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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16:14:49

중인전쟁

파일:중국 국장.svg 중국의 대내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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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Sino-Indian War of 1962, Sino-Indian Border Conflict of 1962
한자 ( 중국어): 中印戰爭(중인전쟁), 中印边境战争, 中印边界自卫反击战( 간체자) / 中印邊境戰爭, 中印邊界自衛反擊戰( 정체자)
힌디어: भारत-चीन युद्ध (Bhārat-Chīn Yuddha)
1962년 인도-중국 국경 분쟁
냉전 시기 영토 분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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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대기 중인 인도군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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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중인 인도군 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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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을 떠나는 티베트인 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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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을 도수 견인하는 인도군 병사들
날짜 1962년 10월 20일~11월21일
장소 아크사이친, 아루나찰프라데시[1]
교전국
[[인도|]][[틀:국기|]][[틀:국기|]]

[[중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파일:인도 국기.svg 자와할랄 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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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ff,#00003f> 병력 10,000명 - 12,000명 80,000명
피해규모 전사 1,383명
부상 1,047명
실종 1,696명
포로 3,968명
전사 722명
부상 1,697명
결과 중국 승리
영향 아크사이친 내 인도군 초소 제거
아크사이친의 중국 실효 지배
파일:attachment/indo2.jpg
좌측은 카슈미르 면적의 14% 정도 되는 아크사이친, 우측은 아루나찰프라데시
1. 개요2. 배경3. 전쟁의 양상4. 전쟁의 여파5. 이후 재충돌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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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시 대한뉴스 보도영상




1962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중국 인도 사이에 벌어진 전쟁. 편의상 중인전쟁으로 불린다.

1962년의 중인전쟁은 A.D 90년 쿠샨 왕조 한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이래로 1900년 만에 일어난 충돌이다.[2] 그리고 이 뒤에 1967년의 소규모 충돌도 있었다.

사단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명백한 전쟁임에도 국경분쟁 정도로 칭해지는 이유는 비교적 속전속결로 끝난 이유도 있지만,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대외적 이미지 차원에서 이것을 크게 비화시키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양국의 복잡한 역사적, 지리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터진 사건이며, 당사국들에게는 현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지는 데 비해 타국에서는 중국-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전쟁 중 하나이다.

2. 배경

영토 문제의 발단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을 차지하던 청나라 인도 제국을 지배하던 영국 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할양하는 조건에서 영토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청은 열강이 더 이상 자국의 땅을 넘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영국도 필요 이상 중국을 침범하면 이 알토란 같은 땅을 넘보는 다른 열강들과 복잡한 대립각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문제가 되는 티베트 땅은 자원에서나 전략적인 면에서나 양국 모두에게 큰 가치는 없었다.

이후 청이 신해혁명을 통해 무너진 기회를 틈타 영국은 청나라에서 독립을 선언한 티베트 정부와 국경 협상을 벌여 1914년 맥마흔 라인을 선포하여 티베트와 영국령 인도 제국 사이의 국경선을 선언하였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켜 준 뒤에도 이 라인을 인증했고,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인도는 독립과정에서 종교 간 대립으로 인해서 전쟁 끝에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권의 파키스탄으로 분열하여 별개의 국가로 출범한다.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보이자, 비동맹주의를 내걸고 미-소간의 냉전에서 중립적 태도를 내건 인도에서는 국방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었다.

비슷한 시기, 중일전쟁 종전 직후부터 중국은 국민당 중국공산당 간의 국공내전에 빠져들었고, 4년간의 내전 끝에 중공이 승리하여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가 될 때까지는 아직 자국 내 안정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하여 UN군을 몰아붙이는 저력을 발휘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동시에 1951년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티베트를 무력병합하였다. 1920년대 이래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티베트의 토착 정권은 인민해방군의 침공 이후 중국공산당과의 17개조 합의를 통해서 자치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지역 대표로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직접 출석해서 마오쩌둥과 만나는 등 한동안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내외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불안정한 국경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한편으로 1950년대 흐루쇼프가 집권한 소련과 공산주의 노선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중소관계는 악화일로 치닫다가 1959년, 완전히 파탄난다.

이에 따라 소련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접근한다. 1960년에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서 철수하고, 대신 인도에 소련 군사고문단이 파견된다. 이렇듯 친소 노선을 걸으며 맥마흔 조약에 따른 국경선을 확정하려는 인도와 중국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정부수립 10년이 안 된 신생 국가로서 불안정한 국내외 사정을 어떻게든 타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도 양국의 직접적인 감정적 앙금은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티베트로부터 비화되었다. 청나라에서는 티베트를 반자치령으로 용인했고, 20세기 초반 중국의 혼란기에 반독립상태로 있던 티베트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일단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 협정을 맺고 자치권을 보장받는 대신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게 된다. 인도 또한 1948년 직후, 같은 신생국의 입장에서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종주권을 인정한다. 곧이어 1954년에 '중국의 티베트 지역과 인도 사이의 무역과 교섭'을 체결함으로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었다.

1960년에는 중국에서 벌인 2년간의 대약진 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중소결렬로 중국에 대한 소련의 기술, 군사적 지원이 완전히 끊기면서 중국은 위기에 빠진다. 상대적으로 인도의 입김은 더욱 강해져갔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본격적인 냉전이 도래하면서 중동,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중국과 인도는 제3세계 국가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중국은 1961년 비동맹회의 참여를 거부했는데, 이것은 중국이 노리던 제3세계의 종주국 자리를 포기하고 독자 행동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비동맹회의가 곧 제3세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3. 전쟁의 양상

파일:attachment/HU019009.jpg
이런 와중에 1959년에 티베트에서 중국에게서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진압군을 티베트로 파견해 대규모 유혈 진압을 벌였고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 중국 공산당 정권의 종교 탄압과 티베트 문화 말살 정책에 반발하면서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 수립으로 두 국가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이로 말미암아 8월에 중국군과 소규모 총격전이 일어났으며, 10월에는 중국군이 인도 경찰 9명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와중에 1950년대 말, 히말라야 소국을 마찬가지로 병합하던 인도군은 티베트 접경까지 주둔하게 되었고, 원래부터 인구가 희박해서 불명확한 국경에서 잦은 교전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당시 중국은 대약진 운동의 부진으로 인한 내부 혼란 수습 및 미국, 소련과의 불편한 역학관계 때문에 또 다른 비상사태가 터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또한 10월2일 소련의 흐루쇼프는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인도 정부를 옹호하며 개입했다. 결국 이 사태는 당시 양국의 지도자인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간의 회담을 통해 당장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양국은 11월 7일 관할선을 정해두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했다고 하지만 국경선의 최종합의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문제는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복잡해져만 갔다. 중국이 예상 외로 소극적 입장으로 나서자 인도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친소적 중립이었던 인도는 친미 성향을 보였던 파키스탄과 반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 중국 사이의 밀월 관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참에 자국의 군사력을 떨쳐 파키스탄을 비롯한 주변국에 엄포를 놓으려고 했다. 인도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미국은 인도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 감소와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여론 형성을 위해 인도에 호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즉, 인도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한 위협을 증강시키는 동시에 파키스탄을 압박하기에는 최적의 외교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1961년, 인도 해군은 파키스탄과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영국으로부터 항공모함 '비크란트'를 인도받았다. 이같은 아시아 국가 초유의 항공모함 도입을 보더라도 당시 인도가 얼마나 해군력 증강에 의욕적이었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비크란트의 인도는 어디까지나 인도양의 바다를 끼고 있는 파키스탄의 해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며, 전투행동반경에서 벗어난 티베트 등지 내륙 지역의 분쟁에는 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항모로써 중인전쟁 때는 전혀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물론 항모 도입이 패착이었던 것은 아니고, 이때 도입한 항공모함 비크란트는 인도의 기대에 부응하여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현존 파키스탄 해군의 절반을 격침시키고 벵골만을 봉쇄하여 방글라데시를 해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3]

1962년 봄, 소련군 군사고문단의 협력을 얻은 인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으로 맥마흔 라인에 육군 부대들을 전진배치했다. 인민해방군 육군의 전투 태세 또한 보다 견고해졌다. 하지만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962년 8월에 와서도 인도 군부의 D. K. 팔리트 여단장은 근미래에 중국과의 전쟁 가능성은 배제해도 된다고 주장했다[4]

대부분의 서방측 군사전문가들은 인도군의 우세를 예상하였다. 일단 보급로부터가 차이가 났는데, 티벳을 관할하는 청두(성도)군구의 수도이자 보급기지인 청두와 분쟁지는 거리가 3,000㎞인데다가 도로는 거의 없었고, 날씨가 나쁘면 아예 그런 도로도 불통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의 보급은 등짐과 야크에 의존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인도의 수도 뉴델리로부터 분쟁지는 수백 ㎞밖에 안떨어져 있었는데다가 양호한 도로가 구비되어 있었다. 결국 인민해방군은 중화기는 꿈도 못꾸고 가지고 있는 지원화력은 박격포 정도였으며, 뿐만 아니라 티벳지역에는 당시 인민해방군 공군 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제공권도 장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도군은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북상하던 인도군에는 인도군 최정예 혹은 최강으로 꼽히던 제7여단, 제4사단에 구르카나 시크 부대 등 정예 부대가 많았다. 단지 인도 정부의 생각과 다르게 중국의 전투 의지가 매우 높아서 인도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력을 투입했다.

10월 6일 중국의 마오쩌둥 및 수뇌부는 인도와의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조정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동부 전선을 주공으로 결정했다. 10월 8일 중국의 청두와 란저우 군구로부터 티베트에 정예 부대를 파견하였고, 10월 16일 중국의 류보청(劉伯承) 원수가 수립한 중인전쟁 계획이 승인받았다. 그리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중인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마침내 10월 20일에는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0,000~90,000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겨우 1~1.2만 병력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중국군 3개 연대가 남카추 강으로 진격하여 겨우 인도군 1개 대대, 그것도 병력이 완편되지 않은 인도군에게 야간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압도했다. 다급한 인도군은 부탄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23일의 중국군 대공세는 인도군의 정확한 포격에 일시 고착되어 제4시크 연대가 3일간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하자 결국 후퇴한다.

이후 중국군은 산악 통로로 접근하여 인도군 1만 명의 보급로를 끊고 인도군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내게 하고, 휴전이 발표되었을 당시, 아삼 북동 국경으로부터 50km 들어간 테즈푸르까지 진격한 후 전쟁을 중단했다.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중국군의 거대한 규모를 감지한 인도군이 거의 저항하지 않고 전방 초소를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눈이 내리는 매우 추운 겨울 날씨 가운데,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중국군은 중포와 기관총의 화력 지원을 통해 쿠마온 연대의 샤이탄 싱 소령이 이끄는 C중대원 123명이 지키던 해발 5,000m 고도에 위치한 레장 라 진지를 점령했다. 싱 소령의 시신은 나중에 맹추위에 얼어붙은 상태로 발견된다. 반격을 위해 인도군이 더 많은 병력을 불러모으는 동안, 중국군의 일방적인 휴전 포고로 전쟁은 끝났다.

파일:attachment/1962uniform.jpg

중국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중인분쟁 당시의 인민해방군 육군 보병 군장. 10년전의 한국전쟁에 비해 달라진 점은 일단 전투복 색이 한국전 때의 황토색 계열에서 올리브색으로 바뀌었고, AK-47의 라이선스판인 56식 자동소총이 도입되었다. 1950년대 말 중국이 식량으로 AK-47을 비롯한 무기 라이선스비를 지불했다가 그만 대약진운동과 겹쳐 참극을 빚었다…

철저히 전쟁 준비를 거친 중국군의 장비와 훈련 수준은 인도군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존 키건의 <세계전쟁사>에는 "중국군이 티벳 지방에서 1년 이상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마친 상태였던 반면에 인도군은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받지도 않은 부대를 투입했다."고 나온다. 여기에 인도군의 주력소총은 수동식 볼트액션 방식의 리-엔필드인데 반해 중국군은 1956년부터 라이선스 생산을 하기 시작한 AK-47의 중국버전 56식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 지휘관들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6.25 전쟁을 거치며 실전경험이 많았고, 특히 6.25 전쟁 때는 초강대국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위에 두고도 산악지대에서 수없는 기동전을 치뤄본 적이 있었다.

병력은 물론 전술, 지형적으로도 우위를 점했던 중국은 은밀하고도 철저한 기습에 성공하여 파죽지세로 인도 영내를 향해 밀고 들어갔다.

파일:attachment/chineseawacs.jpg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전쟁에서 중국 공군은 B-29를 복제한 소련제 Tu-4를 가지고 폭격기, 정찰기, 수송기, 심지어는 조기경보기로 사용했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제대로 수송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짝퉁 B-29는 큰 활약을 했고, 덕분에 아마도 이 전쟁은 최후로 B-29가 활약한 전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반면 인도군 측은 거의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것이 험한 산악지형에서 방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크고 쉽게 밀린 원인으로 지목되기 한다.

그나마, 중국 육군의 공세 시기에 인도 육군도 1개 중대의 선전으로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했다. 실질적으로 관구사령부라고 봐도 무방한 육군 쿠마온 연대(Kumaon Regiment) 13대대 C중대가 선전의 주인공이다. C중대원 123명은 전멸(중대원 88%에 해당하는 109명이 전사하고 생존자 14명 중 9명이 중상을 입은 상태로 투항)할 때까지 저항, 중국군에게 이 전쟁에서 발생한 피해의 1/3인 500여 명의 사상자를 강요한 것으로 공인되었고,[5] 중대장 샤이탄 싱 육군 소령은 인도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인도군은 이후에 제대로 된 저항을 보여주지 못한 채 무력하게 패퇴하였다.

아무튼 개전 7일만에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160㎞를 진군했고, 인도 동북부 아삼 지방의 브라마푸트라 평원까지 진출한다.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중국은 공세종말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략적 요충지인 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를 말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양국과 이해관계로 얽힌 제3세계 국가들끼리도 대립이 일어나 3차 세계대전이 날 판이었다.

중국 정부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하여,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정치적 판단 하에 인도에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그 제의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중국군은 11월 18일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여 인도 정부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중국군은 뉴델리의 20㎞ 근방까지 진주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전쟁 막바지까지 여전히 전투는 변두리에서 진행 중이었다. 인도 영내 깊숙히 밀린 건 사실이지만, 인도도 중국 못지 않은 거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다. 국경에서 좀 밀렸다고 수도 함락 위기까지는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비동맹주의를 잠깐 잊고 비밀리에 미국에게 중국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상당히 친소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가 말이다! 미국은 위와 같은 이유로 태평양에 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 전단을 인도양으로 급파한다.

이는 소련 지도부에도 곧바로 전달되지만, 놀랍게도 소련은 인도를 이해해 주었다. 게다가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인도에게 군사적 원조를 지속할 정도였다. 소련에게 있어서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테고, 스탈린도 그러하였고 그 후계자도 중국을 소련의 우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잠재적 적국이라 믿었다. 마오쩌둥도 역시 중국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취급되는 걸 원치 않았고 저우언라이를 필두로 미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신생 독립국들의 리더로서 국제정치 에서 한 축을 담당하려 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표방하던 수정주의를 중국에선 대놓고 반동이라 욕했고 소련도 거기에 모든 지원을 끊는걸로 답했다. 이런 살얼음 판 같은 상황에서 두 공산권의 거두인 소련 중국 관계 결국 완전히 깨지고 중국은 원래 최대의 적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는 이겼음에도 오히려 대외적으로 불안해지는 상황을 우려했는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심지어 붙잡은 인도군 포로를 조건없이 모두 석방하고, 무기와 차량, 탄약 등의 모든 압류한 장비들을 돌려주기까지 하였다.[6]

1958년에는 중화민국과의 진먼 포격전, 소련과의 이념갈등(실질적으로 누가 공산주의 국가들의 수장이 되는가 하는 싸움) 때문에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내부적으로는 1958년부터 무리하게 시작한 대약진 운동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확대시킬 수 없던 입장이었다. 또한 위에서 지적했듯이 히말라야 산맥을 2,000km씩 끼고 있어 등짐과 야크에 의존한 보급이 어려웠던지라 더이상의 공세도 지속하기 어려웠다.

승전국 중국은 아크사이친을 차지했지만 아루나찰프라데시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일부 중국 네티즌들은 중국 정부를 다 삼킨 고기를 다시 뱉어내는 호구 정도로 인식하고 깐다. 어쨌든 승리를 거둔 시점에서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현실을 정확히 판단해 멈춘 것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현명한 일이었다. 또한 이후로 인도가 중인전쟁의 후유증으로 물가가 급속히 올라가고, 성장률 또한 3% 안팍으로 침체를 겪게되는데 이처럼 인도에 경제적 타격을 주면서 인도의 성장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실패라고 볼 수 없었다. 물론 중국도 문화대혁명으로 사정이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7] 그리고 중국-인도 국경선 전초기지를 기존 위치에서 20㎞ 후방으로 재배치, 인도와 더 이상의 국경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 중 하나이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인도와 중국 국경 카슈미르 주처럼 미확정(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더불어 중국은 악사이친 주를 비롯한 인도 영토를 손에 넣었다. (반중적인 입장에서 중국이 손해였다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강조하기 위해) 이곳이 인구밀도가 희박해서 쓸데없는 곳을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곁에서 파키스탄과 인도가 카슈미르에서 국경분쟁을 벌일 정도로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충지이다. 그리고 어차피 히말라야 지역 전역은 이곳과 마찬가지로 인구밀도가 희박하다. 그리고 인도가 1년후에 이곳이 점령당한 것을 알았다는 것은, 이곳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인도의 행정력이 그 정도로 허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4. 전쟁의 여파

1965년 미 국방부가 추산한 인도 육군의 피해

를 낸 명백한 졸전이었다. 심지어 부대 자체가 해체된 경우가 많아서 매우 위험했다.

반면, 중국 육군은 전사 700명, 부상 1,600명, 포로 0명의 가벼운 피해를 입으며 승리했다.

그러나 인도군은 중국군만큼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았고 물량도 차이가 났음을 알아야한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소련군을 생각하면 된다.

인도 육군은 영국 육군의 일원으로 1,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현대전"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으며 이후 파키스탄과의 전쟁과 대립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지전에 참여한 베테랑 군대였다. 하지만 군대 편성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상대적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군단, 집단군 등의 운용을 습득하여 전술적 기량이 보다 뛰어났다.

이와 같은 교환비는 중국군이 초기에 방어 포지션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인도군에게 강요한 후, 충분한 준비를 거쳐 확고한 수적 우위를 점한 채 공세를 가한 덕분이었다.

당시 서로 3개 사단씩을 투입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인도군이 투입한 병력은 2~3개 대대로 이뤄진 여단 단위로 분산되어 운용되었고 그마저도 3개 여단 이상은 일시에 투입되지 못했으나, 중국군은 개전 초기에 일시에 강화된 2~3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는 전형적인 기동전을 구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다음으로, 국제적인 여건에서 냉전 구도를 초월한 미국, 소련, 중국의 새로운 이해관계가 정립되었다. 인도는 이 전쟁에서 미국에게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요청, 미국과 동맹관계를 만들 하였으나, 중국이 일찍 발을 빼면서 동맹 관계까지는 가진 않았다. 중국이 일부러 미국과 적이 되는 상황을 피하려 철수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얼마 후 발발한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은 보란듯이 북베트남을 지원해 미국과 대립각을 형성했다.

이 전쟁에서 탈탈 털린 인도는 제3세계의 맹주로써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다. 또한, 네루의 도덕적 이상주의 외교정책도 크게 타격을 입은데다 티벳을 중국이 가져가게 되어 남아시아 패권국으로의 위상도 흔들린다.

동맹관계로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인도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는 미국, 소련의 정책과 이해를 같이 하여 일정한 협력을 얻었다. (단, 소련의 군사지원단은 전쟁이 터진 1962년 철수했다).

파키스탄은 기존에 친미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중국-인도 국경분쟁에 미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하여 인도를 도우려고 한 점과 그럼에도 친소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에게 소련이 계속 군사지원을 하는 모습을 보며 외교적 역량 부족을 실감했다. 그 반작용으로 중국과 파키스탄은 보다 굳건한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중국-인도 국경분쟁 이후 인도는 중국-파키스탄이라는 적대국의 연맹과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인도가 방글라데시를 적극적으로 우군에 끌어들인 요인이 되었다.

파키스탄은 이후 중국과 국경 분쟁이 있던 북부의 트란스 카라코람 지역을 1963년 중국에 양도하였으며 대만과의 주권 논쟁, 신장위구르, 티벳 문제 등 중국이 중시하는 여러 외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중국도 파키스탄에 광범위한 경제원조와 정치적 후원을 제공하였다. 파키스탄은 중인전쟁에서 인도가 졸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력에 자신감을 얻었고, 중국을 끌어들인 여세를 몰아 1965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도발한다. 중국은 파키스탄에 무기와 전술지원도 제공했으며, 이 전쟁은 나중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1967년에도 두나라는 충돌을 하게 되고 인도가 승리해서 히말랴의 소국들을 병합하는 계기가 된다.

중국-인도 양국 사이에 끼어있는 네팔 부탄은 완충지대로 자리잡아 중계국으로서의 입지가 상승했으며, 덕분에 티베트처럼 어느 한 나라의 영향력에 휩쓸리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네팔은 마오이즘을 표방하는 친중국파와 힌두교를 내세우는 친인도파간의 분쟁으로 인해 현재도 내부사정이 상당히 혼란한 편이다. 사정이 복잡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중국과 인도의 대리전쟁을 수행한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중국에 흡수된 티베트는 인도의 선전에 한 줌의 기대를 걸었으나 보기 좋게 무산되었고, 그 결과 중국은 티베트를 점유함에 있어서 어떠한 주변국의 도전도 단호히 물리치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는 여전히 중국령이며,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정부 역시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1979년에 있었던 중국-베트남 전쟁은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는데, 문화대혁명과 베트남 전쟁 이후 혼란한 상태에 있던 중국-베트남간 국경선을 정리하기 위해 중국군이 먼저 도발해 일어났다. 하지만 초기 중국군의 호언장담과 달리 베트남의 저항은 실로 완강했고, 급기야 중국군은 먼저 공격해 놓고 깨져서 철수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야말로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비교될만한 점이며, 전쟁 결과 중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을 도와주고도 뒤에 가서는 욕을 먹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한편, 중국과의 전쟁을 통해 긴 국경선을 기존의 재래식 군대로 방어하는 데 한계를 느낀 인도 정부는 군대의 기계화에 박차를 가한다. 인도는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항모를 가장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굴린 나라이며, 현재 아시아에서 사실상 가장 오랜 기간동안 항모를 운용한 국가다.

인도는 항공모함과 전차군단의 전력화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1998년 최종결전병기인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현재는 인도, 중국, 파키스탄 모두 핵무기 보유국이다. 다만 중국이 공식적인 핵 보유국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보유하였으나 비공식 핵 보유국 지위에 아직 머물러 있다.

만약 다시 한번 중국과 인도간에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야말로 헬게이트가 구현될지도 모른다. 여전히 군사력뿐만 아니라 국력자체가 중국이 인도를 압도하고 있지만 군사력만큼은 중국도 인도를 쉽게 보지 못할만큼 막강하다. 무엇보다 인도도 중국 본토를 초토화시킬 미사일과 핵무기가 있는 나라다.

인도에서 쿠미온 연대의 활약을 다룬 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차마 이겼다고 하기 어려운 일인지라 남녀 주인공이 수만의 중국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죽으면서 서로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이후 인도군의 낙하산 부대 투하 장면과 함께 갑자기 끝난다.

5. 이후 재충돌

파일:654prkiooxi71.png

1967년 9월 11일부터 9월 14일 현재 인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당시에는 시킴 왕국과 중국의 국경지대) 나투 라(nathu la)와, 10월 1일 초 라(cho la)에서도 인도군과 중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었다. 여기서는 1962년 중인전쟁과 달리 인도군이 88명 사망•163명 부상으로 340명 사망•450명 부상당한 중국군을 크게 이겼으며, 중국은 시킴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계획을 접고 물러나야 했다.

중국-인도 국경분쟁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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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북동 변경 특별 행정 구역(North East Frontier Agency, 약칭 NEPA)라는 이름이었다. [2] 중국과 인도 두 문화권 사이에는 히말라야 산맥 티베트 고원이라는 거대한 자연 장벽이 있어서 직접적인 교류 자체가 대단히 힘들었다. 때문에 실크로드나 바닷길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만 행했다. [3] Tariq Ali (1983). Can Pakistan Survive? The Death of a State. Penguin Books Ltd. ISBN 978-0-14-022401-6. [4] Swaminathan South Asia Analysis Group Lessons of 1962: A stock taking after 40 years. [5] 인도 측 주장은 1,000명 이상 사살이라고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6] 다만 몇몇 차량은 전리품으로 챙겨가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M3A3 스튜어트 한 량이 중국군에게 노획되었으나 이 개체는 반환되지 않고 중국 베이징 군사 박물관에 소장 중에 있다. [7] 다만 1950년대와 60년대 당시 경제성장률 자체는 중국이 인도보다 훨씬 높았다. 이는 중국이 인도보다 지방행정력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경제계획에 온 자원을 집중할 수 있던 것이 컸다. 물론 이렇게 강력한 행정력이 독으로 작용해서 완전히 말아먹은 것이 대약진운동이었고, 이후에 경제성장률이 두자릿수대를 잠깐 찍게되나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다시 사회가 혼란에 빠져 경제가 다시 침체되었다. 이후 회복은 되었지만 생활수준의 급속한 향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실질 경제성장률이 인도와 큰 차이가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수천만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