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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 ||||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 | →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 → | 2월 역류 |
조반파 홍위병의 주류 등극 | → | 탈권 현상 시작 | → | 군 원로들 숙청 |
중국어: 一月風暴
영어: January Storm
1. 개요
1967년 1월 장춘차오가 이끄는 조반파 홍위병들의 상하이 정부 전복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1월 혁명'으로 일컬어졌다. 탈권 현상을 전 중국에 퍼트려 국가의 정상적인 통치 기능이 마비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등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증폭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 배경
1965년 11월 10일에 벌어진 해서파관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66년 상반기에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5.16 사건과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으로 펑전, 양상쿤, 뤄루이칭, 펑더화이, 류사오치 등 중공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본격화했고 마오쩌둥이 경험 대교류 운동을 권장해 1100만여 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각지에서 베이징으로 몰려들어 '혁명의 교리를 교류'하면서, 베이징에서 시작된 광기는 중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이후 홍위병들은 4인방과 린뱌오 등이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는 뜻의 주자파(走資派)라는 낙인을 찍은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을 무자비하게 핍박했고 시설 및 역사 유적들을 마구 파괴했다.그러던 중 홍위병 내에서 혈통론이 제기되면서 홍위병들은 '보수파'와 '조반파'로 분열되었다. 보수파 홍위병은 고급 간부들의 자제로 구성된 홍오류였다. 그들은 홍위병 가입 기준을 출신 성분으로 삼고 비판 기준 역시 출신 성분으로 정해 "아버지가 영웅이면 그 아들도 영웅이다. 아버지가 반동이면 그 아들도 잡종이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테러를 자행했다. 이들의 테러가 매우 극렬해 베이징에선 8월에만 하루에 100명씩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수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었다. 이에 보수파에게 탄압받던 흑오류 출신 홍위병 조직이 곳곳에서 결성되어 이들에게 맞서게 되니, 이들이 바로 조반파 홍위병이었다.
1966년 10월 13일, 천보다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 연설을 발표했다. 이 연설로 인해 보수파 홍위병들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추종하는 반동의 자제들이 되었고 조반파 홍위병이야말로 진정한 홍위병들로 떠받들어졌다. 조반파는 당내 고급 간부들을 가짜 혁명가, 반당 분자, 좌파 행세를 하는 우파로 몰아세우고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인민해방군은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마오쩌둥이 막지 말라는 엄포를 놓는 바람에 무력화되었고, 조반파들은 아예 군대까지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보수파 홍위병 사냥에 나섰다. 보수파 역시 조반파에 맞서기 위해 군대 병영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조반파와 유혈 충돌을 벌임으로서 중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이무렵, 상하이에서는 목화공장에서 보위부 간부직을 맡고 있던 왕훙원을 중심으로 한 조반파 홍위병들이 노동자들을 선동해 공총사를 조직했다. 중국 공산당 상하이 시정위원회는 이 단체에 대해 "인정도, 지원도, 참여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에 공총사의 일부 회원들은 "베이징에 가야 한다."고 선전하고 상하이 인근의 안팅역 철도를 차로 봉쇄하고 31시간 34분 동안 상해-난징 노선을 차단했다. 이에 중앙문화 혁명 그룹은 사태 수습을 위해 장춘차오를 상하이로 파견했다. 그러나 장춘차오는 이 기회를 틈타 상하이 정부를 뒤집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으며, 장칭 등 문혁소조의 극좌파들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3. 경과
3.1. 조반파 홍위병들의 상하이 시위총부 습격
1966년 11월 11일 상하이에 도착한 장춘차오는 동중국 지국과 상하이 시정위원회와 함께 상황을 논의했다. 그후 그는 안팅으로 가서 공총사 위원들과 만났다. 상하이 시정위원회는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는 공총사와 접견한 장춘차오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11월 16일 마오쩌둥이 "공총사는 결사의 자유에 부합한다."며 장춘차오의 행위를 합법적인 것이라고 판정했고, 시정위원회는 어쩔 수 없이 장춘차오의 행동을 허용해야 했다.이후 장춘차오는 상하이 시정위원회를 반동이라고 비난했고 장칭, 야오원위안과 함께 왕훙원의 행동을 지지했다. 그는 12월 18일 칭화대학의 조반파 홍위병 우두머리인 콰이다푸를 만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아직도 자산계급 반동 노선을 견지하면서 투항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그대들같은 혁명 소장들이 물에 빠진 개를 두들겨야 한다는 루쉰 선생의 정신을 발양하여 그들(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내쫓아 버리게. 어설프게 중간에 멈춰서는 안될 것이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비난하는 군중대회가 열렸고 국가주석인 류사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는 비투회에 끌려나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12월 28일, 10만에 달하는 조반파 홍위병들이 장춘차오의 지시를 받고 시위총부로 진군해 시위총부를 호위하고 있던 보수파 호위병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해 91명을 부상시키고 상하이 시정위원회 간부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이리하여 상하이 정부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장춘차오는 상하이의 권력을 장악했다.
3.2. 1967년 신년 사설
1967년 1월 1일, 인민일보와 '홍기' 잡지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대혁명이 막을 내렸다.'는 사설을 발표했다."1967년은 포괄적인 민족계급 투쟁의 해가 될 것이다. (중략) 프롤레타리아는 다른 대중들과 함께 당의 소규모 자본주의자들과 사회적으로 독을 품은 뱀들에 대한 한 해에 걸친 공격을 시작했다."
이 사설은 1966년 12월 26일 마오쩌둥의 생일 연회 때 마오쩌등에게 받아낸 서면 승인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마오쩌둥의 정신을 배우자며 즉각적으로 행동했다. 당시 산업 기술 총국과 상하이의 보수파 및 조반파 간의 투쟁은 상하이의 경제 및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했다.
12월 31일,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제1서기 천비셴에게 "교통을 중단시키지 말고 혁명의 질서를 잘 지켜라."고 지시했다. 이에 천비셴은 상하이의 다양한 정치 파벌들을 소집해 "마오쩌둥 주석의 혁명 정신을 파악하고 이를 철저히 이행하라!"며 긴급 조치를 촉구했고, 문회보는 <상하이 전 인민에게 고한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또한 문회보는 1월 4일에 천비셴과 수십개의 대중 조직이 초안을 작성한 <긴급통고>를 기사에 실었다. 이 두 성명서는 부르주아들을 비판하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 주된 목적은 상황을 안정시키고 상하이의 경제활동을 재개하는 것이었으며 상하이 시장 차오디추가 계속 시장직을 역임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은 긴급통보에 동의하지 않았고 상하이 시정위원회를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한 총회를 소집했다. 총회는 차오디추가 더이상 상하이 시장이 아니며 "반혁명 범죄"를 고백하고 반역자들에 의한 생산 및 교통 혼잡에 대한 책임을 상하이시위원회에서 자아비판할 것을 명령한 3건의 일반 명령을 발표했다. 또한 야오원위안은 상하이 시의회를 완전히 제구성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리하여 상하이 시정위원회와 장춘차오 및 조반파 홍위병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3.3. 마오쩌둥의 지지 선언
1월 8일,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의 지휘 아래 '상해시조극명촉생산화선지휘부(上海市抓革命促生產火線指揮部)'가 설립되어 혁명 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선도조직이 되었다.장춘차오는 이를 "경제 소비에트"라고 칭했다. 이후 공안 및 사법기관을 대체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적 국방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상하이 시정위원회를 상하이 혁명 연락소로 대체하려 했다. 같은 날 마오쩌둥은 상하이 조반파 홍위병들의 반란 활동을 지지했다."이것은 계급을 전복시킨 혁명이다. 이것은 위대한 혁명이다. (중략) 상하이 혁명세력이 부상하는 것이 중국 전체의 희망이다. 그것은 동 중국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각 성들과 도시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1월 9일, 인민일보는 상하이시의 인민혁명'을 보도하면서 마오쩌둥의 호평을 "편집인 주"를 추가하는 형식으로 전했다. 중화문화혁명그룹은 11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회의를 통해 상하이의 반부패 혁명 단체들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고 상하이의 "혁명가들"로부터 배울 것을 전국에 촉구했다. 이에 각지에서 상하이를 본뜬 '혁명'이 일어났다. 이른바 '탈권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3.4. 상하이 코뮌 설립과 몰락
장춘차오는 상하이 시정위원회를 뒤엎고 권력을 쟁취한 뒤 홍위병들을 동원해 공산당 간부들과 시 위원들을 탄압했으며 펑더화이와 허룽을 조리돌림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파리 코뮌을 본떠 상하이 코뮌을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1967년 2월 5일, 장춘차오는 마침내 상하이 코뮌을 설립하고 자신은 이 새로운 조직의 우두머리로 등극했다.그러나 마오쩌둥은 자신에게 아무런 허가도 받지 않고 멋대로 상하이 코뮌을 세운 장춘차오에게 분노했다. 그는 장춘차오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모든 성과 도시, 지구가 코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면 우리나라는 중화인민공화국 대신에 중국 코뮌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다. (중략) 그렇게 된다면 당은 어떻게 될까? 당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당 위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어쨋거나 당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구심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2월 중순, 마오쩌둥은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에게 상하이 코뮌을 혁명위원회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춘차오는 2월 24일에 상하이 인민들에게 상하이 코뮌을 취소하며 상하이 시 정부의 혁명 위원회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이리하여 상하이 코뮌은 불과 한달도 안되어 취소되었고, 상하이 1월 폭풍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4. 영향
상하이 1월 폭풍은 중국 각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1월 14일 산서, 1월 25일 구이저우, 1월 31일 헤이룽강, 2월 3일 산둥 등 각지에서 조반파 홍위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각성 정부를 뒤엎고 코뮌을 설립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고 광기는 극에 달했다. 국가는 홍위병간의 내분과 군대와 홍위병 간의 유혈 충돌로 인해 분열되었고 많은 당 간부들이 박해를 당했다. 이에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천이, 탄전린 등 인민해방군과 공산당의 원로들은 혼란에 빠진 국가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천보다, 캉성, 4인방 등 문화대혁명 지지파들에게 맹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결국 군부 수장들과 당 원로들은 대거 실각했다. ( 2월 역류) 이후 인민해방군은 홍위병들에게 무력화되었고 중국 전역의 통치 질서는 마비 상태로 빠진다.5. 참고 문헌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백승욱, 그린비
-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천이난, 그린비
- 중문 위키피디아 상하이 1월 폭풍 문서
- 바이두백과 상하이 1월 폭풍 문서
- 영문 위키피디아 상하이 인민위원회 문서
- 마오쩌둥이 만든 "문화혁명 모델인 "상하이 1월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