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6:04:02

제1차 직봉전쟁

1차 직봉전쟁에서 넘어옴
제1차 직봉전쟁
第一次直奉戰爭
First Zhili–Fengtian War
파일:1차직봉전쟁.jpg
1차 직봉전쟁 전개도
시기 1922년 4월 28일 ~ 1922년 6월 24일
장소 중국 동북 지역
교전세력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직계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봉천군벌
지휘관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차오쿤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우페이푸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펑위샹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치셰위안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왕승빈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팽수신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소요남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쭤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양위팅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쉐량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궈쑹링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덩쉬안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리징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쭤샹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징후이
병력규모 10만 12만 5천
피해규모 4~5천명 사상 3만명 사상
4만명 포로
2만 5천명 투항
결과 봉천군벌의 참패, 직계군벌의 승리

1. 개요2. 배경
2.1. 직봉동맹의 균열2.2. 지방관 임명 문제
3. 전개
3.1. 4거두 회의3.2. 외몽골과 양호순열사 문제3.3. 진윈펑 내각의 붕괴와 량스이 내각의 출범3.4. 량스이 내각의 붕괴와 최후 교섭3.5. 직봉의 대치3.6. 전쟁의 시작3.7. 6일만의 승부3.8. 동삼성의 독립3.9. 전쟁의 종결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22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직계군벌 봉천군벌 사이에 벌어진 전쟁. 직계군벌이 승리했다. 1차 봉직전쟁, 1차 직예-봉천전쟁, 1차 봉천-직예전쟁이라고도 하며 중국식 독음으로 1차 펑즈전쟁, 1차 즈펑전쟁, 1차 즈리-펑톈전쟁, 1차 펑톈-즈리전쟁이라고도 한다.

2. 배경

2.1. 직봉동맹의 균열

1920년 안직전쟁 차오쿤, 우페이푸가 이끄는 직계군벌은 장쭤린의 봉천군벌과 연합하여 돤치루이 안휘군벌을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봉천, 직계 양 파벌이 각각 자파의 세력확장에 골몰하면서 환계에 대한 저항을 매개로 맺어진 직봉동맹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청조의 고급 장교 출신인 차오쿤과 우페이푸 눈에 마적단 출신에 재물욕이 많은 장쭤린은 상종하기 어려운 천박한 인간으로 보였고 장쭤린은 장쭤린 나름대로 직계의 실세인 우페이푸를 일개 사단장으로 여겨 푸대접하는 등 개인적인 관계부터가 별로였던 것도 있지만 군비의 배분과 지방관 자리를 놓고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안직전쟁 직후인 1920년 8월 11일, 차오쿤과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진윈펑을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으로 복직시키고 외교총장에 옌후이칭, 내무총장에 장지담, 재무총장에 저우쯔치(周自齊), 해군총장에 싸전빙, 사법총장에 동강, 교육총장에 범원렴, 농상총장에 왕내빈, 교통총장에 예궁차오(葉恭綽)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우페이푸는 재물욕이 많고 기자들 앞에서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장쭤린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 8월 16일 베이징에 온 이후 바로 다음날인 8월 17일 정저우로 이동, 직계장령회의를 소집하고 낙양에 연병기지를 설치하여 봉군을 상대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9월 4일, 차오쿤과 장쭤린은 직봉 동맹을 위해서 장쭤린의 넷째 아들 장쉐쓰와 차오쿤의 여섯째 딸 조사영의 혼인을 결정, 톈진에서 사돈관계를 맺는 한편 4가지에 대한 합의사항을 도출했다.

이렇게 봉천과 직계는 한동안 동맹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지방관 임명 문제에 있어서 각 파벌의 이해관계가 충돌,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

2.2. 지방관 임명 문제

그러던 중 안휘독군 니쓰충의 병이 깊어 후임 독군을 임명하는 상황이 되었다. 장쭤린은 장훈복벽을 일으켜 선통제를 복위시켰던 장쉰을 신임독군으로 추천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넷째딸 장회경이 장쉰의 아들 장몽조에게 시집을 가서 장쉰과 장쭤린이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휘사람들이 장쉰의 취임을 반대하였고 이에 장쭤린은 자신의 다른 사돈인 포귀경을 추천하였다. 포귀경의 아들 포육재는 장쭤린의 장녀 장관영과 결혼한 상태였다. 반대로 직계는 장문생을 추천하면서 장쉰 임명을 결사반대했고 대총통 쉬스창은 이를 수용하여 장쉰 임명안을 부결하였다.

이어 1920년 12월 강소독군 겸 장강순열사, 영위대장군 리춘이 영위대장군에 임명된지 이틀만에 갑자기 권총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리춘은 차오쿤, 장쭤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인물이었지만 정신병이 있어서 갑자기 그렇게 죽고 말았고 리춘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직계와 봉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장쭤린은 다시 장쉰을 신임 강소독군 겸 소환상 삼성 순열사에 추천했다. 하지만 강소사람들이 장쉰을 반대하자 다시 자기 자신이 직접 강소독군에 임명되고 장쉰을 봉천독군에 임명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차오쿤은 전 국무총리 왕스전을 소환상 삼성 순열사로 추천하고 리춘의 부하 치셰위안을 신임 강소독군에 추천하였다. 쉬스창은 명망높은 북양군벌의 원로 왕스전을 임명하는 편이 정치적으로 적절하다고 여겨 12월 3일 왕스전에 즉각 소환강 삼성 순열사에 부임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치셰위안을 강소독군에 임명했다.

안휘와 강소독군 모두 직계의 뜻대로 처리가 되자 봉계의 불만이 깊어졌고 이를 감지한 쉬스창은 진윈펑에게 명하여 텐진에서 4거두 회의를 개최, 시국의 당면과제들을 처리하자고 제안하여 텐진에서 4거두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3. 전개

3.1. 4거두 회의

한편 리춘이 죽고 난 이후 호북독군 겸 양호순열사 왕잔위안이 장강삼독의 영수가 되어 남방의 실력자로 행세하게 되었다. 왕잔위안은 충칭진수사 겸 천군 총사령관 류샹과 천악연방조약을 체결하고 또한 호남독군 겸 상군총사령관 자오헝티와 상악연방조약을 체결하여 서남과 남방의 경계를 안정화한 다음에 중앙정치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에 쉬스창은 장쭤린, 차오쿤, 진윈펑 외에 왕잔위안 역시 초청하여 4거두 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4거두 회의는 1921년 톈진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장쭤린은 총참모장 허란주, 일본 고문 마치노 다케마 중교 등을 대동하여 4월 15일 봉천을 출발, 텐진으로 갔다. 장쭤린 일행은 4월 16일에 톈진에 도착했고 오후 6시, 장쭤린이 머물고 있던 조가화원에 차오쿤이 찾아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회의에는 장쭤린, 예궁차오, 왕내빈, 장징후이, 차오쿤, 차오쿤의 동생 조예가 참석하였고 4월 18일에 두번째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4월 18일, 차오쿤을 만난 장쭤린은 대뜸 소리쳤다.
" 형님, 형님은 친척이 친합니까? 부하가 친합니까? 나는 절대로 형님을 지지할 것입니다. 만일 다른 말이 있게 되면 총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이는 사돈인 자신이 우페이푸보다 더 가까이해야 할 인물이 아니냐는 소리였다. 이어 하남성에서 벌어진 변란을 정리하고 온 왕잔위안이 4월 25일 아침에 톈진에 도착하면서 텐진에 4거두가 모두 모이게 되었다. 회의는 4월 27일에 정식으로 개최되어 조가화원과 황기덕 군의장에서 번갈아가며 열렸는데 4월 27일에는 광동에서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것에 대한 대응 문제를 논하기 위해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 외에 각성의 32명의 군민장관이 참석하였다. 이어 4월 28일에는 재정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진윈펑과 조예가 찻잔을 집어던지며 욕설까지 퍼부으며 싸웠고 화가 난 진윈펑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4월 29일에 장쭤린, 왕잔위안, 차오쿤, 진윈펑이 술을 마시며 화해의 시간을 가졌고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이 내각 지지 성명을 발표, 진윈펑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진윈펑은 사직을 취소했다.

5월 1일, 다시 한번 4거두 회의가 소집되어 내각의 인원과 재정 문제를 협의했고 5월 2일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과 각부 총장들이 마지막으로 회의를 열어 각 항목에 대한 문제를 결정, 5월 5일 진윈펑이 베이징으로 돌아가 쉬스창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했고 텐진에서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이 순열사의 명의로 내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5월 6일 쉬스창은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을 베이징에 초청해 연회를 베푸는 한편 이들에게 회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4거두 회의에서 차오쿤은 왕승빈을 하남독군으로 추천했고 또한 안휘군벌 출신인 섬서독군 진수모가 몰락하자 그 후임으로 염상문을 추천했다. 반면 장쭤린은 허란주를 추천했으나 섬서에 많은 부대를 주둔시킨 상태였던 염상문이 섬서독군이 되었다. 그 대신에 직계는 장쭤린에게 외몽골 정벌을 구실로 몽강 경략사 자리를 만들어 주어 열하, 차하얼, 수원을 통괄하게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산동독군 톈중위의 후임으로 직계는 왕승빈을, 봉계는 포귀경을 추천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중립적 성향의 정사기가 임명되었다.

3.2. 외몽골과 양호순열사 문제

4거두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장쭤린과 왕잔위안 등은 돌아가지 않고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다. 쉬스창은 5월 24일과 5월 25일 양일에 걸쳐 대총통 공관인 회인당에서 회의를 열어 순열사들을 위로하였고 5월 25일 오후의 회의에서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외몽골을 점령해버린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날 회의는 3명의 순열사 외에 진윈펑, 내각 요인들, 베이징의 몽골 왕공들을 포함하여 40여명이 참석했다. 정부는 외몽골 정벌을 결정, 동삼성 순열사이자 외몽골과 인접한 장쭤린에게 몽골 정벌 문제를 일임하기로 하였다. 먼저 쉬스창이 몽골 정벌이 결정되었음을 발표하자 장쭤린이 외쳤다.
"외몽골 역시 중국의 영토입니다. 오늘날 이민족이 점령을 했는데 중국 인민의 치욕입니다. 국토를 보전하는 것은 군인의 책임입니다. 정몽 문제는 이미 다시 거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장쭤린은 토벌을 하기로 이미 국가 원수의 명을 받았습니다. 조만간 관동의 건아들을 이끌 것입니다. 외몽골 수복을 위하여 사막의 북쪽 초원을 누빌 것입니다. 만일 이민족의 수중에 있는 몽골을 탈환한다면 쭤린은 만리변방에서 죽어도 이 구차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5월 28일 차오쿤이, 5월 30일에 왕잔위안이 임지로 돌아갔다. 5월 30일, 장쭤린은 몽강 경략사에 임명되어 수원, 열하, 차하얼 각 특구의 도통을 지휘할 권한을 받게 되었고 5월 31일 봉천으로 귀환하여 6월 5일 몽강 경략사에 취임, 7월 5일 몽강 경략사 직인을 수령하고 7월 6일 휘하의 관제를 제정하고 각급 관원을 임명, 열하, 수원, 차하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직계 역시 23사단장 왕승빈이 하남독군에, 28사단장 염상문이 섬서독군에 임명되면서 어느 정도 정치적 이익을 챙겼다. 당시 차하얼 도통은 장징후이로 직계의 요인이었고 수원 도통은 마복상인데 도림현에 봉군이 주둔한 상태라서 봉계에 복종하고 있었다. 열하도통은 북양군벌의 원로 강계제였는데 눈치를 살피며 대단한 행동을 취하진 않고 있었다. 4거두 회의와 이어 장쭤린의 몽강 경략사 임명으로 직봉 양파의 이익 분배가 적절히 이루어지는가 했지만 곧 변수가 발생했다.

1921년 6월 3일, 왕잔위안이 무창으로 돌아왔는데 바로 다음날인 6월 4일 의창에서 병변이 발생했다. 이어 6월 7일 무창에서도 병변이 발생했는데 병변에 참여한 병사들이 대부분 직계군이었다. 이는 이웃한 호남성의 자치 선포에 자극을 받은 호북의 연성자치론자들이 호북성에서 자치를 벌이기 위해 봉기한 것이었고 호남성장 자오헝티가 7월 20일에 군대를 보내 호북의 자치운동을 원조하였다. 결국 왕잔위안은 우페이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페이푸는 25사단장 소요남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왕잔위안은 패하여 하야를 통전하였고 소요남은 진격을 정지했다. 쉬스창은 8월 9일 우페이푸는 신임 양호순열사에, 소요남을 호북독군에 임명하면서 호북성을 우페이푸에게 주었고 우페이푸는 자오헝티의 항복을 받아내어 호남성 악주에 병력을 진주, 호남까지 세력권을 확장했다. 이는 장쭤린의 불만을 크게 자극했다.

이 당시 장쭤린은 우페이푸를 일개 사단장으로 얕잡아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순열사의 지위에 올라 자신에게 대등해졌고 자신이 탐내는 장강 유역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었다. 분노한 장쭤린은 절강독군 루융샹과 연락하는 한편 몽강 경략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하여 불만을 표시했고 이에 쉬스창은 장쭤린을 달래기 위해 강계제를 육군검열사로 이동시킨 후 10월 1일 봉군 28사단장 급금순을 열하도통에 임명하여 장쭤린을 달랬고 우페이푸의 양호순열사 임명으로 촉발된 정치적 위기는 잠시 사그라들었다. 이어 쑨원의 북벌에 대응하기 위해 11월에 개최된 바오딩 회의에서 직계는 사천과 호남을, 봉계는 복건과 강서를 포위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직봉의 불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3.3. 진윈펑 내각의 붕괴와 량스이 내각의 출범

그러던 중 1921년부터 대규모 경제위기가 도래하여 중국이 혼란에 빠졌다. 9개월이나 군비 지급이 중단되면서 각 지방의 군벌들은 모두 아우성이었고 11월 14일 급여를 받지 못한 교육부가 동맹파업에 돌입하였다. 이어 참모부가 자동으로 해산을 요청했으며 육군총장 채성훈, 해군총장 이정신, 사법총장 동강 등이 모두 사직을 청했다. 11월 16일에는 베이징, 톈진, 한커우의 중앙은행과 교통은행에서 대규모 예금 인출이 벌어졌다. 하지만 교통계가 장악한 은행단은 진윈펑 내각의 붕괴를 원했기 때문에 도움을 주지 않고 방관했다. 또한 장쭤린과 차오쿤 모두 진윈펑 내각이 편향적이라 여겼기 때문에 진윈펑을 더 이상 돕지 않았다. 장쭤린의 경우, 진윈펑 내각이 우페이푸를 양호 순열사로 승진시킨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고 차오쿤은 진윈펑 내각이 장쭤린에게 몽골 원정 예산으로 700만원을 할당해주었으며 직계의 섬서 원정 예산은 고작 100만원만 책정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때 교통계의 예궁차오가 장쭤린에게 교통은행을 장악하여 재정권을 틀어쥐라고 제의하며 장쭤린과 결탁하였고 장쭤린은 호응하여 교통은행에 동삼성 공금 400만원을 빌려주었다. 12월 12일, 장쭤린이 텐진으로 오자 진윈펑은 장쭤린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텐진으로 가서 장쭤린을 만났고 장쭤린과 연명으로 차오쿤을 초청하여 현안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의했으나 차오쿤은 우페이푸가 텐진행을 반대하자 칭병하여 초청을 거절했다. 12월 14일 장쭤린과 진윈펑이 베이징에 왔는데 장쭤린은 자신은 군인이므로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면서도 쉬스창에게 개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쭤린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진윈펑은 12월 17일 사퇴하여 톈진으로 떠났다. 12월 18일 쉬스창은 진윈펑의 사직을 비준, 외교총장 옌후이칭을 내각총리 대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차오쿤에게 차기내각을 상의하자고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12월 18일 차오쿤이 베이징에 왔다.

이때 장쭤린은 교통계의 량스이를 새 국무총리로 추천했다. 직계는 량스이를 좋아하지 않고 특히 우페이푸는 베이징에 있어봐야 장쭤린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라고 강하게 반대하며 베이징을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량스이가 밀린 군비 지급에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제의하자 차오쿤은 량스이의 총리 임명에 동의, 12월 24일 량스이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12월 25일 취임했고 외교총장에 옌후이칭, 내무총장에 고릉위, 재정총장에 장고, 육군총장에 포귀경, 해군총장에 이정신, 사법총장에 왕충후이, 교육총장에 황옌페이, 농상총장에 제요산, 교통총장에 예궁차오를 임명하였다. 이를 본 차오쿤은 12월 31일 바오딩으로 돌아갔고 장쭤린도 1922년 1월 2일 봉천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량스이 내각의 출범은 직봉의 결정적인 결렬을 가져오게 되었다.

3.4. 량스이 내각의 붕괴와 최후 교섭

직계군벌에게 군비를 지급하겠다는 공약으로 총리가 된 량스이였지만 경제위기가 너무 심각하여 약속과 달리 군비를 지급할 수 없었다. 원래도 량스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속았다고 여겨 격노했고 1922년 1월 1일, 량스이가 환계의 돤즈구이, 취퉁펑, 진문운, 유유순, 위종한 6명을 사면하고 1월 5일 국민적으로 지탄을 받던 신교통계의 차오루린(曹汝霖)을 실업계 특사로 임명하고 역시나 매국노로 욕을 먹던 루쭝위(陸宗輿)를 베이징 시정 독판에 임명하면서 친일 내각으로 비난을 사게 되었다. 또한 량스이는 일본에 1천만원의 차관을 빌려 경제위기를 수습하려 했는데 직계가 경한선과 우한의 자원을 활용하여 군비 충당에 비교적 수월한 데에 비해 친봉 성향인 량스이는 일본에서 자금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량스이는 이를 바탕으로 교제철로를 회수하여 봉천파의 확장계획을 지원하려 했다. 우페이푸는 이를 광동, 안휘, 봉천이 연합하여 철도를 지배하여 직례를 합병하려는 수작으로 여겨 더 이상 참지 않고 1월 5일 통전을 보내 량스이 내각에 대한 토벌을 선언했다.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도쿄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도록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를 따르도록 훈령하였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철도 운송권이 중단되는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논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드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이에 즉각 치셰위안, 펑위샹, 톈중위, 진광원 등이 호응하여 우페이푸를 지지하였다. 량스이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변명했으나 우페이푸는 이를 묵살하고 계속 전문을 발표해 량스이 내각을 공격했다. 1월 19일 치셰위안, 진광원, 소요남, 톈중위, 자오티, 펑위샹이 연명으로 쉬스창에게 량스이 파면을 요구했다. 1월 20일, 우페이푸가 소요남에게 고급군관회의를 개최하게 하고 부대를 이끌고 량스이 내각을 무력으로 축출하기 위해 북상할 것을 지시하자 량스이는 하야를 거부하고 텐진으로 달아났다. 1월 25일, 쉬스창이 옌후이칭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했는데 량스이 내각 출범 28일만의 일이었다.

자신이 추천한 량스이가 겨우 한달만에 쫓겨나게 되자 장쭤린은 격노하였는데 때마침 남방의 쑨원이 북벌을 선포하여 진군하였고 안휘독군 장문생, 하남독군 자오티, 섬서성장 유진화 등 환계의 잔여 세력과 직계에 불만이 있던 여러 군벌들이 호응하였다. 이에 직계는 봉계를 달래기 위해 교섭에 들어갔다. 차오쿤은 23사단장 왕승빈을 봉천에 보내 장쭤린을 예방하게 했고 장쭤린도 장징후이를 바오딩에 보내 답례했다. 이어 차오쿤은 베이징과 직례의 봉군을 철수시켜 직봉의 무력충돌을 아예 사단에 차단하자고 제의했다. 장쭤린이 이에 동의하여 긴장국면은 잠시 완화되었다.

하지만 베이징에 체류하던 돤치루이가 잠적하고 쑨원이 북상하기 시작하자 장쭤린은 방어 임무 교대를 이유로 대규모 병력을 산해관 내부로 입관시켰다. 이에 우페이푸는 경한선의 차량을 억류하고 부대를 마주 북상시켰다. 이때 봉계 내부에서는 주전론과 주화론이 대립했다. 열하도통 장징후이는 봉군이 경진 지역을 장악할 역량이 없으며 봉군과 직군의 실력차이가 현저하여 이길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며 직군과의 화해를 주장했고 장쭤샹도 주전론을 주장했다. 반면 장쉐량과 양위팅은 주전론을 고수하며 관내진출을 지지했다. 장쭤린은 2월에 11일 동안 개최된 바오딩 회의에서 직계에 군인의 정치 불간섭, 우페이푸가 양호 순열사 직책에 전념하며 중앙에 간섭하지 말것, 량스이 내각의 복직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으나 직계가 거부하자 고심 끝에 직계와의 전쟁을 결정하였다. 왕스전, 장소증 등 북양군벌의 원로들이 중재에 나섰으나 소용이 없었다.

3월 8일 직례성장 조예가 장쭤린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봉천에 왔으나 장쭤린은 그를 환대하면서도 그에게 얘기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에 조예는 장쭤린의 심복 손열신을 찾아갔으나 손열신은 장쭤린은 부하가 가까운지, 친척이 가까운지 가르침을 받길 원한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자 조예는 하늘에 맹세코 친척을 불리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장쭤린은 3가지 조건을 제출했다.

3.5. 직봉의 대치

장쭤린이 제출한 요구는 매우 무리한 것으로 장쭤린 스스로도 직계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으로 여겨 오히려 전쟁의 명분을 찾고하 했다는 분석도 있다. 어쨌거나 조예의 보고를 받은 차오쿤은 열강의 지지를 바탕으로 시간을 끄는 한편 조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4월 3일, 우페이푸가 자신의 49세 생일잔치를 명분으로 11개 성 대소군벌 500명을 뤄양으로 초청, 봉군 토벌에 대해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봉천군에 끝까지 대항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결집했다. 잔치에 참석했던 조예는 원래 우페이푸를 바오딩으로 초청하여 차오쿤으로 하여금 그를 진정시켜 보고자 하는 심산이었으나 참석자들의 모습을 보고 직계 내부의 주전론이 강성하여 전쟁이 피할 길이 없음을 느끼고 포기하게 되었다.

우페이푸는 3사단을 의창 북쪽으로 이동하게 하는 한편 왕승빈의 23사단을 바오딩으로, 장복래의 24사단을 정저우로 가게 하고 소요남의 25사단을 호북으로, 펑위샹의 11사단을 뤄양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각 부대로 하여금 경한선의 차량을 징발하고 부대를 장신점, 바오딩, 스좌장, 정저우에 포진시켰으며 경한선 철로 수입 328만원을 압수하여 군비를 충당했다. 이에 맞서 봉군도 전쟁 준비에 돌입, 4월 10일 봉군이 관내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장쭤린은 군량성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부대를 마광, 정해, 덕주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봉군을 진위군으로 개칭하고 스스로 진위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손열신을 부사령관에, 양위팅을 참모장에 왕수상을 참모처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 지휘부를 하북 중주회관에 설치하여 부대를 두개로 갈라 하나는 진포선을 따라 쉬저우로 진군시켜 장문생의 신안무군과 합류, 하남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꾸몄다.

장쭤린은 "직례와 봉천은 원래 한 가족이었다. 북양군벌이 갈라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라고 하면서 톈진의 봉천군에게 조씨 가문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라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지시하는 등 차오쿤에게는 원한이 없음을 드러내며 전쟁을 바라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조예는 봉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저항을 포기하고 직례성장 공관의 문서를 가지고 철수했고 경찰청장 양이덕을 대리성장에 임명, 톈진의 모든 직계군을 바오딩으로 철수하게 했다. 또한 덕주의 26사단장이자 차오쿤의 7번째 동생 조영 역시 덕주로 봉군이 접근하자 작우용을 대리 사단장으로 임명하고 도주했다. 차오쿤 역시 명령을 내려 진포선의 모든 직군에게 봉군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모든 병영과 덕주의 병공창을 봉군에게 넘겨주게 했고 자신의 식구들을 한커우로 철수시켰다.

차오쿤의 유화적인 모습에 4월 19일, 장쭤린이 "통일의 기약이 없으면 나라가 영원히 평안할 날이 없다. 눈앞에 놓인 장애를 제거하지 않으면 통일은 영원히 기약할 수 없다.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입관 주둔하여 무력통일을 기도하고자 한다. (...)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자가 있다. 사사로이 당을 짓고 정치와 기강을 문란케 하고 국고를 도둑질하여 평화와 통일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즉시 몰아내야 한다. 민중화 마께 내쳐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통전을 보내 평화통일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또한 최후 건의서라는 명목의 전보를 보내 "통일의 진행에 있어서 공개회의를 하여 제도를 확정짓는 것은 어떠한가. 전국의 지도자와 덕망있는 분들이 공동으로 정치를 하도록 해야 한다. 쭤린은 함부로 하찮은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우페이푸는 지지 않고 4월 19일 장쭤린 비방 전문을 보냈다.
근래 중앙의 정국은 장쭤린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왔다. 우페이푸는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차오쿤 역시 자기 주장을 못해 왔다. 이번에 량스이는 장쭤린의 뒤를 믿고 외국에 아첨하여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뒤를 봐주는 자를 위해 인민이 바라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것 같다. 또 인민에게 해를 끼치는 좀벌레를 비호하고 있고 마구 무력으로 인민을 위협하고 있다. 자신들만을 위하고 인민은 돼지 새끼로 보고 있다. 3000만 직례인과 전국 4억 인민의 청원을 우페이푸가 대표하고 싶다.

4월 20일, 장쭤린은 쉬스창에게 전보를 보내 전국 통일회의 소집을 요청하는 한편 반대하는 자에게는 무력을 쓰겠다고 위협했다. 이쯤되자 차오쿤 역시 무력해결만이 답으로 여겨 우페이푸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전보를 쳤다.
당신이 바로 이고 가 바로 당신이다. 우리는 친척보다 가까웠다. 당신이 어찌할 것이냐 함은 내가 어찌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3.6. 전쟁의 시작

4월 21일, 우페이푸는 치셰위안, 진광원, 톈중위, 자오티, 소요남, 펑위샹, 유진화와 연명으로 "통일을 한다는 구실로 먼저 통일을 방해하고 있고 장애를 제거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자기가 장애가 되고 있다."라며 장쭤린을 비난했다. 4월 23일 장쭤린은 전문을 보내 관내진출에 대해 쉬스창과 조씨 형제의 동의를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맞섰고 4월 25일 우페이푸가 직계 장령들과 연명으로 장쭤린의 10대 죄상이라는 것을 발표, "쭤린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페이푸는 이미 비적을 소탕할 책무를 짊어졌으므로 마땅히 적과 내통하는 배반자를 없애는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하며 직접 전선으로 나가서 독전했다.

한편 우페이푸는 자오티가 1921년의 병변을 펑위샹이 지원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장쭤린과 결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후방 안정화 작업에 들어갔다. 펑위샹의 11사단과 섬군 1사단, 북양군 혼성 4여단이 이미 동관을 출발하여 선두부대가 뤄양에 이르렀는데 우페이푸는 전선으로 가면서 펑위샹에게 섬군 총사령 겸 직노예 순열부사 직권을 부여하여 후방 각군의 통제를 맡게 하고 자오티의 굉위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이때 봉군은 장징후이가 서로군 총사령관에 임명, 장신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다시 부대를 3개로 나누어 1부대장을 장징후이가, 2부대장을 추분이, 3부대장을 전정승이 맡았다. 동로군은 장쭤샹이 총사련관을 맡아 낙벌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3개의 보병 부대에 1개 기병부대를 거느렸다. 1부대장은 장쭤샹이, 2부대장은 장쉐량이, 3부대장은 리징린이 맡았으며 기병부대장은 허란주가, 참모장은 창인화이(상음괴)가 맡았다. 장쉐량의 2부대 산하에는 봉군 3혼성여단, 궈쑹링의 8혼성여단, 채병폰의 4혼성여단이 있었고 2로군을 합쳐 봉군의 총 병력은 12만에 달했다. 한편 장쭤린은 궈쑹링의 부하 성스차이를 사천성에 파견하여 류샹, 쑨촨팡을 직계군벌 진영에서 이탈시키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맞서 직군은 탁주에 총사령부를 설치, 우페이푸가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왕승빈을 서로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고안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왕승빈의 23사단, 장복래의 24사단, 펑위샹 휘하의 이명종의 15혼성여단, 장극요의 1혼성여단, 3사단의 일부 병력이 서로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리하와 고안에 주둔하며 방어진지를 설치했다. 동로군 총사령관은 장국용이 맡고 마창에 총사령부를 설치했는데 장국용의 26사단, 동정국의 13혼성여단, 팽수신의 14혼성여단, 손악의 16혼성여단을 거느렸다. 이들은 우두진, 전가구, 승방, 대성, 자아하를 점거하고 부대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직군은 2로군을 모두 합쳐 10만에 달했다.

4월 28일 심야, 직봉 양군이 접전에 들어가면서 마침내 1차 직봉전쟁이 시작되었다.

3.7. 6일만의 승부

4월 29일에 이르러 본격적인 진지전이 시작되었다. 장징후이는 사령부를 장신점으로 이동시키고 정오, 베이징을 출발하는 차를 타고 전선지휘부에 도착했지만 이미 우페이푸는 신속하게 독전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직군은 봉군의 우익을 우회, 앙향과 장신점 사이의 남강와에서 봉군을 공격했다. 봉군은 전열이 무너져 퇴각길에 올랐고 장징후이가 60여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직접 독전하여 전선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봉군의 예비대와 포병대 상당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장징후이는 1사단 산하의 장락산 여단과 주익청 기병단을 투입하여 직군을 격퇴하였다.

4월 30일, 양조동 여단이 밀리기 시작하자 추분의 16사단이 지원을 위해 급파되었다. 하지만 몽골에서 달려온 추분의 16사단은 피로가 누적된 상태라서 병사들의 사기가 땅을 치고 있었다. 심지어 추분이 전투 중 부상을 입어 후송되자 16사단은 삽시간에 붕괴되어 퇴각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아예 봉군 1사단을 향해 발포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16사단이 과거 직계의 수령 펑궈장의 휘하에 있던 직군이건만 추분이 사단장 왕정정을 쫓아내고 멋대로 흡수한 전력이 있던 탓도 컸다. 결국 봉군은 루거우차오로 퇴각하였고 직군이 장신점을 점령했다. 한편 자오티가 하남에서 장쭤린에게 호응하여 정저우로 진군했지만 우페이푸가 미리 배치한 펑위샹이 자오티를 격파하고 하남성을 장악했다.

이어 풍태에서 남원에 이르는 지역에서 봉군의 정전승과 우영복이 직군의 장석원, 이명종과 접전을 벌였다. 이명종은 대회창, 삼가점, 문두구를 우회하여 봉군의 후방을 공격하였고 장징후이는 직군의 계략에 빠진 것으로 여겨 전군에게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우페이푸는 5월 3일 장석원에게 추격명령을 내려 황촌으로 군사들을 진격시켰고 고안에서 봉군은 포로가 되어 무장해제당했다. 5월 4일에 장쭤린이 낙벌에서 독전하여 전세를 만회하려 했으나 동부전선이 무너지자 서부전선도 덩달아 무너졌고 장쭤린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텐진에서 총퇴각령을 내리고 장쉐량에게 부대를 돌리라고 하였다. 장쉐량은 궈쑹링에게 지휘를 맡기고 황급히 철수하였다. 5월 5일 봉군은 란저우로 퇴각, 장석원은 랑방까지 어떠한 저항도 없이 진격하여 텐진을 점령했다. 당일에 장석원은 봉군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있던 군량성을 점령, 동로전선에서 패주 중이던 장구경, 이계주의 2개 여단을 포로로 잡아 무장해제시켰다. 이어 왕승빈이 유관까지 추격하여 산해관 너머로 봉군을 몰아내었다.

장징후이는 베이징에 머물며 죄를 청하는 한편 차오쿤에게 전보를 쳐서 전쟁을 마무리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차오쿤은 장징후이의 죄를 묻지 않고 그에게 안위장군직을 수여하였다. 5월 5일 쉬스창이 봉군과 직군에게 모두 철수할 것을 지시하고 장쭤린 대신 량스이, 예궁차오, 장호삼을 전범으로 지목하여 체포령을 하달했지만 이들은 5월 7일 모두 일본으로 도주했다. 5월 6일, 리징린이 싸우지 않고 양유청을 내주고 기차를 타고 퇴각했다. 장쭤샹도 패배하여 부대가 모두 흩어졌다. 5월 7일 퇴각하던 봉군이 란저우에 집결하자 영국 공사 이스튼이 성명을 발표하여 영국 교민의 생명, 재산, 탄광 운영상의 손해가 발생하면 장쭤린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발표했다. 일본 외상 우치다는 동삼성에 대한 중립을 지키겠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그간 봉군을 지원하던 일본 측의 연막작전에 불과했다.

5월 7일 우페이푸가 군량성에 입성하여 봉군 총사령부를 둘러본 다음에 톈진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축하했고 전 동삼성 총독을 지낸 조이손이 전쟁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짓자고 제안하자 우페이푸는 조이손을 비웃었다.
"전에 장쭤린을 발탁한 것은 선배님이 아닙니까? 마적이 나라를 어지럽히니 선배님도 마땅히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오늘 또 그를 대신해 말씀하시는군요."

3.8. 동삼성의 독립

승리한 우페이푸는 쉬스창이 장쭤린을 처벌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반발, 장쭤린에게 엄벌을 내릴 것을 청했다. 이에 5월 10일 쉬스창은 장쭤린의 동삼성 순열사직을 포함한 모든 직책에서 면직하고 조사와 처벌을 기다리라고 지시했으며 5월 11일 몽강 경략사를 폐지하여 장쭤린의 모든 군정대권을 박탈하였다. 또한 흑룡강독군 우쥔성을 봉천독군에 임명하고 펑더린을 흑룡강독군에 임명했으며 원금개를 봉천성장, 사기상을 흑룡강성장에 임명했다. 이는 패한 장쭤린이 부하들에게 쫓겨나기를 기대한 것이었지만 펑더린 등은 5월 15일 장쭤린 지지를 통전했다.
베이징 정부는 장쭤린 순열사의 본직과 다른 모든 겸직을 박탈하고 덕린 등을 독군서리로 전보 발령을 냈습니다. (...) 펑더린은 이 명령에 대하여 거부이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문으로 삼가 알립니다.

소하연에 있던 참모장 응선일을 비롯하여 우쥔성의 막료들은 우쥔성이 봉천독군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흥분하여 난리를 피웠지만 우쥔성은 즉각 독군서 비서장을 불러 임명 거절 전보를 치게 했다.
대총통님, 저는 못나고 재주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우정 상장군을 모시고 흑룡강성 지역에 머물러 왔는데 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지 않을까 두려운 느낌만 듭니다. 기타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지만 비서장은 참모장은 응선일과 상의하여 멋대로 '오직 정부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는 구절을 첨가했는데 분노한 우쥔성은 비서장을 불러 마구 욕을 퍼부으며 발로 걷어차 구타한 후에 멱살을 잡아 내쫓아버렸다. 이에 응선일은 직계와 내통하여 고위직을 얻고자 했으나 장쭤린에게 들키는 바람에 봉천 독군서 부관 고금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봉천성장 왕영강은 이 사건의 범인을 잡겠다는 시늉을 했으나 우쥔성이 응선일은 기생집이나 들락이는 못된 인간이라 건달들에게 죽은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자 수사를 덮어버렸다. 우쥔성은 왕영강에게 봉천의 치안을 맡긴 후 부관 진진지와 경호원 두명만 데리고 차를 타고 산해관으로 가서 장쭤린을 만났다. 부대를 점검하던 장쭤린은 우쥔성의 도착을 보고 그를 맞이하지 않고 즉각 막사로 들어가버렸다. 우쥔성이 따라 들어오자 장쭤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찌 이제야 오시는지. 난 당신을 오래 기다렸소. 발령 났으니 서로 임무교대를 해야지. 국가 명령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요. 빨리 봉천으로 돌아가야 민심이 안정될 것이오. 우린 오랜 친구였소. 당신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 항상 뛰어났지. 나와 임무 교대가 끝나면 나는 이제 어디서 무얼 해야 할지 말해 보시오. 내가 어디서 살아야 할지 말이오."

이에 우쥔성이 대답했다.
"상장군, 우린 더 이상 이 문제는 말하지 맙시다., 내가 있는 흑룡강성은 경작지가 얼마이며 황무지가 또 얼마나 있는지 아십니까? 몇세대의 생을 보내기에 충분합니다. 돈은 일본 정금은행, 조선은행, 동삼성 관허 금융기관에 많이 보관되어 있지만 나의 재산은 상장군에 비해서는 적습니다. 베이징 정부가 시끄럽게 수작을 부리면 구이라 곤란하기는 하지만 베이징 정부는 현재 광동성 북벌군을 상대하고 있어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오늘은 이 사람이 해임되고 내일은 저 사람이 해임된다면 성공을 못할 것입니다. 저에게 흑룡강성의 비적들을 토벌하고 말을 방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파종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를 봉천에 옮겨 놓으면 외국과의 교섭이라든지 각 성을 대표하는 것이라든지, 문치를 무치와 똑같이 한다는 것들은 제가 대응하기 벅차 저는 하루도 배겨 내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온 것은 모두가 편안하자는 것입니다. 상장군이 다롄으로 가시면 저 역시 다롄에 가고 어디든지 따라갈 것입니다."

우쥔성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장쭤린은 그제야 웃으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형님, 형님이 보기에 어찌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장쭤린의 기분이 풀렸다는 것을 안 우쥔성이 대답했다.
"대총통이나 조씨 형제들, 오생원 등 어린아이들 말은 듣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니까요. 나보고 다시 말하라고 하며 봉천에 가서 다시 말하겠습니다. 어떤 명령이든지 내려만 주십시오."

이에 장쭤린은 5월 12일 란저우에서 동삼성의 독립을 선포, 동삼성의 자치의 실시와 봉군 총사령부 개칭을 발표했다.
우방과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예전에 청국 정부와 민국 정부가 맺었던 모든 조약들을 일괄적으로 승계토록 한다. 만일 교섭사무가 있을 땐 란저우에 있는 본 총사령부의 조회를 거쳐야 한다. 이달 1일부터 베이징에서 동삼성, 몽골, 열하, 차하얼에 관하여 맺은 조약들은 본 총사령부의 허가를 득하지 못하면 승인할 수 없다.

5월 20일, 동삼성 의회는 자치를 선포하고 장쭤린을 지지했으며 5월 26일 장쭤린, 손열신, 우쥔성 등이 연명으로 "5월 1일부터 동삼성과 서남 및 장강의 동지들은 각 성에서 행동을 같이 한다. 법률을 준수하고 자치를 옹호하고 통일을 촉진토록 한다."고 발표했다. 1922년 5월 30일 장쭤린은 봉천으로 돌아갔고 6월 4일, 동삼성 의회는 장쭤린을 동삼성 보안총사령관에 추대했으며 손열신과 우쥔성을 부사령관에 추대했다. 7월 16일 장쭤린은 순열사와 독군서를 합병하여 보안사령부를 설치하고 우쥔성과 손열신을 부사령관에, 양위팅을 총참의에 임명하여 부관, 군무, 군수, 군의, 군버부, 비서 조직을 설치하였다. 또한 왕영강을 봉천성장에, 괴승을 길림성장에, 사기상을 흑룡강성장에 임명하여 동삼성 연성자치를 실시했다.

3.9. 전쟁의 종결

미국인 목사 프레드와 양크의 중재로 6월 9일 직군 사령부가 있는 진황도에서 정전 교섭이 실시되었다. 6월 11일부터 15일까지 교섭이 행해졌으나 그 사이에도 전선에서 전투가 계속되어 3천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봉군은 3명의 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하지만 산해관을 뚫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팽수신 등이 교섭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6월 16일 오후 12시, 장쉐량이 왕승빈과 회견, 휴전을 결정하였다.

6월 17일 영국 함성 컬리호에서 2차 강화회의가 열려 손열신과 장쉐량이 봉군 대표로, 왕승빈과 팽수신이 직군 대표로 배석했다. 이들은 8조로 구성된 강화조약에 서명했고 왕잔위안과 송소렴이 유관에서 철병을 감시, 6월 24일에 철군을 완료하면서 1차 직봉전쟁은 완전한 직군의 승리로 끝났다. 봉군은 3만명이 사상당하고 4만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3천만원의 군비를 소모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고 직군은 베이징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4. 결과

한편 남방에서 직계에 호응하려 했던 쑨원 중국국민당은 1922년 6월 16일 천중밍이 일으킨 영풍함 사건 때문에 붕괴, 쑨원이 상하이로 도주하는 등 위기를 겪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사천의 양썬, 광동의 천중밍이 우페이푸에게 복종하면서 직계는 관외를 제외한 중국 천하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직계는 내친 김에 그간 마음에 들지 않던 대총통 쉬스창까지 끌어내기로 결정, 구국회와 약법을 부활시키면서 쉬스창을 선출한 안복국회의 정통성을 부정하였고 2대 대총통 리위안훙을 총통으로 추대했다. 여기에 1923년에 리위안훙까지 끌어내리고 회선 사건을 일으켜 차오쿤을 6대 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군공을 세운 펑위샹 등이 논공행상에서 배제되면서 큰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장쭤린은 자신의 부채에 '무망오치' 네 글자를 새겨놓은 후 7월 24일 동삼성 육군 정리처를 설치, 대대적인 군 현대화에 착수하여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