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1b> 중화민국 1대 산동독군 | ||
한문 | 田中玉 | |
한국식 독음 | 전중옥 | |
영문 | Tian Zhongyu | |
자 | 온산(薀山) | |
출생 | 1870년 청나라 직예성 임유현 | |
사망 | 1935년 관동주 다롄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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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산해관무비학당 | |
직업 | 정치가, 군인 |
1. 개요
청말의 군인, 중화민국의 군벌. 1919년부터 4년간 산동독군으로 산동성을 지배했으나 1923년 임성 사건으로 몰락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70년 직예성 임유현에서 태어났다. 1884년 회군에 들어갔으며 포귀경, 루융샹 등과 함께 산해관무비학당에서 공부하여 졸업한 후 1885년 천진무비학당 포병과에 입학하여 1887년에 졸업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청일전쟁에 참여했었고 1895년 위안스카이의 신군건설에 참여했다. 신군에서 1899년 무위우군 포병통제를 거쳐 1902년 제1 포영대, 1904년 북양육군 1진 통대로 승진하여 양광총독 천춘쉬안의 밑에서 일했고 이후 북양교련처 총판을 역임했다. 1907년 동삼성 총독 쉬스창을 따라 동삼성총독공서 총참의에 임명되었고 1910년 강소순무 정덕전의 휘하를 거쳐 1911년 진수사를 지냈다.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혁명군 진압에 참여했다.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산동 민정장관 대리를 거쳐 육군 5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916년 육군차장에 임명, 1916년 6월 9일 차하얼 도통에 임명되어 1917년 10월까지 재임했다.
2.2. 산동왕 시절
1917년 10월에 장훈복벽을 지지하였다가 면직된 멍언위안을 대신하여 길림성 독군에 임명되었으나 멍언위안이 자리를 내놓지 않아 부임하지 못했고 1919년 12월 산동독군 겸 산동성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하남독군 교체 파동으로 산동성의 치안이 혼란해지자 하남독군 자오티에게 우광신과의 대립을 중지하고 산동성경의 치안을 회복하기 위해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직계군벌과 봉천군벌의 알력이 심해지자 1922년 1월, 치셰위안, 펑위샹, 진광원과 함께 량스이 내각을 탄핵하면서 우페이푸의 토벌론을 지지하여 1차 직봉전쟁에 참여하여 승리했다. 안휘군벌이 패배한 이후 장징야오의 잔여세력 등이 토비가 되어 산동성에 침입하자 초비사령관에 취임, 토비들을 토벌하였고 1923년 차오쿤이 대총통 취임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매수하기 위한 선거자금을 요구하자 40만원의 선거자금을 송금했다.
2.3. 몰락과 죽음
하지만 1923년 5월 임성 사건이 발생하여 여러 외국인들이 억류되자 열강 공사단의 비판을 받아 10월에 정사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하야했다.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여 일본 제국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이주, 그곳에서 살며 사업을 하다가 1935년에 병환으로 사망했다.3. 참고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臨城事件과 中國鐵道管理案, 김지환, 중국근현대사연구 36권 36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民國初 地域(小)軍閥의 운명 : 河南 趙倜·馮玉祥政權(1914~1922年)을 중심으로, 손승회, 중국근현대사연구 1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일본어 위키피디아 톈중위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