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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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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731部隊ななさんいちぶたい.jpg
731 부대 본부 전경
1. 개요2. 설립3. 마루타4. 계급 체계5. 행적6. 만행
6.1. 부대 내규6.2. 생체실험 내역
6.2.1. 생체 반응 실험6.2.2. 무기 실험6.2.3. 세균 실험6.2.4. 기타 생체 실험
6.3. 기타 만행
7. 일본 제국 멸망 후
7.1. 하바롭스크 재판7.2. 이시이 시로의 회고7.3. 부대 건물7.4. 소련의 데이터 활용7.5. 이후
8. 미국에 의한 전쟁범죄 은폐와 면책특권 부여9. 유사 부대10. 현지 사건11. 부대원12. 생체실험 피해자
12.1. 한국인12.2. 러시아인12.3. 특별이송
13. 생존자들
13.1. 탈출 이후의 행적
14. 기타15. 대중매체에서16. 관련 자료1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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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31[ruby(部隊, ruby=ぶた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을 포함한 각종 생화학무기개발 등의 업무를 하던 일본 제국 육군 소속 부대.

후술하겠지만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다. 당연히 이 문서에 기술된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다고는 차마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짓들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고문하여 처참히 죽게 만든 일본의 행태는 그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집단주의 사상에 절여져 비이성적•반윤리적 행위를 밥먹듯이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

부대본부는 하얼빈시 핑팡구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関東軍防疫給水部本部)"다. 영어로는 "Unit 731", 표준 중국어로는 731[ruby(部队, ruby=bùduì)]로 표기한다.

2. 설립

1936년에 육군군의학교 방역부 휘하 이시이 시로 등 군의(軍醫) 5명이 속한 방역연구실로서 시작되었다. 1936년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가 관동군 방역부의 신설 및 증강을 주장했고 이것을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가 재가하면서 방역연구실은 '관동군방역부'로 정식 발족되었으며 1940년 하얼빈시 남부 핑팡(平房)에 새로운 부대 시설을 지은 뒤 통칭 '만주 제659 부대 관동군 방역 급수부(満洲第659部隊 関東軍防疫給水部本部)'로 개편되었다.[1] 이 부대는 일본 제국이 패망한 1945년까지 약 5년간 활동했다.

'방역급수부'란 전염병을 예방하고 물을 공급한다는 뜻이다. 즉, 부대 명칭대로라면 예방의학의 연구 및 식수의 병참을 연구하는 부대여야 했다. 그러나 이시이 시로가 부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명칭은 위장명칭으로 전락했고 비인간적인 인체실험을 통해서 생물학무기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731 부대는 이시이 시로 취임후 부대의 성격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생물학전을 대비한 세균전 부대로 창설되고 운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대 초기에는 '동향부대'라 불리웠고 이후 731이라는 비밀 명칭을 유지하다가 패전 직전인 1945년 초에 부대 비밀코드가 25202로 변경된다.

본디 만주 지역은 공기와 물이 매우 나빠서 말라리아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실제 일본군은 전염병 사상자가 전투사상자 이상으로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급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쇼와 덴노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에 급수부대를 창설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방역급수부대로 창설되었다.

하지만 위에 서술된 것처럼 이 부대는 애초에 대대적인 세균병기를 사용한 전쟁을 대비할 목적으로 창설되었고 방역 급수는 그 임무의 일부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731부대는 창설 이후 전쟁기간 내내 단 한번도 그 존재와 임무가 공개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대의 존재는 일반 군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본군 장성들에게까지도 극비로 부쳐졌는데 731에 관해 알고 있던 장성들은 관동군 사령관 및 극소수의 관련자들 뿐이었다. 이 부대 보안의 등급이 어느 정도로 높았냐 하면 부대 상공을 허가없이 비행하는 항공기는 일본군 소속이라도 격추할 수 있도록 상시 허가가 내려진 상태였다. 731부대는 전투기 경폭격기 수송기 여객기 등을 갖춘 자체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731부대 부근에 주둔하던 일본 육군 제8372 항공대도 731의 임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이 부대의 정리정돈, 청산 이전까지 대외적으로 이런 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질 않았는데 그야 당연히 부대 자체가 군사기밀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731부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731부대는 일본 육군이 추진한 세균전 프로젝트의 본부격인 조직이고, 핑파오의 731부대 본부외에도 4개의 731 지대와 소규모 방역급수부대 (로 위장한 세균전부대)가 만주 중국 조선 및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점령지 도처에 수십 군데가 존재했다. 이 부대들을 통칭 이시이 부대로 부르며 외에도 독가스 전문 연구를 하는 관동군 화학부 516부대 및 동식물 관련 질병 연구를 하던 관동군 군마 방역창 제100 부대 등이 존재했다. 이들 특수임무 부대들은 731부대와 수시로 연구 교류를 실시했다.

3. 마루타

이러한 인체실험의 대상을 ' 마루타[2]'라고 불렀다. 희생자 중에서는 전쟁 포로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소수의 한국인, 미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연합군 포로(미군, 중국군 등)나 소련인 간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끌려가 희생되었다.

미국도 전후 전범들과의 사법거래를 통해 생체실험을 통해 나온 자료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시이 시로 같이 731 부대에서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른 자들보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3] 이는 미군과의 사법거래에 의한 것이다. 미국이 자료에 눈이 멀어 전범에게 면죄부를 준 탓에 죽어나간 사람들만 억울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이 난징 대학살, 만주사변, 위안부 문제와 달리 731 부대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종전 후 자료 분석 결과 당시 일본 제국의 산업기술과 공업력이 약해서 실험이 대부분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통제변인이나 조작변인 따위는 구분되어 있지도 않아서 실제로 쓸만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사실 일본보다 몇 달 이전에 항복했던 나치 독일도 비슷한 생체실험들을 진행했고 독일 쪽 자료들 중에는 순환계 및 림프계 관련으로는 어느 정도 혁신적인 자료들이 있길래 일본 731 부대 쪽에도 같은 기대를 했던 것인데 이는 1940년대 이전까지 생리학계에서 순환계 및 림프계 관련으로 연구가 영 지지부진했던 것이 더 큰 원인이며 나치 독일 쪽 자료들도 막상 나치 간부들 본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인종 관련 생체실험은 완전히 볼 게 없는 개판이었다는 점에서 731 부대 쪽과 별반 차이 없었다.

4. 계급 체계

일제 공무원, 군속, 군인의 계급은 서로 비교할 수 있었다. 731 부대에는 군인들 외에도 의사, 간호사 등 군속들이 복무하고 있었다. 고등관, 판임관, 고원 등은 일제강점기의 공무원들의 계급이고 기사라든가 기사의 보조인 기수 등은 국가가 공인하는 기술자들의 자격 명칭이었다. 보통 전문학교나 고등실업학교 출신 수준의 기술자가 기수, 거기서 경력을 더 쌓으면 기사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기수가 기사자격증, 기사가 기술사 자격증 정도로 보면 된다. 고등문관시험 합격자가 고등관, 보통문관시험 합격자가 판임관이었으며 고원은 필요에 따라 뽑는 계약직 기능직 공무원들인데 한국식으로 말하면 5, 7, 9급 출신에 각각 대응된다. 딱히 731 부대만의 특별한 호칭은 아니고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무원 취급을 해 줬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일본의 직제에 하사관은 판임관 4~1등(4등이 낮고 1등이 높다)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소위는 고등관인 주임관 8등이었다. 용인은 한국식으로 따지면 옛날 기능직 공무원 같은 건데 필요에 따라 뽑는 노무자들 정도였고 고원은 구태여 말하자면 무기계약직 사무보조 공무원 같은 건데 이 시대에는 보통문관시험 합격자들이 수습기간에 고원 신분으로 일을 하거나 빽으로 관청에 들어가서 고원으로 일하다가 5년 전후로 판임관 정식 발령이 나거나 말거나 했다. 그리고 판임관 대우라는 것도 있었는데 판임관보다는 아래로 취급받았는데 이를테면 형무소 말단 간수나 경찰 중 순사나 순사부장이 판임관 대우였다. 한편 '기수'라는 직책을 살펴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온 이상이 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기초적 전문기술이 있는 기술자를 일컫는 말로 관청 기수라면 경부나 경부보와 비슷한 판임관에 해당했으며 '기사'가 되면 주임관의 직급을 받았다.

731 부대를 다룬 미디어들 중 소설 마루타나 영화 흑태양 시리즈 같이 악마의 포식[4]을 참고했다는 작품들을 보면 일본의 계급이나 관제가 아주 개판으로 설명되어 있다.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에서 이시이 나가데가 요시다에게 부대 계급을 설명해 주면서 '마루타 특설감옥 간수들을 죄다 이시이 시로의 고향에서 데려왔는데 판임관 대우를 해 준다'고 말했는데 정현웅이 어디서 저 '판임관 대우'라는 말을 보고 저 이야기를 한 거라면 아마 진짜 일제 시절에 있었던 공무원 계급인 '판임관 대우'였을 확률이 크다.[5] 또 진청민의 '일본군 세균전' 같은 학술서도 뭘 참고했는지 일본의 계급이나 관제에는 상당히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
계급 군인 민간인
칙임관(勅任官) 장관급 장교
부대장 이시이 시로 육군 중장
그 형제인 이시이 지로 등의 인물들
육군 소장급으로 1명~2명
-
주임관(奏任官) 장교 군속 기사(의사)
판임관(判任官) 하사관 군속 기사보조 등
고원(雇員) 상등병~병장 간호사 등
용인(用人) 이등병~일병 잡역부

자세한 것은 공무원/계급 문서의 일제강점기와 비교 문단으로.

5. 행적

731 부대의 진상은 1981년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에 연재된 논픽션 '악마의 포식'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악마의 포식"은 당시 "적기"의 기자였던 "시모사토 마사키"가 "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731부대와 일본군의 생체실험 등을 추적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가 연재한 논픽션이다. 총 2부작으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적기"의 일간지판에 1981년에 연재되었고, 제2부는 적기의 일요일판에 1982년에 연재되고 코우분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글에 실린 731부대에 대한 내용은 다시 공산당 소속 의원이 국회에서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악마의 포식' 연재 이전부터 731부대의 존재나 그 부대에서 있었던 만행의 대략적인 개요는 알려져 있었던 듯한데 1969년에 발행되어 다큐멘터리 라디오 극본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한림출판사의 5권짜리 태평양 전쟁 책에도 731 부대의 존재와 이시이 시로의 이름, 그리고 그 부대에서 했던 제반 실험 등등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존재했던 것이 그 증거다.[6] 그리고 당장 한국인들이 처음 731 부대의 이야기를 알게 된 계기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방영 당시 저 부대가 나오면서부터인데 여명의 눈동자 원작 소설은 70년대 후반에 연재되었다. 악마의 포식이 연재되기 전부터도 저 부대의 정체는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다.

애시당초 '일본군 부대 중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곳이 있다더라'는 이야기가 '일본 군부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초초초초 특급 비밀'이라는 것 자체가 약간은 과장된 사실로 볼 수 있다. 관동군이나 대본영에서 731 부대의 실험을 참관하면서 생화학전을 논의하던 장교들의 숫자도 적지 않으며, 애시당초 일본군에는 731 부대 말고도 관동군 제100 부대니 등등 본토나 한국, 만주 중국 등 점령지 전체에 생사람을 잡아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가 여럿 있었다. 하는 일의 성격상 알면서도 쉬쉬하는 구석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731 부대가 국화 문장이 없는 유일한 부대일 정도로 천황도 모르는 부대라느니[7], 이시이 시로나 아주 극소수의 고위층 빼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안이 유지된 유일한 부대라느니 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을 하는 부대는 많았고 그 부대들끼리 나름 인력교환도 있었으며[8] 그 부대들끼리의 업무를 자기들끼리 알아서 한 게 아니라 관동군이나 더 상위 부대 등의 명령과 조정을 받아서 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와 관련해 한국에서는 1982년 4월 13일과 같은 해 8월 4일 동아일보에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사족으로 당시 책에 실렸던 사진 35장 중 20장은 실제 사진이 아니었다고 한다.[9] 1982년 9월 16일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서 관련 기사가 나왔다. 개정판에서는 수정됐다고 한다. 한국에서 '마루따' 내지는 '악마의 포식'이라고 나온 판은 전부 초판본이다. 그런 이유로 731을 방문한 독일 장교 내지는 731이 생기기도 전에 나온 병원 사진이나 중국 병원에서 찍은 검시 사진 같은 것이 포함되기도 하니 주의할 것.

사실 한국의 일반 대중에게 " 마루타"라는 단어와 "731 부대"란 명칭을 확실히 각인시킨 연도는 1990년이었다. "마루타"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홍콩 영화 " 흑태양 731"은 그 잔인성으로 인해 크게 회자되었고 비디오 대여점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동년 가을 MBC의 창사 40주년 특집극 " 여명의 눈동자"의 초반부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또 등장했다.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731부대는 살아있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시청자들에게 다시 한 번 크나큰 충격을 줬다. 1편, 2편.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731 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로 6.25 전쟁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본에서 싼값에 거둬들인 혈액을 6.25 전쟁에서 미군에게 비싸게 팔아서 많은 이득을 얻고 영향력을 행사했단다. 심지어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조선 독립운동가 40여 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10]는 내용 등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11]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해 준 731 부대 다큐멘터리에서 이시이 시로는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나치 독일의 의사 요제프 멩겔레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상당히 악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아우슈비츠와 비견될 만한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노약자 및 임산부 및 어린이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를 요망한다.

6. 만행

"나는 표본실로 혼자 끌려갔는데, 끔찍한 인간 표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머리 절반이 잘린 채 열려있는 시신도 봤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요."
14살에 징집되어 731부대에 보내진 시미즈 히데오 JTBC와의 인터뷰에서. #
이들이 자행한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행으로 아무 검색 사이트나 들어가서 731 부대라고만 쳐도 관련 사진이 쏟아져 나온다. 흑백이라 잔혹함이 덜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매우 혐오스러운 광경이므로 보기 전에 각오해야 한다. 한국에 출판된 저서 중에는 재중동포인 진청민이 쓴 《제731부대의 진상을 파헤친 일본군 세균전》이라는 책을 참고해 봐도 좋다. 《악마의 731부대와 마루따》도 읽어 보면 좋다. 일본인이 직접 생존자[12]들의 증언을 들어 가면서 작성한 책이다.

6.1. 부대 내규

6.2. 생체실험 내역

※ 주의: 읽기 전에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잔혹한 내용이 많으니 열람시 주의를 요함.

단편적으로 알려진 731 부대 실험 내용은 소련군의 만주 공습 때 남겨져서 부대시설 소각을 맡은 부대원들이 소련군에 잡히고 하바롭스크 재판을 받으면서 알려진 정보다. 물론 이들은 실제 실험의 핵심 내용을 몰랐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13]

실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아있는 실험체에 탄저균, 천연두균 등의 바이러스균을 주사하여 결과를 지켜보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해부하여 내장을 빼내거나 심지어 타 동물의 내장과 교체하는 실험도 하였다. 그리고 포로의 대량 처분에 독극물을 쓰면 돈이 들기에 어떻게 빠르게 대량학살을 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사람을 저진공에 집어넣어 죽이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4]

이들은 어떨 때는 피험자에게 마취하지도 않고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실험들이라는 것이 모두 동물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고 그걸 거의 다 시도했다.

6.2.1. 생체 반응 실험

수용자는 마취 없이 생체 반응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당했다. 다양한 질병에 걸린 수용자를 생체 해부하였다. 아주 드물게 외부에서 초청된 사람이 참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45년 5~6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소속 B-29 폭격기에서 포로로 잡힌 탑승원 8명을 대상으로 수술 실험을 하였다. 수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19]
5월 17일 포로 2명의 한쪽 폐를 전부 적출
5월 22일 포로 2명 중 1명에게 위 전 적출 수술. 대동맥을 압박해 지혈하고 심장 정지시킨 후 개흉 심장 마사지, 심장 수술, 나머지 1명은 상복부 절개하고 담낭을 적출, 간장의 편엽을 절제
5월 25일 포로 1명에게 뇌수술(3차 신경 차단)
6월 2일 포로 3명 가운데 1명에게 오른쪽 대퇴동맥에서 약 500cc를 채혈한 후 대용 혈액약 300cc 주사. 1명에게 폐동격 수술, 나머지 1명에게 담낭 적출, 대용 혈액 200cc 주사, 간장 절제, 개흉 심장 마사지, 심근 절개 및 봉합, 대동맥 압박 지혈
동상 실험을 했던 다니무라라는 인물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야외 실습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니무라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해 텐트에서의 수술, 지혈, 수혈 등에 대해 가르치는 야외 실습을 했는데 중국인 8명은 생체 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8명은 실험이나 수술이 끝난 뒤 살해돼 생체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총살됐다고 한다.

6.2.2. 무기 실험

6.2.3. 세균 실험

6.2.4. 기타 생체 실험

6.3. 기타 만행

7. 일본 제국 멸망 후

731 부대에 의해 실험당한 사람들 가운데 생존자는 단 1명도 없다. 당연하겠지만 실험 자체가 생존할 확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진짜로 죽을 때까지 실험하는 일도 흔했다. 상기한 내규에 따라 생존자도 모두 처리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그들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 실험을 주도한 자들도 이게 만행이라는 것은 알았는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진격한 소련군에게 발각되기 전에 만주 작전을 개시해서 남아있는 실험 대상자와 관련 시설을 주도면밀하게 모두 제거한 후 실험 결과를 적은 문서 따위만 휴대한 채 성공적으로 일본으로 도주했다. 게다가 실험을 저지른 작자들의 전우회도 있다. 전우회의 이름은 각각 '정혼회', '파공회', '방우회'라고 한다. 물론 전부는 도주하지 못하고 일부는 결국 소련군에게 생포당했는데 이들은 잔인한 생체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기는커녕 소련에게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유는 후술.

일본 의학계는 731 부대 관계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731 부대가 작성한 여러 논문이 있는데 이 가운데 731 부대 시절에 작성한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 보고 게재 논문을 학위 논문으로 그대로 제출해 통과한 사람도 있었다. 731 부대가 작성한 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25]
* 조직 내에 있는 페스트균 염색법에 관한 연구(게이오, 1946)
* 파상풍과 키소이드의 예방적 효력에 대해(구마모토, 1946)
* 이질균 분류에 대해(구마모토, 1946)
* 장기 손상의 후유 기능 장해에 대해(도쿄, 1947)
* 뇌척수액 당량의 변화에 대한 연구(니가타, 1949)

7.1. 하바롭스크 재판

하바롭스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의 4년간의 자료 수집과 준비를 거쳐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에 걸쳐 소련 하바롭프스크의 장교 회관에서 일본군 전범 피고에 대해 6일간 열렸던 군사 재판이다. 재판에 회부된 일본인 피고들은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관동군 지도부와 생체실험 및 세균전 관계자들이었으며 소련에 대한 침공 계획인 관동군 특종연습, 대소련 공격에 대한 내용도 다루어졌다. ​피고인들은 모두 강제 노동형 실형 판결을 받아 그대로 시베리아에 교정 노동 수용소에 억류되어 형을 살다가 1956년 소련-일본 공동선언 체결에 의한 양국 국교 회복으로 감옥에서 병사하거나 자살한 이를 제외한 모두가 특별 사면으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피고인과 판결]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관동군 12명의 판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야마다 오토조(山田 乙三) 관동군 총사령관 [대장] - 강제노동 25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카지즈카 류지(梶塚 隆二) 관동군 군의부장 [중장] - 강제노동 25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다카하시 다카아츠(高橋隆篤) 관동군 수의부장 [중장] - 강제노동 25년 형
1952년 뇌출혈로 사망
* 사토 슌지(佐藤 俊二) 관동군 제5군 군의부장 [소장] - 강제노동 20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카와시마 키요시(川島 清) 제4부 세균 제조 부장 [소장] - 강제노동 25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카라사와 토미오(柄澤十三夫) 제4부 세균 제조과 과장 [소령] - 강제노동 20년 형
1956년 수용소에서 자살[26]
* 니시 토시히데(西 俊英) 제4부 세균 제조과 과장 [소령] - 강제노동 18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오노우에 마사오(尾上 正男) 731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장 [소령] - 강제노동 12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히라자쿠라 젠사쿠(平桜全作) 100부대 연구원 수의사 [중위] - 강제노동 10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미토모 카즈오(三友 一男) 100부대원 [중사] - 강제노동 15년 형
1956년 일본-소련 국교회복으로 특별사면
* 키쿠치 노리미츠(菊地則光) 731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 의무병 - 강제노동 2년 형
1951년 소련에서 석방
* 쿠루지마 유지(久留島祐司) 731부대 린커우 지부 의무병 - 강제노동 3년 형
1952년 소련에서 석방
731 부대의 잔인한 행위는 현재 전쟁범죄로 공표되어 있다. 하지만 절반 가량인 25명이나 사면되는 등 잔인한 고문 속에서 죽어간 피해자들의 목숨 값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나머지 절반은 소련에 12명, 중국공산당에 13명(헌병대장들까지 포함)이 잡혀서 하바롭스크에서 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심문을 받으며 진술서를 작성하고 시베리아 유형 6년 강제노동형, 만주벌판의 푸순 유형 6년에서 10년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다.

7.2. 이시이 시로의 회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시이 시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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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대학 시절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의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27]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든 겁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리해 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났다.

하나 더하자면 생체실험과 세균전이라는게 조금 쉬쉬했을지는 몰라도, 일본 육군과 전 일본 의학계에서 광범위한 협조를 얻어 이뤄진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시이 시로의 지휘와 군부 밎 의학계의 높으신 분들의 뒷바라지 아래 인력과 돈이 광범위하게 들어간 사업이라는 건데 이렇게 따지고 보면 731부대가 천황도 몰랐던 부대니 국화무늬가 없는 부대니 하는 말 자체가 그저 광범위한 전쟁범죄를 저거 하나로 물타기하려는 꼬리자르기용 어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저 위에서 이시이 시로가 언급한 이시가와나 오카모토, 그리고 동상 연구반장 요시무라 등은 대체로 교토대 의학부 출신으로 1907, 1908년생이며 부대 설립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비군인 의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을 이 부대로 보내고 이 연구결과를 기대하고 이용하려는 누군가가 의학계의 거물 중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이는 일본 군부의 흑역사일 뿐 아니라 일본 의학계 전체의 흑역사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7.3. 부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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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대 건물은 전쟁이 끝난 후 중학교로 사용되었으며 2001년부터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중국 하얼빈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하얼빈(哈爾賓) 핑팡취(平房區) 신장다제(新疆大街) 25호에는 당시의 현장을 일부 복원시킨 ‘침화일군 제731부대 유적지’(侵華日軍 第七三一部隊 遺跡地)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731 부대는 원래 건물 80여 곳에 총면적이 6.1km²였으나 현재는 당시의 본부 건물을 유적지로 복원하였다.

731 부대 유적지의 고고학 발굴 자료를 해제하면 세균실험실 자체는 건물 중앙에 중정이 있는 2분할된 청사급의 건물이고 조선총독부나 일본 내 청사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을 수 있다.[28] 또 세균실험실과 특설감옥은 함께 위치하지만 특설감옥에만 난방 등이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인권이 존중되지 않았다는 물적 증거도 확보되었다.[29] 이처럼 부대 건물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증언과 기록에서 나아가, 물적 증거가 새롭게 확보되고 있다.[30]

7.4. 소련의 데이터 활용

전직 소련의 생화학무기 과학자였던 켄 알리벡(Ken Alibek)은 그의 저서에서 소련의 생화학무기 연구 개발에 731 부대가 그동안 수집한 데이터가 유용하게 활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이후 소련군에 의해 생포된 731부대 관련자들은 NKVD 특별히 취급해 안락한 수용소에 수감했다. 다만 소련에서는 전쟁 후 만주를 점령한 뒤 731 부대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전모를 거의 파악했고 100명이 넘는 관계자들 가운데 12명을 기소했으며 조사자료도 미국에 넘겼다. (출처:연합뉴스)

냉전이 도래하자 라브렌티 베리야는 731 부대로부터 입수한 각종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생화학무기 프로그램을 더욱 확장할 것을 지시했고 스베르들롭스크에 대규모 생화학무기 시설을 건설하게 되었다. 즉, 731부대의 연구 데이터가 소련의 생화학무기 연구에도 공헌한 셈.[31]

7.5. 이후

일본 정부는 여태 이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해 부정하고 있었지만 2002년 8월 도쿄의 지방 법원이 처음으로 731 부대의 존재와 범죄 사실 일부를 인정한 후 731 부대의 만행은 대부분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관련 기사 결정적으로 2011년 10월 16일 731 부대 관련 극비 문서가 발견되어 731 부대 존재 부정론자들에겐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되었다. 이 문서에는 중국의 한 도시에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살포한 기록이 있는데 살포한 날짜와 벼룩의 양, 1, 2차 감염자 수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 일본을 경악시킨 희대의 집단 살인사건인 제국은행 사건은 731 부대 또는 731 부대와 같은 성격의 부대인 100부대[32]의 관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적어도 당시 사용된 독극물만큼은 거의 확실히 731 부대로부터 흘러나온 물건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일본인 안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
《일본의 야망 & 죽음의 공장》이라는 책에는 생체실험에 참여했던 자들이 미국의 지시 아래 원자폭탄 희생자들을 마루타로 삼아 실험했다는 내용도 있다. 다만 이 책은 상당히 신빙성에 의문을 가질 만한 내용이 있는데 다분히 소련과 중국이 선전의 목적으로 부풀렸으면 부풀렸지 줄일 리 없는 실험 희생자 발표 수인 3천 명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할힌골 전투에서도 731 부대가 활약했다는 이야기 등 다분이 증거가 박약한 이야기도 실렸다.[33]

현재 전시 형태로 개방되어 있다. 하얼빈시 핑팡구에 위치해 있으며 택시를 타고 731(치싼이, 치싼야오)을 말하면 찾아갈 수 있다. 입장료는 받지 않으나 대신 신분증이 필요하다. 외국인은 여권을 가져가야 한다. 하루에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개방하며 내부의 설명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되어 있으나 한국어로 된 오디오 해설기를 빌릴 수 있다. 마지막에는 신분이 확인된 희생자들의 이름이 쓰인 방이 있으며 한국어로 된 이름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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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2일에 아베 신조[34] 일본 총리가 항공자위대 히가시마쓰시마 기지를 방문해서 곡예비행단 '블루 임펄스'의 많은 T-4 훈련기 중 하필이면 731이라고 적힌 기체에 탑승해 기념사진까지 찍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연히 그랬든 의도적으로 그랬든 명백하게 도발적인 행위다. 게다가 해당 기체의 파일럿 네임에 아베 신조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우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애초에 이런 사진은 촬영 전 총리 관저에서 이미 여러 번 체크해 가능한 모든 오해를 배제하는 형태로 찍는다. 결정적으로 이는 일본의 최대 우방인 미국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된 모양인데 자료를 대가로 731 부대의 부대원을 사면해 준 미국 입장에서 더 이상 731 부대가 이슈화되는 것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731 부대에 관해 극도로 말을 아끼는 미국에서조차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2014년 1월 21일 교토대학 의학부에서 731 부대에 가담한 관계자들에게 1960년까지 꾸준히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경성제국대학에서도 1945년에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뉴스, 뉴스2 2015년 중국의 한 청년이 731 부대와 비슷한 성격의 부대인 526 부대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공개했다.( #) 2016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부산에서도 생체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전파했다. #[35]

소련 국경까지도 위안부가 있었는데 반항할 경우 비밀리에 731 부대로 끌려가 세균 실험과 신체 실험 대상자가 되기도 했다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 2020년에 731 부대 대원 정보, 조직 기구의 모습이 상세하게 담긴 문서가 발견되었다. # 한국에서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 만행 중 하나로 제일 많이 인용되는 사례 중 하나지만 정작 한국에서의 연구는 서이종이 2014년에 발표한 논문 2편 정도를 제외하면 매우 지지부진하며 언론에서 자극적인 방송을 위해 편의대로 써먹는 일만 허다하다. 731부대의 실험장면이랍시고 인용되는 사진들을 보면 일본군 다른 부대의 실험 사진이면 진짜 양호한 경우고 1928년 지난 사건의 일본인 피해자들을 뜬금포로 731 부대 마루타로 둔갑시키질 않나, 731 부대의 구호활동 선전 사진을 실험 사진으로 둔갑시키고 731 부대가 창설되기 수십 년 전의 1910년대의 부검 사진을 마구잡이로 인용하는 일이 허다하다. 2005년 MBC는 자신들이 러시아 기밀 자료를 입수했다면서 중국 고어영화 흑태양 시리즈 흑백판을 상영해 산케이신문으로부터 광병적 반일에 매몰된 한국 매스컴의 실체라고 가루가 되도록 씹혔으며 한국에서도 비판이 쏟아져 결국 사과하고 정정보도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現 스페셜 탐사 스포트라이트), 한겨레 등 여러 주요 매체들에서 수차례 731 부대 관련 왜곡 보도를 내보낸 사실이 학계 내부에서 지적되었다. 731 부대와 관련된 1/2차 자료들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에 있어서 과거 대한민국에 잘못된 정보들이 상당히 퍼져 있었던 탓이다. 물론 현재는 원전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과거 오용 사례들이 수정되지도 않고 고스란히 인용되고 있다. 731 부대에서 소련을 상대로 세균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문서가 기밀해제되었다. #

중국에서 만주사변 90주기를 맞이해서 731 부대의 부대원이 당시 실험자료를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해 통과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2022년 9월에 일본 정부가 적은 731 부대 문서가 발견되었다. #

2023년 7월 731부대 명단이 발견되었다. # 의사와 군인 등 140명 부대원의 개인 정보와 함께, 페스트를 배양하기 위해 쥐를 잡았다는 등의 기록이 담겼있다고 한다.

2024년 7월 8일, 1945년에 14살의 나이에 징집되어 731부대에 보내진 시미즈 히데오씨는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사과하기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밝히며 다음달 자신이 복무했던 중국 하얼빈에 방문하고 희생자 가족들에게 사과할 예정이다. # 8월 13일. 하얼빈을 찾아 참회를 가졌다. #

8. 미국에 의한 전쟁범죄 은폐와 면책특권 부여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은 비밀부대의 지도자들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전쟁포로와 남성, 여성, 어린이, 심지어 유아를 포함한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실험에 대한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기밀해제에 따라 공개된 문서에서 일본과 미국의 ‘검은 뒷거래’가 드러났습니다.

일본은 생체실험 결과를 대가로 미국에 전쟁범죄 면책 특권을 요구했고, 미국은 해당 데이터를 미군 포트 데트릭 연구소로 옮겨 냉전 기간 생물·생화학 무기 개발에 사용하며 일본의 전쟁범죄를 눈 감아 준 정황이 확인된 것입니다.
(MBN)'역사상 가장 잔인한 생체 실험'…日 731부대 연구실 중국서 발견\
At the end of the war, US authorities secretly granted unit officials "immunity from prosecution" in return for access to their research. Several former Unit 731 officials went on to have successful careers in medicine, academia and business.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당국은 비밀리에 부대원들에게 그들의 연구에 대한 접근권을 주는 대가로 "기소 면책"을 부여했습니다. 몇몇 전직 731부대 간부들은 의학, 학계 및 비즈니스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습니다.
(가디언) Unit 731: Japan discloses details of notorious chemical warfare division
전후 731 부대 구성원들이 전쟁범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게 된 것은 미국 때문인데 미국에서 일본과 뒷거래를 해서 일본이 미국에게 실험 결과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이 이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묵인하고 이들에 대한 면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때 최대 피해국인 중국[36]과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였고 냉전 시대라는 특성상 당시 자유진영이었던 일본이 자유진영 맹주 미국의 우방이라 미국이 덮어 주기 쉬운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 따라서 731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것에는 미국이 소극적이고 최대의 피해국인 러시아, 중국이 나서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큰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공론화해 줘서 다행이라는 평이 나왔다. 중국이 일본을 GDP 순위에서 추월하면서 나름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등으로 날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사 문제를 꺼내들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기본 시설과 극비문서 일부, 그리고 731 부대의 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하거나 1950년대 발굴된 731 부대의 기록물에 관해 발표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인 일본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 발표 자료는 1936년부터 1945년 5월 사이에 작성된 것들로, 81권의 책자와 400여 건의 문서, 70여 건의 시청각 자료로 상당한 수준이다. 관련 기사 보도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는 독일 전범재판에서 생체실험 등에 참여했던 의사 전범 20명이 기소돼 7명이 사형을 선고받는 등 무겁게 처벌된 것과 비교된다. 심지어 소련조차 전쟁 후 만주를 점령한 뒤 731부대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전모를 거의 파악했고 100명이 넘는 관계자들 가운데 12명을 기소했다. 소련은 조사 내용을 미군 측에도 넘겼으나 미국은 반인도 범죄를 처벌하는 대신 731부대의 연구 성과를 넘겨받고 일본을 냉전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기 위해 용인하는 쪽을 선택했다.
(연합뉴스)미·일 야합으로 75년간 은폐된 731부대의 진실
미국의 이러한 묵인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일단 소련도 데이터를 활용한 것까지는 미국과 똑같았지만 그나마 관계자들 가운데 일부는 기소까지는 했고 조사 내용도 미국에게 넘겼다. 그런데 미국은 731부대의 연구 성과를 넘겨받아 이를 용인하고 심지어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 재판의 기소를 면제해 주기까지 했다 (출처: 중앙일보)

1945년 10월 731 부대장의 오른팔이었던 대령과 곤충학자인 소령, 전 육군참모 등 3명을 미 육군의 생물전연구 기관 캠프 데트릭의 샌더스 중령이 신문한 기록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전쟁범죄자의 적발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안심하고 얘기해주기 바란다. (중략) 대통령에 제출하는 비밀 보고 자료를 작성하기 때문에..."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신문 보고서를 1947년 12월 12일 미 국방부에 제출한다. 그가 제시한 최종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비용과 오랜 세월을 거쳐 얻은 자료다. 이런 정보를 우리 쪽 연구소에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체실험은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총액 25만엔 정도로 얻었다. 연구에 투입된 비용을 따져보면 이는 미미한 금액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은 731 부대가 아니라 일본에서 소수의 미국인이 생체실험을 당하여 살해되었을 때 그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하였지만 731 부대를 비롯한 자국민 이외의 사람이 생체실험을 당한 경우에는 전혀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금전까지 지급하며 보호하였다.[37] 뿐만 아니라 미국은 생체 실험 주범들에게 월급을 주고 실험 인원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화학전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까지 요청하였다.

미국이 이같은 행동을 한 이유는 종전 이후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대표되는 인재와 기술력이 절대 소련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계산이 있었고 여러 전범들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으로 형장의 이슬이되거나 콩밥먹으로 가는 도중에도 독일의 일반 과학자는 물론 베르너 폰 브라운 같은 나치 소속 과학자도 거짓으로 신분세탁을 해 가면서까지 빼 왔다. 때문에 특히 윤리적 문제로 구하기 힘들고 사법처리 도중 소련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는 인체실험 자료라는 점이 미국 입장에는 충분히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거래에 응했고 실제로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경쟁의 주역이 되는 등 유용했기 때문에 미국의 위선적인 면모와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38]

9. 유사 부대

731 부대 외에도 난징의 1644 부대나 광저우의 8604 부대 등 일본군 점령지에는 방역급수부 휘하 생체실험 부대들이 여럿 존재했다.

10. 현지 사건

1989년 신주쿠의 유명한 공원인 도야마공원(戸山公園)에 위치했던 후생성 연구청사의 건설현장 지하에서 100구가 넘는 훼손된 아시아인 유골이 발견된적이 있다. 수술 및 총상 자국으로 인해 훼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수 년 동안 일본 정부와 후생성은 이 유골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아서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는데 이 연구청사가 있기 전에는 육군 군의학교가 있었다는 점, 지하에는 731 부대와 관련 깊은 연구실이 있었다는 증언 등과 신주쿠 구의원 까지 나서게 되면서 결국 731 부대의 생체실험 지하 연구소였다는 도시전설 비슷한 의혹이 나오기까지 했지만 정부와 후생성은 끝까지 부정하고 있었다.

이 미스테리는 당시 군의관 간호사 출신이였던 이시이라는 할머니가 종전 후 미국으로부터 생체실험 은폐를 위해 마루타들을 모두 처형시키고 지하에 매장시켜 그 위에 건물을 세워 들키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밝혀졌다. 이후 후생성은 결국 일부를 시인했다. 후생성은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기관이라 입지에 타격을 입을 것을 걱정하고 계속 부정해 왔다는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부정하고 있다.
파일:toyama_door.jpg
도야마 공원 근처 당시 군의학교 731부대 지하연구실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

현재는 저렇게 형상만 남았는데 저게 뭔지 아는사람은 정색한다고 한다. 이 지역은 원래 군의학 시설이 많았던 곳이라 현재도 근처에 도야마 병원 등 의료센터가 많다. 구글맵 위치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일본 시민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도야마 공원이 있는 곳은 너무 무서워서 절대 살고 싶지 않은 마을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십 수년 전만 해도 이 부근은 굉장히 어두운 동네였다. 다만 현재는 근처에 신오쿠보라는 한인타운이 있고 좀 더 가면 가부키초, 신주쿠라는 일본에서 1, 2위를 다투는 도심이 있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고 부동산 가격도 높은 편이다. 반면 이 도야마 공원 지역 주민은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을 내기도 하는데 농담 반 진담 반이다.

11. 부대원

12. 생체실험 피해자

중국에 위치해 있었던 만큼 당연히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중국인이었고 그 외 연합국인 미국인 러시아인과 식민지인 한국인 등과 기타 전쟁 포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인들은 범죄자, 공산주의자, 심지어 독립운동가 부류의 반체제 운동가들도 잡혀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이들 외에도 731 부대의 주둔지 부근의 지역민들도 세균폭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의 여러 군정서들에 소속된 독립군들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온 경우로 추측된다.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규모는 제대로 확인되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가 발굴되고 있다. 1998년 지린성 문서고에서 1,467명의 특별이송문서가 발견되었고 이후 731 부대의 세균전으로 인한 사망자와 1,500여 명의 피해자가 밝혀지면서 2010년 기준으로 3천여 명의 피해자 명단이 공개되었다. #

또 1945년 9월에 잠수항공모함을 이용해 미국 서부를 세균 폭탄으로 공격한다는 '밤의 벚꽃' 작전을 계획했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8월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무산되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현되었더라면 미국 서부 지역 주민 수만 명이 희생되는 대참극이 벌어졌을 것이다.[42]

12.1. 한국인

한편 한국인 피해자들도 그 규모는 미상이지만 일부는 그 신원이 밝혀졌다. 731 부대 죄증진열관에 공개된 피해자 명단 중 현재까지 정확히 밝혀진 한국인 피해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이름 생몰년도 체포일자 출생지 활동
이기수(李基洙) 1913~? 1941.07.20 함경남도 신흥군 동흥면 동북항일연군
한성진(韓成鎭) 1913~? 1943.06.25 함경북도 경성군 독립운동가
고창률(高昌律) 1899~? 1941.07.25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독립운동가
김성서(金聖瑞) 1943.07.31 함경북도 길주군 독립운동가
이청천(李淸泉) 1944.07 독립운동가
김안동(金安東) 독립운동가
심득룡(沈得龍) 1911~1944 1943.10.01 중화민국 소련 공산당 첩보원 [43]
김성배(金成培) 1892~? 경상북도 동북항일연군

다만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항일독립운동가 7명이 731 부대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데 대한 피해국인 대한민국이 731 부대의 만행에 무관심한 사실을 보고 적잖게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731 부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관련 용품들과 기록들을 모은 사람이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했다는 일화는 더욱더 충격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활동한 이기수, 김성배 같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아예 서훈은커녕 시민단체가 제사를 지내주고 있었는데, 일각에서는 이 사람들을 김일성과 동급인 사람으로 매도했다. 건국훈장 수여자들 중에서 동북항일연군 소속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존재하고 빨치산 진압에 적극적이었던 차일혁 총경 역시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아직도 진영논리에 휘말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한숨을 쉬었던 시청자들이 굉장히 많았으며, 애초에 북한정권 창립에 상관이 없으면 서훈이 가능하고, 광복 전인 1944년에 순국한 사람들이라 김일성과 관련도 없으며, 저 당시 김일성 소련으로 도망간 뒤였기에 결과적으로 김일성과 완전히 무관하고, 그저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한 거지 무슨 공산주의 같은 논리에 휘말려 입대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731 부대에게 죽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이 많아 많은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12.2. 러시아인

1931년 러시아 파시스트당(Российская фашистская партия, RFP[44])이 들어서고 1932년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일본의 치하에 들어가면서 하얼빈시 인근의 상황이 험악해졌는데 이때 그 악명높은 731 부대가 같이 세워졌다. 일본에서는 731부대의 러시아인 희생자들이 소련군 포로라고 날조를 하고 있으나 731 부대의 러시아인 희생자 상당수는 임신부를 포함한 민간인이었다. #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하얼빈의 러시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등등은 상하이시로 피신한 후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호주, 미국, 캐나다 등으로 망명했다.[45]

12.3. 특별이송

‘특별이송’은 만주 지방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가 체포한 항일 독립운동가나 국민당 국군이나 공산군 포로, 외국의 첩보원 등을 대상으로 취조한 뒤 완강하게 버티는 인사들은 ‘개전의 정이 엿보이지 않는다’거나 ‘항일정신이 뼈에 사무치니 없애 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이유로 생체실험 자료인 ‘마루타’[46]로 지정해 재판도 없이 압송하는 것이었다. ‘실험 재료’가 모자란 탓에 애꿎은 민간인이 헌병대에 의해 731부대로 특별이송된 경우도 있었다.[47] 심지어 731 부대 측에서 성별, 연령대, 신체스펙을 명시하고 여기에 맞는 사람에 대한 특별이송 요구를 하기도 했다.[48]

다음은 한국인을 ‘특별이송’한 자료 중 일부다.
시기:1939년 6월

명령자:하얼빈시 신시가헌병분대장 소좌 아카기 모리미

내용:하얼빈 교외에서 중국 공산당 아청현 위원회 소속 중국인과 한국인 공작자 25명 이상이 회합하고 있음을 정찰해 전원 체포했음.

결과:비행장에서 이시이 부대가 독약을 주사해 사망. #

13. 생존자들[49]

항일전쟁 시기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 ‘살소(薩蘇)’의 조사에 따르면 731 부대 산하 기관에 의해 수용당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은 총 4인이라고 한다. (1) 중화민국 길림성(吉林省) 중국국민당 당무 제3독도구(督導區) 108지부 서기(書記)였던 ‘이광덕(李廣德)’과 (2) 당원이었던 ‘하가훈(何家訓)’, (3) 110지부 서기였던 ‘장인천(張人天)’과, (4) 중국공산당원으로서 항련정찰원(抗聯偵察員)이었던 ‘이우지(李遇遲)’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1945년 8월 13일 대외적으로 “삼도화학연구소(三島化學硏究所)”라고 불렸던 흑룡강성(黑龍江省) 가목사시(佳木斯市) 만발둔(萬發屯) 동북부에 위치한 731부대 특별 분대 산하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이는 1945년 8월 12일 심야에 자행된 일본군의 수용자 학살 와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결과였다.

13.1. 탈출 이후의 행적[50]

14. 기타


파일:731 박물관.jpg

15. 대중매체에서

악마의 부대
작중 배경이 되는 마을 히나미자와의 3대 가문 중에서 실질적 지배자인 소노자키가의 부흥 배경에 731 부대가 등장한다. 메이지 유신까지도 식인 풍습이 조금 남아있던 히나미자와는 외부에서 막대한 차별을 받았고 당시 소노자키가에서 일본군에 차출된 소노자키 소헤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노자키 소헤이는 천한 출신으로 인해 하얼빈의 전염병 시체 운반과 군 의료기관의 잡무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 부대에서는 히나미자와의 식인 풍습을 아득히 넘는 비인도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케이이치는 731 부대를 언급하며 구일본군이 히나미자와를 차별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비웃고 미온은 소헤이가 담당했던건 731 부대의 주업무들 보다는 더 온정적인 연구였다고 말한다.[53]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선에 조달할 식량을 연구할 것. 그 결과 중 인육 통조림이 성공을 거뒀다. 소노자키 소헤이는 설령 자신이 정말로 천한 식인귀라 할지라도, 인육 통조림을 만들 걸 지시한 일본군의 상부는 그보다 더한 악귀라고, 그래서 아무리 경멸당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면서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소노자키 가문은 소노자키 소헤이가 대량으로 빼돌린 통조림을 팔아[54] 가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통조림이 사실 인육 통조림이었다는 예전 상관의 폭로[55]와 함께 부활한 차별이 히나미자와를 다시 폐쇄적인 환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 망량의 상자》미마사카의 연구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731 부대가 나온다.

사실 731의 연구진 및 세균제조 공정 근무자들은 실험실이나 현장에 들어가기 전 석탄산 용액으로 채워진 욕조를 고무 방역복과 장화를 착용한 상태로 통과했다 일명 '소독의 시냇물'이라 불렸다.
[navertv(43971989)]
[다큐] 731부대의 진실 - 엘리트 과학자들과 인체실험 (2017)[68][69]

16. 관련 자료

17. 관련 문서


[1] 즉 731 부대의 시작은 1936년 방역연구실이지만 정식으로 하나의 부대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1940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731 부대의 창설을 1940년으로 보고 있다. [2] 뜻은 통나무. 사람이 아니라 재료라는 의미다. 이를 지시한 지휘관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안 봤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3] 교토대 의학부를 비롯한 일본 의학계 중진에 731 부대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권 때문에 진행할 수 없었던 생체자료를 잔뜩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작가가 생존한 731 부대원에 대한 인터뷰와 취재를 통해 만든 사실 기반의 소설이라고 밝혔다. 일부 세력의 위협을 우려한 안전장치로서 그렇게 설정했다는 설도 있다. [5] 적절하게도 일제강점기 형무소의 간수를 판임관 대우를 해 줬다. [6] 참고로 이 책은 일본어 중역의 흔적이 많이 보이는 데다 고가 미네이치 생존설, 사이판 전투 전에 일본군 장성 탈영 후 행불설등 몇몇 부분에서 묘하게 픽션스러운 흔적이 있기는 하다. 731 부대에 대한 서술에도 1944년에 이시이 시로가 부대장으로 실험을 주재했던 이야기나 부대의 비밀을 알게 된 일본인 기자를 마루타로 사용한 이야기 혹은 731 부대의 비밀을 6년에 걸쳐서 파헤친 소련인 스파이 이와노프 소좌에 대한 이야기 등등 확인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이시이 시로의 존재나 각종 실험 상황, 부대의 규모 등은 요즘 나온 여러 연구들과도 일치하는 바가 있는지라 80년대 훨씬 이전에도 731 부대 자체나 그 만행의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는 증거는 된다. [7] 천황이 모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본영이나 관동군의 알만한 사람들이 모를 부대는 아니었다. [8] 이시이 시로는 예산 횡령 등의 문제로 좌천 후에도 절강성 영파 등의 전선이나 포로수용소 등으로 발령받아서 여전히 생체실험을 했다. 이시이 시로 이후의 부대장인 기타노 마사지 역시 그런 부류였다. [9] 이를 가지고 일본 극우들은 731부대의 생체실험이 날조되었다는 '증거'라고 우기기도 한다. [10] 1998년 KBS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취재진 미국 의회도서관 미군 정보 문서에 나온다. 731부대 다큐멘터리 이 동영상 19:45초 부분에 나온다. [11] 심지어 여기에서 파생되어 731 부대에서 얻은 세균무기를 토대로 6.25 전쟁에 사용했다는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다. # 그러나 니덤 보고서는 영국 과학자 조지프 니덤이 작성했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배포한 국가가 중공이었으며 미국 CIA의 입장은 미군 전쟁포로가 중국에 억류되는 동안 중공군에서 이들에게 허위진술을 한 내용이 그대로 흘러들어간 것이라고 일축했기 때문에 6.25 전쟁에서의 사용 여부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자세한 건 조지프 니덤 문서로... [12] 정확히는 생존해 있던 731부대 요원들이다. 후술하듯 실험 피해자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13] 실제 실험 정보는 밀실 거래를 한 미국이 공개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실무자들은 미리 기차를 타고 한반도를 경유해서 일본으로 도망갔다. [14] 단, 이런다고 보통 생각대로 터져 죽지는 않는다. 게다가 당시 일본에게는 고진공을 유지할 만한 시설을 만주 한복판에 건설할 여력도, 기술력도 없었다. 현대에도 진공시설은 상당히 고가의 시설에 속한다. [15] 1991년 방영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이 실험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16]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일본군 731 부대 운전병 코시 사다오가 직접 증언한 부분이다. 실제 증언 [17]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취재진이 찾은 미국 의회도서관 미군 정보문서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 당시 방영된 장면 [18] 마루타 실험은 주로 건장한 청년들에게 시행되었는데 정확한 실험 결과를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으나 미국과 중국과 소련의 젊은 군인들을 상대로 사용할 무기나 세균무기를 실험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게 맞다. [19] http://www.astronomer.rocks/news/articleView.html?idxno=87957 [20] 독가스 부대. 라바울의 일본군 요새에서 거듭된 포격으로 일산화탄소 중독 문제가 일어나자 대본영의 명령으로 731 부대와 공동으로 일산화탄소 중독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7동의 마루타를 섬멸했다. [21] 사실 바닷물은 생리식염수를 대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생리식염수의 염분 농도가 0.9%인데 반해,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이것의 4배에 가까운 3.5%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표류 중인 사람이 아무리 갈증이 나도 바닷물을 마실 수 없는 것도 바로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체내의 염분 농도보다 높기 때문이다. [22] 위관급 장교 및 기사보조(의사) [23] 영관급 장교 및 기사(의사) [24] Criminal History of Unit 731 of the Japanese Military, pp. 118–119 (1991) [25] # [26] 1956년 10월 19일 일소 공동선언에 의한 특별 사면 발표가 나왔지만 10월 20일 소련 제48 장교 수용소의 빨래터의 기둥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27] (『고 기요노 겐지 선생 기념존문집』 제3집). [28] 김동일, 2022, 「‘제731부대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78호, 동북아역사재단. [29] 김동일, 2022, 「‘제731부대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78호, 동북아역사재단. [30] 김동일, 2022, 「‘제731부대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78호, 동북아역사재단. [31] 공교롭게도 스베르들롭스크의 생화학무기 시설에서는 1979년 4월 2일 탄저균이 유출되면서 수십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소련은 이를 철저하게 은폐했지만 소련 붕괴 후 뒤늦게 보리스 옐친이 이 해당 참사를 인정했다. [32] 이놈들은 만주국 수도인 신징(지금의 창춘)에 있었던 부대다. 겉으로는 수의 방역 연구소라는 푯말을 달고 주로 군마 등의 전염병을 연구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가축을 이용한 인간 살상을 연구했던 놈들이라는 거다. 당연히 여기도 극비부대였다. [33] 다만 할힌골 전투에서 모종의 세균작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34]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731 부대가 있었던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과 총무국 차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장관은 만주인을 세운 바지사장이었기에 실질적인 정책은 그가 담당하였다. [35] 물론 오랜 연구를 통해 부산에서 생체 실험을 했다는 것이 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졌지만 지상파 뉴스를 통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6] 후술하겠지만 물론 당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 현 대만이었다. [37] http://news.bbc.co.uk/2/hi/programmes/correspondent/1796044.stm [38] 물론 이런 면모는 소련도 마찬가지라서, 소련 역시 독일의 주요 과학자들과 설비를 자국으로 가져와 백분 활용했다. 다만 미국처럼 작전이란 이름을 붙여가며 주도적으로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는데, 애초에 소련은 굳이 독일인들을 포섭하기보다는 첩보전을 벌여 정보를 빼내거나 상대편 과학자를 전향시키는 편을 더 선호했다. 대표적으로 영화 오펜하이머로 주목을 받은 클라우스 푹스 같은 케이스들이 있다. [39] 다카히토는 전임 다이쇼 덴노의 아들이자 당시 재위 중이던 쇼와 덴노(히로히토)의 동생, 즉 '직황족'인 반면(혈통 상으로는 간인노미야), 츠네요시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갈라져 나온 '방계 황족( 세습친왕가)'(혈통 상으로는 후시미노미야)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참고로 츠네요시와 다카히토는 황가 혈통으로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츠네요시의 어머니가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6녀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공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촌지간이 된다. 참고로 2019년 기준으로 구황족 타케다노미야 당주는 이 사람의 장남이며 막내아들(엄밀히 말하면 황적이탈 직후에 출생)은 부정부패 등으로 IOC/JOC 위원 자격을 사임한 다케다 츠네카즈(竹田恒和)고 그의 장남인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는 이러한 집안을 팔아가면서 일본 극우 활동가로 활동한다. ( 일본 황실 문서에도 나온다.) [40] 미쓰비시 다나베 파마 전신( 한국법인) [41] 전범기업 미쓰비시그룹 산하의 미쓰비시 케미컬 홀딩스의 계열사다. [42] 무엇보다 이로 인해 진주만 공습으로 분노했던 미국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수많은 일본인들이 보복 학살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후대에 수천 명이 죽어간 9.11 테러 당시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로 인해 몰락 작전이 더 빨리 실행되었을 수도 있다. [43] 공산당 첩보원 심득룡의 출생부터 체포 행적까지 일부 밝혀진 내용. 독립운동가 이청천과 함께 최초로 신원이 확인된 인물이다. 다렌 헌병대에 넘겨져 문초를 받다가 마루타 부대로 수송되었고, 이후 생체실험으로 인해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44] Russian Fascist Party의 약칭. 이하 RFP로 서술. [45] 그 여파로 오늘날 하얼빈에 남아 있는 러시아인은 극소수고 상술된 종교 시설의 상당수가 관광지로 보존되거나 버려졌다. 시나고그의 경우 조선족 학교로 개조되었다. [46] 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 단어. [47]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10415&code=117 [48] 정현웅 장편실화소설 '마루타'에는 이식수술 용도로 15살가량 된 여자 2명을 요청한 내용이 있다. 결국 수술이 실패해서 이식수술을 받을 대상자들과 이 소녀들이 전원 사망했다. [49] 薩蘇, 「逃出七三一」, 『尊嚴不是無代價的:從日本史料揭秘中國抗戰』, 山東畫報出版社, 2009.2. https://www.sohu.com/a/247723143_99957841 [50] 薩蘇, 「逃出七三一」, 『尊嚴不是無代價的:從日本史料揭秘中國抗戰』, 山東畫報出版社, 2009.2. https://www.sohu.com/a/247723143_99957841 [51] 상술했듯이 처음에는 급수부대였다. 1941년부터 변질된 것. [52] 이 숙부라는 양반도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며 인육 통조림을 만드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걸 본인이 먹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731 부대를 자신보다 휠씬 더한 오니라고 평가한 모습에서 731 부대가 얼마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곳인지를 알수 있다. [53] 문제는 이게 인육 통조림을 어떻게 먹을수 있는지 조사하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수없이 많은 시체들을 해부했다고 한다. [54] 당시는 전후였으므로 이것 하나도 상당히 비쌌다. [55] 이 부대는 인육 통조림에 마루대라는 표시를 해 놓아 구분할 수 있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자신들이 먹지 않도록 했다. 이때 당시 군인들에게 보내진 인육 통조림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며 그중에는 간장으로 졸인 전골도 있었다고 한다.(인간의 뼈를 간장으로 졸인 거다.) 소노자키 소헤이가 전후에 팔았던 통조림 역시 절대 인육 통조림이 아니었다고 끝까지 부인했다고 한다. [56] 작가는 직접 취재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소설처럼 쓴 것'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57] 이우와 처음 접촉했을 때 홍사익은 이우의 작전 내용을 듣고 "방역급수부는 식수를 공급하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부서일 뿐입니다. 굳이 그런 곳을 공격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말하며 의아해한다. 고위 장교인 홍사익도 731 부대의 실체를 몰랐다는 설정이다. [58] 하지만 이시이 시로는 당시 부재중이어서 끌려가지 않았다. [59] 이우의 말에 따르면 잡히기만 했으면 포를 떠서 하얼빈 중심가에 내걸었을 거라고, 슈코르체니도 맞장구를 치며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깐다. [60] 작품의 설정에서는 이 보직이 업무 특성상의 문제로 인해 이시이 시로 부대장이 일반인에게는 줄 수 없는 보직이고 자기 친척에게만 줄 수 있는 보직으로 나온다. 그래서 마루타 특별감옥 경비원들도 죄다 자기 고향에서 데려온 청년들이고 특별감옥 총 책임자는 시골에서 농사짓던 자기 친형, 저 이시이 나가데 대위의 아버지를 임명했다. 진청민의 '일본군 세균전' 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실제로도 마루타 특별감옥 책임자가 이시이 시로의 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물연구반장은 친동생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자기 조카를 그 자리에 보직시켰다. [61] 이 영화는 아웃포스트와 상당히 유사한 구조다. [62] 영화에 나온 괴물들이 그 포로들이고 생존한 일본 군인의 흉측한 모습도 이러한 실험 때문이다. [63] 이 병기들은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일본 갑옷 일본도로 무장하고 있다. 갑옷은 현대식 총알로도 뚫지 못한다. [64] 이들은 적군, 아군 가리지 않는다. [65] 1부대 2부대... 이렇게 계속 수를 더하다 보니 이런 것 같다. [66] 생체 실험은 만주와 일본에서 이루어지고, 부대 철수는 철도로 만주에서 부산까지 가서 배로 건너갔기에 서울은 해당 없다. 한반도는 전후 도주로로만 이용되었다. [67] 이 전범의 손자가 바로 이 작품의 메인 빌런인 도우나미 신이치. [68] 2017년 8월 13일 방송. 일본 공영방송답게 수위를 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영 당시 일본 우익들이 맹렬히 비난했던 다큐다. [69] 기존 NHK 46분 방송용과 달리 1시간 39분 위성 BS1용으로 <제01부> 731부대, 인체실험은 이렇게 확대 되었다, <제02부> 731부대, 부대원들의 본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70] 소련군은 포로로 잡힌 731부대 관련자 12인을 재판하기 위해 모든 자료를 수집과 번역하여 이들의 죄를 추궁하기 위해 재판에 임했다. [71] 영상에는 안 나오지만 당연히 한국인 피해자들도 있다. [72] 일본군은 이들을 떼로 몰려다니는 무장 강도라는 뜻의 비적(匪賊)으로 부르며 헌병대에서 특별 제도까지 만들어 사람들을 실험재료로서 잡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