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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1:35:17

왕잔위안

파일:왕점원.jpg
중화민국 양호 순열사 겸 호북독군
한문 王占元
한국식 독음 왕점원
영문 Wang Zhanyuan
자춘(子春)
출생 1861년 2월 20일 청나라 산동성 관도현
사망 1934년 9월 14일 중화민국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천진무비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호북독군으로 리춘, 진광원과 함께 장강삼독이라 불리던 중립파의 막강한 군벌이었으나 반란으로 인해 허무하게 몰락했다.

2. 생애

1861년 현재의 하북성에 해당하는 청나라 산동성 관도현에서 태어났다. 원래 회군(淮軍)에 입대하여 알보병으로 구르다가 1890년 이홍장이 설립한 천진무비학당에 입학하여 졸업했으며 1894년 청일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이후 1895년, 위안스카이가 조직한 신건육군에 입대, 공정영대관(工程營隊官)을 맡았다. 1902년, 북양군 보병 제7영 관대, 제1표 통대(統帶), 1904년 2진 3협 통령(統領)를 맡았으며 1910년 협도통(協都統)에 이르렀다. 1911년 4월 신건육군 총위에 이르렀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펑궈장의 1군 휘하에서 2진 통제를 맡아 한커우를 점령하는 등 혁명군과 교전했고 제2진 통제로 승진했다. 중화민국 건국 후 1912년 북양육군 제2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913년 계축전쟁 진압에 참여해 공을 세웠으며 1914년 3월 예남초비총사령에 임명되어 백랑기의를 진압했다. 그 공으로 1914년 4월, 호북군무독판에 임명되었다. 1915년 12월 홍헌제제 이후 위안스카이에게 서둘러 즉위하라고 그를 부추겼고 호북장군 겸 1등 후작에 봉해졌다. 하지만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다들 그랬듯이 입을 쓱 닦으며 모른척했다.

리위안훙이 총통을 계임하여 구 국회와 약법을 회복시킨 후 정식으로 호북독군 겸 성장에 임명되었다. 돤치루이 내각에 들어온 혁명파들을 못마땅해 장쉰의 선동 아래에 사법총장 장요증, 외교총장 탕사오이 하야를 요구하였다. 부원지쟁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참전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열강의 참전 요구가 강력해지고 돤치루이가 본격적으로 움직임에 나서자 입장을 선회하여 돤치루이를 지지하였고 여러 군벌들과 함께 대독선전포고를 결의하여 대총통과 국회를 압박하였다. 이후 국회에서 돤치루이 탄핵안이 가결되자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하였다. 장훈복벽으로 리위안훙이 물러나고 부총통 펑궈장이 대총통을 계임하면서 펑궈장은 장강 연안의 자신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리춘, 진광원, 왕잔위안 3인의 독군직을 돤치루이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돤치루이가 이를 수락하면서 호북성의 지배권을 유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장강삼독의 근원이다. 이후 호북성을 통치하면서 자신의 산동성 인맥을 적극 활용하였다.

호법전쟁이 발발한 후 장강삼독의 일원이 되어 1917년 10월 리춘, 진광원과 함께 무력통전에 반대하는 통전을 보냈다. 호남독군 푸량쭤가 계계군벌 탄하오밍, 상계군벌 자오헝티, 청첸의 공격으로 패퇴하자 돤치루이는 결국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대총통 펑궈장이 정전령을 내리면서 이들의 평화통일 요구는 성공을 거두는 듯 싶었지만 1918년 1월에 전쟁이 재개되고 3월에 돤치루이가 다시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더 이상 정전요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이 벌어지자 중국의 국력이 미약해 외교라는 것이 불가능하며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더욱 어렵고 큰 손해를 당하지 않은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유로 학생운동을 비판했다.

1919년, 돤치루이의 독재를 견디다 못해 리춘, 진광원, 장쭤린, 손열신, 포귀경, 자오티 등과 함께 반환8성동맹을 체결하였고 1920년 안직전쟁에서 환계를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대총통 쉬스창으로부터 양호순열사 겸 호북독군에 임명되었다. 안직전쟁 이후 하남성과 호북 북부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게 된 우페이푸를 견제하여 장쭤린과의 동맹을 타진했으며 호북, 사천, 운남, 귀주, 호남, 강서 6성 자치동맹을 모색하였다. 리춘이 정신병으로 자살한 이후에는 장강삼독의 우두머리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이후 국무총리 진윈펑이 개최한 천진 4거두 회의에 참여하는 등 중화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강력한 자치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자오헝티의 호남성에서 시작된 연성자치운동이 호북성으로 번지면서 기반이 불안해졌다. 결국 1921년 6월, 우페이푸가 조종한 것으로 알려진 호북성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결국 축출되었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양호순열사 자리는 우페이푸가 차지하게 된다. 우페이푸는 왕잔위안이 봉천군벌 전계군벌, 계계군벌에 우호적 태도를 가진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원악전쟁이라 불리는 호북성 병변이 일어나자 지체없이 대군을 파견하여 왕잔위안의 기반을 몰아냈으며 이후 호북성은 우페이푸의 부하 소요남이 지배하게 된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끝난 후 봉천군벌의 철병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그의 부하였던 쑨촨팡 손봉전쟁에서 장쭤린을 대파하고 강남의 최대 군벌로 부상하게 되자 그의 휘하에서 5성연군 총사령부 훈련총감을 맡았으며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장쭤린, 장쭝창 쑨촨팡의 동맹을 위한 사절로 파견되었다. 이후 장쭤린의 대원수 정부에서 육군검열사를 맡았으나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까지 성공해 베이징이 함락되자 천진의 조계지로 도주했다. 이후 실업계에 종사하며 베이징, 톈진 등을 떠돌았고 부동산, 주식 투자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갑부가 되었다. 그렇게 괜찮은 말년을 보내다가 1934년 톈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