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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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신종 원년인 1198년 5월, 당시 노비 신분의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노비해방운동. 일반적으로 역사학에서는 한국사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자연재해, 생활고, 탐관오리들의 수취 때문에 일어난 민란은 조선이나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에서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주동자가 뚜렷하게 신분 해방을 목표로 삼았던 경우는 만적의 난이 최초이다.2. 내용
만적은 당시 무신정권의 5번째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노비로 추측되는데[1] 미조이, 연복(延福), 성복(成福), 소삼(小三), 효삼(孝三) 등 5명의 노비와 함께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여러 명의 노비들을 불러 모으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2]경인년, 계사년 이래 나라의 높은 벼슬은 천민, 노예 계급에게서도 많이 나왔다.[3] 장수, 재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4]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근육을 고생시키며 채찍 아래에서 시달리겠는가? |
연설 당시 자리에 모였던 노비들은 만적의 말에 찬성했고, 노란 종이를 수천 장 잘라 '丁'자 모양을 새겨 표식으로 삼고 나서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운다. 우선 날짜를 정해 흥국사에 모여 회랑부터 격구장까지 인파로 가득 메운 후, 일제히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관노비들의 호응을 얻는다. 그런 다음 관노비들은 조정의 청사 내에서 권신들을 죽이고, 사노비들은 개경 성내에서 최충헌을 비롯한 각자의 상전을 때려죽인 뒤 노비 문서를 불태워 "삼한에서 천민을 없애버리자"는 것이었다. 노비들은 만일 이 난이 성공한다면 공경장상(公卿將相)의 높은 벼슬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정작 거사 당일인 5월 17일[5]이 되자 흥국사에는 몇백 명의 노비들밖에 안왔다. 이 정도 병력으로는 거사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만적은 하는 수 없이 날짜를 나흘 뒤인 5월 21일로 미루어 보제사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다. 배신자가 있을 것을 대비해 "일은 안 은밀하면 안 이루어지니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자리에 있었던 노비 순정은 거사가 실패할 것을 겁내 자신의 주인인 한충유(韓忠愈)에게 반란 계획을 고발해 버리고 만다.[6] 결국 순정의 밀고로 거사가 발각되고, 이를 한충유로부터 전해 들은 최충헌에 의해 만적을 포함한 100여 명의 가담자들이 붙잡혀 강에 산 채로 던져지는 죽음을 맞는다.[7] 이후 한충유는 종8품 율학박사(律學博士)에서 정7품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승진했으며, 순정은 공로를 인정받아 은 80냥을 받고 양인으로 면천되었다.
순정에게 상금까지 준 것을 이유로 사실 순정이 조정에서 보낸 첩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 역시 추측의 영역이다.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는데 막상 사람이 모이지 않아 거사를 연기한다고 하면, 다음이라고 사람이 충분히 모여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으므로 함께 죽느니 밀고하고 나만이라도 빠져 나와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그리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다.[8]
결국 만적의 난은 참여자 중 단 한 명만이 양인으로 면천된 채 실패로 끝났으나, 당시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시대에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려 했던 그들의 생각은 오늘날에 와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만적이
권력을 잡고 타락하기 이전의 최충헌을 따르는 부하이자 충직한 가노[9]로 나오기 때문에 반대로 순정과
미조이가 먼저 거사를 꾸민 것으로 각색되었다. 처음에 만적은 거사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고
가문에 오랜 기간 충성한 덕분에 면천될 기회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은 끝에 사람이 차별받는 세상을 뒤집고자 거사에 참여하게 된다. 설사 자기가 면천이 되어 살아간다 해도 귀천으로 갈린 신분 질서를 타파하지 않으면 혼자 잘 살아 뭐하냐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잃을 것은 노비 문적이고, 얻을 것은 천하를 얻을 것이다!"
순정은 밀고를 한 것이 아닌 거사 직전 붙잡혀서 고문당한 끝에 거사를 토설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최충헌도 만적을 동정해서 진압 직전 "지금이라도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라고 권고하지만 끝내 거부하고 동료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물에 수장된 노비들의 시신이 건져지자 유족들은 죽은 노비들을 보고 통곡했으며 홍련화는 죽은 만적을 울면서 위로한 것으로 연출되었다. 만적과 노비들은 관군에게 포위되어 저항하다가 패하여 참살당하는데 죽기 직전 만적이 남기는 말은 폭풍간지.
하늘이 사람을 세상에 내실 때 모두가 사람답게 살라 명하시었거늘 어찌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을 수 있겠소이까? 노비 문적 하나에 귀천이 갈리는 이놈의 세상을 뒤엎지 못하고 가는 것이 원통할 뿐이오이다! 허나 먼 훗날, 천노의 자식들이 귀천의 족쇄를 깨부수려다가 죽어간 선대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오니 후회는 없소이다.
-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에서는 주인공 김준의 아버지 김윤성이 이 반란에 연루되어 도망쳤기 때문에 김준은 절에서 숨어살다가 절조차도 반란에 연루되는 바람에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으로 그려졌다.
4. 같이보기
[1]
사실 만적이 최충헌의 사노비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며, 《
고려사》에는 만적이 사동(私僮)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적의 난 기사가 《고려사》 열전 최충헌 편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최충헌의 사노비라고 추정할 뿐이다.
[2]
고려 무인 이야기의 저자 이승한은 만적이 저 말을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저 말 자체가 당시 일종의
유행어였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해석했다. 당시는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 무신이 직전까지 전권을 휘두르기도 했던 시기였기에 문신들이 자조적으로 "에구.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더니 저런 무식한 칼잡이들도 정권을 잡는구나"라는 식으로 되뇌이던 말이 아이러니하게도 천민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뜻으로 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내놓은 것. 물론 추측일 뿐이다.
[3]
무신정권의 2번째 집권자
정중부는 평민 출신이었고, 4번째 집권자
이의민은 천민 출신이었다. 장군
조원정 역시 천민 출신.
[4]
이 말은 만적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중국 진나라 때의
진승·오광의 난에서
진승이 했다.
[5]
《
고려사》에는 정확한 날짜가 안 나오나, 《
고려사절요》에는 '갑인'이라는
일진이 적혀 있다.
[6]
야사에서는 주인인 한충유가 노비들을 잘 대해줬기에
순정이 차마 상전인 한충유를 죽일 수 없어
배신했다는 말도 있다.
[7]
불행 중 다행으로 안잡힌 노비들은 조정에서 더 이상 색출하기 어려워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8]
조선 시대
사육신도 거사를 연기하자
김질이 이렇게 밀고하고 빠져 나왔다.
[9]
최충헌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으며 최충헌의 아내와 어머니는 만적을 노비가 아니라 아들처럼 대하며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최우와
최향이 집 마당에서 격구 연습을 하다가 만적을 다치게 하자 "어찌 집 안에서 공을 쳐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라며 나무랐을 정도인데 극중에서 만적이나 그와 함께 난을 일으킨 노비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 천노는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0]
실제로 기록된 말이 아니라 극중의 대사이며,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중 유명한 구절인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 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11]
사육신을 세조에게 밀고한 인물이다.
[12]
와트 타일러의 난 때 난의 사상적 기반의 제공자였던 사제 '존 볼'이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귀족은 어디 있고 평민은 어디 있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13]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홍길동전에서 많이 언급되는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