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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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의 변 土木之 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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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C420,#000080><colcolor=#800000,#D0FC5C> ■ 15세기경 오이라트의 판도 / ■ 16세기경 몽골의 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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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전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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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49년 (영종 14년) | |
원인 | 명나라와 오이라트 간의 무역분쟁 | |
교전국 |
오이라트 연맹 (수세) 승
|
<rowcolor=black> 명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타이순 칸 에센 타이시 |
지휘관 영종 (명 황제) ◎ 왕진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오이라트 연맹의 승리 - 명 황제가 포로가 되는 참극 발생 |
|
영향 | 대종 (경태제)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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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목의 변은 명나라 초중기인 1449년, 몽골 계통의 오이라트와의 전투 도중 정통제가 포로로 사로잡힌 사건으로,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 또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통의 변(正統之變)'이라고도 부른다.영가의 난, 정강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사[1] 3대 치욕로 꼽히기도 한다. 이때 명나라가 입은 피해는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대통령과 국방장관, 합참의장 이하 군 수뇌부 전원 사망 또는 실종에 최정예 부대인 7기동군단이 통째로 지워진 것과 비슷하다. 중국 역사의 비극 토목의 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앞의 두 시기와는 달리 한족 왕조가 천하의 절반을 넘기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황제가 친정에 나섰다가 사로잡히는 일은 물론 대참사이지만 당시는 명나라의 힘이 건재하던 시기여서 조정의 수뇌부가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차선책을 찾아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
2. 원인
명나라와 몽골 계통 오이라트족 사이의 무역분쟁이 원인이었다. 1406년 영락제가 몽골 부족과의 조공무역을 승인한 이후, 명나라에서는 비단과 의류, 식량을 수출하고, 몽골 부족들은 말과 모피 등을 수출하는 마시(馬市)가 관례화되었다.[2]그런데 초기에는 기껏해야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교역에 불과했던 마시의 규모가 점점 커져 수천 명 단위가 되어버리고, 여기에 위구르 상인까지 가세하면서 무역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버렸다. 게다가 오이라트 쪽에서는 실제 말 숫자보다 명목상의 말 숫자를 늘리는 형식으로 말 값을 몇 배로 올려받았고[3], 한 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가세하여 밀무역이 벌어지는 등[4] 이래저래 영종 정통제 시절에는 명나라의 골칫거리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하였고, 환관 왕진이 나서서 조공무역 이외의 무역은 금지하고, 오이라트에도 실제 숫자에 해당되는 말 값만을 지불함으로써 말 값을 정상화했다.
3. 경과
3.1. 정통제의 친정
갑작스러운 무역 금지 조치에 분노한
명나라의 참장 오호(吳浩), 서녕후 송영(宋瑛), 무진백 주면(朱冕), 평향백 진회(陳懷), 부마도위 정원(井源), 도독 왕귀(王貴), 오극근(吳克勤) 등이 이끄는 명의 변경 수비대 4만 5천명은 기존에 수축된 방어시설을 거점으로 응전하나, 양화구에서 오이라트군에 참패하여 명군의 대부분은 궤멸되고[6] 장군들이 전사함으로써[7], 군사 요충지 대동(大同)이 황당하리만치 쉽게 함락되고 명나라의 방어선이 붕괴되어버렸다. 변경 지역의 국방이 공백이 된데다가 수도 베이징이 오이라트의 공세에 노출된 위험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놀란 왕진은 대책을 모의하며, 황제 정통제에게 친정(親征)[8]을 건의하였다. 지휘 경험도 없는 젊은 황제가 출진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전장이었으나 정통제 본인부터 황자 시절부터 무예에 관심을 보인 바 있었고, 친정을 통해 황실의 권위를 바로세우기 위해 중신들의 반대에도 친정을 강행하게 된다. 병부상서 광야(鄺埜)와 호부상서 왕좌(王佐)가 최후까지 친정을 반대했으나 왕진에게 모함을 당해 처벌을 당해야했고, 정통제는 친히 50만 대군을 이끌고 오이라트족을 벌하기 위해 베이징을 나섰다.
정통제의 군대는 수도 베이징을 수비하는 최정예 경군을 주축으로 하는 전투력이 높은 부대였고 이들을 지휘할 능력있는 장수들도 포함되어 있어[9]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통제는 군 지휘를 총애하던 환관 왕진에게 맡겼고,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문신과 귀족들이 다수 동행하여 정예 군대라고 해도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군대를 지휘해 본 경험과 능력이 없던 정통제와 왕진이 지휘권을 휘두르다보니[10] 전장으로 행군하는 것부터 비효율적으로 늘어지며 병사들의 피로만 누적되었다. 정통제의 피로가 심하여 토목보에 일단 머물러야 했고, 추격해 온 에센의 오이라트군이 근처에 있었지만, 50만 대군을 쉽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숫자만 뻥튀기한' 것조차도 서류상으로만 뻥튀기했다는 해석까지 있다. 한 예로 같은 시기 조선왕조실록(세종 31년 8월 18일자)에는 황제가 이끈 군대가 8만이라는 기록이 있다. # 명나라의 직접 기록이 아니라 간접적인 정보를 획득한 실록의 특성상 부정확할 확률은 있다. 실록에서도 '이 사실은 전해 들었을 뿐, 문서로 전달되어 상고할 만한 것은 없다.'고 적었지만, 그럼에도 '50만'과 '8만'은 차이가 너무 크다.
3.2. 토목보의 참변
결국 정통제의 군대는 전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앞서 왕진이 무리하게 출격시킨 주면의 호위부대가 에센군에 처참하게 박살나버렸고, 참담한 현장을 목격한 왕진이 겁을 먹고 황제에게 철수를 건의한다.
차라리 베이징으로 돌아갔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겠으나 철수 경로에 자신의 고향지역이 포함된 것을 안 왕진이 자기 고향에 피해가 된다며[11] 먼 길을 돌아가게 하는 멍청한 짓을 벌였고, 철수가 늦어지는 와중에 에센군이 보낸 추격대에 몰려 정통제의 군대는 인근 토목보로[12] 숨어들게 된다.
문제는 토목보가 원래 거용관(居庸關)의 전선에 설치된 소규모 작은 성, 곧 보(堡)에 불과하였으며, 많은 병사와 전마들이 마실만한 수원(水源)과 대군을 보호할 만한 방어 시설이 부족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마실 물도 없는 곳에 고립된 명나라군은 점차 피폐해지다가 에센군의 기습 공격에 전면 붕괴, 왕진은 사망하고[13] 수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사했으며 황제 정통제는 에센의 포로가 되는 참극이 벌어진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히고 장보를 비롯한 조정의 상당수 공경대신과 장군들이 전사했으며, 수도를 지키는 정예군인 경군이 그 장비와 함께 전멸하는 바람에, 명나라는 수도 베이징성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대혼란에 빠졌다.
4. 결과
4.1. 경태제 옹립과 베이징공성전
명나라 조정은 남경에 남아있던 제2조정의 신하들이 주축이 되어 남경으로 천도할까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병부시랑 우겸[14]이 정면에 나서서 남쪽으로 도망간 송나라의 예를 들어가면서까지 강력히 반발한 까닭에 간신히 진정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본국에 황제가 없으면 안 되니까 정통제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하고, 국가 위기 상황에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태자는 있어야 하므로 정통제의 장남 주견심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15] 이후 베이징 방어의 총책을 짊어진 우겸은 거의 총력을 다해 남경의 무기와 병력을 이동시키는 등 방어전력을 모으고 전쟁에 대비하였다.[16]명나라가 그럴 동안에 에센은 우선 정통제를 앞세우고 명나라 변방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요새들을 무혈점령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베이징처럼 요새화된 도시를 공략하는 건 상당히 다른 차원이라서, 여러 요새에 공격을 시도해봤지만 격퇴당하고, 남쪽에서 근왕병들이 속속 증원되어 올라오자 베이징 공략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사로잡은 정통제를 이용해 협상하려 했는데, 이때는 이미 명나라는 경태제를 세우고 정통제를 버린 상태라 별 성과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센은 격노하여 군대 10만으로[17] 베이징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터라 22만명의 병력을 소집해 베이징에 모아 놨고, 장비들도 남경과 기타 지역, 심지어는 토목보 주변에 버려진 것까지 싹 회수해서 배치해 우주방어를 준비한 상태였다. 게다가 단순한 수성전이 아니라, 베이징 주변에 있는 옛 성의 성벽 등을 이용해서 주변에 진지도 다수 깔아 놓은 상태. 한마디로 토목에서 당했던 것과 차원이 다른 상태였다.
당시 명군 병사들이 화기를 휴대만 했지 사용법을 몰랐기 때문에 미사용 상태로 화기를 버렸다고 한다.[18] 에센의 몽골군도 역시 화기 사용법을 몰라 그대로 화기가 방치되었다.
몽골군이 화기를 활용하지 못했음은, 이들이 미개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근대 화학 무기는 원리 면에선 단순하지만 단순 격발에도 숙련도가 필요하다. 현대 화기는 미숙련 사용자를 위해 가능한 단순한 조작계를 추구하며 복잡한 화기는 간소한 매뉴얼이라도 끼워넣지만, 그런 화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굉장히 수준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기에[19] 전근대 수준의 기술력으로는 최소한의 화력을 보장하면서도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는 화기를 만드는게 불가능에 가까웠고, 훈련을 통해 화기 조작법을 숙달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가령 명나라 화포를 조작하던 병사가 포르투갈 화포를 쓰기는 어려우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명나라 병사도 조작하기 어려워하는 무기를 몽골군이 조작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사실 몽골은 원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인 몽골제국 시절 이미 금나라를 통해 화약무기를 접했고, 이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용했다. 이는 남송을 멸망시킬 때나 일본 원정을 갔을 때의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화약이나 기타 소모품이 부족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베이징 공방전에서는 그때의 교훈을 살려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숙지시켰기 때문에, 명군이 화력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창의문과 덕승문을 중심으로 벌어진 교전에서 명나라 포병의 공격과 수비군의 저항으로 1만의 사상자를 내면서[20] 베이징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베이징을 구원하기 위한 명나라의 지원군 22만이 오고 있었기에 난감해진 에센은 베이징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해 돌아간다. 그렇게 5일 동안 싸우고 돌아온 후, 오이라트 측은 정통제를 내세워 송환 문제를 포함한 협상을 진행시켰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명나라는 이미 정통제를 버렸기 때문에 정통제의 송환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에 에센 칸은 정통제를 더이상 데리고 있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1450년 정통제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에센 칸은 정통제가 명나라로 돌아가서 반란이라도 일으켜주기를 바랬다.
4.2. 탈문의 변
경태제는 정통제가 귀환할 경우 황제 자리를 내놔야 되나 싶어서 매우 걱정했다. 신하들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설득해서 정통제를 받아들였고 정통제는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경태제의 불안은 타당했다. 명나라의 종친왕들은 의전상 신분만 높고, 연금을 주는 등 예우만 해줄 뿐이지, 실권은 박탈된 채 살았다. 경태제 자신은 예전에 그렇게 살다가 정통제가 사로잡힌 후, 정통제의 생모 성모태황태후[21]가 나서서 그를 옹립한 상황이었다. 제왕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으며 민심 안정을 위해 정통제의 맏아들 주견심을 황태자로 그대로 놔뒀다. 즉위 과정도 비상상황의 임시조치였기에 권력 기반은 매우 약했다. 그러니 형인 정통제가 복위하면 허락도 없이 즉위한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경태제는 권력 기반이 어느 정도 다져진 후, 형인 정통제의 아들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경태제의 태자 주견제가 병사한다. 그런데 경태제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후계자 지명을 거부해서,[22]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다가, 몇 년 뒤 경태제 본인도 병에 걸려서 위독해졌다. 이에 정통제는 자기를 따르는 군사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퇴위, 감금하고 황제에 복위하였다. 이걸 탈문의 변(奪門之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연호를 천순으로 바꿔 천순제라고 불리었다.[23][24]
이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석형과 서유정, 그리고 조길상이다. 서유정은 토목의 변 당시 남경으로 천도를 주장했다가 우겸의 꾸중을 들은 이력이 있었다. 또 조길상은 환관이었으며 석형은 장군이었다.
천순제로 복위한 이후 베이징을 방어했던 우겸을 사형시키는 등 실책이 없진 않았다. 어쨌든 예전에 고생한 때문인지, 미숙하고 줏대가 없었던 집권 초기인 정통제 시절보다는 그나마 괜찮게 정치를 한다. 포로로 잡혔던 기억 때문인지 명나라에 전해지던 몽골 악습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후궁과 궁녀의 순장(殉葬)을 당대에서 끊어버렸다고 한다.
우겸의 사형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맥락과 이유가 있었다.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여지가 컸다. 군권을 가지고 승전으로 인기가 높은 자는 딴 생각을 품기 쉬운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러 사례가 있었기에 중국 역대 왕조는 이들을 극히 경계했다.
쿠데타로 즉위한 자는 권력 유지를 위한 숙청이 필수다. 경태제 옹립 1등 공신인 우겸을 그냥 놔두기는 어려웠으리라. 이를 놔두면 권력 유지가 어렵고 분란의 씨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겸은 제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베이징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능력을 감안할 필요가 있었다.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실책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청렴결백한 신료였음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25]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측근들을 처형했다.
한편 천순제는 자신을 폐위시킨 동생 경태제를 '불효하고 오만불손하고 어질지 않고 정의롭지 않고 도덕을 더럽히고 추문을 드러냈다'며 폄훼했다. 따라서 신과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분개했다며 7년 동안 유폐를 당한 원한을 거의 저주에 가까운 악평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경태제가 사후에 황릉의 장지로 생전에 천수산에 만들어 놓은 수릉을 없애버리고 그를 서산에 안장하게 했다. 그리고 천순제는 그를 폐위시킨 뒤 성려왕이라는 다른 시호를 내렸다. 패륜을 저지르고 사나우며 욕심이 많은 성왕이라는 뜻으로 얼마나 악감정이 심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4.3. 오이라트족의 향방
토목의 변 이후로 몽골 내부에서 오이라트족을 이끌던 에센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으며 대부분의 몽골 부족들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그러다 결국 1453년 몽골의 타이슨 카간이 에센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하자, 에센은 스스로 카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에는 황금 씨족(칭키스 칸의 성인 보르지긴 가문, 칭기즈 칸의 후손)만이 카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에 황금 씨족 출신이 아닌 에센이 카간이 되자 많은 부족들이 반발하였다. 게다가 에센은 카간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부족들을 탄압하여 전 몽골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1455년 에센이 카간의 자리에 오른 지 단 2년 만에 초원 부족들간의 내분으로 에센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에센 사후 오이라트의 세력은 약화되어 몽골 서부로 쫓겨났다.[26]4.4. 당시 조선의 반응
당시 조선은 세종 재위 31년, 실질적으로는 문종이 대리청정을 행하던 시기였는데, 정통제는 친정(親征)을 하기 전 조선에도 원정을 지원할 병사를 보내달라는 요구를 한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으론, 명나라에서 '우리가 오랑캐들 정벌하러 갈건데, 조선도 평안도에 10만 대군을 배치하고 부를 때 와서 호응해달라.'고 요구했고, 여기에 한술 더 떠 '조선에 말이 많이 난다고 들었다. 3만 마리쯤 준비해달라. 더 보내도 된다. 돈은 내주겠다.'며 민폐성 요구도 해왔다고 한다. 조선 전성기 때 보유할 수 있었던 말의 최대 물량이 2만~4만 마리였음을 감안하면 명은 조선에게 꽤나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 특히 토목의 변을 당한 후에는 더욱 도움을 요청한다.이런 무리한 요구에 세종은 고민하다가 신하들이 성의 표시로 5천 필만 보내자고 건의하자, 그래도 1만 필은 채워 보내자고 하는 정도로 타협을 봤다고 한다. 그외에도 세종은 만일의 사태를 경계하여 여진 토벌과 몽골 침입의 대비 차원에서
정통제가 오이라트족에 잡힌 후, 명나라에서 이 소식을 알리고 경태제 주기옥의 등극을 알리는 칙사가 왔다. 그런데 하필 이 때 세자 문종은 평소 앓던 종기가 악화되어 세종보다 더 심각한 몸 상태였다. 그러자 접대를 할 만큼 능력 있는 종친이 없어 혼란이 발생했다. 세종은 노환으로 아프고, 세자 문종도 종기 때문에 위급하고, 세손 단종은 이제 겨우 9살이라 이런 엄청난 문제를 맡기기는 곤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차남 수양대군더러 접대하라고 하는 것도 외교적 결례이기 때문에, 접대 방식을 놓고 조선 조정은 매우 곤란해했다. 이에 세상물정에 어두운 젊은 유학자 출신 신하들이 "왕이 아프면 세자가 대신, 세자가 아프면 세손이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하자, 가뜩이나 건강이 안 좋아서 신경이 날카로웠던 세종이 격분해서 "아오, 이 더벅머리 선비들!"이라고 일갈을 했다. 어린 세손이 실수해서 이를 빌미로 더 큰 지원을 강요할까봐 염려한 건 둘째 문제고, 조그만 세손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데다가 가뜩이나 약간 역모성이 있는 황제 즉위라 외교적으로 분쟁 여지가 높은 사신인데 이런 소리를 하니 신경질이 날 수밖에.[27] 결국 사신 접대는 수양대군이 하고, 황제의 칙서는 병상에 누워 있던 문종이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나서서 겨우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나라 사신들은 "왕이 아픈 건 예전에 들어서 알았는데, 세자는 젊은데 아프다고 코빼기도 안 비치니 우리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 "수양대군은 세자랑 동모(同母) 형제인 건 맞긴 한가?"라 했고, 조선에선 세자가 매우 아프다는 게 정말이며 사신 홀대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한편으로 수양대군은 이 경험 덕에 이후 단종 즉위년에 왕실의 어른이 없어진 상황에 중요 행사에서 얼굴마담으로 나서고 단종의 책봉 이후 사은사로 베이징에도 갔다오며 명나라에도 존재감을 각인시킨다.[28] 그렇게 대외적인 정치질에도 힘쓴 덕에 단종에게 양위받은 후 조카를 내쫓고 황제에 오른[29] 경태제로부터 책봉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5. 매체
홍콩 신파무협의 대가 양우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평종협영록이 토목의 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양우생의 스타일대로 역사적 사실이 세세한 부분까지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어 읽어볼 만하다. 주인공 장단풍이 등장하는 첫 시리즈.조선 세종대를 다루는 대체역사물에선 조선과 명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바뀌는 사건으로 삼는다. 아무래도 명이 심각한 공격을 당하는 시점인데 조선은 공격을 당하지 않고, 유목민족의 세가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면서 단순하겐 입지의 변화에서 크겐 새로운 유목왕조의 탄생이나 명의 몰락, 사대외교에서 벗어난 조선 등 다양한 사건으로 발전하면서 원래의 역사와 틀어지게 만들기 좋은 구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선 주인공의 등장으로 조선이 발전하면서 화약 사용법이나 카우치드 랜스 전술이 오이라트군에게 전수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더욱더 오이라트군이 강력해진 것. 이를 기반으로 토목의 변이 일어났을때도 역사 변동이 있어 원 역사에서 죽었어야 할 왕진이 정통제가 친히 몸으로 막아 주어 살아남는데 성공했고 결정적으로 화약 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오이라트 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당하고 경태제와 우겸은 남경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비록 곧바로 밀려온 조선군과 성 내부에 있던 한명회의 호응으로 오랜 점거를 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오이라트는 더 큰 혜택을 받았는데 일단 청해호 일대의 영지를 얻어 거기서 생산한 소금과 전리품을 기반으로 유목민들의 추앙을 받는데도 성공한데다 결정적으로 에센이 칸을 자처하지 않고 타이순 칸을 내세워 그 뒤에서 실권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나가면서 상당히 영향력을 확보했고 그 결과 오이라트는 대규모 서방원정까지 진행할 힘을 얻어 오스만과도 대등한 싸움을 할 정도로 성장한다.
근육조선에선 명나라가 공물로 받은 보총을 대량생산해서 배치했는데, 몽골도 이를 눈치채고 대나무 폭발소리에 말들이 익숙해지게 훈련하고 명나라의 보총은 비리로 예산이 빼돌려저 불량품이거나 훈련도 제대로 안된 병사들이 많아 원역사보다 빠르게 일어나 더 처참하게 당한다.[30] 한편 몽골은 양동작전으로 타이순 칸이 조선을 공격하지만 주인공 수양대군이 격퇴하고 불평등 밀약까지 맺게 된다.
[1]
중국은 거란족도 만주족도 흉노도 현재는 중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한족만의 치욕이다.
[2]
사실 몽골 뿐만 아니라 다른 유목민들도 중국과 교역할 때 이렇게 했다.
[3]
당연히 좋은 말 안주고 나쁜 말을 많이 주어서 말 값을 비싸게 받았다. 이렇게 말을 강매하면서, 값을 높게 받고, 질이 떨어지는 말만 넘기는 수법은
위구르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내려온 유목민의 중화제국 삥뜯기 방법이다.
[4]
사실 한족과 북방 유목민 간의 밀무역은 이전부터 성행하고 있었다.
[5]
이때 에센은 스스로 대칸(大元天盛 大可汗, 대원천성 대가한, 이흐 온 울루스 텡게를크 보크드 칸)이 되기 전이었다.
[6]
에센이 교활한 탓도 있었으나 황실에서 감독을 위해 파견한 태감 곽경이 장수들의 전략을 무시하고, 무모한 공격을 채근한 것이 원인이었다.
[7]
오호는 선봉대를 이끌고 가서 싸우다가 묘아장에서 패하여 전사했고 선봉대의 전멸에 송영이 맞서싸웠으나 몽골군의 함정에 빠져 주면과 함께 전사했다.
[8]
임금이 몸소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정벌(征伐)함
[9]
고위급 장군들만 해도 20명이나 되었다.
[10]
정통제는 무예에 관심이 있긴 했으나 22세의 어린 나이였고, 전장을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병법에 통달하지도 못했다. 환관에 불과한 왕진이라고 다를 게 없었으니 군 지휘를 사실상 무능력자들이 맡아서 한 셈이다.
[11]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은 물자 충당을 이유로 필히 지역민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특히 정통제가 이끄는 대군은 숫자가 많은 데다가 경군을 제외하고서는 급히 모집하여 군기까지 떨어지던 상황이라 물자 충당만으로 지역에 초토화될 수 있고, 자칫 행패나 조직적인 약탈까지 벌어질 수 있다. 여기에 당시 중국은 성공해서 고향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큰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인맥도 있었다.
[12]
지금의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 화이라이 현 투무 진.
[13]
진중의 중신과 장수들이 황제의 신변을 우려하여 무슨 수를 동원해서든 황제만이라도 베이징으로 모시려고 했다. 실제로 이렇게 되었다면 최소한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만은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진은 정통제가 없으면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진다는 이유로 끝까지 방해했고 오히려 이 충신들을 마구 모함하여 벌을 내리게 하는 짓을 벌였다. 결국 안 그래도 만인의 미움을 사던 왕진은 증오를 받았고 에센군의 공격에 토목보가 무너지자, 분노한 명나라 장군 번충에 의해 죄상을 추궁당한 뒤 번충이 직접 내려친 철퇴에 맞아 죽었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왕진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려죽였는데도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고 전부 기뻐했으며 정통제도 어찌하지 못했다. 번충은 황제를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에센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다.
[14]
병부상서 광야는 이미 토목보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15]
이때 정통제에게 아들이 둘 있었고 주기옥에게는 아들이 1명 있었는데, 이 같은 정황으로 볼 때 국가 위기 상황에서 두 돌이 채 안된 정통제의 장남을 황제로 세우는 것은 위험이 크다고 여겨 당장은 직무 수행이 가능한 주기옥을 황제로 세우고 대신 정통성 확보와 정국 안정을 위해 정통제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아 이후의 황위는 정통제의 자손들이 잇도록 만드는 쪽으로 타협을 본 것으로 생각된다.
[16]
이 때 우겸은 도망을 주장하는 서유정에게 도망을 주장하는 자는 머리를 깨부수겠다는 극언까지 하며 결사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의 일로 서유정은 우겸에게 원한을 품어 훗날 우겸을 죽이는데 적극 나서게 된다.
[17]
몽골인 외에도 투르크인과 준가르인, 카자흐인 등 여러 유목 민족이 포함된 군대라서 당시 몽골로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동원한 셈이었다.
[18]
사실 이게 큰 문제였는데 병사들이 화기를 사용할줄 모르다보니 명군은 몽골군보다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도 정작 이 화약무기를 제대로 써먹지를 못하다가 당한것이다.
[19]
예를 들어 현대의 총기는
스프링의 힘으로 탄약을 밀어서 자동으로 다음 탄을 장전하는데, 스프링은 별 것 아닌것 같아보여도 만들기 위해선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코일 형태의 스프링이 처음 나온게 15세기 서양이었으니 토목의 변이 일어날 당시에는 스프링 자체만으로도 최첨단 기술이었고, 당연히 그런 스프링을 응용해 총기를 자동으로 장전시킨다는 발상은 상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
[20]
에센의 최측근 지휘관인 소로, 마오나하이가 전사하기도 했다.
[21]
경태제의 생모는 즉위 하면서 태황태후에 봉해졌다.
[22]
경태제에게는 주견제 이외의 다른 아들은 없었다. 정확히는 1남 2녀를 두었지만 그 가운데 딸 1명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물론 황제였을 때 나이가 젊었던 만큼, 더 오래 생존하여 계속 재위했다면 다른 아들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었을 텐데... 정작 그 자식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정통제 쪽이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연금 상태에서도 자식을 봤다고 한다.
[23]
사실 이 쿠데타라는 것도 실상은 쿠데타라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매우 어설펐다. 경태제가 병으로 드러눕게 되자, 정통제가 밤중을 틈타 유폐되어 있던 궁문을 부수고 자금성에 당당히 들어가려 했으나, 궁문 수비병들이 이를 막았고, 이에 정통제는 "짐이 태상황이니라!" 라고 외쳤는데, 그 한 마디에 수비병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고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24]
사실 어설펐다기보다는 그만큼 경태제의 지위가 불안정했다는 말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현재 대권을 쥐고 있는 쪽은 경태제였으므로 평소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한번 자리에 드러눕자마자 어설픈 쿠데타가 먹혔다는 것만 봐도 알 만하다.
[25]
우겸은 모함을 받았음에도 결말을 예상했던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억울할 것도, 사리분별을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님'을 간파했다고 한다. 어차피 정통제/천순제의 복위를 주도한 자들의 정치적 공작이었으니 말이다.
[26]
명나라는 이 내분으로 인해 한세기동안 천만다행히도 북방민족의 위협에서 어느정도 벗어날수있게되었다.
[27]
세종실록, 세종 32년 1월 18일 기사. 기사를 보면 칙사 문제에 더해 불사 문제로 간관들의 간쟁을 받은 세종이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드러나 있다. 실록에서는 왕이 쌍욕을 해도 '격하게 화를 내었다'던지 '차마 적지 못할 말을 하였다'는 식으로 돌려 적었다. 고로 전술한 세종의 일갈도 필터링을 거쳐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8]
안평대군 등의 다른 세력들이 형님 베이징 갔다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평양까지 마중을 나가는등 견제에 들어가는 기록도 묘사된다.
[29]
성화제는 당시 황태자 신분이었지만, 경태제가 제위에 오른 후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폐태자당하고 말았다.
[30]
원래 역사에서는 번충의 철퇴에 맞아 죽지만, 여기서는 얼굴에 은자가 던져지고 애지중지하던
석감에 구타당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