게 무례를 저질러 폐출된 걸로 알려졌으나 치이거의 누이를 폐출했다는 만주기록 원문이 나와 우라나라가 아니라 원비 니오후루씨가 쫒겨났다는 게 확인되었다. 우라나라씨는 대복진으로 호오거는 생전에 엄연히 적장자였고 풀린 또한 정실로 취급 받는 몽골 출신의 5복진<중궁국군복진(中宮國君福晋)/동관저궁복진(東關雎宮福晋)/서인지궁복진(西麟趾宮福晉)/동연경궁복진(東衍慶宮福晋)/서영복궁복진(西永福宮福晉)> 의 소생이라 적자였다[44]. 그러나 홍타이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후계 다툼이 발생하였고, 이에 도르곤과 도도 형제가 여러 기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즉위할 상황에 이르게 되자, 홍타이지의 측근세력인 양황기와 정황기들은 홍타이지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를 뽑아야 한다고 하면서 적장자이자 이미 장성하여 도르곤 형제와 나이가 비슷한 호오거를 옹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분쟁이 내전이 될 가능성이 생기게되자 가장 연장자인 다이샨의 중재와 도르곤의 양보로 몽골 출신 5복진의 소생 중 장자인 푸린이 즉위하게 되었다. [38] 정실 황후 [39] 만주어 : ᠵᡝᡵᠵᡝᡵ [40] 푸진, 즉 후궁 [41] 만주어 비취(ᡥᠠᡵᠵᠣᠯ) [42] 만주어 : ᠪᡠᠮᠪᡠᡨᠠᡳ [43] 물론 실제로는 반대로 용골대가 숭덕제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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