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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 サンダカン死の行進
영어 : Sandakan Death Marchs
1. 개요
1945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2. 참상
2.1. 처음엔?
1942년 보르네오 섬 동북부 지역의 공항건설을 위해 보르네오 포로수용소의 일부로서 설치된 산다칸 포로수용소(소장: 호시지마 스스미 대위)는 1943년 가을에 호주군 1,800명, 영국군 700명을 포함해 도합 2,500명(2,000명이라는 설도 있다)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처음 의외로 산다칸 수용소와 보르네오 섬의 각 수용소에서 포로취급은 괜찮은 편이었다. 포로들은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지만 그 대신 임금이 지불되었다고 하며 매점의 운영도 이루어져 감시도 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취급은 제16군 사령관이자 보르네오 섬 포로수용소의 최고책임자였던 일본에서 존경받는 덕장 이마무라 히토시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무라 히토시는 11월에 현지를 떠나게 되었고 후임으로 바바 마사오가 이 자리에 오면서 포로들에게 비극의 서막이 시작되었다.[1]
2.2. 비극의 서막
이마무라 히토시가 현지를 떠난 후에는 포로들을 매우 혹독하게 부려 먹었고 이것 때문에 포로의 도망과 라이오넬 머슈 중위가 현지 주민과 협력하여 반란을 계획한 <산다칸 사건>이 발생했다.또 호주군에서는 도망을 시도하는 포로가 매우 많았다.[2] 이후 전국의 악화로 인해 엄벌이 심해지고 남방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식량 배급이 제한되면서 의약품 부족과 더불어 처우가 악화되었다.
연합군의 보르네오 섬 공습이 이어지자 1945년 1월에 일본군은 비행장 보수를 단념하고 미군이 보르네오 섬 서부에 상륙할 것을 대비하여 일본군 부대를 600km 떨어진 아비로 이동시켜 이와 동시에 포로를 보르네오 섬 서부 260km 정도 떨어진 라나우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산다칸에서 라나우에 이르는 길은 밀림과 늪이 많은 위험한 길이었다.
2.3. 본격적인 학살
먼저 제1진의 포로 500명을 12일간에 낙오없이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야마모토 쇼이치 대위에게 내려졌다. 야마모토 대위는 의약품 공급과 3주간의 일정을 요구했지만[3] 사령부는 이를 각하했다. 결국 비교적 건강한 470명이 제 1진으로 선발되어 출발하게 되었고 출발 전에 야마모토는 최후미의 제9조 책임자였던 아베 카즈오 중위에게 낙오되는 포로는 처분(처형)해도 좋다는 허가권을 주었다.1945년 1월 29일부터 2월 6일에 걸쳐 470명은 총 9조로 나뉘어져 간격을 두고 출발했다. 포로들은 열병과 영양실조로 약해진 몸으로 약 30kg의 일본군 화물도 등에 지고 호우로 불어난 밀림을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신발을 신은 자는 고작 1% 정도였다.[4] 게다가 식량의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각 조의 책임자는 식량확보와 지급에 열을 올려 개구리와 뱀 등을 잡아먹으면서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행군으로 포로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본군 병사들도 사망하게 되었으며 움직이지 못한다고 여겨진 포로는 <낙오자를 없앤다>는 아베 중위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해도 포로들은 쉴 틈이 없었다. 라나우에 도착한 제1진의 1조~5조의 포로 약 200명은 식량과 의약품 부족하에 중노동에 내몰렸다.
건강한 자를 다시 선발해 이들은 45km 떨어진 파기나탄까지 20kg의 쌀가마를 메고 도보로 걸어가야 했는데 도중에 쓰러지는 자는 여지없이 살해되었다. 제6조~9조의 포로 약 200명은 도중에 40명이 낙오하여 파기나탄까지의 행군은 중지되었다. 제1조~5조의 포로들이 운반해 온 식량으로 간간이 버텼지만 약 한달 만에 생존자는 100명으로 줄었다. 살아남은 포로 전원이 라나우에 합류한 4월에 생존자는 약 150명에 불과했으며 제2진이 도착한 6월 하순에 생존한 포로는 6명이었다.
한편 산다칸 포로수용소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와 식량배급의 부족으로 1945년 3월엔 매일 1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게다가 4월 이후엔 쌀과 물의 배급이 중지되면서 6월 말에는 포로의 숫자가 830명으로 줄어들었다.
5월 17일에 호시지마 대위가 교체되면서 다카쿠와 타쿠오 대위가 소장으로 취임했다. 수용소에 대한 공습과 함포사격에 버틸 수 없었던 다카쿠와는 5월 20일에 포로이송명령을 긴급히 내렸다. 5월 29일 밤에 걸을 수 있는 자 536명을 11조로 꾸려 출발함과 동시에 일부 건물을 남기고 수용소는 쇠약해진 남은 포로들과 함께 소각했다.
제2진으로 출발한 포로들은 쇠약해진 상태에서 감시병들에게 심한 구타와 폭행을 당하면서, 낙오자는 와타나베 겐조 중위가 이끌던 감시병과 츠지 조장이 이끄는 병사들에 의해 정글에서 살해되었다. 처형엔 모두 대만인 감시병이 동원되었다. 포로들에겐 하루 85g의 쌀만 주어져 6월 25일에 라나우에 도착시 포로는 183명이었다. 이때 캠벨, 브레이스웨이트의 2명이 각자 탈주하여 미군에 구출되었다.
한편 수용소에는 아직 288명의 포로가 남아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쇠약해져 움직일 수 없는 병자들로, 동료들에게 폐를 주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은 포로들이었다. 건물들이 소각되면서 이들은 나뭇가지 등으로 만든 움막에서 식량과 의약품이 끊긴 채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으로 목숨을 연명했다.
1945년 6월 9일에 모리다케 중위는 이와시타 소위 등 37명의 일본군 병사에게 움직일 수 있는 포로 75명을 선발하여 제3진으로 이동하게 했지만 1명의 일본군 병사만이 살아남았을 뿐 나머지는 전멸했다. 산다칸에는 6월 9일에 185명의 포로가 남겨져 있었지만 7월 12일에는 그 숫자가 50명으로 줄었다.
2.4. 학살의 마무리
다카쿠와 대위의 성급한 산다칸 철수 시 포로를 처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리타케 중위는 자연사가 확실한 27명을 방치하고 23명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7월 13일에 무로즈미 히사오 조장에게 포로의 처형을 명령하여 무로즈미는 12명의 대만인 감시병에게 총살을 지시하였는데 감시병들이 주저하자 권총을 들이대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따르지 않은 감시병들은 포로와 함께 처형됐다.[5]결국 23명의 포로는 총살되어 그 시체는 방공호에 버려졌다. 나머지 27명의 포로는 약 한 달 간 목숨을 부지했지만 8월 14일과 15일에 최후의 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라나우에선 6월 25일에 약 190명의 포로가 생존해 있었지만 6월 28일에는 이미 19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포로는 하루 약 70~75g의 식량[6]으로 가혹한 노동에 동원되었다.
대만인 감시병으로부터 다카쿠와가 포로 전원을 살해한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키스 보텔린 등 4명의 포로는 7월 7일 밤에 탈주했는데 이들 중 3명이 호주군에 구출되었다. 7월 18일에는 포로수용소라는 이름의 움막이 완성되어 살아남은 포로 72명 중 이질환자인 34명이 수용되었다. 이들에겐 움직일 힘도 없어 7월 20일엔 강제노동이 중지되었다.
7월 26일엔 스티븐위치 등 2명이 탈주하였고 스티븐위치만이 구조되었다.
8월 1일 아침에 다카쿠와는 살아남은 포로 33명을 3조로 나누어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자신의 발로 처형장까지 향하도록 강요되었고, 움직일 수 없는 자는 들것에 실려 옮겨져 전원이 총살되었다고 한다.
3. 전후
전후 호주군이 실시한 B, C급 전범재판에서 산다칸과 라나우에서 이루어진 포로살해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기소되어[7] 호시지마 스스미 대위, 야마모토 쇼이치 대위, 아베 카즈오 대위, 다카쿠와 타쿠오 대위 (4명이 교수형), 와타나베 겐조 중위(1명 총살형)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무로즈미 히사오 조장은 종신형을 언도받았으며 살해에 동원된 대만인 감시병은 모두 징역형에 처해졌다.산다칸 포로수용소를 통괄한 보르네오 섬 포로수용소 쿠친 본부에 지령을 내련 제37군 사령부의 바바 마사오 중장은 총살형, 보르네오 섬 포로수용소 전체의 최고책임자였던 스가 타츠지 대령은 처벌이 두려운 나머지 권총으로 자살했다. 한편 포로를 나무로 만든 십자형틀에 고정시킨 채 산 채로 칼로 살과 내장을 도려내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3.1. 여담
호주 정부는 이 참담한 사건을 언론에 공표하지 않았는데 동원된 장병들의 사기저하가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포로수용소 연합군 포로 사망률은 27%로 상황이 가장 좋았던 라바울 포로 수용소에서는 0.05%가 사망하기도 했는데[8] 산다칸 수용소에서는 99%의 포로가 사망했다.이런 일본군에서도 금도를 넘은 학대 행위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대만에서 징용된 군속신분의 경비병들이 본토 일본인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아 불만이 많았고 전황이 악화되면서 물자 보급이 어려워진 데다 연합군의 폭격 등으로 결국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절제력과 자제력 등을 상실했다는 등.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일본군 내 극도의 부조리와 가혹행위가 포로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대만인들을 원인으로 짐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만 경비병들이 학대 행위를 하였다고 해도 일본군이 그걸 막았어야 했으므로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
현재 산다칸에는 전쟁기념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추도비와 추도시설도 건설되어 있으며 산다칸 수용소와 죽음의 행진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다.
[1]
이는 '일본군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마무라의 현지친화적인 정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대본영의 조치로, 당연히 후임자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인물로 내정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2]
당연하지만 히토시가 사령관으로 있었던 시절엔 꿈도 안 꿨다.
[3]
이건 포로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포로들을 이송하는 일본군들에게 필요한 사항이었을 뿐 포로들의 분량이 아니라 자신들의 분량만을 요구했다.
[4]
이 1%의 인원은 장교들이었다.
[5]
이렇게 상급자의 협박에 의한 총살이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여 해당 대만인 감시병들은 전후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는 선에서 끝났다.
[6]
사람에게 필요한 일일최소량은 약 600g이며 중노동자에게는 더 필요하다. 이따위 70g은 그나마 많이 준 경우고 실상은 1g도 지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7]
이 전범 재판에 라바울 포로 수용소장도 같이 있었다.
[8]
약 4000명의 포로 중 2명만 사고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