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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행정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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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 행정 제도
1.1. 초기 행정 제도의 구축 과정1.2. 중앙 행정 제도
1.2.1. 남면관제1.2.2. 북면관제1.2.3. 날발 제도
1.3. 관료 임용과 교육 제도1.4. 법 제도1.5. 군사 제도
2. 지방 행정
2.1. 정주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2.2. 유목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
2.2.1. 두하주 & 알로타 & 궁장2.2.2. 속국과 속부
2.2.2.1. 몽골인 통치
2.2.2.1.1. 오고 · 적렬부2.2.2.1.2. 조복
3. 세금 제도

1. 중앙 행정 제도

1.1. 초기 행정 제도의 구축 과정

원래 요는 부족 연맹에서 출발해서 행정 제도라 할 것이 없었지만, 영토를 넓히고 다른 문명과 접촉해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조금씩 제도를 갖춰 나갔다. 요의 행정 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국가는 돌궐과 위구르, 중국 왕조들이 있다. 거란 연맹은 자신들을 지배한 돌궐과 위구르 제국으로부터 칙령과 인장, 기초적인 통치 제도를 흡수하고 관직 제도도 받아들였다. 돌궐과 위구르의 관직 제도는 요의 북면관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연맹 후기에 조성한 유목도성과 아보기가 경영에 주력한 한성도 돌궐과 위구르 제국 시기에 존재한 유목도성을 모방한 것이다.

야율아보기의 백부로서 모략을 써서 수장의 자리를 탈취한 야율석로(耶律釋魯)는 연맹에서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거란을 통치한 인물이다. 석로는 법을 정비하고 초보적인 관제를 실시해 법질서를 세웠으며 상비군을 창설해서 연맹 수장의 권력을 강화했다. 야율석로의 뒤를 이은 야율아보기는 권력을 강화하고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려 하는 반대파를 숙청한 다음, 요를 건국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각 유목민 부족들을 재편성해 유력 부족들을 견제하고 유목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는 한편, 한인 유민과 연운 지역을 공격해 강제로 끌고 온 한인 포로, 투항자들을 곳곳에 이주시켜 주현제를 실시하고 이들로부터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웠다. 또한 관직과 관제를 정비하고 자신의 부족이면서 황권에 가장 강하게 저항하는 질랄부를 약화시켜 질랄부의 수장인 질랄이리근(迭剌夷離菫)을 북대왕(北大王)과 남대왕(南大王)으로 나누었다.

태조 아보기의 뒤를 이은 요 태종 야율덕광은 석경당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후당군을 섬멸하고 그 대가로 연운 16주와 30만 필의 세공을 받았다. 이 덕에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력을 더 키울 수는 있었지만, 연운 16주에 사는 엄청난 수의 한인들을 다스릴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애릍 먹어야 했다.

요가 석경당으로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곧바로 국력이 급성장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원래 연운 16주는 거란 기병들의 약탈에 자주 시달려 요에 대한 원한이 깊은 데다 석경당이 요 태종에게 갑작스럽게 땅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요군이 연운 16주를 인수하러 오자 그대로 민심이 폭발해 버렸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요의 통치를 거부하고 호족이나 군 사령관이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아 독립, 군벌화해서 요에 저항했다. 이런 저항에 시달리느라 요는 연운 16주를 인도받고도 상당 기간 동안 통치력 확보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지역 민심을 우호적으로 변화시켜야 16주의 풍부한 물자와 인력을 확보할 수 있기에 한인의 통치법을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이에 요는 한인과 발해인을 비롯한 정주민 지식인들을 관료로 등용하고 당과 오대의 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요 태종은 통치 기구와 관제를 정비하여 북면관제와 남면관제를 시행했으며 거란어로 된 관직을 한어로 개칭한 다음,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관직의 격을 높였다.

1.2. 중앙 행정 제도

요 왕조는 정주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발해와 연운 16주, 삼림 수렵민과 유목민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초원과 북만주 일대를 다스려야 해서 하나의 통치 방식만으로는 인민과 영토를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면관(南面官)과 북면관(北面官)이라는 이중 통치 기관을 세워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려 했다. 북면과 남면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관부가 각각 궁정의 남쪽과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남면관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해서 조직한 관제이며 주현 · 세금 · 군마 · 한인과 발해인에 대한 민정을 담당한다. 북면관은 독자적으로 창안한 관제로서 행궁 · 부족 · 속국 · 군사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다. 그래서 금대의 시인 원호문(元好問)은 요 왕조의 정치에 대해서 "북아(北衙. 북면관)에서는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남아(南衙. 남면관)에서는 병사를 주관하지 않는다." 는 평을 내렸다.

1.2.1. 남면관제

당제(唐制)를 모방하여 남면관에 3성 6부(三省 六部)를 구축하고 9시(寺)와 5감(監), 각종 국(局) · 대(臺) · 부(府) · 사(司) · 사(使) · 서(署) · 소(所) · 원(院) 등을 설치해서 정부와 궁정의 주요 업무를 처리했다.

남면관의 최고 권력 기관인 남추밀원(南樞密院)은 오대와 송의 제도인 추밀원을 모방해서 설립한 행정 기관으로서 남면관의 주요 부서들을 통제하고 국정을 운영했으며 재상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의논했다. 그리고 남추밀원에 속한 이방(吏房) · 호방(戶房) · 병방(兵房) · 형방(刑房) · 청방(廳房)의 5방은 6부에서 추밀원으로 보내오는 각종 공문을 처리하고 6부의 업무를 감독했다. 또한 남면관의 재상들은 항상 추밀원의 직책을 겸임해서 추밀원에서 국정을 운영할 때는 주요 부처의 재상들이 모여 사안을 의논했다.[1]

다음으로 요의 3성 6부제는 당 후기에 일어난 관제 변화를 반영해서 문하성(門下省)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중서성(中書省)의 업무와 상서성(尙書省)의 위상도 당 전기의 제도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원래 3성은 중서성이 조칙 작성과 법안, 정책 발의를 하고 문하성이 그것을 심의한 뒤, 상서성이 집행하고 주요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당 후기부터 황제권이 강화되어서 조칙과 정책에 대한 봉박권(封駁權)과 법안 심의권을 행사해 황제권을 견제하던 문하성이 무력화되고 중서성에 흡수된 것이다. 이러한 3성 6부제의 변화는 고려에도 영향을 주어서 고려는 당 전기의 3성 6부제를 수용한 발해와 달리, 문하성이 중서성에 흡수된 당 후기의 중서문하성 '2성 6부제'를 도입했다.

그래서 요의 중서성은 문하성의 업무도 함께 수행하고 송제를 받아들여 당 전기의 총리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 대신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와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두어 재상들의 행정권을 분할하고 권력 독점을 막았다. 평장사와 참지정사는 위계의 차이만 있을 뿐, 권한은 비슷하여 상호 견제가 잘 이루어졌다. 관리 감찰은 어사대(御史臺)가 맡고, 형벌 부과와 사법 업무는 대리사(大理寺)와 형부가 담당한다. 언론 활동은 당 · 송과 마찬가지로 좌 · 우 간원(諫院)에서 한다.

이렇듯, 남면관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든 중국식 제도이나, 중국이나 발해와는 다른 독자성도 있다. 원래 추밀원과 3성은 당 · 송에서는 서로 문무 분리의 독립적인 기관이지만, 요에서는 추밀원의 직능을 분할해 원래 추밀원의 기능인 군사권은 북추밀원에 부여하고 남추밀원에는 3성을 소속시켜 추밀원이 3성을 통제하게 했다. 그리고 중서성은 조칙 작성과 법안 발의 업무 외에도 6품 이하의 한인 관료들을 임명하고 예부의 업무도 겸했다. 당 말기 ~ 송 초의 중서성이 고급 관료의 인사를 맡았던 반면, 요에서는 중서성이 하급 관료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2]

원래 6부를 통제하고 행정을 총괄해야 할 상서성은 그 권한과 직능이 대부분 남추밀원에 넘어가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이 점은 요에 영향을 미친 발해와도 차이가 나는 점인데, 발해에서는 상서성에 해당하는 정당성에서 모든 정령을 집행하고 행정을 총괄했다. 그리고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이 총리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고 선조성과 중대성의 수장인 좌상과 우상은 대내상의 하급자로서 그를 보좌했다. 중서령(중대성)과 문하시중(선조성)이 상서령(정당성)을 보좌하는 체제란 점에서 발해의 3성 6부제는 상서성 중심으로 작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추밀원 중심의 정치 제도는 후대의 금, 원 왕조와도 차이가 있다. 금은 해릉왕대에 황권 강화를 위해 중서성과 문하성을 철폐하고 상서성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으며 원은 반대로 중서성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를 구축하고 추밀원도 중서에 속하게 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정복 왕조들의 행정 체제도 변화한 것이다.

1.2.2. 북면관제

고유 관제인 북면관은 최고 권력 기관인 북추밀원(北樞密院)과 북 · 남 이재상부(北 · 南 二宰相部)를 중심으로 한다. 연맹의 전통이 남아 있던 초기에는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는 귀족 회의를 주도하던 재상부가 권력의 핵심이었으나, 점점 황제권이 강화되면서 그 위상을 잃기 시작해 최종적으로는 황제가 주관하는 신료 회의에 의결권을 비롯한 핵심적인 권력을 넘겨 주었다.

그러나, 권력을 상실한 뒤에도 재상부는 유목 민족의 민 · 군정을 총괄하고 국경의 방비를 맡는 중앙 행정 기관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북부 재상부는 거란 오원부(五院部)와 오외부(乌隗部)를 비롯한 유목민 28부, 남부 재상부는 을실부(乙室部)와 저특부(楮特部), 해왕부(奚王部)가 포함된 16부를 관할한다.

다음으로 궁궐 의례를 맡은 북 · 남 선휘원(北 · 南 宣徽院), 연맹 시기부터 유목민에 대한 형벌과 사법을 담당한 이리필원(夷离畢院), 문서 작성과 관리를 맡은 대림아원(大林牙院), 행궁과 황족 관련 업무를 관리한 거란행궁도부서사(契丹行宮都部署院), 의례를 맡은 적렬마도사(敵烈麻都司), 황족의 정치 행위, 종교 행사를 관리한 대척은사(大惕隐司) 등이 있다. 요사에서는 북면관제를 중국의 6부제로 대입시킨다면, 북추밀이 병부, 북왕부와 남왕부가 호부, 이리필이 형부, 선휘원이 공부, 적렬마도가 예부에 해당하고 북부 재상과 남부 재상이 업무를 총괄한다고 평했다.

거란의 고유 관제이긴 하나, 북면관 역시 당제의 영향을 받아서 각 부의 관직은 중국 관직의 명칭을 모방하여 태사 · 태보, 사도 · 사공, 도감, 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하고 북 · 남 재상부에는 당의 상서성이 좌 · 우 복야(僕射)를 둔 것처럼 각각 좌 · 우 재상을 두었다. 이는 모두 태종대에 이뤄진 한화 정책의 결과이다. 후진을 정벌해 중국 전체의 군주가 되려는 포부를 품은 태종은 국명을 거란에서 요로 개칭하고 관직 체제와 관명을 모두 한제로 개정했다. 다만, 이러한 한화 정책 이후에도 상온(詳穩)이나 척은(惕隐)을 비롯해 일부 관직들은 거란어 명칭을 계속 유지했다.

그리고 한제를 채택한 남면관에 9시, 5감과 각종 부서를 설치해 잡무를 담당하게 한 것처럼 북면관도 국(局), 원(院), 방(坊), 군목 등을 설치해서 각종 업무를 맡겼다. 이 중에서 방은 경제와 관련한 부서인데, 매를 관리하는 응방과 철생산을 맡는 철방, 무기를 생산하는 군기방 외에는 각 부서의 직능을 알 수가 없다.

남면관에 최고위 관직이며 명예직인 삼공이 있는 것처럼 북면관에도 원로와 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우월부(大于越府)를 설치하고 공신이나 원로를 우월(于越)에 제수했다. 원래 우월은 연맹 시기에 칸 다음 가는 직책으로 아보기도 우월을 지낸 바 있는데,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상실하고 권위만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우월은 큰 공을 세운 자에게만 제수하고 정말 특별히 공이 높은 이는 그 격을 높여 대우월(大于越)로 봉했다. 요나라 218년 역사에서 대우월로 봉해진 자는 야율갈로(耶律曷魯) · 야율옥질(耶律屋質) · 야율인선(耶律仁先) 3명밖에 없어서 이들을 일컬어 3우월이라 부른다.

북면관은 거란인과 여러 유목민, 삼림 수렵민족을 통제하고 군권도 행사하기 때문에 초기에는 황족, 외척들에게만 재상 선출권과 피선출권을 부여하고 한인들은 북면관으로 임용하지 않았다. 북재상부에는 종친인 황족 4장(帳)의 인사들을, 남재상부는 외척인 국구(國舅) 5장의 인사들을 선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다 점점 국가가 발전하고 조정에서 한인과 발해인들이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이 높아지자, 요 왕조는 한인과 발해인들이 북면관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용하고 남 · 북 재상에도 비황족 거란인과 한인, 발해인들을 기용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고위 귀족과 황족들이 장악한 재상부와 북면관의 주요 직책에 믿을만한 측근과 한인, 발해인들을 임명해 거란인 왕공대신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의중도 작용했다.

다만, 최고 권력 기관이며 병부의 역할도 맡던 북추밀원의 주요 직책에는 한덕양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한인과 발해인을 기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군권만큼은 거란인이 쥐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한인과 발해인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대로 남추밀원에 거란인을 임명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다.

일종의 일국양제라고 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한 덕분에 요는 정주민과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후대의 정복 왕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2.3. 날발 제도

날발(捺鉢)은 일종의 순행 제도로서 요의 황제들은 상경이나 중경에 상시 거주하지 않고, 관료와 황족들과 함께 지역을 순행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동하기 때문에 사시날발(四時捺鉢)이라고도 부르며 날발이란 단어는 한어로 행궁(行宮), 또는 행재(行在)라고 한다. 날발은 유목민 특유의 이동 생활과 목축, 어렵 활동을 국가 운영에 적응시킨 것으로서 전쟁과 외교와 같은 정치적인 상황 변화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초기의 날발은 순행 장소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상경 일대와 여러 지역을 불규칙적으로 오갔다. 다만, 원의 황제들이 겨울에 추울 때는 대도로, 여름에 더울 때는 상도로 이동한 것처럼, 날발도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후, 연운 16주를 확보해 남부 지역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송과의 전쟁이 잦아지자, 점점 더 남쪽으로 순행하기 시작했다. 전연의 맹을 맺고 평화가 찾아온 뒤부터 사회는 안정되고 국가 제도가 완비되었다. 이에 따라 순행 장소도 점점 고정되기 시작해 성종 후기부터 천조제의 시대까지 규칙적으로 정해진 곳을 방문했다.

황제의 행궁이 순행하는 것은 엄청난 규모의 집단이 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행궁에 소속된 인민과 군인, 황제를 호위하는 군대, 일부 황족, 중앙 정부에 소속된 북면관원 전체, 남면관 소속의 재상 일부와 실무 관료들이 황제를 수행했다.

황제는 여름과 겨울 날발에 최고 의결 기구인 북 · 남 신료 회의(北 · 南 臣僚 會議)를 소집해서 각종 사안을 처리하고 중대사를 의논했으며 회의에 모인 신료들과 함께 국정을 살폈다. 그리고 현령 이상의 문관과 모든 무관의 인사 이동도 모두 날발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수도의 관료들이 임명에 동의한 인사 명령도 행궁에서 황제가 결재를 해야 시행할 수 있었다.

요의 제도상, 현령 이하의 문관은 행궁의 처리가 필요 없고, 현령 이상의 문관도 관료들이 미리 인사권자의 결재를 득해놓을 수 있지마는 무관의 인사는 반드시 황제에게 소를 올려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이는 황제가 군부에 대해서 강한 통제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봄 순행 때는 황제가 직접 낚시와 사냥을 하는 두어연(頭魚宴)과 두아연(頭鵝宴)을 거행해 새해의 풍어와 풍렵을 기원했다. 그리고 황제가 봄 순행을 할 때는 사방 1천 리 안에 있는 속국의 왕과 속부의 장을 행궁으로 불러 황제를 배알하고 충성을 맹세할 것을 명했다. 그래서 봄 순행은 여러 속국과 속부를 위무하고 감시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름 순행 중에는 북 · 남 신료 회의를 소집해 국사를 논의하고 가을 순행을 떠난 뒤, 겨울이 될 때까지 수렵에 힘썼다. 수렵은 취미 생활일 뿐만 아니라 군사 훈련과 군인들에 대한 포상을 겸했기 때문에 황제가 마냥 유희에만 집중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일부 황제들은 국정은 팽개치고 사냥과 잔치에만 몰두해 문제가 되었다. 겨울에는 두 번째 북 · 남 신료 회의를 소집하고 국가에 중요한 정책을 추진했으며 송과 고려, 서하를 비롯한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하고 수렵과 무예 연마에 힘썼다.

이러한 날발 제도는 유목민의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반영한 것이면서 중요한 정치 활동이었다. 후대로 갈수록 정주화와 한화가 이루어졌지만, 날발 제도는 그대로 유지했으며 멸망하는 그날까지 국정 운영의 핵심으로 기능했다. 그래서 요의 정치 중심이 날발인지, 아니면 5경인지를 놓고 현재까지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1.3. 관료 임용과 교육 제도

초기에는 포로나 유민 신분으로 합류한 한인 지식인, 항복한 한인 관료, 일부러 억류시킨 한인 외교관과 그들의 자손, 천거나 수색을 통해 등용한 지식인들을 임용하는 방식으로 인재를 모았다. 그러나 영토가 늘어나고 인구가 많은 연운 16주를 차지한 뒤부터 이런 방식만으로는 필요한 행정 인력을 수급할 수가 없어서 태종대부터 연운 16주의 한인과 발해인들을 대상으로 과거제를 실시하고 관료들을 임용했다. 하지만, 초기의 과거제는 행정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실시하는 비정기 시험이고 합격자 정원도 고작 1 ~ 3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통치 체제가 성숙해진 경종대부터 과거 시험을 정례화하고 남경에 예부공원(禮部公院)을 세워 과거 시험을 주관케 했다. 성종은 당의 제도를 참고해서 시험 제도를 재정비하고 공거법(貢擧法)을 실시, 지방에서 추천한 인재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관료로 등용했으며 과거 시험 합격자의 등수를 가리는 전시(殿試)도 실시했다. 흥종은 송의 과거 제도를 도입해서 1년마다 치르던 과거제를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방식으로 바꾸었으며 합격 정원도 늘렸다.

문과는 사(詞)와 부(賦), 잡과는 법률을 시험 과목으로 정했으나, 흥종대부터 송의 제도를 참고해서 시부(詩賦)와 경의(經義)로 개정하고 과목별로 장원을 따로 뽑았다. 책론과 율을 중시한 송과는 달리 요는 사와 부를 중시하고 경(經)과 율(律)을 경시해서 율과를 통과한 진사는 숫자가 적었다. 이러한 송, 요 간의 학문 경향 차이는 금의 과거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금 초기에 과거제를 시행하려고 하니 송과 요의 옛 영토에 거주한 문인들이 평소에 배우고 중요시한 학문이 다 달라서 시험 과목 선정과 시험 운영이 어려웠다. 그래서 금은 송, 요의 고토에 각각 남선과 북선을 실시해서 인재를 따로 선발했다. 이 남 · 북선 제도는 해릉왕대에 폐지되고 하나의 과거 시험으로 일원화된다.

요 왕조의 과거 시험 과정은 송과 마찬가지로 향시 - 부시 - 성시로 구성되어 있고, 향시(鄕試)를 향천(鄕薦), 부시(府試)를 부해(府解), 성시(城試)를 급제(及第)라고 불렀다. 성시는 예부의 공원에서 주관하고 성적에 따라 갑 · 을 · 병으로 나누었다. 진사과에 합격한 관료는 주로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에 임용된 뒤, 점차 주요 관직으로 나아가 정치에 참여했다. 그리고 한인 의사 · 점술가 · 도축업자 · 노예 · 상인 출신 · 불효자 · 죄인 · 도망자는 응시 자격을 제한했다.

과거제는 전적으로 정주민 지식인을 등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제도라서 한인과 발해인에게만 응시 자격을 부여하고 거란인의 응시는 지나친 한화를 우려해서 엄격하게 제한했다. '한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흥종대에 야율포로호(耶律蒲魯虎)가 과거에 급제했다가 관리에게 들켜서 그의 아버지인 야율서잠(耶律庶箴)이 "자식이 과거를 치르게 내버려 두었다"는 이유로 채찍형 200대를 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식자층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거란계 문인들은 대부분 진사 출신이 아니었다.

이러한 응시 제한은 도종대에 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종대에 실시한 과거 급제자 중에 백습인(白霫人) 출신[3] 진사로 정각(鄭恪)이란 인물이 등장하고 서요를 세운 야율대석(耶律大石)이 과거에 급제해서 한림원 승지가 된 사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과거제를 실시하긴 했지만, 요 왕조는 음서(蔭敍)와 천거제(薦擧制), 세선제(世選制)로 관료와 군인들을 선발하는 일이 더 많아서 과거제 출신 관료는 전체 관료의 20 ~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중에서도 북면관은 모든 관료를 천거와 세선, 음서,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충원하고, 남면관만 과거제 출신을 임용했다. 무관의 경우에는 전공과 실적을 평가해 승진과 임용을 결정했다.

그러나 한인과 발해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받고 과거제 출신 관료들이 정치 · 경제 · 문화에서 활약한 것을 생각하면 과거제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도종과 천조제 시기에는 남추밀원과 중서성의 장관, 관료 대다수가 진사 출신이었고 과거제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의 역사가 더 길어졌다면 과거제의 위상과 관료 임용에서의 비중도 더욱 커졌을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게다가 당의 과거제 출신 관료는 전체 관료의 15%, 동 시기의 송도 40% ~ 50% 정도여서 요가 과거제를 시행, 발전시킨 당 · 송에 비해서 크게 밀린다고 볼 수도 없다. 정리하면, 과거 제도는 인재 선발과 피지배 계급의 참정권 확대와 같은 통치 기반의 확대, 문학과 교육의 성장 촉진, 중국 문화와 유학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음서제는 황족과 외척, 귀족 자제들에게 임관의 혜택을 주는 제도로서 한인과 발해인 명문가, 요에 사관한 정주민 지식인의 후손들도 음서의 혜택을 보았다. 천거제는 초기부터 실시한 제도로서 대신이나 측근이 추천하거나, 우수한 인재를 찾을 것을 명받은 지방관이 추천해오는 인재들을 관료로 충원했다. 때로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려 인재를 찾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황제가 잠행 중에 직접 인재를 찾아 등용하기도 했다.

천거제는 여러 차례의 보완을 거쳐서 도종대에 현량과(賢良科)로 개혁했다. 현량과는 피추천인이 그동안 공부한 것을 만언서(萬言書)로 제출하면 시험관이 그것을 평가해 임용을 결정하는 제도이다. 도종 이전에는 단순히 인물의 평판과 추천인의 보증만 믿고 임용했지만, 이때부터 현량과라는 시험을 통해 인재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제고하고 무능력한 자가 손쉽게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방지했다.

세선제는 연맹 시기부터 존재한 선출 제도로서 귀족과 황족들을 대상으로 후보를 선정한 다음, 능력과 실적을 평가해 관직에 임용했다. 이밖에도 유목민들의 추대를 받거나 지방 세력, 권력자, 귀족들이 절도사 · 사도 · 상온 · 도감과 같은 주요 지방관직의 선출에 관여한 사례가 있기에 기본적으로 관직은 임명직이지만, 유목민 고유의 지도자 선출 방식이 잔존하고 권력층이 관료 임용에 개입한 것으로 파악된다.

과거제와 달리 음서, 천거, 세선은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요 왕조는 혈통보다는 능력과 실적에 비중을 두어서 공이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을 임용하고 성종대부터 송의 관료 심사 제도를 도입해 무능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인사를 배제했다.[4]

그러나, 이러한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세선제와 음서제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다. 세선제는 거란 황족과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으로 초기부터 지배 계급의 관직 독점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으며 음서 또한 고려에서처럼 기득권층의 권력 유지 도구로 쓰였다. 다행히 세선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비중이 줄어들고 말기에는 거의 소멸해 버렸다.

세선제는 소멸하는 과정을 밟지만, 도종 후기부터 심사 제도가 망가지고 권력층이 임용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권력 독점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관직 세습과 매관매직이 이루어지고 지방관이 봉건 영주화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또한 지배층의 부패와 사회 혼란으로 정부 재정이 악화되어 과거제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학교 교육도 저질화되었다. 조정은 이러한 현상을 막아내지 못했고 사회적 모순이 가중되었다.

이는 천거제의 장 · 단점이 드러나고 음서와 세선제의 악영향이 나라를 좀먹은 사례이다. 유능하고 실적 있는 관료와 군인, 숨겨진 인재들을 선발하고 무능력한 인사들을 배제하는 순기능이 작용하면서 권력층의 개입으로 관료와 군인 임용에서의 부정과 기득권의 권력 독점이 이뤄지는 역기능이 발생한 것이다.

교육 제도는 요 태조가 상경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하나, 태조대에는 학문이 성숙하지 못해서 실질적인 교육과 학문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교육 제도의 시작은 태종이 남경에 태학을 설치하면서부터이며 성종이 5경의 주현에 학교를 설치하고 학생들을 후원하면서 지방에도 교육 제도를 이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도종은 중경에 국자감을 설립하고 좨주(祭酒) · 사업(司業) · 감승(監丞) · 주부(主簿)를 임명해 인재를 양성했다. 국자감의 설립으로 유학 교육의 확산이 진전되어 관학과 사학의 설립이 촉진되었다. 또한 도종은 송의 제도를 모방하여 부, 주, 현마다 학교를 설치하고 박사와 조교를 임명해 지방 교육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오경(五經)의 주해를 반포하고 지방 학교의 교재로 오경을 채택했다. 이는 당, 송을 모방해 충군, 애국을 강조하고 유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 시도였다. 학교에는 거란인 · 발해인 · 한인 · 해인들이 입학했으며 성종대에는 고려인 유학생이 거란어를 배우기도 했다.

또한 조정은 황족들을 위한 제왕문학관(諸王文學官)을 설치하고 이름난 유학자들을 초빙해 여러 과목을 개설하여 황족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원래 제왕문학관의 설립 목적은 핵심 통치 집단인 황족들이 무능하고 무식한 권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나, 요대 제왕문학관의 교육은 상당한 효과를 내어서 일부 황족들은 기초적인 수준의 지식을 갖춘 것을 넘어서서 높은 학식과 문예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사교육의 경우, 송에서 유행하던 서원이 요에도 영향을 미쳐서 요대 중기의 명신으로 유명한 형포박이 용수 서원을 설립하여 한인과 거란인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요의 서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사교육은 가정 교사, 유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세운 사학, 가정 교육이 주를 이뤘을 것으로 추정된다.

1.4. 법 제도

연맹 시기의 거란인들은 문자가 없어서 성문법 대신에 관습법과 불문법에 의거해서 판결을 내리고 질서를 유지했으나, 점점 사회가 발전하고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의미의 법 제도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연맹 시절에도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하고 건국 이후에는 돌여불(突呂不)에게 지시해 결옥법(決獄法)을 정비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태조는 꾸준히 제도의 개선을 추진해 관제와 형법을 정비하고 거란인과 여러 이족(夷族)들을 다스리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태조는 재판에서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입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종원(鐘院)을 설치하여 민원을 받고 인민들이 원통한 사건을 황제에게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종원은 말 그대로 종을 설치한 관청으로서, 인민이 종을 치면 관리가 사안을 듣고 황제에게 전했다. 종원은 목종이 없앴다가 경종이 등문고원(登聞鼓院)이란 이름으로 되살렸다.

요사 형법지에 따르면, 요 왕조는 당과 오대의 율령을 도입해 한인과 발해인들은 율령으로 다스리고 거란인과 해인, 기타 유목민 · 삼림 수렵 민족들은 '치거란급제이지법(治契丹及諸夷之法)'이라는 전용 법령에 근거해 다스렸다. 법 제도면에서도 인속이치의 원칙을 세워 민족마다 다르게 법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민족 간의 분쟁은 오로지 율령으로만 처리했다.
성종 초기에 섭정을 한 예지황후는 황제에게 법을 관대하게 적용할 것을 권하고 본인 스스로도 신중하게 판결을 내렸다. 모후의 영향을 받은 성종은 여러 차례 법령과 소송 제도를 개정하고 사법 기관을 정비했다. 또한 성종은 사건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신중하게 처리했으며, 관료들에게 판결을 지체하지 말고 인민을 가혹하게 다루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누명을 쓴 죄인들을 신속하게 석방하고 원통한 이들은 판결이 난 뒤에도 관청에 호소할 수 있게 조치했으며 수차에 걸쳐 각지에 체옥사를 파견해 밀린 재판의 처리와 사건 심의를 명했다.

일부 사건은 본인이 직접 재판을 심리하기도 했는데, 거란 오원부의 수장인 불노(佛奴)가 무구를 훼손한 부민을 장살(杖殺)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성종은 그야말로 격노해 불노에게 인민을 가혹하게 다스린 죄를 물어 관직을 삭탈했다. 이 사건이 신하들에게 큰 경고가 되었는지, 사건 이후로 관료들이 인민에게 함부로 중형을 가하거나 혹독하게 다루지 않았다.

거란인들이 법을 무시하고 소수민족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성종은 거란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민족의 차별을 두지 않고 법을 적용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교적 윤리를 전파하고 민족 차별을 줄이기 위해 십악팔의(十惡八議)를 제정하여 거란인이든 한인이든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모조리 처벌했다. 성종이 개정하고 보완한 법 제도는 관대하고 간소했으며 법령 대부분이 민심에 잘 부합해서 인민들은 성종의 법 개정과 집행에 기뻐했다.

요 초기에는 형벌이 엄하고 가혹해 인민이 두려워하고 거란인과 귀족들에게만 관대하게 법을 적용해서 원망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경종과 성종이 즉위한 뒤부터 형벌을 관대히 하고 평등하게 법을 적용하여 각지의 감옥이 텅 비었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였으니 법 제도가 개선되고 법질서가 높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형벌 적용이 관대해진 것은 좋았으나, 같은 죄를 범해도 다르게 처벌하는 일이 많아서 기득권층이나 관료들이 뇌물을 써서 처벌을 피하거나 그 수준을 낮추어서 법질서가 흔들렸다. 게다가 성종 말기부터 뇌물을 받거나 큰 죄를 진 관료, 부정부패나 큰 범죄를 저지른 귀족, 심지어는 외국에서 가져온 조공품을 훔친 자들까지도 사형을 면하거나 중죄를 피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반대로 역모에 연루된 자들은 가혹하게 다루었기에 법의 권위가 떨어지고 사회 풍조가 문란해졌다. 천조제 시기에 다시 형벌을 엄하게 적용했지만, 그 기준이 모호하고 주관적이라 민심만 잃을 뿐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고 요의 쇠망만 앞당겼다.

요의 율령은 태종대에 당과 오대의 율령을 도입한 것이 시초이며 이후, 성종이 태평 연간에 송율을 도입하고 소덕과 야율서성에게 명해 율령을 개정했다. 허나, 기본적으로 송대 초기의 율령은 당률을 답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한인과 발해인들에게 적용하는 법은 당률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어서 흥종이 1036년(중희 5년)에 신정조제(新定條制)를 편찬해 이전의 법들을 개정하고 법령을 547개 조로 증보했다. 도종은 즉위 초에 중희조제(重熙條制)를 편찬하여 789개의 법조문을 제정하고, 이후에도 꾸준히 법을 개정하고 증보해 1070년(함옹 6년)에 함옹중수조제(咸雍重修條制)를 편찬하고 약 1천여 조의 법조문을 제정했다. 이 때 제정한 법전들은 유목민족의 전통과 율령을 조화시킨 것으로서 요의 법 제도에 한률의 영향이 강해지고 성종대의 기조가 이어져서 법적인 면에서 민족 차별을 없애려 한 특징이 드러난다.

그러나 함옹중수조제부터 법조문이 너무 번다하여 율관들도 이를 숙지하지 못하고 법을 어기는 인민의 수가 급증했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이 술수를 부려 인민을 괴롭히고 부정하게 이득을 편취하는 일까지 벌여지자, 도종이 명해 중수조제를 폐지하고 중희조제로 회귀했다.

재판은 항소심을 허용해 1심의 결과에 만족치 못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는 자는 어사대에 진소해 항소심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어사대에 사건을 재조사할 권한을 부여했다. 원통한 일이 있는 이들은 등문고원을 이용해 황제에게 직소했다. 조정에 올라온 사건은 원래 황제에게 아뢰고 중서성과 문하성의 낭관, 한림학사가 황명을 받아 심리했으나, 성종대부터 대리사에서 전담했다.

요의 형벌은 태형(笞刑) · 장형(杖刑) · 도형(徒刑) · 유형(流刑) · 사형(死刑)의 다섯 가지로 나뉜다. 사형은 선고와 집행을 할 때는 반드시 조정의 재가를 받아야 하며 강도죄에 한정해서는 도종대부터 각 지방, 관부에 처결할 권한을 주었다. 사형을 집행한 뒤에는 그 시신을 저자 거리에 3일간 놔두어 만민에게 경고했는데, 성종대부터 그 기간을 하루로 줄이고 유가족이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는 것을 허용했다.

요는 교형(絞刑) · 참형(斬刑) · 능지형((陵遲刑) · 환형(轘刑) · 효형(梟刑) · 지해형(支解刑) · 요참형(腰斬刑) · 생예형(生瘞刑) · 투애형(投厓刑) · 사귀전형(射鬼箭刑) 등의 형벌을 집행했다. 요의 사형 방식은 당의 사형법과 수대 이전의 잔혹한 형벌, 거란의 형벌 방식이 섞여 있다. 환형은 거열, 지해형은 난도질, 생예는 생매장, 투애는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형벌이다. 이 중에서 교수, 참수, 투애, 생예, 사귀전은 연맹 시기부터 존재한 거란의 형벌이다.

사형 방식 중에 사귀전은 사형수를 나무나 기둥에 묶어놓고 화살을 수십 발 쏘아 죽이는 형벌로서 요에서는 황제가 친정을 나서면, 여러 황제의 사당에 제를 지내고 사귀전형을 집행했다. 이는 정벌을 나가는 방향에 기둥을 세우고 사형수 한 명을 묶은 뒤에 화살을 마구 쏘아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히게 해서 혹시나 전쟁 중에 생길지 모를 액운을 막는 제례였다. 사귀전형을 집행할 때 쓰는 화살은 명적(鳴鏑)을 쓰는데, 명적이 날라가며 내는 소리가 마치 귀신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귀적(鬼鏑)이라고도 불렀다. 이밖에도 포락이나 철퇴로 장살하는 잔혹한 형벌들도 있었으나, 거의 다 목종대에만 시행하고 그 뒤로는 폐지했다.

귀양을 보내는 유형은 3등급으로 나눠 경중에 따라 국경 유배, 국외 추방, 만리타국에 사신으로 보내는 형벌을 집행했다.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왜 형벌인지 의아할 수 있는데, 바닷길이 험하고 풍토병으로 죽을 수도 있는 조선 통신사처럼 사신으로 보낸다는 핑계로 먼 변방까지 가게 해서 심하게 고생시키거나 죽게 만드는 형벌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무사히 돌아온 이들도 있었고, 경우에 따라선 돌아와서 다시 중용받기도 했다.

감옥에 가두는 도형도 3등급으로 분류해 18개월형 · 5년형 · 종신형을 선고하고, 곤장을 치는 장형은 50대 ~ 300대 이하를 가했다. 이외에 거세를 시키는 궁형(宮刑)과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경형(黥刑) 등의 형벌을 시행했다. 경형은 고대 중국에서 시행하던 형벌로 유명하지만, 거란 각 부족은 예전부터 족장이 죄를 지면 경형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어 한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한 관습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율의 영향을 받아 연좌제도 적용했다. 역적의 가족은 역모 사실을 몰랐어도 연좌하고 가족이 뇌물을 받았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관료와 귀족도 뇌물죄를 적용했다. 만약 귀족이 모반하면 그 가족을 관노, 또는 황제의 직할지인 오르두를 관리하는 저장호나 궁분호로 만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료들에게 노비로 주었다. 그리고 가산을 몰수하는 적몰법을 도입해 반역자의 재산을 국고나 오르두에 귀속시켰다. 업무를 잘못한 관료와 15살 이하, 70살 이상의 범죄자나 범죄에 연루된 자는 동전을 바쳐 속죄할 수 있게 했으며 그 비용은 장 1백 대당 1천 전이다.

절도죄의 경우, 요 왕조는 다른 왕조들보다 절도를 훨씬 더 엄하게 다루었다. 초범일지라도 절도한 돈이나 장물의 가치나 5관(貫)을 넘으면 사형에 처했다. 다만, 5관만 훔쳐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점차 처벌 기준을 완화해 10관, 25관, 최종적으로 50관 이상을 절도한 사건의 주범은 사형, 종범은 유배에 처하도록 조정했다.

성종 시기에는 절도범의 처벌에 경묵형(黥墨刑)을 추가했다. 절도 3범은 이마에, 4범은 얼굴에 죄명을 새기고 5년형에 처하고 5범은 사형을 선고했다. 흥종대부터는 처벌을 더욱 강화하여 절도 초범은 오른팔, 재범은 왼팔, 3범은 왼쪽 목, 4범은 오른쪽 목에 문신을 새기고 5범은 사형에 처했다.

노비들은 주인이 모반, 유배형이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경우가 아니면 주인을 고발하지 못하게 했으나, 노비가 도망을 치거나 주인의 재산을 훔쳐도 주인이 함부로 경면(黥面)하지 못하게 하고 목과 팔에만 경형을 허용했다. 또한 노비가 사죄(死罪)를 저질러도 주인이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 관부에서 사안을 심리하게 했으니 노비의 인권도 어느 정도 존중해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형벌 도구로는 목검, 목봉, 사대(沙袋), 철골타(鐵骨打), 고문 도구로는 낙(烙), 편(鞭), 세장(細杖), 추장(麄杖) 등을 썼다. 목검과 사대, 철골타는 거란 고유의 형벌 도구로서 목검은 주로 중죄를 진 대신에게 관용을 베풀 때, 목봉은 대체로 중한 범죄를 관대히 처리할 때에 썼다. 목검과 목봉을 가할 때는 3등급으로 나누어 15 ~ 30대를 때렸다. 사대는 가죽으로 싼 모래 포대를 곤봉에 달은 것으로 장형 50대 이상을 선고받은 자에게 썼으며 사용 방식은 곤장형이었다. 철골타는 속이 비어 있는 팔각형의 철 뭉치를 곤봉에 매단 것인데, 철골타로 때리는 것은 5대 ~ 7대로 제한했다.

그러나 요의 법체계는 제도가 불완전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성종이 민족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모두 동등하게 처벌하도록 했으나, 일부 거란인들은 한인에게 피해를 줘도 괜찮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일부러 한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같은 거란인들이 범죄자를 비호해주어 범죄자가 처벌을 가볍게 받거나 쉽게 풀려나는 폐단이 있었다.[5][6]
정리하면, 이중 통치 체제를 창조한 요답게 법 체계도 이중으로 만들어 정주민과 유목민 각각에게 맞는 법을 제정하고 차별 없이 공정하게 인민을 통치하고 질서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법 제도가 기득권과 거란인에게 유리하고 평민과 소수민족들에게는 불리한 폐해가 있었다.

1.5. 군사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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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북송) 송군 요군 서하군
송(남송) 송군 금군 서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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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 / 녹영 / 북양해군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군벌 홍군
( 팔로군, 신사군)
관동군 대만군(일본) 만주군 화평건국군
현대 중화민국 국군 중국 인민해방군 }}}}}}}}}

요는 전민개병제를 실시해 15세부터 50세까지의 인민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군대는 어장친군(御帳親軍) · 궁위기군(宮衛騎軍) · 부족군(部族軍) · 오경향정(五京鄕丁) · 속국군(屬國軍)으로 편성했다. 군정권은 북추밀원이 행사하고 전쟁 준비, 작전 수립을 담당했다. 최고 군통수권자는 당연히 황제였으며 당제를 모방해 최고 군 통수 기관으로 천하병마원수부(天下兵馬元帥府)를 설치하고 황태자나 황자를 천하병마원수(天下兵馬元帥)로 임명했다. 병마원수부의 하위 기관으로는 도원수부(都元帥府)와 대원수부(大元帥府)가 있으며 두 기관은 천하병마원수부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병마원수부는 당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당은 황태자를 천하병마원수로 임명해 군권을 장악했다. 이후, 당이 몰락하고 오대 국가들이 등장한 뒤부터 이 제도는 쇠퇴했으며 설령 시행하더라도 임시직으로 운용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정강의 변 직전에 흠종 황제가 황족 중에 유일하게 금군의 손아귀에서 빠져 있던 강왕 조구를 천하병마대원수로 임명한 일이다. 원래 강왕은 일개 황자에 불과했지만, 흠종의 임명 조서를 받은 뒤부터 병마대원수의 권위를 이용해 정강의 변으로 조정이란 머리가 잘려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각 지방을 돌며 행정 체계를 복구하고 물자와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오대와 송과 달리 요가 이 제도를 되살려 황태자나 황자를 원수로 임명한 까닭은 군권을 장악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황태자가 군 경험을 쌓게 하고 그 기량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장자 계승제가 확립된 뒤부터는 기량을 시험한다는 목적이 퇴색되지만, 요는 황태자를 원수로 임명하는 전통을 유지했다.

각 지방에는 군을 지휘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장군 · 상장군 · 장군 · 소장군, 도위와 같은 직책을 설치해 군권을 부여했다. 거란의 주요 유목민 부를 관장하는 대왕부들과 각 유목민 부들을 통제하는 절도사, 상온도 휘하 유목민들에 대한 군정권을 행사했다.

군 지휘는 도통(都統)과 부도통(部都統), 도감(都監) 등이 지휘하며 이들은 황제가 공신, 황족, 대신 중에서 임명했다. 이 중에서 도감은 감군(監軍)으로서 군의 관리, 감독을 맡고 사령관인 도통을 탄핵할 수도 있어서 권한이 막강했다.

병력을 동원하거나 조정에서 각 군에 군령을 내릴 때에는 금어부를 사용했다. 금어부는 부절(符節)의 일종으로 말 그대로 글자를 새긴 금제 물고기이다. 부절은 원래 중국에서 적군의 기만 전술에 걸려드는 것을 막고 역적들이 각 군 지휘관들을 속여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요에서는 금어부를 쪼개서 하나는 조정에, 나머지 하나는 각 군에 비치했다. 만약, 동원령이 내려지면 조정의 사자가 지참해 온 금어부와 부대에서 보관해 둔 금어부를 맞춰서 그 모양과 글자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했다. 여기서 맞으면 병력을 동원하고 틀리면 사자를 붙잡았다.

어장친군은 전국 각지의 부족군에서 선발한 요의 최정예 병력으로서 요 태조 야율아보기와 순흠황후가 구축한 피실군과 속산군에서 유래한다. 송의 금군과 마찬가지로 어장친군의 다수는 시위와 숙위를 맡고 일부는 5경과 국경에 주둔했다. 세종대에 전전도점검사(殿前都點檢司)를 설치하고 새로이 금군을 조직한 뒤부터는 그 성격이 변해서 시위와 숙위 업무를 금군에 넘겨주고 국경 수비와 전시 주력군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궁위기군은 여러 오르두에서 차출한 군대로서 황제들은 궁위기군을 후하게 대우해 충성심을 확보하고 좋은 무구와 군수물자를 지급했다. 그 대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그 중에서도 정예병인 자들을 선발했기 때문에 강군이라 할만 했다. 궁위기군은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각 오르두의 제할사가 병력을 모집해 전선에 투입했다. 제할사들이 격문을 띄우고 군사를 모집하면 주현과 부족에서 징병을 하지 않아도 10만의 기병을 모을 수 있어서 요는 병력 동원이 용이한 편이었다. 반대로 보병 중심인 송은 병력 동원과 이동 과정이 번잡하다보니 요의 기동력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금군은 세종대에 조직한 근위대로 당과 송의 제도를 모방해 공학(控鶴) · 우림(羽林) · 용호(龍虎) · 신무(神武) · 신책(神策) · 신위(神威)의 6군과 11위로 편성했다. 그 장관은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이며 금군의 주요 업무는 황궁에서 숙위와 시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유목민으로 구성한 부족군은 대수령 부족군(大首領 部族軍)과 중부족군(中部族軍)으로 나뉜다. 대수령 부족군은 왕공 대신들이 지원하는 사병들로서 그 수는 수백에서 수천을 헤아린다. 요사 병위지에는 왕공 대신들이 솔선수범해 국가를 위해 사병을 내놓았다고 칭송하지만, 요는 전시에 어장친군과 궁위기군, 금군을 주력으로 삼고 중부족군과 속국군으로 보조했기 때문에 수가 적은 왕공들의 사병은 중요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를 위해 싸우기 보다는 반란이나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에서 싸우는 일이 많았다.

중부족군은 남 · 북 재상부 소속의 부족들로 구성한 정규군이며 부족군은 평시에는 국경을 지키다가 전시가 되면 자비로 무장을 갖추고 전선으로 이동했다. 요의 유목민들은 모두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나고 평시에도 사냥을 많이 해서 전민개병이 가능해서 병력 동원이 용이했다.

각 부족군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오원부(五院部)와 육원부(六院部)는 남경에 주둔하면서 송의 침입을 대비하고, 오외부((烏隗部)는 동북에 주둔하면서 여진족의 침공을 방어했다. 돌여불부(突呂不部)와 저특부(楮特部) 등은 서북 지방에 주둔하면서 서북의 각 유목 민족들을, 날랄부(捏剌部)와 을실부(乙室部), 품부(品部) 등은 서남 지방에 주둔하면서 서하와 조복 등을 제어했다.

오경향정, 속칭 경주군(京州軍)은 5경과 각 주현에 주둔했다. 이들은 대부분 한인과 발해인이며 평시에는 도시를 수비하다가 전쟁이 나면 즉각 동원되었다. 경주군 중에서 우수한 자들은 금군으로 선발했다.

이외에도 각 부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한 사리군(舍利軍),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힌 유목민과 국경 지역의 부민들로 구성한 규군(乣軍), 군목군(群牧軍)을 조직했다. 사리군은 남부 지방의 방위를 담당하지만 전투력은 그저 그렇다는 평가를 받는다. 규군은 국경 방위를 맡으며 그 성격과 구성원의 특징이 현재까지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군목군은 요군에 군마를 조달하는 군목의 군대로서 군목 수비와 약탈 방지에 주력하고 전시에는 잘 동원하지 않았다.

해군도 존재했다. 유목민 출신이라 해군이 약할 것 같지마는, 요는 한인, 발해인으로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워서 상당한 규모의 함선을 건조할 능력을 키웠고 해운업도 상당히 발달했다. 심지어 흥종대에는 함대를 조직해 황하에서 송군을 상대로 수전을 걸어 승리한 적도 있어서 요의 해군을 과소평가하긴 어려울 것이다.

속국과 속부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으나, 전쟁이 나면 주력군인 궁위군과 5경의 군대만 동원하고 속국과 속부, 부족군을 동원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었다. 평시의 요는 20만 ~ 30만의 병력을 유지했고 전성기에는 총병력이 164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64만의 수치는 동원 가능한 전체 장정의 숫자로 보인다.

해인, 발해인, 여진인, 복속한 실위인 등, 민족별로 구성한 부대도 운영했다. 이 부대들은 대체로 지휘관도 같은 민족 출신의 군인을 임명했다. 3차 여요 전쟁 때, 요군 소속으로 귀주에서 고려군과 맞서 싸운 발해 상온 고청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듯 요군은 다민족 혼성군으로 조직되어 있지만, 주력은 유목민 기마 군단이고 군부와 고위층들은 '한인 금군'을 '거란 금군' 만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종이 정변을 일으킬 때에 한인과 발해인 금군의 지지를 받아낸 것이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친 바 있기에 한인 금군이 어장친군이나 거란계 금군에 미치지는 못해도 그 중요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한인과 발해인들은 중요했다. 한인과 발해인들은 대부분 보병으로 편성되어 있고 거란인보다 정주화의 경향이 더 짙었던 해인들도 기병보다는 보병이 많아서 기동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기병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기가 힘든데다 발해인들은 전투력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고[7] 한인들은 위력적인 쇠뇌와 공성전에 필수적인 포차를 다루는데 능숙했다. 민족 감정이 있긴 했지만, 이러한 사실은 요의 수뇌부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후진의 석경당을 치기 전에 침공 계획을 논의하던 태종은 거란 기병대를 좌 · 우에 세우고 중앙에 발해인 보병대를 배치해서 진격한다면 적수가 없을 것이란 측근의 진언에 크게 감탄하고 지휘관들도 동의를 표했다.

남경 · 중경 · 서경에는 금군을 파견하고 각 주에는 절도사를 설치했다. 그리고 5경 전체에 군무를 전담하는 기관을 세웠다. 남경은 원수부를 설치해 번한병(蕃漢兵. 거란과 한인 혼성 군대)을 통솔하고 중경의 남·북 대왕부(南北 大王府), 해왕부(奚王府)에 군권을 부여했다.[8] 그리고 서경은 을실왕부(乙室王府), 동경은 도부서사(都府署司)와 통군사사(統軍使司), 상경은 상경총관부(上京總管府)와 상경성황사사(上京城隍使司)가 담당했다.

국경에는 특수 행정 단위로 로(路)를 설치하고 초토사(招討使)와 통군사(統軍使), 도부서사를 설치해서 지역을 방어했다. 울란바토르 인근에 위치한 진주(鎭州)에는 서북로 초토사(西北路 招討使)를 설치해 서북 지역의 각 유목 민족들을 제압하고, 현대 몽골의 동부 지역에는 오고 적렬 통군사(烏古 敵烈 統軍使)를 세워 몽골 오고부와 적렬부에 속한 유목민들을 통제했다. 서남 지역에는 풍주(내몽골 호화호특 인근)에 서남로 초토사((西南路 招討使)를 설치해서 서하 방면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리고 동북 지역은 태주에 동북로 통군사((東北路 統軍使), 황룡부(黃龍部)에 병마도부서사(兵馬都府署司)를 두어 동북 지방의 여진계 속국과 속부들을 통제했다. 국경 방위 업무 외에도 초토사는 항복한 병력과 흡수한 포로를 관리하는 직능도 수행했다.

군사적 특징에 대해 알아보자면, 요군은 정찰과 숙영을 중시했다. 원탐난자(遠探攔子)라 부르는 정찰병들을 세밀하게 보내어 이동 중에도 반경 10km 내외를 탐지하고 야간에도 정찰병들을 보내 야습을 방지했다. 만약 야간에 움직임이 있으면 사로잡고 그 규모가 크면 선봉대에 알려 협공했으며 만약 대군이 이동 중이라면 즉각 지휘관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만약에 적진을 탐지하면 적군의 허실을 주밀히 살폈다. 숙영 중에는 진영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적의 기습을 방지하고 이동할 때에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일례로 요군은 이존욱과의 일전에서 대패했을 때에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영을 정리하고 퇴각해 그 이존욱이 감탄할 정도였다.

또한 정보 전달을 중시해서 각 부대에 신속하게 명령을 전달하고 정보를 주고 받았다. 국경 지역의 군대는 국경 밖으로 나아가 외부 세력의 동향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했다. 적대 세력의 침공을 막기 위해 순찰을 나가 국경 밖의 농지와 목초지를 불사르고 위험이 될만한 세력을 미리 공격하는 예방 전쟁도 수행했다.

전술적으로 기마 군단을 주력으로 삼는 요군은 기동전을 장기로 삼았다.[9] 요군은 기동력을 이용해 양동 작전을 펼쳐 조공으로 적의 국경 방위 군단을 틀어막고, 주력군으로 적의 약한 후방이나 거점, 중심 도시를 강타했으며 주요 방어선을 우회해 허를 찌르는 전략도 자주 구사했다.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무시하고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부여부를 급습, 순식간에 함락하고 상경을 포위한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1004년에 송을 침공할 때는 양동과 우회 전술을 함께 구사했다.

요 성종과 예지황후가 직접 친정한 요의 20만 대군은 송의 군사 요충지인 정주(定州)를 우회한 뒤, 병력을 나누어 주력군은 계속 진격하고 조공으로 관남에 속한 영주(瀛州)를 포위했다. 2달이 넘도록 영주를 함락하지 못하자, 요의 조공은 영주를 포기하고 주공과 합류해 송의 후방 거점들을 공략하고 전주(澶州)까지 진격했다. 전주에서 개봉까지는 300리(약 120km) 밖에 되지 않았고 황하가 얼어붙어 기마 군단이 며칠이면 개봉을 포위할 수 있었다.

이 가공할 기동력으로 요군은 송 조정에서 천도론까지 나올 만큼 송을 압박했다. 그러나 송 진종의 친정, 일부러 우회한 정주와 보주(保州)의 주둔군이 보급로 차단을 시도한 것, 원수 소달람의 전사와 같은 악재가 겹쳐 개봉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연의 맹을 맺어 30만 냥의 세폐를 확보하고 기존에는 이민족이라고 무시당하던 입장에서 송 황제와 요 황제는 동등하다는 명분상에서의 큰 이익을 받아내어 성과는 충실했다.

반대로 요군의 전략과 전술이 실패한 사례로는 여요 전쟁이 있다. 2차 여요 전쟁 당시, 요군은 쉽게 함락되지 않는 흥화진(興化鎭)을 우회해 통주(通州)에서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 주력군을 궤멸시키고 곽주(郭州)와 안주(安州)을 함락했다. 이어서 요군은 개경(開京)을 함락해 불바다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玄宗)은 나주(羅州)까지 도망가야 했다. 여기까지는 확실히 요군의 전략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요군은 전쟁 목표인 고려의 항복이나 현종의 포획을 달성하지 못하고 전쟁 기간 내내 흥화진의 양규(楊規)에게 시달렸다. 심지어 회군할 때에도 양규의 급습에 당해 피해가 상당했다.

3차 여요 전쟁의 요군은 피해가 누적되는 상황에서도 개경까지 진격했으나, 결국 개경을 함락하지 못하고 회군하다 귀주에서 대패했다. 그래서 요군의 기동전은 그 장 · 단이 뚜렷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요군이 이렇게 기동전을 중시한 것은 유목민 특유의 기질이 발현한 것이지만, 속전속결을 강요당한다는 점도 있었다.

요의 주력군인 유목민 기마병들은 상대적으로 한인과 고려인에 비해 추위에 강해서 겨울에는 추위에 떠는 정주민들을 몰아붙일 수 있지만, 더위에 취약해서 여름만 되면 맥을 못 추었다. 또한 봄부터는 강물이 녹고 강우량이 늘어나 기마 군단의 기동성이 떨어지고 활의 아교가 녹아 전투력도 감소했다. 그래서 요군의 군사 작전은 실질적으로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만 가능하고 그 이상을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요 태종이 개봉을 점령했을 당시에, 날씨가 더워지면서 요군의 전투력이 떨어졌고 태종 본인도 더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요군은 막강한 기마 군단을 운용해 강국인 발해를 무너뜨리고 송과 고려를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장기적인 전쟁을 준비할 수 없다는 태생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요의 군부도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어서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그 약점을 극복하는 모습을[10] 보여주기도 했지만, 여요 전쟁에서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를 벌일 때에는 유목민 특유의 스웜 전술을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전투 초기에는 탐색전을 벌여 적의 특징을 파악하고 강점과 약점을 살펴 그에 맞게 대응했다. 2차 여요 전쟁 때, 통주 전투에서 강조는 계속 승리를 거두지만, 요 성종은 계속 패전해주면서 고려군의 특성을 파악하고 강조가 오만해진 틈을 타서 고려의 주력군을 박살내고 강조의 목을 베었다.

또다른 군사적 특징으로는 공성전을 벌일 때에 미리 사로잡은 포로들을 앞장세워 화살받이로 쓰고 후열에 군인들을 배치하는 것이 있다. 꽤나 잔혹하지만, 공성전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후대의 몽골 제국도 이 전술을 사용했다. 요 – 후진 전쟁 때도 포로들을 앞장세워 성을 공략한 적이 있다. 조금 다른 식으로 포로를 활용한 사례로는 2차 여요 전쟁 중에 흥화진 성 앞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참살한 일이 있다. 아마도 주둔군의 사기를 꺾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흥화진을 지휘하는 양규는 동요하지 않고 요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여요 전쟁 이후, 요군은 2차에 걸친 서하와의 일전에서도 패배하지만, 그래도 그 기세를 유지했다. 허나, 도종대부터 군역을 담당하는 평민들이 파산하거나 군역을 기피하는 일이 많아서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인적 자원의 감소를 타개하기 위해서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용했다. 천조제 시기에는 군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기가 낮아 대군을 동원하고도 소수의 금군에게 대패했다. 요동이 무너진 뒤부터는 사태가 급해 부유층과 특권층까지 징집해 맞섰으나, 금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나라가 멸망했다.

최종적으로 요의 병제를 정리하자면, 병역은 15세 ~ 50세에 부과하고 평시엔 20만 ~ 30만, 전성기의 전체 병력은 164만이었으며 나머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2. 지방 행정

요나라의 행정구역
상경도 동경도 중경도 서경도 남경도


요는 이원적인 지방 행정 제도를 구축해서 정주민은 주현제로 통치하고, 유목민은 부족제로 통치했다. 이는 요의 통치 전략인 인속이치(因俗而治)를 적용한 것으로서 각 민족의 풍습에 맞게 법률과 행정 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요 왕조는 피지배층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효과적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

2.1. 정주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

정주민 지역의 행정 제도는 당의 제도를 모방해 지방을 5도 · 5경 · 156 주군성 · 209현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중요한 지역에는 부를 설치하고 주는 상등주, 중등주, 하등주, 현은 상등현과 하등현으로 나누었다.

요는 지방 행정 제도를 구축할 때에 오대나 송보다는 당을 많이 모방해서 당제가 지방 행정 제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5경제와 부(府)의 설치, 자사 파견, 최고 행정 단위를 도(道)로 설정한 것, 주를 상 · 중 · 하, 현을 상 · 하로 편성한 것은 모두 당제를 모방한 것이다. 당의 경우에는 현도 상 · 중 · 하로 편성했으며 안, 사의 난 이전까지 전국을 15도로 편성했다.

최고 행정 단위인 도(道)는 각각 상경 · 중경 · 동경 · 서경 · 남경도가 있으며, 도의 하위 행정 단위로 부 · 주 · 군 · 성(府 · 州 · 郡 · 城)과 현(縣)이 있다.[11] 그리고 5경은 각각의 역할과 특징이 달랐다.

상경 임황부는 최초의 수도이며 거란인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여러 수도들 중에서도 가장 중시했다. 행정적으로 상경은 드넓은 상경도의 유목민들을 통제하고 요 전기의 수도로 기능했다. 경제적으로 상경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초가 풍부해서 농업과 목축업이 모두 활성화되어 있고 한인과 발해인의 대규모 이주로 지역 개발을 도모해 경제가 매우 발전했다. 또한 비단길에서 오는 재화가 모이는 곳으로 위구르인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에서 오는 상인들이 모여 진귀한 재화를 거래했다. 상경의 인구는 36,500호, 약 20만 명이다.

동경 요양부는 원래 태조가 고려, 발해와의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쌓고 방어선을 구축한 곳으로 발해 멸망 이후에는 동란국의 수도가 되었다. 동란국이 해체된 뒤에도 요양은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아 동경으로 격상되었으며 요서 지방의 중심 도시로 기능했다. 군사적으로 동경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발해인과 여진인을 통제하고 고려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했다. 만약 고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 동경에서 총지휘를 하고 모든 원정군이 동경에서 출발했다. 경제적으로 동경은 바다와 가깝고 매우 풍요로워서 무역과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동경의 인구는 인구는 46,400호, 약 23만명이다.

서경 대동부는 원래 인구도 적고 경제 수준도 낮아서 중요성이 별로 없었으나, 점차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나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이후, 흥종대에 서하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서경으로 승격시켜 서하의 침공을 대비하고 서남 지역의 유목민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지리적으로 서경은 북쪽에 평원이 있어 유목민들은 쉽게 진입하지만, 남쪽은 오대산을 위시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남방의 송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요는 고지대에 위치한 서경의 이점을 살려 송의 동향을 감시하고 만약에 있을 송군의 침공을 방비했다. 경제적으로 서경은 5경 중에서 경제적 중요도가 가장 떨어지지만, 그래도 연운 지역 서부의 경제 중심지로 기능했다.

남경 석진부는 원래 당대에는 유주였다. 유주는 한 대부터 유목 민족의 침입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당대에는 노용 절도사 유인공의 핵심 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요 태종에게 바치면서 한인 왕조 입장에서 ‘남경’은 더 이상 유목민의 약탈을 방어하는 ‘북방의 요새’가 아니라 정복 왕조의 침공 기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남경은 물산이 풍부해서 요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 기능했다. 또한 송과 요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상업과 무역이 크게 번성했다. 군사적으로 남경은 송의 침공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 2차 북벌 중에 송군이 다른 지역들은 함락해도 남경은 무너뜨리지 못해서 연운 16주를 수복하지 못했으니 남경의 군사적 중요성은 상당히 높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남경의 인구는 약 30만이며 5경 중 인구가 가장 많다. 인구의 다수는 한인이지만, 거란, 해, 발해, 여진인들도 거주했다.

마지막으로 중경 대정부[12] 는 5경의 중심으로서 요 후기부터 상경을 대신해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경제 · 문화적 중요성이 높은 연운 16주와 정주민 지역을 통치하고 송과의 관계를 조율하기에는 상경이 너무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만한 중심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종은 전연의 맹을 체결한 뒤에 중경을 세워 5경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 중심지로 만들었다.

행정적으로 중경은 요대 후기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였다. 또한 중경도는 거란인들과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리는 해인들의 중심지여서 중경은 해인들을 통제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도 맡았다. 경제적으로 중경은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농경에 적절해 농업이 발달했으며 송과의 거리도 가까워서 교류가 편리했다. 그래서 중경은 다른 수도들과 마찬가지로 정치 중심지이면서 지역의 경제 중심지이기도 했다. 중경의 도시 구조는 송의 개봉을 모방한 것으로서 성종은 많은 수의 한인 건축가, 기술자들을 모아 중경을 건설했다.

부는 수도에 소속된 도(道)의 행정을 총괄하는 경부(京府)와 지방의 번부(藩府)로 편성했다. 경부는 유수(留守)가 행정과 치안을 맡고 경순원(警巡院), 처치사(處置司)가 각각 사법과 징세를 담당한다. 수도의 장관이라는 위상 때문인지 5경의 유수는 주로 황족이나 대신들을 임명했다. 번부에는 지부사(知府事)를 임명했다. 대표적인 번부로는 동북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황룡부(黃龍府)와 중경과 남경 사이의 대도시인 흥중부(興中府)가 있다.

주는 자사주(刺史州)와 절도주(節度州)로 편성하고 등급에 따라 상등주, 중등주, 하등주로 나누었으며 특수한 주는 방어주(防禦州) - 단련주(團練州) - 관찰주(觀察州)로 구성했다. 각 주의 지방관으로는 자사 · 방어사 · 단련사 · 관찰사 · 절도사를 임명했다. 주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소속 관청을 감찰하는 녹사참군, 실무를 맡는 판관 등의 지방관원들은 행정 실무를 맡고 지방관을 보좌했다. 지방관의 위계는 절도사 → 관찰사 → 단련사 → 방어사 → 자사의 순서로 절도사가 가장 높다.

관찰주 하위의 주(단련주, 방어주, 자사주)들은 소속이 다양했다. 도나 부, 절도주의 소속으로 편성된 주도 있고, 중등주와 하등주의 경우에는 도의 직속 행정 단위가 아니라 상등주에 소속되기도 했다. 따라서 요의 지방 행정 구조는 매우 복잡하며 행정 단위별로 소속 관계와 지위가 매우 다양하다고 평할 수 있다.

중간 행정 단위인 군에는 군수(郡守)를 파견하고 최하위 행정 단위인 현에는 현령(縣令)과 현승(縣丞), 현위(縣尉), 주부(注簿)를 임명했다. 현도 주와 마찬가지로 상등현과 하등현으로 나누는데, 상등현은 주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현에 속한 마을들은 태종대에 마을의 유력자들을 촌장으로 임명한 전례가 있어서 부호나 장로, 호족, 인망 있는 자들이 마을을 지도했을 것으로 보인다.[13] 그리고 주현의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과 그 밑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는 대부분 한인이나 발해인이었다.

요는 광대한 지역에 산재한 도시와 요충지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곳곳에 역참을 설치해 신속한 통신 체계를 유지했다. 역참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패자(牌子)를 발급했는데, 이러한 제도는 모두 몽골 제국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요 제국의 파발은 통상 500리, 긴급시에는 700리를 달렸다.

만약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 요 왕조는 다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해 반란이 일어난 해당 행정 단위를 해체하거나 이전해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민들을 아예 분산시켜 여러 지역에 보내기도 했다.

정주민 중에서 가장 강제 이주를 많이 당한 민족은 발해인들이다. 발해인들의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린 요 왕조는 발해인들의 역량과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인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곧바로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거나 주민들을 여러 집단으로 쪼개서 각지에 분산 이주시켰다.

요 왕조 입장에서 강제 이주는 반란의 뿌리를 뽑고 통제력도 회복하는 한편, 인구가 부족한 지역도 개발하는 1석 3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강제 이주를 당하는 인민 입장에서는 모든 기반과 재산을 잃고 고향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겪어야 했으므로 강제 이주가 매우 가혹한 징벌이었다. 일례로 요 태종이 상경을 불사르고 발해인들을 요서로 이주시킬 때는 많은 수의 발해인들이 빈곤해져 부유층의 노비나 부곡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강제 이주 정책은 미래의 반란을 예방하는 데에는 적절했지만, 민심이 이반하고 소수 민족들의 원한을 양산하는 문제도 있었다.

2.2. 유목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

요의 부족제는 일종의 중앙집권화로서 혈연으로 연결되고 부족장의 통치를 받는 '부족'을 정부가 임명한 관료의 통제를 받는 민 · 군정 일치의 '행정 단위'로 변화시킨 것이다. 태조 아보기의 시대부터 요 왕조는 분토정거(分土定居)를 단행해 부족을 재편성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들의 혈연 관계는 약화되고 단결력이 떨어져서 조정에 대항할 힘을 잃기 시작했다. 또한 통제를 위해 각 유목민 부족의 토지를 할당해주고 자유로운 이동을 막았으며 원래 세습하거나 선출하는 부족장의 지위를 임명직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정주민들에게 구사한 강제 이주 정책을 유목민들에게도 적용했다. 요 조정은 반란을 일으킨 직할 부족이나 속부를 강제 이주시키거나 아예 해체해서 부족민들을 다른 부족에 편입시켰다. 속부의 경우에는 사로잡은 포로들로 새로운 직할 부족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요 조정은 반항적인 유목민 부족들을 쉽게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 왕조가 굳이 초원의 자유로운 유목민들을 통제하는 방식을 쓴 이유는 각 부족에 소속된 유목민들이 관료와 군인이 되어 정치와 행정을 이끌어 나가고 요의 군사력을 유지시켜 주는 핵심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요의 국력이 강해져서 인구가 늘어나고,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많은 유목민들이 부에 편입되어 요는 태종대에 부를 20개로, 성종대에 34개로 증설, 재편성했다. 부의 증설과 재편성은 황제의 통치력 강화 시도이면서 수많은 유목민들을 복속시킬 만큼 요의 세력이 강대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통치력 강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질랄부(迭剌部)의 재편성이다. 야율씨가 소속된 부족이며 아보기의 친족인 질랄부는 아보기의 독재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려 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아보기는 질랄부를 오원부와 육원부(六院部)로 분리하고 자신의 조부 균덕실의 후손들을 맹부(孟父), 중부(仲父), 계부(季父)의 3방(房)으로 분할해 이들을 약체화시켰다. 이러한 친족 약화 작업이 진행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부터 옛 질랄부에 속하던 부족들은 황제의 친족으로서 그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었으니 아보기의 정책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요는 인구의 다소에 따라 유목민 부를 왕의 통치를 받는 대부족과 절도사의 통치를 받는 소부족으로 편성했다. 대부족은 삼공과 좌 · 우 재상, 절도사사(節度使司)와 상온사(詳穩司)를 설치하고 소부족은 부 단위로 절도사사, 상온사, 사도부(司徒部) 같은 지방 행정 기관을 두어 부를 관리했다. 대부족은 4대왕부로 오원부 · 육원부 · 을실부(乙室部)· 해왕부(奚王部)로 구성되어 있고 북대왕부가 오원부, 남대왕부가 육원부, 을실 대왕부가 을실부, 해왕부가 해인들을 통치했다. 북대왕부(北大王部)와 남대왕부(南大王部)는 군사 문단에 상술했듯이 중경의 군사 업무도 담당했다.

해인은 해왕부에서 전담하지 않고 해왕부 소속 6부, 남재상부의 7부, 소속 미상의 1부로 편성했다. 해인들은 초기부터 복속한 부족으로 요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바 있으나, 요의 통치가 개선되고 해인을 거란인과 동격으로 대해줌에 따라 거란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소부족은 34개로 되어 있고 절도사가 통제했다.

부에는 하위 행정 단위를 설치해서 미리 - 석렬 - 부의 구조로 조직했다. 미리(彌里)는 부의 최하위 행정 단위로서 거란어로 작은 마을을 뜻한다. 미리의 장관은 갑살융(甲撒狨)이며 미리는 중국의 군현제로 따지면 향에 해당한다. 석렬(石烈)은 거란어로 마을(鄕, 향)을 뜻하며 군현제로 따지면 현에 해당한다. 석렬의 장관은 신곤(辛袞), 아서(牙書)이며 부마다 최소 2개, 많게는 14개의 석렬을 설치했다.[14] 부의 장관인 절도사는 행정 · 군사 · 사법권을, 사도가 민정, 판관은 사법, 상온이 또한 군사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지방의 모든 관원은 조정에서 임명했으나, 부민들의 추대를 받아 절도사가 되거나 유력자들이 절도사의 선출에 개입하고 절도사직을 세습한 사례가 있기에 기본적으로 주요 직책들은 임명직이지만, 예외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부족은 사회적 조직이기도 했다. 요는 유목민들에게 세금과 요역, 군역, 변경 수비 임무를 부과하는 한편, 각 부의 목초지 범위를 설정해주고[15] 부의 유목민들이 목축과 농업을 비롯한 각종 경제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부의 장관은 일종의 경제 관료이기도 해서 부의 경제를 발달시키고 생산을 독려했으며 민생에 신경썼다. 그래서 상당수의 장관들이 경제 활동을 잘 이끌었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고, 부민들의 추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는 다민족, 다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각 부에는 한인 포로, 발해인 같은 정주민과 해인 · 몽골 · 돌궐 · 여진인과 같은 비 거란계 유목민들도 함께 살았기 때문에 부는 민족간의 융합을 촉진하고 부에 소속된 소수 민족들의 정체성을 희석했다.

2.2.1. 두하주 & 알로타 & 궁장

요에는 두하주(頭下州)라는 행정 단위도 있다. 두하주는 국가의 통제를 받는 주현이 아니라 황족, 귀족들이 세운 개인 영지로서 포로로 잡아온 한인과 발해인, 해인을 비롯한 유목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유목도성이다. 규모가 작은 것은 두하군(頭下郡)이라 불렀으며 가장 규모가 큰 곳은 1만호, 평균적으로 수천 호가 거주했다. 두하주와 두하군은 영주가 직접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않고 중앙에서 파견한 절도사들이 두하주의 부세를 징수한 후, 일부를 영주에게 지급하는 형태였다.[16]

초기부터 황제권을 강화하던 요 왕조가 두하주를 세운 것은 국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종의 봉건제를 도입해 지역 개발과 국경 방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의도는 적중하여 초원으로 끌려 온 정주민들은 새로운 땅에서 농사를 지어 목초지를 농경지로 바꾸고 황량한 초원에 상공업을 일으켰다. 요가 강성해지면서 두하주는 점점 그 숫자가 계속 늘어나, 연운 16주에 버금갈 정도의 인구를 자랑했다. 또한 두하주는 초원 지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하나의 교역 거점이 되어 무역과 상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두하주는 황족과 귀족을 비롯한 유목 귀족들의 권력 기반이 되어 이들에게 많은 부를 제공했다. 그러나, 두하주의 원래 목적(지역 개발, 방위)이 달성되었다고 판단한 황제들이 유목 귀족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온갖 명목을 붙여 두하주를 몰수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국가로 귀속되어 성종대에 완전히 사라졌다.

궁장(宮帳)은 황제들이 세운 궁(宮)과 황족과 외척들의 부족, 요련 연맹 8부에서 기원한 9개 부족들을 일컫는 횡장(橫帳)을 뜻한다. 먼저 황제는 귀족, 황족들이 두하주를 설치한 것처럼 알로타(斡魯朶)라는 직할령을 두었다. 알로타는 한어로는 행궁을 뜻하고 오르두라고도 부른다. 오르두에는 황제를 수행하는 행정 기관인 도부서사(都府署司)와 군대인 궁위기군(宮衛騎軍), 오르두에 소속된 저장호(著帳戶)와 궁분호가 있어서 황제들은 순행할 때마다 오르두에 머무르고 업무도 함께 처리했다.

도부서사의 장관은 도부서(都府署), 또는 궁사(宮使)라고 부르며 궁사는 오르두의 호구·재정·사법을 담당하고 궁위기군도 지휘했다. 요 왕조는 오르두에도 각 민족의 특성에 맞춰 통치한다는 인속이치의 원칙을 적용해 도부서사를 거란행궁도부서(契丹諸行宮都府署)와 한아행궁도부서(漢兒諸行宮都府署)로 분할하고 각자 오르두 소속의 유목민과 정주민의 통치를 전담케 했다.

황제가 순행 중일 때는 현 황제가 세운 오르두가 소금위(小禁圍)를, 다른 오르두에서 대금위(大禁圍)를 조직해 황제를 호위했다. 요의 황제들은 권력 기반을 다지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즉위하는대로 자신만의 오르두를 만들었고, 그래서 요에는 총 13곳의 오르두(12궁 1부)가 존재했다.

오르두의 전체 인구는 20만 4천호에 장정 4만명으로 그중에서 거란인이 8만 호, 번한호(여진, 발해, 한인)가 12만 4천호이다. 오르두에 속한 주현은 황제와 황후들이 사용하던 궁장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히 할당한 곳으로 황제의 개인 영지이나, 성종 이후로는 점차 조정에 귀속시켜 오르두 소속의 주현은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다음으로 황족과 외척, 요련 연맹 시기의 8부족을 재편성한 횡장(橫帳)은 총 3종류로 요련 연맹 8부가 기원인 요련 9장(遙輦九帳), 황족 4장(皇族四帳), 외척 가문인 소씨들로 구성한 국구 5장(國舅五帳)이 있다. 그중에서 황족 4장은 야율씨의 방계 일족인 횡장(橫帳),[17] 아보기의 선조 균덕실의 자손들이 수장을 맡는 맹부(孟父), 중부(仲父), 계부(季父)의 3방(房)으로 구성되어 있어 1장 3방이라고도 하며 여기에 속한 황족들을 일컬어 사장황족(四帳皇族)이라 부른다.

요련 9장과 황족 4장은 내부적으로 상곤사(詳袞司)와 상온사, 사리사(舍利司) 등의 부서가 정무와 군무를 담당하고 대척은사의 통제를 받았다. 후족(后族)인 국구 5장은 횡장과는 별도로 대국구사(大國舅司)에서 정무를 맡았다. 횡장과 유목민 부의 차이점은 횡장은 개인이 수장직을 세습하지만, 유목민 부는 수장이 임명직이란 점이다.

2.2.2. 속국과 속부

요에 복속한 유목민(속부)과 속국은 총 53개 부족과 60개 속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면관이 관장했다. 속부는 호적에 등재하지 않고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지원을 해줄 의무를 부과받았다. 각 몽골 부족에 상온사나 절도사사를 설치하고 지역에 상위 행정 기관을 세워 통제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절도사들이 인민을 제대로 위무, 관리하지 못하고 불만만 양산해 반란이 빈번했으므로 원래 부족의 수장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자치권을 주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숙여진, 여진 오국부, 달노고, 올야, 철려, 실위, 당항의 부족들도 마찬가지로 자치권을 받고 요에 복종했다.

수장들이 받은 직책은 높게는 왕급이며 낮게는 부사급이다. 태사나 상온의 직책을 받은 이들도 있어 각 부족별로 그 지위가 상이하다고 볼 수 있으며 각 부족의 지배층들에게도 별도의 관직을 하사했다. 이들이 요 왕조로부터 받은 직책과 관인은 권력 기반이 되어주었다.

요 조정은 속국과 속부들과의 조공 무역을 진행해 조공품을 받고 그 대가로 하사품 주었다. 조공 무역은 속국과 속부는 물론, 요 왕조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상업적인 이익과 교류의 확대는 상호 간의 우호 관계로 이어졌고 송이 요에게 세폐를 주고 전쟁을 억제하듯이 요 왕조도 조공 무역을 이용해 속부의 반란을 억제할 수 있었다. 만약, 반란이 일어나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하사품과 선물, 각종 이익이 끊기면 그 동안 무역의 혜택을 보며 경제 규모가 커진 부족이 수입 감소로 고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밖에도 자연재해가 터지거나 기근이 발생하면 속부를 진휼하고 도움을 주었다.

자치권을 주고 공물만 받으면서 간접 지배하는 것이 꽤나 느슨해 보일수도 있으나, 요 왕조는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생기면 속부에 절도사나 상온을 파견하고 부족민들의 원성을 사거나 반란을 일으킨 부족장은 해임하고 조정에서 절도사를 파견했다. 만약 반란을 일으키면 속부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부족을 해체하는 식으로 통제력을 유지했다. 또한 속부의 영토에 초토사나 통군사 같은 행정 기관과 군사 기지를 지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유목민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요는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유목민 부족장들의 친족을 인질로 받았다. 요 조정은 인질로부터 부족의 사정을 청취하고 민원을 해결해주었으며 수도로 온 인질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관료나 무관으로 기용했다. 또한 돌아갈 때가 되면 높은 관직을 주어서 부족 내부에서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의 정당성을 세워주었기 때문에 인질 제도는 여러 부족들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소속된 유목민 부가 반란을 일으키면 인질은 무조건 죽였다.

만약 전쟁이 나서 요가 군대를 요구하면, 속국과 속부는 무조건 군대를 제공해야 하며 불응하면 요의 토벌을 각오해야 했다. 다만, 서하의 원병 제의를 요가 거절한 사례가 있고 전시에 속국과 속부의 병력을 동원하는 일은 비교적 적었다. 그리고 요는 속국에 대한 내정 간섭과 원병 파견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요가 내정에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고 반란과 내전 때문에 서하의 원병 요청을 여러 차례 거절해서 서하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일도 있었다.

요 왕조의 속부 통치 전략은 당의 기미주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서 관직 하사와 군사 기관 설치, 조공 무역, 병력 요구 같은 정책은 모두 당에서도 시행하던 것이다.

부족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고 유능한 절도사들이 각 부족을 잘 안무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요는 소수민족과 속국을 철권으로 통치하고 관용과 자비는 선택 사항으로 여겼다. 그래서 비거란계 유목민, 발해인, 여진인과 같은 요의 소수민족들은 정치적 억압, 사회적 차별, 경제적 수탈에 당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요 조정은 여러 민족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해서 해인들은 거란인과 동급으로 우대하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인들은 신경써서 대우한 반면, 발해인들에게는 강온양면책을 쓰고 여진인들은 아주 가혹하게 대했다.
2.2.2.1. 몽골인 통치
위구르 제국이 붕괴한 뒤, 키르기즈가 몽골 초원 지역을 장악하지 않고 예니세이로 돌아가 버리자, 힘의 공백이 발생해 아르군 강과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실위계 민족들이 몽골 초원으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일부 투르크계 부족들이 초원으로 들어왔다. 삼림 수렵 민족으로 살던 실위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원이 풍부한 초원에 정착한 뒤부터 유목민으로 변화해 갔다. 이들 중에 타타르를 비롯한 일부 부족들은 연맹을 구성해 세력화했으나, 요에 맞설 수준은 되지 못해서 요 태조와 태종은 몽골 초원으로 원정해 몽골인들을 복속시키고 위구르 제국의 고토를 차지했다.

원래 몽골 초원의 주인이던 위구르인들은 대다수가 서부와 남부로 이주했으나, 본토에 남은 위구르인들도 일부 존재했다. 이들은 요대 초기의 몽골 원정 중에 포로로 잡혀 부에 편성되거나, 요 왕조에 의탁해 속부가 되었다. 성종대에 새로이 설립한 34부 중, 설특부(薛特部)가 위구르인으로 편성한 부족이며 위구르인 속부는 요사 영위지에 기록된 회골부(回鶻部)이다.

982년, 성종은 초원에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초원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했다. 1003년에는 위구르 제국의 중심지였던 카툰성을 수축하고 진주로 개칭한 뒤, 인근에 유주 · 방주를 설치하고 건안군 절도사사를 세워 톨라 강과 오르콘 강 유역을 관할하도록 했다. 3개 주 중에서 톨라 강 하반의 진주가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며 많은 수의 병사와 주민들이 거주했다.[18]

요는 몽골계 유목민들의 통제와 방비를 위해 흥안령 산맥(興安嶺. 싱안링 산맥) 서쪽에서 몽골 칠렝긴 톨고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700 ~ 1,000km)의 장성을 건설하고 곳곳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 소위 칭기즈칸 장성이라 알려진 성벽은 동쪽으로는 에르구네 강에서 시작해 오논 강 남쪽에 이르며 성벽 높이는 1 ~ 2m, 해자는 3 ~ 4m이다. 다만, 칭기즈칸 장성은 금계호라 부르는 금국의 영북로 방어선과 구간이 겹치기 때문에 요대의 장성과 군사 기지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요와 몽골 부족들간의 관계는 우호와 적대가 섞인 매우 복잡한 애증 관계였다. 몽골의 각 부족들은 속부로서 공물을 바치고 요 조정은 국경 곳곳에 각장을 세워 조공 무역을 진행하고 하사품을 내렸다. 여러 몽골 부족들은 요와 교류하면서 획득한 선진 기술과 문화를 흡수하여 내부 발전에 활용하고 일부는 요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충성심을 유지해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몽골 부족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통제에 저항하고 요 조정을 근심케 했다. 이는 요 왕조와 몽골 부족간의 불편한 감정 외에도 양자 간의 입장 차이가 작용했다. 요 왕조 입장에서는 유목민들의 통제를 위해 각 부족의 영유지를 정해놓고 이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좋지만, 유목민들 입장에서는 자연 재해나 지역의 자원 고갈, 부족 간의 갈등 문제 때문에 이주의 자유가 필요했다.
2.2.2.1.1. 오고 · 적렬부
몽골 오고부(烏古部)는 실위계인 오소고(烏素固)의 일파로 추정하며 해륵수(海勒水. 현대의 아르군 강. 한어 : 해랍이하. 海拉爾河) 일대에 거주했다. 아르군 강 이북에 거주하는 이들을 삼하(三河) 오고부, 아르군 강 이남에 거주하는 이들은 오고부라 불렀다. 오고부의 영토 서쪽에는 적렬, 동쪽에는 실위, 동남에는 거란이 거주했다.

오고부가 요에 신종하게 된 것은 요 태조 신책 4년(919년)에 황태자 야율배가 오고를 정벌하면서부터였으며 이때 오고부는 14000명의 포로와 많은 물자를 약탈당한 끝에 일부는 직할 부족으로 편성되고 나머지는 요에 복속하고 조공을 바치는 속부가 되었다. 오고날랄부(烏古涅剌部)과 도로부(圖魯部)가 포로로 끌려온 오고인들로 구성된 부이다. 통제 강화를 위해 요 조정은 오고와 적렬에 절도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요가 비옥한 오고의 초원에 인민들을 이주시켜 오고부의 땅을 개척하고 오고부가 쓸 방목지를 줄여 버리자, 오고부는 이때부터 요의 개척과 토지 침탈에 저항하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성종대에 오고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뒤에는 통치력을 개선하고 반란을 막기 위해서 포로로 잡아온 오고부의 인민들을 알돌완(斡突盌) 오고부로 편제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오고의 부족들을 진휼했다.

적렬부(敵烈部)는 케룰렌강 하류에 살던 유목민족으로 8부로 구성된 연맹이며 오고와는 친척으로 간주받았다. 요는 성종대의 반란 이후, 요는 사로 잡은 적렬인 포로들을 북적렬부(北敵烈部)와 질로적렬부(迭魯敵烈部)로 편성하고 통제를 강화했다. 알돌완 오고부와 북적렬부, 질로적렬부는 모두 요의 서남과 북부 국경 지역을 방어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적렬이 어떤 민족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여러 중국의 사서에서 그들을 정령(丁零) · 고차(高車) · 철륵(鐵勒)의 분파로 보았기에 투르크계일 가능성이 높다.

요 태조가 오고를 정벌할 때, 적렬도 함께 정벌했다. 930년(요 태종 천현 5년)에 적렬은 요에 항복했으나, 이후로도 계속 요에 반항했다. 이 때문에 성종은 994년(통화 12년)에 소호련과 소달람에게 적렬 경략을 명했다. 소호련은 적렬부의 영토에 진주 · 방주 · 유주의 3개 성을 세워 여러 적렬 부족들을 통제하고 위무하는 한편, 몽골 초원에 산재한 조복 부족들의 반란에 대비했다. 이러한 조치가 효과를 내서 조복의 여러 부족들이 비로소 요에 신종하고 오고, 적렬, 조복에 대한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요 도종 함옹 4년(1068년)에는 오고 적렬 통군사를 설치해서 오고, 적렬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마고사의 난 이후, 요는 몽골 초원에 대한 통제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고, 적렬부가 초원의 반항적인 부족들과 연계하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1096년(요 도종 수창 2년)에 오고, 적렬 양대 부족을 오납수(烏納水. 아마도 눈 강으로 추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 이후에 야율대석이 가돈성으로 와 인근 주의 지방관들과 부족장들을 소집하자, 오고부와 적렬부의 일부가 그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야율대석을 따라가지 않은 나머지는 금에 항복했다.
2.2.2.1.2. 조복
요는 오르콘, 툴라, 케룰렌 강 일대와 인산 산맥 남부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을 모두 조복(阻卜)이라 일컬었으며 북조복, 서조복, 조복찰랄(阻卜札剌)로 분류했다. 북조복과 서조복은 몽골 초원의 제세력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조복찰랄은 다찰랄부(茶札剌), 즉 잘라이르 부족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는 조복의 부족장들을 대왕이나 절도사, 태사, 상온으로 임명하고 초토사로 이들을 관리했다.

몽골 초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케레이트[19] 한어로는 극렬(克烈)이라 하며 요는 그들을 조복, 또는 북조복이라 불렀다. 케레이트라는 명칭은 검다는 뜻을 가진 투르크어 KARA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며 케레이트 부족의 피부가 다소 어두웠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추정한다. 케레이트는 세력이 큰 부족으로 도종대에 연맹 수장인 마고사(磨古斯)가 여러 몽골 부족을 규합해 수차례에 걸쳐 요의 진압군을 격파하고 요의 몽골 통치력을 붕괴시킨 바 있다. 마고사는 칭기즈칸의 시대에 케레이트를 이끌었던 옹칸(王罕)의 조부인 마아홀사(馬兒忽思), 즉 마르쿠즈 부이룩 칸으로 추정한다.

나이만은 투르크계에 속하며 한어로는 내만(乃蠻)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서쪽으로는 이르티시 강, 동쪽으로는 타미르 강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한 강대한 세력으로서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신앙해서 기독교 성직자들로부터 지식을 전수받고 천산 위구르나 탕구트 같은 선진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위구르 문자를 받아들이는 등, 다른 몽골 부족들보다 문화 수준이 높았다. 요 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금국과의 거리가 멀고 서요와는 가까워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몽골 부족들이 요의 관인을 금에 바치고 금의 관직과 관인을 받을 때도 계속 서요에 신종했다. 나이만은 1175년(서요 숭복 11년, 금 대정 14년)까지 서요에 충성하다가 1176년부터 서요의 관인을 금에 바치고 금국에 신종했다.

바이칼 호 남쪽의 셀렝게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메르키트는 목축과 수렵에 종사했으며 일부 부족민은 농사도 지었다. 메르키트는 호전적인 부족으로 유명해 요가 멸망하고 초원의 통제가 풀린 뒤부터는 여러 몽골 부족들과 상쟁을 벌였다. 케레이트, 나이만과 마찬가지로 메르키트도 부족민 중 일부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신앙했다.

초원 동부의 타타르는 키르기즈인들이 9성 타타르의 나라(Toquz Tatar Eli)라고 부르거나 송의 사신 왕연덕(王延德)이 구성 달단(九性 韃靼)이라 부른 사실로 볼 때, 연맹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에서는 타타르를 조복의 일파로 간주했으며 송에서는 타타르를 달단이라 칭하거나 백달단(白韃靼)이라 부르는 옹구트 부족과 구분지어 흑달단(黑韃靼)이라 불렀다.

옹구트는 내몽골 음산 산맥(阴山山脉. 인산 산맥) 대청산(大靑山. 다이칭산) 북부 지역에 살았다. 백달단, 또는 숙달단(熟韃靼)이라고도 불렸다. 막북에 거주하는 타타르를 비롯한 몽골 부족들은 반대로 흑달단, 또는 생달단(生韃靼)이라고도 불리었다. 요는 유목민 약탈자들을 막고 서하 방면 국경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위주에 요새(위주새 衛州塞)를 세우고 옹구트족에게 요새를 지키고 위주의 통로를 보호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타타르와 옹구트, 운기라트 부족은 영토 안에 비단길의 하나인 초원길이 지나고 있어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다. [20] 또한 이들은 지리적으로 선진국인 송, 요, 서하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다른 몽골 부족들보다 기술력이나 문화 수준이 높았고 부족 내부에는 농사를 짓는 이들도 일부 존재했다. 또한 타타르, 옹구트, 운기라트는 거리가 가까워서 다른 부족들에 비해서는 충성심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깝다는 점이 독이 되기도 했는데, 금군이 상경을 함락하고 여러 몽골 부족들에게 신종을 요구했을 때에 가장 먼저 항복하고 요의 관인을 바친 부족들이기도 했다.[21] 이 조복 부족들 또한 오고, 적렬부처럼 일부는 야율대석을 따라 서쪽으로 이주하고 나머지는 금에 항복하거나 독립했다.

3. 세금 제도

요 왕조는 이원 지배 체제를 구축한 만큼, 유목민과 정주민에 대한 세금 제도가 달랐다. 건국 초기에는 초보적인 수준에서 세금과 공물을 징수했으나, 요 태조의 지시를 받은 한연휘가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조세 제도를 제정하면서 체계적으로 세금을 걷기 시작했다. 태종대에는 당과 발해, 오대의 제도를 참고해서 제도를 재정비하고 효율을 높였다. 성종은 조세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고 토지와 재산을 조사해 세금 대장을 새로 개정했다. 이 과정에서 세금 부담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인민의 원성이 높자, 성종은 세금을 감면하고 지역별로 조세와 요역을 형편에 맞게 부과했다. 이로써 국가의 조세 제도가 완비되었다.

조세는 지역마다 세율을 다르게 책정했다. 강제 이주당한 발해인들이 많이 사는 동경도는 토지세를 감면해주고 관영 시장에서 장사할 때도 세금을 걷지 않았다. 상경도와 중경도는 정주민들의 신분과 지위, 재산 수준이 제각각이라 세금 부담이 모두 상이했다.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전한 연운 16주에서 보내오는 막대한 세금은 국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로서 정치 · 경제 · 군사 ·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반적으로 요의 세금 부담은 송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 송이 보내주는 세폐 30만냥(흥종 이후 50만으로 증액) 덕에 재정에 여유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역적으로는 무역세, 상세 면제에 전매제도 느슨하고 부세도 낮은 동경의 세율이 제일 낮지만, 상경과 중경도 세금 부담이 비교적 적은 편이고 가장 조세 부담이 높은 남경 지역도 한인들이 송으로 도망치는 일이 없어서 역시 세 부담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대와 송의 세금 제도인 절변(折變)도 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절변은 규정된 세금(현물이나 화폐) 대신에 대체품을 받는 것인데, 아래의 전부(田賦) 문단에 서술한 대로 양세를 현물로 대납하는 것도 절변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절변은 규정된 세금을 바치기 어려운 지역민들의 호소를 중앙 정부가 받아들여주거나 중앙의 편의에 따라 정하는 일이 많은데, 요 왕조에서 지역별로 절변을 허용한 곳으로는 남경과 서경이 있다. 남경에서는 염철세를 비단으로 대납하고, 서경에서는 양세를 곡물로 대납했다. 명신 야율말지가 개원군 절도사로서 인민의 세 부담을 줄여준 것도 개원군의 주민들이 동전 대신에 납부하던 곡물의 가치를 종전의 5전에서 6전으로 증액해준 것이다.[22]

정주민에게는 토지세인 전부(田賦)와 노동력 징발인 요역(徭役)을 부과하고 정기적으로 괄전(括田. 장량(丈量) 토지 조사)과 괄호(括戶. 인구 조사)를 실시해서 조세 공정성과 효율성을 제고했다. 전부는 당과 오대의 제도를 따라 양세법(兩稅法)을 적용해 여름과 가을에 하세와 추세를 징수했으나, 중국에서처럼 완전 전납은 아니어서 현물로 세금을 바치는 것도 허용했다. 또한 영토가 광대한 요는 북부와 남부의 기후는 물론이거니와 작물의 생장 속도도 달라서 특정 지역의 환경에 맞춰 곡물을 징수하면 다른 지역에서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후당의 제도를 적용해 보리와 밀, 완두의 납부 기한을 6월부터 9월까지로 정했다.

농토는 공유지인 관전(官田)과 사유지인 사전(私田)으로 분류하고 사전은 무(畝) 단위로 계산해서 토지세를 징수했다. 관전은 다시 둔전(屯田)과 한전(閑田)으로 나뉘는데, 둔전에서 징수한 둔전미(屯田米)는 창고에 저장해 비상시에 대비하고 군량미로 썼으며 함부로 대출해주지 않았다. 한전은 유민들을 정착시켜 버려진 땅을 개간한 토지로서 처음 경작하는 유민에게는 토지세를 몇 년간 면제해주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경작권을 인정하고 전부를 징수했다. 한전을 경작하던 유민이 추가로 한전을 빌리면 소작료를 걷었다.

요역은 한제(漢制)를 따라 재산을 기준으로 등급을 정하고, 조세 공정성을 위해 정기적으로 재산 조사와 호구 조사를 실시한 뒤에 부과했다. 정주민들이 부담한 요역은 매우 다양해 역체(驛遞) · 마우(馬牛) · 기고(旗鼓) · 향정(鄕正) · 청예(廳隸) · 창사(倉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화물과 세금 운송(역체), 중요 화물 보관(창사), 치안 유지(향정), 관청의 공공 사업(청예), 하천 정비와 도로 공사 같은 일이 많았다.

한인과 발해인들로 경주군과 금군을 편성한 예로 보아 정주민들도 군역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군역은 주로 유목민들이 부담하고 정주민들은 주로 요역을 담당했다. 당시 요에서는 기병 1명당 4명의 봉족(奉足)을 할당해서 정주민으로서 봉족의 의무를 부담하는 이들이 존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요 왕조의 잡세에는 염 · 철세, 주세 · 농기구세 · 가죽세 · 비단세 · 의창속(義倉粟)과 상세(商稅) 등이 있다. 다른 중국 왕조와 마찬가지로 요 왕조는 염 · 철과 술에 대한 전매를 실시하고 염 · 철세와 주세로 막대한 세수를 확보했다. 그래서 요 왕조에서 염 · 철세와 주세, 상업세의 수취는 매우 중요했다.

효율적으로 잡세를 징수하기 위해 조정은 5경에 전운사와 탁지사를 비롯한 재정, 잡세, 상업 등을 담당하는 관청을, 각 주현에도 상세, 염 · 철세, 주세를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상경은 염철사(鹽鐵使)와 도상세원(都商稅院), 중경은 탁지사(度支使), 동경은 호부사(戶部使)와 전운사(轉運使), 국원(麴院), 남경은 도국원(都麴院)과 상세도점검(商稅都點檢), 주방사(酒坊使), 서경은 상세점검(商稅點檢)을 설치하고, 주현에는 도감(都監)과 염원사(鹽院使)와 철원사(鐵院使) 같은 원사(院使)를 설치했다.

목축을 업으로 삼는 유목민들은 매년 보유한 가축의 수에 맞춰서 가축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징발했다. 요 왕조의 유목민 세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대의 원 왕조에서 보유한 가축의 1%를 징수하는 가축 추분세 제도를 운영한 바 있기에 요 왕조도 그렇지 않았나 추측한다.

부에 소속된 유목민들은 주로 교량과 도로 건설, 하천 정비 등의 공사를 하는 요역을 수행하고 군역도 부담했다. 군역은 유목민들에게 가장 부담이 큰 역으로 전시가 되면 스스로 무기와 말을 준비해 절도사를 따라 전장에 나서고, 평시에는 변방을 수비했다. 군역을 질 수 없는 노약자는 마을에 거주하면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했다.

유목민들도 정주민들처럼 잡세를 부과받았다. 절도사들이 조정에 매년 진봉하는 안장과 말, 진귀한 재화들은 모두 유목민들에게서 수취한 것이어서 유목민들은 가축세와 요역 외에 별도로 사치품과 가축을 납부해야 했다. 또한 조정은 급하게 재원이 필요하면 귀족과 관료, 황족들의 재산을 헌납받고 경조사, 황제와 태자의 결혼 예물, 혼수품, 결혼 비용, 능원 조성 비용, 관료 하사품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이 조정에 헌납하는 세금은 모두 부와 장원에 소속된 인민들에게서 징수하는 것이어서 지배층들에게 ‘특별세’를 걷는 것은 인민에게 부가세를 징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속국과 복속한 유목민들에게는 공물을 징수했다. 조복(阻卜)은 말과 낙타 같은 가축과 담비, 날다람쥐 가죽을 공물로 바치고, 여진 오국부(烏國部)와 오야부(烏野部)는 가축 · 진주 · 가죽 · 인삼 · 사금 · 밀랍 · 노예 등을 바쳤다. 오외부(烏外部)와 몽골 오고부(烏古部)는 담비와 날다람쥐 가죽을 바쳤으나, 생산량이 적어 성종 통화 6년에 소와 말로 대체해줄 것을 청원하여 그 때부터 소와 말로 대납했다. 천산 위구르는 옥 · 진주 · 호박 같은 보석과 마노 세공품, 금속 공예품 · 모직물 · 유향 · 가죽을, 고려는 직물과 인삼 · 종이 · 먹 · 술 · 공예품을 조공했다.[23]

요 왕조는 한인 왕조에 준하는 정교한 조세 제도를 구축했으나, 문제점이 많았다.

주현에 거주하는 자영농은 국가에 토지세만 부담하면 되지만, 소작농들은 토지세 뿐만 아니라 소작료도 부담해야 했다.[24] 귀족과 황족의 개인 영지인 두하주에 거주하는 두하호와 불교 사찰에 거주하는 사원호(寺院戶)들은 국가와 영주 모두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세금을 두 번 낸다고 해서 '이세호(二稅戶)'라고 불렸다. 일반 소작농들은 나름대로 재산을 모아 자영농으로 성장할 수 있고 두하주는 국가 정책으로 일반 주현화해서 두하호들도 평민이 되지만, 사원호들은 요 조정의 불교 우대 정책 때문에 요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이중으로 세 부담을 져야 했으며 최종적으로 금 세종의 이세호 해방령이 있기 전까지 계속해서 사원과 국가에 조세를 바쳤다.

요역 제도의 경우, 지역별로 요역 부담이 불균형하고 정주민의 요역이 유목민보다 더 과중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부담하는 정역(正役)외에도 불규칙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부과하는 잡역(雜役)도 많았다. 전시에는 세금이 오르고 잡역 징발도 늘어나서 요의 인민들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중으로 부담을 졌다.

게다가 요의 영토는 매우 광대해 물품 운송과 가축 제공, 화물 보관, 치안 유지 등의 요역은 그 역이 과중하고 교통의 요지나 행궁이 머무르는 지역은 그야말로 부담이 극심해 파산을 해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역들은 후대의 명 왕조 시절에도 문제가 되던 것이었으니, 그 부담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요역 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한 일부 관료들이 개혁을 실시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마인망(馬仁望)은 송산 현령(松山 縣令) 시절에 요역 부담이 과중한 송산현(松山縣)의 요역을 줄여주고, 남원 추밀사(南院 樞密使)를 역임하면서 인민들에게 돈을 걷는 대신에 노동자를 고용해 요역을 맡기는 모역제(募役制)를 시행해 요역 부담을 줄여주었다.

삼하 현윤(三河 縣尹) 유요는 공사를 장인들에게 맡겨 백성들의 요역 부담을 감면하고, 요역 징발 과정에서 재산만을 기준으로 삼는 원칙을 적용해 인민을 3등급으로 편성하고 공평하게 요역을 부과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유요는 가문의 위세와 평판을 이용해 기득권층과 부호들이 요역을 회피하는 폐단과 관리들이 양민을 혹사시키고 재산을 강탈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 개혁책들을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지역 단위의 개혁으로만 남았다는 한계가 있고 요의 국력이 이미 쇠퇴한 시점에서 시행한 것이라서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나 마인망의 모역법(募役法)은 요의 인민들이 버거워하던 군역과 요역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것이었는데, 확대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25]

명 왕조와 비교하자면, 명은 이갑제에 기초해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작성하여 세금을 걷는 조세 제도가 붕괴하여 서민층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기득권층은 관료, 서리와 결탁해 궤명자호(詭名子戶), 궤명기산( 등의 방법으로 세금을 회피하고 자신들이 납부해야할 것들을 서민들에게 전가했다. 이 상황에서 개혁적인 지방관과 의식 있는 신사들이 양보와 타협에 기초한 개혁을 실시해 사회적 모순을 완화하고 조세 공정성을 확보하려 했다.

균요법(均徭法), 보갑법(保甲法), 관수관해, 강남의 징일법, 균전균역법(均田均役法), 하북의 십단법(十段法) 등이 명대 중, 후기에 시행한 대표적인 개혁책들이다. 이러한 지역 단위의 개혁이 이뤄지고 사회적 공감대가 생겨나면 여론의 영향을 받은 조정에서 여러 개혁책들을 비교, 분석하고 단점을 보완해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이렇게 전국화된 제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강남의 징일법을 보완해 만든 일조편법(一條鞭法)이다. 반면, 요 왕조는 지역 단위의 개혁만 일부 이뤄졌고 황제들이 개혁안들을 거부하거나 체제 정비를 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중흥을 이루지 못하고 멸망했다.

군역의 경우, 원래 공평하게 교대로 복무하게 되어 있지만, 어쨌거나 일을 해야 할 장정들이 군역으로 빠져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목축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혔다. 게다가 전민 개병제를 채택한 요는 군역 부담자가 무기와 갑주, 군마, 활, 화살 등을 직접 자비로 갖춰야 해서 군역 부담이 높았다. 또한 군사 안보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서북과 동북의 국경 지역은 전쟁이 잦고 물자와 인력을 보내기가 까다로워서 군역을 지러 온 이들이 파산하는 일이 빈발해 민생과 국가 안보에 큰 문제가 되었다.

원래 국경 수비 군역을 부담하던 부유층들이 파산해서 군역 수행을 못하게 되자, 요는 중산층과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군역을 징발해 서북과 동북 국경으로 보냈다. 국경 방위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대체 인력을 징발한 것이었지만, 부유층들조차 파산하는데 그보다 재산이 적은 이들에게 군역을 부과했으니 파산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흥종대부터 군역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고 수많은 서민들이 군역을 지다가 파산하는 일이 속출했다.

군역 문제를 인식한 변경의 지휘관들과 여러 관료, 지식인들이 국경을 재설정해서 수비할 지역의 범위를 줄이고 유목민들에 대한 요역 · 군역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몇 차례에 걸쳐서 개혁안들을 상주했으나, 당시 황제였던 흥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주요 군역 부담자인 거란인 평민들과 중산층들이 몰락해서 요의 군사력이 약화되고 민생이 어려워졌다.

잡세의 경우, 빈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의창을 설치해놓고는 농민들에게 의창속이란 부가세를 걷어 의창의 운영 비용을 충당하고, 전비와 군마를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불시에 부호들의 마차와 말을 징발하는 문제가 있었다. 본래 의창은 국가가 조세로 걷은 곡물의 일부를 저장해놓고 빈민 구제와 가뭄 피해 원조에 쓰거나 지역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곡식을 조금씩 모아 운영하는 것인데, 의창의 곡식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조세 외에 별도로 의창속을 걷는 것은 국가가 빈민 구제 같은 복지 부담을 인민에게 전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마차와 말을 징발하는 것은 정해진 액수도 없고 형편에 따라 수시로 정하는 것이라서 인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외에도 조정에서 급히 재원이 필요할 때마다 각 지방에 은패천사(銀牌天使)를 파견해 인민의 재산을 강탈하는 폐단이 있었다. 은으로 된 패(銀牌)를 차고 다닌다고 해서 은패천사라 불리는 이들은 지방 관료와 속부의 부족장들에게 특별세 납부를 강요하고 제대로 양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들에게 장형을 가했다. 심지어는 죄 없는 부호들의 재산까지 마구잡이로 강탈해서 원성이 높았다. 은패천사들 중에서 가장 악질은 여진족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가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여진족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특산물과 재산을 강탈하고 부족장들에게 모욕을 주었으며 여진의 땅을 방문할 때마다 미녀를 요구하는 등, 온갖 패악질을 부렸다. 이러한 은패천사들의 만행은 여진족들의 반요 감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요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개선된 폐단으로는 타초곡(打草穀)이 있다. 타초곡은 말 그대로 가축을 먹이기 위한 풀과 군인이 먹기 위한 식량을 빼앗는다는 것으로서 요 왕조는 군대를 일으킬 때면 군인들에게 타초곡을 허가해 민간인들에게서 물자를 강제 징발하거나 약탈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날 때면 타초곡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특히나 요 태종이 개봉을 함락하고 난 후에 허락한 타초곡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후진의 한인들이 요에 저항하게 만들고 요군의 총퇴각을 야기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타초곡은 조정 내부에서도 곧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성종대에 인민에 대한 타초곡을 금지해 인민들의 불편을 없애 주었다. 그러나 성종의 금령 이후에도 몇 차례 타초곡을 행하는 일이 있어 폐단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리하자면, 요는 송보다 세금이 적은 편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세금 징발과 과중한 부역, 정주민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성종대에는 여러 차례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금 부담을 낮춰주어서 이런 문제점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흥종대부터 이러한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사회적 모순과 세금 부담이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흥종은 여러 관료, 인사들이 세금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책을 올리는데도 사안을 무시해 해결할 시기를 놓쳐버렸으며 흥종의 뒤를 이은 도종과 천조제는 사치에만 몰두하여 요의 쇠퇴를 앞당겼다.


[1] 요의 추밀원이 북면관제에 속해 있고 요사 백관지에 남추밀원을 북면관제의 이부에 해당한다고 기록하여 남추밀원을 북면관의 소속 기관으로 보는 학설도 있으나, 본 문서에서는 남추밀이 남면관의 업무를 맡아보고 소속 관원들도 대부분 한인, 발해인이어서 남면관제로 보는 것이 옳다는 학설을 채택했다. [2] 추가적으로 요사 백관지를 살펴보니 예부가 존재한 것으로 나오고, 일부 서적에서는 중서성이 당말 ~ 송대와 마찬가지로 기능을 상실했다는 내용이 나와서 중서성과 예부의 권한과 기능 차이, 요대 중서성의 기능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후에 내용을 수정, 보충하겠습니다. [3] 백습은 선비 또는 투르크 계열로 알려진 민족으로 문화는 거란과 유사하고 당대부터 해족에 복속해 점차 해인들과 융화되었다. [4] 아마, 송의 심관원(審官院)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한다. 송은 이부에서 인사권을 발령해도 심관원의 심사를 거쳐야 최종적으로 임용이 이루어진다. [5] 말기인 도종대까지도 이러한 폐단이 이어졌고, 발생하는 빈도도 적지 않았다. 3소 중 한 명인 소철(蘇轍) 또한 사신으로 오면서 요의 법 제도가 가진 폐단을 지적한 바 있다. '북조(요)의 정치는 거란인에게는 관대하고 연인(연운 16주인, 한인)에게는 모질었는데, 대개 옛 제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산전(山前)에 있는 여러 주의 기후(祇候)와 공인(公人)을 방문했을 때, 서민이 싸워 살상한 죄에 대한 판결은 폐해가 많았으나 강한 집안이나 부자에게는 이와 같지 않았다.' [6] 사실 이런 문제는 요나라 이후에 들어선 정복왕조인 원나라와 청나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원나라 시절, 지배계층인 몽골족이 한족을 죽이면 당나귀 한 마리 값만 물어내면 죄를 용서받았으나 한족이 몽골족을 죽이면 기본이 사형이었다. 또한 청나라 시절에도 지배 계층인 만주족 팔기군 병사 한 명이 무려 도시의 시장을 구타했는데도 무죄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유는 그 시장이 피지배계층인 한족이었기 때문이었다. [7] 요는 발해인들이 용맹하고 무용에 뛰어난 강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선봉에 세웠다. 죽게 만드려고 선봉에 보낸 것은 아니다. [8] 거란 오원부가 북대왕원, 육원부는 남대왕원으로 불렀다는 백관지의 내용이 있어서 '대왕원'과 '대왕부'가 다른 기관인지에 대해 조사한 후에 내용을 수정하겠습니다. [9]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기 위해서 송과 연결된 남경 일대의 교통상의 요충지에는 기병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논 농사를 금지할 정도였다. 이 금지령은 전연의 맹을 맺은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고 말기가 되어서야 폐지했다. [10] 1004년 송 - 요 전쟁 때는 4월에 출병해서 늦가을에 전주에 도착할 때까지 송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11] 원래 요에는 도(道)가 없는데 요사의 편찬자들이 오류를 범해 도가 있던 것처럼 서술했다는 학설도 있으나, 이 문서에서는 일단 요가 도를 편성한 것으로 서술한다. [12] 현재 차오양 (조양), 츠펑 (적봉) 시의 경계인 흑수진 즈음에 위치해 있다.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영성(닝청)현이다. [13] 당, 송처럼 향리제(鄕里制)를 실시하고 향촌 조직인 인보를 구성했다는 내용은 찾을 수가 없어서 향촌 지역은 조금 느슨하게 마을 단위로만 관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추가 조사 후에 수정하겠습니다. [14] 석렬은 적게는 몇 십호, 많게는 몇 백호가 있으며 1천 호를 넘기는 경우도 있다. [15] 수비할 지역과 이용할 수 있는 목초지는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했다. [16] 다만, 영주가 두하주의 관리들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주세를 제외한 모든 부세를 영주가 수취했다는 내용도 있다. 아마, 초기 단계에는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 싶으며 추가 연구 후에 수정, 보충할 예정이다. [17] 여기서의 횡장은 야율씨의 방계 황족들로 구성한 부족만을 의미한다. [18] 사족으로 3주에는 발해인들도 보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발해인들이 건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온돌이 발굴되기도 한다. [19] 케레이트는 몽골계인지 투르크계인지에 대해서 이론이 많은 민족이다. 투르크계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키르기즈나 위구르계로, 몽골계로 추정하는 학자들은 9성 타타르의 분파로 본다. 지배층은 투르크계, 피지배층은 몽골계로 파악하는 학자도 있다. [20] 말과 모피를 주고 유목민들의 생필품인 철기와 주요 무역 결제 수단인 비단을 받았다. 그리고 대상단 호위로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21] 그래도 야율대석이 금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진주로 탈출할 때에 운기라트 부족이 야율대석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22] 독자 연구 : 요사 식화지에서 이를 선정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송 왕조에서는 중앙 정부가 대체품의 가치를 임의로 조정해 규정된 세금 납부량보다 몇 배 이상 많은 재화를 갈취하는 일이 빈발했으므로 요 왕조에서도 이런 식의 착취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23] 요사와 고려사에 고려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왔다. [24] 송의 소작농이나 요의 소작농이나 바쳐야 하는 소작료는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자연구 : 동 시기 비잔틴의 소작농들은 토지세를 내지 않고, 송도 지주가 토지세를 전가하는 일은 있어도 원칙적으로는 소작농이 토지세를 내지 않는데, 요의 경우에는 소작농이 토지세도 납부한다는 점에서 요 조정이 송처럼 소작농 보호를 하지 않았거나, 지주의 입김이 강해 국가가 이것을 인정했거나, 송처럼 원칙적으로는 토지세를 내지 않지만, 지주가 전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5] 사족으로 비슷한 시기의 송도 범중엄이 경력 신정을 단행해 국가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마인망이 시행하려 한 모역법은 송의 왕안석이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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