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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팅

파일:왕정팅.jpg
중화민국 국무총리 대행
중화민국 4대 외교부장
한문 王正廷
한국식 독음 왕정정
영문 Wang Zhengting
자백(子白)
유당(儒堂)
출생 1882년 9월 7일 청나라 절강성 봉화현
사망 1961년 5월 21일 영국령 홍콩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예일 대학교 법학 석사
직업 외교관, 정치가, 체육인
외교부장
재임 기간
4대 1928년 6월 8일 ~ 1931년 10월 3일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주요 경력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정치인. 북양정부와 국민정부에서 두루 요직을 지냈으며 북양정부 국무총리 대행을 지내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2년 절강성 봉화현에서 태어났다.[1] 톈진북양서학당 졸업 이후 1901년부터 해관에 근무, 1907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예일 대학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로 인하여 민국시대 유명한 친영미파 인사가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귀국하여 난징 임시참의원 부의장으로 추대되었다.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중화민국 총선에서 출마, 동맹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쉬첸과 함께 1912년 12월, 쑨원의 측근으로서 긴밀히 활동하였다. 이후 탕사오이 내각이 출범되자 공상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공상총장 대리가 되어 공상부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동맹회가 국민당으로 개조되자 국민당에 가입했으며 1913년 4월 8일, 중화민국 국회가 개막되자 참의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1913년 6월 27일, 탕사오이가 사퇴하자 농림총장 쑹자오런, 교육총장 차이위안페이, 사법총장 왕충후이와 함께 7월 14일 연대사직하였다.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무력토벌에 반대하여 참가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 중화민국 국회 해산에 이어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등극하려다가 호국전쟁에 부딪혀 실패하고 사망한 후, 부총통 리위안훙이 총통직을 승계하고 위안스카이가 해산한 구 국회와 약법을 회복하자 왕정팅은 다시 국회의원직과 참의원 부의장 자리를 되찾았으며 장쥐, 구중슈(谷鍾秀), 장요증 등과 함께 구 국민당의 온건파들을 구성하여 객려파를 영도하였다.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객려파를 우대했기 때문에 객려파는 돤치루이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정책에 찬성하는 등 친정부의 입장을 취했으나 왕정팅은 대전 참전에 반대하여 익우사로 개조된 객려파를 탈당, 정여구락부를 조직했다.

2.2. 호법운동 직봉전쟁

부원지쟁 장훈복벽을 거치면서 국회와 약법이 다시 파괴되자 왕정팅은 쑨원 호법운동에 동조하여 광저우로 남하, 광저우에서 정여구락부와 익우사를 다시 합당하였고 참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호법전쟁 말기에 쑨원 탕지야오, 루룽팅, 천춘쉬안의 음모로 축출되자 쑨원을 옹호하던 민우사는 광저우를 떠났으나 왕정팅과 익우사는 광저우에 잔류하여 천춘쉬안의 정학회와 대립하며 남북화의에 반대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고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자 남방 호법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호법정부 대표로서 파리에 파견되었다.

결국 계계군벌의 위협으로 익우사 의원들은 대부분 상하이로 도피하게 된다. 1차 직봉전쟁 이후 집권한 직예군벌이 구 국회와 약법을 회복하고 리위안훙을 총통으로 옹립하자 익우사 의원들은 대부분 베이징의 구 국회에 합류하게 되는데 왕정팅도 참의원 부의장 자리를 인정받아 북양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1922년 10월, 차의원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참의원 부의장에서 퇴임하였고 이은 선거에서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정학회와 연구계의 대립으로 인하여 참의원 부의장에 재선출되지는 못했다. 1922년 11월, 왕대섭 내각이 사퇴하자 국무총리 대행에 임명되어 잠시 국무총리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24년 3월 4일 주중 소련 전권대표 레프 카라한과 협상하여 중소협상을 체결하였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육군검열사 겸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이 회군하여 북경정변을 일으키자 차오쿤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펑위샹은 옌후이칭 내각을 사퇴시키고 황푸의 섭정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때 왕정팅은 외교총장 겸 재정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펑위샹의 부하 녹종린이 자금성에 거주하던 청나라 황족들을 추방하는 핍궁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베이징의 외교관들은 왕정팅에게 항의하였으나 왕정팅은 내정간섭이라고 답변을 거부했다. 공사들의 항의가 거세지고 나서야 왕정팅은 선통제의 안전에 대해 보장하며 중국의 여론이 황실 축출을 원하여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명했다.

2.3. 국민혁명

이후 장제스가 영도하는 국민정부에 합류, 외교업무를 맡았으며 동향인인 장제스를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 학생들을 비롯한 우한의 좌파 지지자들은 황푸와 더불어 왕정팅을 정체불명의 제국주의 주구, 친일파로 매도하기도 하였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왕정팅은 뤄양에 파견, 펑위샹 장제스의 동맹을 주선하기도 했으며 1927년 난징사건, 1928년 제남 사건 등 열강과의 충돌에 대응하였다. 1928년 6월, 일본군의 무리한 요구에 일본과 외교적으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장제스가 지일파 외교부장이었던 황푸 대신에 왕정팅을 신임 외교부장 겸 국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함에 따라 외교부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제남 사건의 처리를 두고 일본군 육군 참모본부가 파견한 마쓰이 이와네 중장 등과 회담하였고 베이징 함락 이후 수약외교라 불리는 관세 자주권 회복 등 불평등조약 혁파에 노력하였다. 7월 7일, 적극적으로 불평등조약 철폐를 추진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국민정부의 관점에서 효력이 소멸한 조약 대신에 중국이 새로 정한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청일통상항해조약 등이 이미 파기되었다고 선포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동시에 천유런 부장 시절의 지나치게 강경한 혁명외교가 열강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감안하여 열강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미국이 중국의 관세자주권을 반환하였고 영국과 프랑스 등도 차례로 관세자주권 반환, 조계지 회수에 응했다. 이후 치외법권 철폐, 조계지 회수 등 많은 외교적 업적을 이루어냈다.

1928년 10월,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 탄옌카이 행정원장에 취임함으로 오원제와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탄옌카이 행정원장으로부터 중일현안을 담판할 대표로 임명되었고 일본측과 협상하였다. 일본에선 중국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였으나 왕정팅은 일본이 산동으로 출병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게 책임이 있으며 일본이 자위 수준을 넘은 대량 살육을 자행한 것을 지적하며 중국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 측은 책임자인 하요조 장군을 처벌하였으나 일본 측의 책임자인 6사단장 후쿠다 케이스케는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이 대접받은 것을 지적하며 이 역시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후 1929년 1월부터 일본 측과의 관세협상을 위해 다시 일본 외교관들과 면담, 다나카 기이치의 대중정책을 비판하며 제남 사건의 처리와 관세협상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켰다. 결국 1929년 3월, 제남 사건의 처리를 종결시켰다. 일본과의 협상 과정에서 그가 매국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난하는 학생들이 그의 관사를 습격해 파괴하는 일이 있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 중동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지지했으며 이후 봉소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을 비난했다. 장쉐량이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체결하여 소련에 항복하자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으나 반장전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국민정부가 봉천군벌에게 간섭할 여력은 없었고 소련과 싸울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이를 묵인하였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자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이중국적 문제가 사태에 원인이라고 보고 이를 해결할 것을 일본에 촉구했다. 일본과의 충돌로 대대적인 배일운동이 벌어지자 일본 측은 왕정팅에게 배일운동을 단속할 것을 요구했다. 나카무라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두고 공평히 처리할 것을 언명했다.

2.4.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까지

파일:왕정정.jpg
1931년의 왕정팅

1930년 12월 4일, 행정원이 개조되자 외교부장에 재임명되었다. 1931년 6월 1일, 훈정 실시가 선포되면서 6월 13일 국민당 제3기 5중전회에서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 6월 15일에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왕정팅은 국민정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장제스로부터 무력으로 저항하지도 않으나 외교적으로 굴복하지도 않겠다는 방침을 하달받았지만 이로 인해 후한민 등에게 비난을 받고 사퇴를 요구받기도 했다. 결국 1931년 9월 28일, 난징 중앙대학 학생들이 왕정팅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그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외교부장직을 사퇴하고 스자오지에게 외교부장 자리를 내주었다.

1931년 12월 30일, 4차 전국대표대회의 결의에 따라 수정국민정부조직법이 발표되었고 왕정팅은 국민당 중앙정치회의 외교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1월 28일, 이를 확대개편한 특별외교위원회가 수립됨에 따라 왕정팅은 천밍수, 쑹쯔원, 샤오위안충, 장췬, 우차오수, 구멍위, 쿵샹시, 뤄원간, 구웨이쥔, 우톄청, 궈타이치, 다이지타오, 천궁보 등과 함께 특별외교위원에 임명되었고 다시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때 옌후이칭을 추천하여 특별외교위원회 위원으로 초빙하였고 자기 자신은 구타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특별외교위원회 일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행정원장 쑨커에게 조속히 항전을 결정할 것을 촉구했으며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에 취임하자 일본군과의 협상에 참여, 송호정전협정 체결을 이끌어냈다.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개최되자 적극지원하였으며 1936 베를린 올림픽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중국의 스포츠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7년 5월, 하매 협정 진토 협정의 체결에 분노한 주미 중국 대사 스자오지가 항의의 표시로 대사에서 사퇴함에 따라 2대 주미 중국 대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1938년까지 미국 대사로 재직하다가 후스에게 자리를 내주고 퇴직하여 완전히 정치에서 은퇴했다.

2.5. 말년

항일전쟁 종결 이후 중국홍십자회 회장, 중국체육협진회 이사장 등을 맡았으며 1948 런던 올림픽의 중국팀을 지원했다. 이후 교통은행 이사로 재직하는 등 사업에도 종사하다가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이 패하자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 1961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4.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국무총리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22대 대행 23대
왕대섭 왕정팅
( 1922년 12월 11일 ~ 1923년 1월 4일)
장소증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파일:대만 외교부 로고.svg
3대 4대 5대
황푸 왕정팅
( 1928년 6월 8일 ~ 1931년 10월 3일)
스자오지


[1] 장제스와 동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