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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촨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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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오성연군 총사령관
쑨촨팡
孫傳芳(손전방) | Sun Chuanfang
'''
파일:손전방.jpg
이름 <colbgcolor=#fff,#1f2023> 쑨촨팡
손전방 | 孫傳芳 | 孙传芳 | Sun Chuanfang
형원(馨沅)
별명 소호(笑虎)
출생 1885년 4월 17일
산동성 력성현
사망 1935년 11월 13일 (향년 50세)
중화민국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종교 불교

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오성연군 총사령관2.3. 국민당의 1차 북벌2.4. 국민당의 2차 북벌2.5. 말년
3. 가족4. 여담5. 매체에서6. 주요 경력7. 참고문헌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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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직계군벌의 인물로 한때 복건, 절강, 강서, 강소, 안휘 등 5개 성을 지배하는 강남의 대실력자로 군림하였으나 국민당의 1차 북벌로 몰락했다. 늘 웃는 표정을 유지하다가 눈 하나 깜빡않고 잔인한 짓을 저지르곤 하여 별명은 소호(笑虎), 즉 웃는 호랑이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885년 산동성 태안시 대악구 축양진 하교장촌에서 태어났다. 조상으로는 북송시기의 교육가 손복이 있었으나 어릴 때 부친을 잃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결국 온 일가가 고향을 떠나 역성으로 이주했는데 1895년에는 어머니를 따라 역성을 떠나 정가에 정착했다. 1899년 산동성에서 의화단 운동으로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제남으로 이주했다. 이때 산동순무인 위안스카이의 부하였던 무위우군 집법 영무처 왕영해가 쑨촨팡의 셋째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서 왕영해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출생지를 정식으로 역성으로 고쳤다.

1901년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으로 승진하자 왕영해도 위안스카이를 따라 바오딩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쑨촨팡도 왕영해와 함께 바오딩으로 이사했다. 1902년, 위안스카이가 신건육군을 건설하기 시작하자 왕영해의 추천으로 1902년 8월 훈련병으로 입대했으며 북양육군속성학당 보병과 3반에 입학했다. 두뇌가 명석하고 훈련에 성실히 임해 모든 과정을 통과하고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장령훈련대대 졸업 후 펑궈장의 추천으로 육군속성무비학당에 진학하여 1904년 보병과를 졸업하고 북경연병처의 일본유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이때 시험에 응시한 인물로 주음인, 노향정 등이 있었으며 시험 합격 후 톈진, 상하이를 거쳐 도쿄로 가게 되었다. 우선 진무학교에 들어갔던 쑨촨팡은 1906년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육군 10사단 보병연대 보충후보생에 입학하여 1907년 11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쑨촨팡의 구대장이었던 사람이 보병중위 오카무라 야스지였다. 1908년 12월, 육사를 졸업한 쑨촨팡은 10사단 보병연대에서 3개월 동안 견습활동을 한 후 1909년 3월 귀국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귀국 후 톈진에서 장씨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1909년 8월 육군부에서 실시한 일본 유학생 상대 고시에 옌시산, 리례쥔, 탕지야오, 자오헝티, 유존후 등 일본에서 공부한 쟁쟁한 인물들과 함께 응시하였다. 쑨촨팡은 보병과 거인과 보병협 군교를 받고 재시험을 치른 후 톈진에 파견되어 북양육군 2진 3협 5표 교련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3협 협통 왕잔위안은 쑨촨팡의 우수한 근무성적을 보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11년, 2사단 치중 제2영 영장으로 전임되었고 1912년 왕잔위안과 함께 하남성에서 백랑기의를 진압했다. 그 공으로 1913년 2사단 6연대장으로 승진했고 1916년 왕잔위안이 호북독군에 임명되면서 3여단장으로 승진, 21혼성여단장을 거쳐 1917년 임시편성 1사단장에 승진했으며 호북군무방판을 역임했다.

1920년, 탄옌카이, 자오헝티 등의 상계군벌이 호북성을 공격하자 왕잔위안의 명령에 따라 이를 격퇴했고 7월,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왕잔위안 휘하에서 참전하여 장강상류총사령 우광신의 부대를 격파하고 그의 부대를 무장해제하였다. 1920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 안휘군벌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복건성은 안휘군벌인 복건독군 리허우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후에도 중립정책을 표방하며 2년간 복건을 지배했다. 그러나 남방의 쉬충즈 등의 공격에 리허우지가 패배하자 쑨촨팡은 주음인과 함께 1923년 3월, 부대를 이끌로 복건성에 진출하여 복건의 민군을 토벌하고 복건성을 장악하여 복건군무독리에 임명되었다. 쑨촨팡은 유종기를 참모장에, 왕영천을 방판에 유임시키고 주음인을 민북호군사로 임명하는 등 복건의 군정을 장악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 이후 대총통 쉬스창을 몰아내기 위해 우페이푸가 법통중광 운동을 벌이자 정치색이 미약했던 쑨촨팡의 우페이푸의 지시로 리위안훙의 총통 복직 운동을 전개하게 했다. 1923년 회선 사건을 즈음하여 직계군벌이 보정파와 낙양파로 분열되자 우페이푸의 낙양파에 속하여 계속 복건을 지배했다. 이후 제남 지역에서 군인을 모집하여 병력을 확충했다.

2.2. 오성연군 총사령관

파일:리즈시절의 쑨촨팡.jpg
리즈시절의 쑨촨팡

1924년 9월 강절전쟁 때 민월변방독판에 임명되어 중국국민당이 안휘군벌을 지원하는 것을 막았으며 9월 7일 차오쿤의 정식 토벌령이 하달된 이후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원조하여 절강독군 루융샹을 축출했고 그 대가로 민절순열사 겸 절강군무독리에 임명되어 대대적으로 군세를 확장했다. 2차 직봉전쟁에서 직계군벌이 몰락한 이후 1924년 11월 19일 치셰위안, 소요남, 유진화, 두시구이, 주음인, 채성훈, 왕보, 이병지와 연명으로 돤치루이의 임시집정 추대를 요청하였다. 11월 24일 임시집정에 취임한 돤치루이의 대표인 육군총장 우광신과 협상하여 절강독판에 임명, 제노전쟁에서 치셰위안이 몰락하는 것을 방관했다.

하지만 새 강소독판 양위팅, 안휘독판 장덩쉬안 등의 전횡이 심각하고 이들이 오만불손하게 굴자 봉천군벌의 다음 목표는 자신이 될 것이라 여겨 양위팅에게 불만이 많던 강소성의 장령들 및 5성의 대표들 및 펑위샹의 국민군과 연계, 1925년 10월 손봉전쟁을 일으켜 강남의 봉천군벌을 축출하고 오성연군 총사령관 겸 강소 총사령이 되어 난징에 총사령부를 두고 20만 대군을 부리는 직예파 최대 군벌이 되었다. 1925년 10월 20일 소요남 등 20여명의 직계군벌 장령들과 함께 우페이푸를 14개성 토벌연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10월에 산동독판 장쭝창과 진포선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교전했고 11월, 쑨촨팡의 부하 사홍훈이 제남진수사 시공빈의 부대를 격파하고 시공빈을 사로잡았다. 쑨촨팡은 시공빈을 즉시 처형했다. 이후 강소성장에 진도유, 절강성장에 하초, 안휘성장에 왕보, 복건성장에 싸전빙, 강서성장에 이정괴를 임명하고 오카무라 야스지를 고등군사고문으로 초빙했다. 그리고 연군 군관학교를 창설하고 직접 교장에 취임하는 등 군세 확장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1926~1927년에 걸쳐 상하이의 노동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펑위샹과 연대하고 돤치루이를 용인하며 봉천군벌에 대해서는 적대정책을 취했다. 그의 통치는 보수적이라 과거 사대부들이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를 진흥하는 등 옛 풍습을 지원하고 부녀자의 치파오 착용과 단발에 대해서 엄금하였다.[1] 그리고 두웨성을 비롯한 청방의 우두머리들과 결탁하여 흑색재료공사와 삼성공사를 수립하여 아편장사를 하는 것을 허락하여 이를 통해 많은 이득을 취했다. 원래 우페이푸를 지원하여 장쭤린을 공격하도록 사주하였으나 우페이푸가 장쭤린과 손잡고 펑위샹을 공격하자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펑위샹과는 딱히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1926년 직봉풍전쟁이 일어났을때 이를 방관했다.

2.3. 국민당의 1차 북벌

국민혁명군이 초기에 하남성과 양호 지역을 지배하는 우페이푸 타격에 우선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우페이푸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관망하는 한편 국민당과의 협상을 꾀했으나 장제스가 광저우 국민정부에 복종하고 국민당에 입당하는 조건을 제시하자 이를 거부하고 보경안민을 외치며 산동성의 장쭝창과 의형제를 맺어 북방을 안전히 하는 한편, 병력을 배치하여 국민혁명군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었다.

1926년 9월 국민혁명군이 강서성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국민혁명군과 쑨촨팡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민혁명군은 초기에 난창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으나 쑨촨팡의 반격으로 곧 격퇴되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직접 독전에 나서고 국민혁명군이 포위기동에 나서자 결국 쑨촨팡은 강서성을 잃고 난징으로 퇴각했다. 10월 11일 난창이 다시 포위되고 11월 4일 구강이 함락되자 쑨촨팡은 배를 타고 상하이로 도주하여 11월 8일 난창이 다시 국민혁명군의 손에 들어왔다. 쑨촨팡은 복건의 주음인에게 명령하여 광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지만 주음인은 이에 응하지 않고 푸저우에서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쑨촨팡이 재차 공격을 지시하자 주음인은 할 수 없이 광동을 공격했으나 허잉친이 남방에서 진격하여 도리어 12월에 복주가 점령되었고 1927년 1월에 절강에 이르게 되었다.

11월에 이르러서는 장쭝창 등 봉천군벌의 실력자들이 쑨촨팡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장쭤린은 쑨촨팡을 안국군 부사령관 겸 오성연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쑨촨팡과 동맹을 체결하고 공동으로 국민당에 맞서기로 했다. 쑨촨팡은 돤치루이, 우페이푸를 연계하는 독자적인 3각동맹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직접 톈진으로 가서 장쭤린과 회담, 국민당과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2월에 항저우가 함락되었으며 3월에 이르러 리쭝런이 안휘성을 점령했고 쉐웨 바이충시의 공격 및 저우언라이가 주도한 폭동과 총파업으로 인해 강소성 역시 국민당에게 넘어갔고 쑨촨팡은 장강을 넘어 북으로 도주했다.

국민당은 이때 국공갈등이 심해져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로 분열되었지만 양 국민정부 모두 일단 서로에 대한 공격은 하지 않고 각각 북벌에 나섰다. 난징 국민정부는 쉬저우을 함락, 산동성으로 북상했고 쑨촨팡은 병력을 보전하기 위해 계속 퇴각해야 했다. 베이징으로 간 쑨촨팡은 장쭝창 등과 함께 장쭤린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여 안국군 정부를 수립한 후 7월에 장제스에 대한 역습을 감행했다. 마침 탕성즈, 장파쿠이 등 우한국민정부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해야 했던 장제스는 쑨촨팡의 역습에 크게 당하여 쉬저우를 잃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쑨촨팡의 공세는 결국 8월 리쭝런, 바이충시, 허잉친의 공세에 격퇴되었으나 8월 13일 장제스는 우한과 난징의 통합을 위해 하야했고 영한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일본은 쑨촨팡과 장쭝창을 원조하기 위해 관동군을 산동반도에 보내는 1차 산동파병을 단행하여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저지하고자 했다.

2.4. 국민당의 2차 북벌

이후 국민당은 중국공산당 국공결렬을 결정하고 이에 반발한 공산당이 난창 폭동,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일으키는 등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으며 향후 새 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서산회의파, 왕징웨이의 개조파, 리쭝런, 바이충시 광서파, 리지천 등의 광동파가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 다툼은 1927년 12월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정치적 권위를 강화한 장제스가 귀국하여 1928년 공직에 복직하고 나서야 진정되었고 장제스는 다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8년 다시 난징 국민정부를 출범시킨 국민정부는 북벌을 준비하였고 안국군 정부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장쭤린은 쑨촨팡에게 장쭝창과 연계하여 제녕, 노남 일대를 사수할 것을 지시했다. 2월 12일, 쑨촨팡은 산동독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쑨촨팡은 장쭤린의 지시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쉬저우 공략에 나섰다가 국민혁명군의 저항에 패주했고 1928년 4월 7일 장제스는 정식으로 2차 북벌을 선포했다. 결국 산동전선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국민혁명군은 일본군 제남 사건을 통해 충돌하여 잠시 진격이 지체되긴 하였으나 이를 곧 수습하고 다시 베이징을 향해 진군하였다. 결국 장쭤린은 봉천으로 퇴각하여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고모토 다이사쿠 등 관동군 장교들의 음모로 인하여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고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산해관 너머로 후퇴,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합류하였다. 오갈곳 없어진 쑨촨팡은 제남을 거쳐 4월 30일, 황하를 건너 북중국으로 도주했고 6월 3일, 모든 공직에서 사퇴함을 알리는 통전을 날렸다. 이후 잠시 장쉐량에게 의탁했으나 곧 장쉐량을 의심하게 되어 일본 제국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도주했다. 쑨촨팡의 잔여 부대 2개 사단은 난주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1929년 1월 5일, 옌시산에게 모두 투항하여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에게 흡수되었다.

2.5. 말년

파일:말년의 쑨촨팡.jpg
말년의 쑨촨팡

1930년 중원대전에서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재기를 도모했으나 반장파가 진압당하면서 실패했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정치에서 은퇴하여 불경 공부에 전념할 것을 통전하고 톈진의 영국 조계지에 은거했다. 1933년 열하사변 이후 일본 제국이 하북성에 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쑨촨팡을 포섭하려 들자 국민정부도 이에 맞서기 위해 쑨촨팡을 회유하려 하였다. 일본은 옹손도장의 구호를 내걸고 1935년 6월 14일 베이핑 시내에 삐라를 뿌려 쑨촨팡을 옹립하여 장제스를 타도하자는 여론을 조성했다. 쑨촨팡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은 이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의 이름을 이용한 삐라는 일본인의 음모가 틀림없다. 나는 전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쑨촨팡은 복잡한 정세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곤 했는데 쑨촨팡에 복수하려는 여인이 쑨촨팡을 추적하고 있었다. 이는 장쭝창의 부하였던 산동군 전선 총지휘관 시공빈의 딸 스젠차오였다. 시공빈은 1925년 10월 3일 손봉전쟁 중 안휘독판에 임명되어 쑨촨팡과 싸우다 패하여 포로로 잡혔는데 쑨촨팡은 포로로 잡힌 시공빈을 참수하여 3일 간 효수하였다. 이에 스젠차오는 복수를 맹세하여 10년이나 쑨촨팡의 뒤를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쑨촨팡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려다 실패했고 나중에는 쑨촨팡의 차를 외워 쫓아 죽이려 했으나 이도 여의치 않았다.

좌절한 스젠차오가 1935년 9월 17일, 거사림(居士林)이란 절에서 불공을 드리며 통곡하자 절의 주지스님이 쑨촨팡같은 사람도 불교에 귀의했으니 열심히 불공을 드리라고 조언하여 쑨촨팡이 거사림에 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다. 1935년 11월 13일, 스젠차오는 향불을 피우며 염불을 외던 쑨촨팡에게 브라우닝 권총 3발을 쏘아 머리에 적중시켜 죽였다. 이 소식은 중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고 쑨촨팡은 자신이 죽인 사람의 딸 손에 그렇게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3. 가족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염색공장에서 근무했다.

2남은 베이징대 졸업후 호주로 이민갔다.

3남은 난징시 정협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남은 대만사범대학 미술과 졸업후 대만사범대학 미술과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수묵화의 대가로서 대만 수묵화 협회 회장이기도 하다.

장녀는 북양정부 장시 독군 천광웬의 8남과 결혼했다.

2녀는 봉천군벌의 장군 우쥔셩의 조카와 결혼했다.

3녀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거주중이라고 한다.

4. 여담

파일:쑨촨팡과 시쟝자오.jpg
쑨촨팡과 스젠차오

쑨촨팡을 살해한 스젠차오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오로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총을 쏘았을 뿐이니 두려워말라며 자신의 거사에 대해 설명한 전단을 배부하고 자수했다. 전국적으로 스젠차오를 동정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으며 오히려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등 악행을 밥먹듯 일삼아서 평가가 좋지 않던 쑨촨팡을 죽인 일에 대해 통쾌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펑위샹, 리례쥔, 장쥐를 비롯하여 사회의 명사들이 스젠차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으며 전국적인 동정여론이 불어닥쳤다. 그 결과 스젠차오는 유기징역 7년의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며 그나마도 1936년 10월 20일에 특사로 불과 1년만에 풀려났다. 이후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시절까지 생존했으며 1957년 베이징 정협위원에 임명되기도 했고 1979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병환으로 사망했다.

쑨촨팡이 죽은 직후 일본 제국은 끝내 한간 인루겅을 포섭하여 기동사변을 획책,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수립했다.

5. 매체에서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한 세계를 다루는 대체역사물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 등장한다. 독일의 지원으로 장제스의 북벌을 방어하는데 성공하고 광둥, 광시와 후난까지 정복하여 팔성연합을 세운다. 우페이푸가 독일의 강압으로 청나라를 다시 세운 이후에는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에 경쟁하기 위해 광저우, 샤먼, 원저우 등의 해안 도시들을 독일에 팔아먹고 무기와 자본을 지원받는 매국행위를 벌인다.[2] 쑨촨팡 통치하의 팔성연합은 군인들은 위부터 아래까지 전부 썩어서 규율은 떨어지고 뇌물이나 탐하는 한심한 작태와 매국적인 모습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게임 시작시인 1936년에는 결국 철도 문제로 민중봉기가 터지고 그 뒤를 봐줘야할 독일도 경제 대공황인 검은 월요일로 힘을 못 쓰게 되는 와중에 쑨촨팡 본인은 가정부로 변장한 스젠차오에게 여기서도 암살당한다. 팔성연합은 안휘의 천댜오위안이 독립을 선언하고 푸젠성 남쪽 끝에서 왕징웨이 쑹칭링의 국민당 잔당이 궐기하며 북에서는 산둥의 장쭝창 혹은 사이비종교 일관도 교주 장톈란 중 권력투쟁이 이긴 쪽[3]에서 들어오며 붕괴하고 만다. 잔당들은 치셰위안이 접수해 난징 군벌을 이룬다.
1.2 패치로 최용덕이 휘하의 공군 전문가로 등장한다.

6. 주요 경력

복건성 역대 지방장관
1대 복건독군 1대 복건독리 2대 복건독리
리허우지 쑨촨팡
( 1923년 3월 ~ 1924년 5월)
주음인
절강성 역대 지방장관
3대 절강독군 1대 절강독리, 1대 절강독판 1대 절강성 정부주석
루융샹 쑨촨팡
( 1924년 9월 ~ 1926년 12월)
장런제
강소성 역대 지방장관
2대 강소독판 3대 강소독판 1대 강소성 정부주석
양위팅 쑨촨팡
( 1925년 10월 15일 ~ 1927년 3월)
유영건

7. 참고문헌

8. 관련 문서


[1] 당시 단발머리한 여자=빨갱이란 인식이 강했었다. 그래서 군벌전쟁 와중에 단발머리 여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대량으로 처형하는 참극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2] 이전에는 '독일령 동아시아'의 영토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설정 변경 이후 팔성연합의 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뿐, 해안 도시를 얼마나 팔성연합-난징군벌이 쥐고 있느냐에 따라 독일령 동아시아 측에서 민간공장 버프를 받는다. [3] 취잉광이 이기면 개입하지 않고 청조의 자치령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