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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8:17:14

쉬수정

파일:서수쟁.jpg
중화민국 서북주변사 겸 변방군 사령관
정체 徐樹錚
간체 徐树铮
한국식 독음 서수쟁
영문 Xu Shuzheng
철산(铁珊)
우정(又铮)
출생 1880년 11월 11일 청나라 강소성 소현
사망 1925년 12월 30일 중화민국 직예성 랑방(향년 45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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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북양정부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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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중화민국
]]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부원지쟁 ~ 호법전쟁2.3. 서북주변사 ~ 안직전쟁2.4. 때 이른 죽음
3. 기타4. 참고 문헌5.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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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 북양군벌의 한 파벌인 안휘군벌의 장군. 돤치루이의 측근으로 그의 비호를 받으며 큰 권세를 누렸지만 안직전쟁의 패배로 몰락했고 2차 직봉전쟁으로 돤치루이 임시 집정 정부가 들어서자 중국에 귀국했으나 펑위샹의 지시로 살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1880년 11월 11일 강소성 소현의 신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수재가 되는 등 어려서부터 재능이 출중했고 1905년 돤치루이의 추천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했다. 1910년 귀국하여 1911년 북양군에 입대하여 제1군 참모 등을 역임했다. 돤치루이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우광신, 푸량쭤, 진윈펑과 함께 안휘파의 4대 금강 중 한 사람이라 불렀으며 돤치루이의 비호 아래에 쉬수정도 고속승진할 수 있었다.

2.2. 부원지쟁 ~ 호법전쟁

쉬수정은 1914년 육군차관에 임명되었으며 홍헌제제 때 북양군벌 내부의 반대파를 제압하기 위한 위안스카이의 음모로 인해 잠시 탄핵당했지만 호국전쟁 이후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고 곧 사망하면서 별일 없었다. 1916년 돤치루이 내각이 출범하자 국무총리의 비서인 국무원비서장을 역임했고 1917년의 부원지쟁에서 돤치루이를 보좌했다. 비서장의 신분으로 돤치루이가 대총통 리위안훙을 만날 일이 있을때마다 대신 만났고 만나도 오만불손한 태도로 일관하여 리위안훙의 미움을 샀다. 이후 리위안훙 제거를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1917년 7월 1일 복벽파 군벌 장쉰의 주도로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데 참가했고 1917년 호법전쟁에 참가하여 남방에 대한 강경한 토벌론을 주장하였다. 1917년 11월 돤치루이가 하야하고 왕스전이 새로운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장회지, 차오쿤, 니쓰충을 사주하여 독군들의 주전 여론을 조성하여 3월에 돤치루이를 복직시켰다.

호법전쟁 도중 직예군벌 차오쿤, 우페이푸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진격을 정지하자 장쭤린 봉천군벌 안휘군벌의 동맹을 추진하여 직계를 압박한 것도 쉬수정이었지만 펑위샹의 외삼촌이자 직계의 원로인 육건장을 봉천군 사령부에서 장쭤린이나 돤치루이의 동의도 없이 살해하여 직계와 봉계의 원한을 동시에 샀고 군비와 군수물자 배분에 있어 욕심을 많이 부렸기 때문에 장쭤린과 사이가 크게 악화되어 환계와 봉계의 동맹이 결렬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918년 안복구락부를 조직하여 안휘계가 국회를 장악, 소위 안복국회라 불리는 돤치루이의 어용 국회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때 진윈펑, 첸넝쉰 등은 쉬수정에게 불만을 품고 쉬스창의 지원을 받아 기미구락부를 조직했다.

2.3. 서북주변사 ~ 안직전쟁

파일:Xu_Shuzheng.jpg
리즈시절의 쉬수정

호법전쟁이 흐지부지하게 끝난 이후 참전독판처참모장에 임명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는 구실로 취퉁펑과 함께 안휘계의 사병인 6만명 규모의 참전군을 조직하였고 5.4운동 이후 국내외적으로 참전군의 존재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자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한 다음에 서북주변사 겸 변방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19년 10월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여 11월 17일 복드 칸국의 자치를 취소하였다. 이후 서북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동북의 지배자 장쭤린의 비위를 크게 거슬렀다.

환계의 세력확장을 위해 안하무인으로 구는 행보 때문에 봉계와 직계의 공적으로 낙인 찍혀 제거하라는 목소리가 빗발쳤으나 돤치루이는 그를 끝까지 비호하며 내치지 않았다. 결국 1920년 3월, 돤치루이를 견제하기 위한 8성 동맹이 체결되고 직계의 거두 우페이푸가 변방군 견제를 위해 북상하면서 직계와 환계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대총통 쉬스창이 중재를 요청하자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이 직접 베이징으로 와서 중재에 나섰지만 입장 차이가 커서 끝내 중재가 결렬되었다. 쉬수정은 급기야 장쭤린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면서 7월 3일 차오쿤, 리춘, 장쭤린이 쉬수정 토벌을 통전, 돤치루이도 맞토벌을 통전하면서 7월 14일 안직전쟁이 발발했다.

쉬수정은 변방군을 지휘, 봉천군벌과 싸웠으나 7월 17일 베이징으로 도주하면서 변방군은 순식간에 궤멸당했고 우페이푸의 직계군이 취퉁펑 등의 주요 지휘관을 사로잡으면서 안직전쟁에서 환계는 단 며칠만에 순식간에 패배했다. 7월 19일 돤치루이가 하야하고 7월 23일 직계와 봉계의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한 후 안복구락부가 해체, 쉬수정 등에 대한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이에 쉬수정은 상하이로 도주했다.

2.4. 때 이른 죽음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안휘계의 재기를 도모하여 광저우에 특사로 파견, 쑨원, 장쭤린과 함께 반직삼각동맹을 체결했지만 1차 직봉전쟁은 우페이푸의 승리로 끝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1924년 9월 강절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안휘군벌의 잔당을 모아 강소-절강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 안휘계의 재기를 다시 도모했지만 상하이 조계지 당국이 군사활동을 금지함에 따라 실패하고 외유를 떠났다. 이어 일어난 2차 직봉전쟁에서 환계와 봉계의 연합군이 승리,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자 1925년 1월 외교사절단으로 임명되어 외교활동을 하였다. 1925년 12월 11일, 외교업무를 끝내고 상하이로 귀국했다. 이후 반봉사건 막바지인 12월 19일에 베이징에 들렀다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오는 전용 기차에 탑승했는데 12월 29일 랑방역에서 펑위샹의 부하 장기강에게 납치되어 12월 30일 새벽에 살해당했다. 이는 돤치루이의 임시 집정 정부와 펑위샹이 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수정이 펑위샹의 외삼촌 육건장을 살해한 일 역시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쉬수정이 죽고 난 직후 장쭤린이 국민군 토벌을 선언하면서 직봉풍전쟁이 일어난다.

3. 기타

정실이외에 첩이 4명 있었다. 4남 6녀를 두었다. 쉬수정의 현 자손들은 대부분 해외에 거주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4. 참고 문헌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