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부흥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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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려시대의 정변 | }}}}}}}}} |
1. 개요
東京民亂1190년부터 15년에 걸쳐 고려 경상도 동경에서 여러 차례 일어난 반란.
2. 설명
1170년에 무신정변이 벌어짐에 따라 고려 내 정상적인 국가 운영은 멈추게 된다. 이러한 전국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고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특히 과거 신라 본토였던 경상도 일대에서도 연이어 반란이 터졌는데, 1190년에 경상도 동경에서 신라 부흥을 기치로 내건 백성들의 반란이 시작됨에 따라 전면적으로 고려에 대항하는 신라부흥운동이 전개되어 6, 7차에 걸쳐서 반란이 진행되었다.1190년에 주유저가 동경을 공격하려 했다가 동경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고 저항했으며, 1193년 7월에는 김사미·효심의 난이 일어나 고려 조정에서 토벌군을 파견했지만,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 이의민이 이들과 내통하면서 패했고, 조정에서 토벌군을 다시 파견해 공격하면서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 한 명인 득보가 궁궐로 찾아가 항복했으며, 김사미가 항복하자 그를 죽였다.
1194년에 토벌군은 장군 사양주(史良柱)가 패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강릉, 밀성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어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이순 등을 보내 투항하자 받아들였고, 12월에 효심을 붙잡아 난을 평정했다.
1199년 2월에 동경과 명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명주의 군사는 삼척, 울진을 함락하고 동경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명주와 연합해 주군을 공격하자 고려 조정에서 사람을 파견해 동경의 김순, 울진의 금초를 회유했으며, 1200년에는 밀성의 관노들이 운문의 반란군에 투항했고, 금주에서 잡족인들이 탐관오리에 분노해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적유에게 진압되었다.
1202년 10월에 동경의 별초군이 영주의 별초군과 사이가 좋지 않아 동경의 별초군이 운문사, 부인사, 동화사를 끌어들여 영주를 공격했지만, 영주 사람들의 저항으로 패해 도망갔으며, 신라부흥을 표방해 석성주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석성주의 밀고로 실패했다.
12월에 이비가 운문산의 패좌와 연합해 이비·패좌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충헌은 대장군직문하 김척후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로, 대장군 최광의를 좌도사로, 섭대장군 강순의를 우도사로 삼아 신라부흥운동 반란군 세력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에 반란군 세력들은 운문( 경상북도 청도군)·울진(경상북도 울진군)·초전( 울산광역시 혹은 경상북도 성주군)의 무리를 모아 3군을 편성, 스스로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고, 관군을 위협하면서 해를 넘겨가며까지 치열히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김척후 대신에 새로 임명된 중도사 정언진이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기양현(基陽縣: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패하면서 기세가 한 풀 꺾였다.
그리하여 서낭당에서 기도 중이던 이비가 정언진의 꾀에 속아 체포되었고, 운문산으로 피신해 기회를 노리던 패좌 또한 대정 함연수, 강숙청 등에게 잡혀 목숨을 잃음에 따라 신라부흥운동은 사실상 좌절되다시피했다.
1204년에 동경 사람이 신라가 다시 융성할 것이라는 말을 퍼뜨려 상주, 청주, 충주, 원주 등 격문을 뿌리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경에서 일어난 여러 반란들에 이어서 일어난 이 일로 인해 고려 3경 중 하나로 꼽혔던 신라의 옛 수도 동경(東京)의 이름이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경주로 격하되었으며, 주변 군현에 상당히 많은 영역을 빼앗기게 되면서 규모마저 대폭 줄었지만 1219년에 금방 동경으로 복권되고 다시 기존의 군현을 거느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