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정국군 서로 사령관 | ||
정체 | 曲同豊 | |
간체 | 曲同丰 | |
한국식 독음 | 곡동풍 | |
영문 | Qu Tongfeng | |
자 | 위경(伟卿) | |
출생 | 1873년 청나라 산동성 복산현 | |
사망 | 1929년 3월 9일 중화민국 톈진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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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일본육군사관학교 | |
직업 | 군인, 정치가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안휘군벌의 주요 장령이었으나 안직전쟁 때 패배하고 은거하다가 살해당했다.2. 생애
1873년 산동성 복산에서 태어났다. 원래 과거시험을 지향했으나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여 북양함대의 정원호의 기관사가 되어 청일전쟁에 참여했다. 정원이 피격당했을 때 바다로 뛰어들어 죽을 뻔 했으나 구조되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천진무비학당을 거쳐 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16기로 입학해서 1904년에 졸업했다. 1907년부터 천진무비학당에서 장교들을 가르쳤고 1910년 운남 제19진 보병통솔관을 지냈다.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차이어의 제안으로 이에 참가하였고 중화민국 건국 이후 바오딩 군관학교 교장을 지냈으나 일본 제국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여 해임되었다.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다시 중용되어 안휘군벌의 주요장령이 되어 1917년 참전군 제1사단장을 역임했고 환계의 세력 확장을 위해 쉬수정과 함께 진문운, 마량 등을 시켜 뤄양, 선화, 랑방, 베이징 근처에서 참전군 3개 사단을 육성하여 쉬수정의 4개 여단을 합쳐 총 6만명의 병력을 양성했다. 이때 푸량쭤, 쉬수정, 진윈펑 등과 더불어 환계 4대 금강으로 불렸다.[1]
이후 참전군 창설의 당위성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참전군이 변방군으로 개편되자 변방군 제1사단장이 되었다. 1920년 안직전쟁 때 정국군 서로 사령관에 임명되어 환군 2로군을 지휘해 직예군벌과 싸웠으나 1로군 15사단 등 휘하 부대의 배신으로 패배하여 우페이푸에게 포로로 잡혀 차오쿤에게 헌도의식을 치르며 항복했고 이후 포로로 지내다가 1921년 12월 출범한 량스이 내각에 의해 1922년 1월 1일 돤즈구이, 진수원, 유순, 위종한 등 환계의 주요 인물들과 같이 사면, 석방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우페이푸가 크게 분노하여 장쭤린의 봉천군벌과 차오쿤, 우페이푸의 직예군벌 사이의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직예군벌이 승리하였다.
1924년 9월 강절전쟁을 빌미로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는데 10월의 북경정변으로 대총통 차오쿤이 하야하고 돤치루이 임시집정정부가 들어서자 1925년 임시정부 항공처장에 임명되었으나 펑위샹의 국민군에게 돤치루이 정부가 무너지자 톈진에 은거하였다. 국민혁명 시기에 국민혁명군이 북상하자 봉천군벌에 의탁하여 장쭝창 휘하 2방면군 17군 군장을 맡아 참전했으나 패배했다.
1929년 3월 9일 피격당해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