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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10:19:45

구로사와 기요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
파일:silverlion.png
감독상
제76회
( 2019년)
제77회
( 2020년)
제78회
( 2021년)
로이 앤더슨
( 끝없음에 관하여)
구로사와 기요시
( 스파이의 아내)
제인 캠피온
( 파워 오브 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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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
[ruby(黒沢, ruby=くろさわ )][ruby(清, ruby=きよし)]|Kiyoshi Kurosawa
파일:trois-questions-a-kiyoshi-kurosawa-realisateur-de-creepy,M460883.jpg
출생 1955년 7월 19일 ([age(1955-07-19)]세)
효고현 고베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영화 감독, 각본가, 평론가, 소설가, 교수
데뷔 1983년 영화 간다천음란전쟁
학력 릿쿄대학 (사회학부 / 학사)
경력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교수 (영상연구과 영화전공)[1]
수훈 자수포장 (2021년 수상)

1. 개요2. 생애
2.1. 데뷔 이전2.2. 활동
3. 필모그래피
3.1. 영화
3.1.1. 데뷔 전 인디 및 단편 영화3.1.2. 장편
3.2. 드라마3.3. 오리지널 비디오3.4. 뮤직비디오
4. 여담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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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유분방한 장르적 상상력에다 현대 일본의 병리에 대한 통찰력까지 겸비함으로써 기타노 다케시와 함께 일본영화의 희망으로 추앙되고 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
빛, 프레임, 속도의 절대적인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2]

일본 영화 감독, 각본가, 평론가, 소설가.

2. 생애

2.1. 데뷔 이전

1955년 7월 19일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다. 아오야마 신지, 만다 구니토시, 시오타 아키히코, 수오 마사유키 등 쟁쟁한 감독들을 배출한 릿쿄대학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표현론' 강좌 출신으로 재학 시절 패러디아스 유니티라는 영화 클럽을 이끌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서로서로 영화 조감독이나 출연해주기도 했다.
지정된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영화에서 무엇이 보였는가'를 학생들이 차례로 발표하는 것이 정상적인 수업 진행 방식이었습니다. '보였던 것만 말하면 안 된다'라는 규칙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누구나 재미있을 정도로 보지도 않은 것을 '봤다'라고 했네요. 예를 들면 어느 러브스토리에 관해 '남녀의 사랑에 감동했다' 등이라고 보고하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 어디에 보였는가'라고 선생님에게 말해 버립니다. '사랑이 눈에 보일 리가 없고 화면에 비칠 수가 없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 같은 스토리에서 당신은 그것을 보고 싶어할 뿐이다'라고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미지와의 조우에 대해 " 특촬 기술이 대단했다"고 발언하면 "왜 저 UFO를 특촬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고, 즉 하스미 선생님은 우리에게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성의 가치관을 뒤집어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셈이군요. 그런 수업에 매주 나오다 보니 영화 보는 법뿐만 아니라 나의 온갖 가치관과 선입견이 무너져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물의 사고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집혔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만약 그 수업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스미 선생님의 수업에는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
개인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릿쿄대학에서 하스미 시게히코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강렬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만들기, 보기, 말하기, 생각하기, 쓰기 어떤 작업이든 일관되게 '영화는 평생에 걸쳐 사귈 만하다'고 강렬하게 하스미씨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저는 다행히 '영화를 만들다'를 계속하고 있는데 만드는 것 외에도 좋고 평론을 해도 되고 '우선 영화를 본다'네요. 영화는 젊었을 때 배우고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하스미 씨는 무명이었어요. 우연히 영화 수업이라 들어간 거예요. 그건 정말 우연이에요. 행운이었어요. 처음에는 100명 있던 학생이, 마지막에는 10명이 됐죠. 그렇게 되자 남은 10명이 '우리는 뽑혔다. 하스미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다'가 됐죠. '하스미씨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우리는 이 말을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라는 사명을 지는 것이지요. 거의 종교에 가까운 강렬한 계시를 체험했습니다. 그 말을 퍼뜨리기 위해 오늘까지 나는 활동하고 있어요(웃음).
구로사와 기요시 (2020년) #

2.2. 활동

릿쿄대학 재학부터 자신이 직접 연출한 8mm 영화를 제작하고 공개했다. 이후 하세가와 카즈히코(長谷川和彦), 사가미 신지(相米慎二)등의 조감독을 거쳐 디렉터스 컴퍼니에 참가했다.

1983년 로망 포르노 영화 '간다천음란전쟁'로 정식 데뷔했다. 당대의 영향력있는 영화 제작사 아트 시어터 길드(ATG)에서 데뷔작을 찍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핑크 영화를 찍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구로사와는 2018년 인터뷰에서 "제 안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었거든요. '찍을 수 있는 걸 찍는다. 데뷔작이든 뭐든 찍을 수 있는 것부터 찍어간다.' 왜냐하면 플라이셔가 그랬으니까요. 저는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ATG에서 작가의 영화로 실현해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면, 저는 아직까지 한 편도 찍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1989년 공포 영화 ' 스위트 홈'으로 메이저 데뷔를 했고, V 시네마에서 야쿠자물이나 오리지널 비디오 드라마를 연출했다. 기요시는 이때 만든 작업물들은 거의 같은 스태프들이 모여서 자체적으로 만든 것들이라 100% 만족했다고 한다. # 이후 1997년 개봉한 ' 큐어'가 일본 스릴러 영화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유명 감독 반열에 올랐다. 이후 ' 절규', ' 회로'같은 작품을 연출해 호러영화 감독으로 유명해졌으며, 일본 호러물의 대표적인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다만, 호러물뿐 아니라 '네 멋대로 해라!! 시리즈'같은 야쿠자물이나 드라마, 다소 실험적인 예술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구로사와의 작품들은 장르 마니아와 평론가 양쪽에서 환영받는 케이스. 특이하게도 같은 영화가 호러 영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어떻게 감상하느냐에 따라서 작가주의 예술 영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나 《 주온》에 비견되는 작품들을 만드는데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 본인은 70년대 미국 B급 영화 팬이라고 한다. 로버트 올드리치, 토브 후퍼, 존 카펜터의 팬이다.

B급 영화도 굉장히 좋아하지만 장 뤽 고다르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같은 예술적인 영화에 큰 충격과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위의 두 감독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앙겔로풀로스처럼 찍고 고다르처럼 편집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제작사한테 뭔소린지 모르겠다고 야단맞았다고.

이 감독의 주특기이자 시그니쳐인 롱 숏과 점프컷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위 두 감독의 영향인듯. 말로만 보면 왠지 지루할 것 같지만 이게 본인의 장기인 공포영화에도 여지없이 나오면서 굉장히 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특히 큐어 후반부의 점프컷 테크닉이나 회로에서의 롱숏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독특한 연출능력을 보여준다.

인간의 소통이라거나 인류의 종말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장르물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는 평이다. 2000년 《 회로》로 제54회 칸 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 2008년 《 도쿄 소나타》로 제61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2009년에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일본 현지에서도 도쿄예술대학 등지 강사로 나서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는 중인데, 하마구치 류스케와 후카다 고지가 대표적인 제자로 꼽힌다.

피아 영화제(Pia Film Festival)에서 오시마 나기사의 정신을 기리고 일본의 신진 영화감독을 발굴하고자 2020년부터 오시마 나기사 상(Oshima Prize)을 제정하였고, 사카모토 류이치와 함께 이곳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021년 두 번째 시상에서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는지 수상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참고로, 첫 번째 수상자는 오다 카오리로, 벨라 타르 사라예보에 설립한 film.factory 출신.

이 오시마 나기사 상의 두번째 시상에서 구로사와 기요시가 한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한때 아시아 영화의 모범이었지만, 통속적인 작품들만 고집하다 몰락한 일본 영화에 대한 비판이자,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당사자를 배척하여 감추려는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いろいろあったけど、よかったよかった」となる映画が多すぎる。
本当にいろいろあったなら、人は取り返しのつかない深手を負い、社会は急いでそれをあってはならないものとして葬り去ろうとするだろう。
人と社会との間に一瞬走った亀裂を、絶対に後戻りさせ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ささやかに打ち込んだクサビは、案外強力なのだ。
よかったよかったと辻褄を合わせる必要なんかどこにもない。
「たかが映画だろう」と周りは言うかもしれない。
しかし映画とは何だ?ぼんやりとみなが想像するものだけが映画ではない。
表現の極北から見出される鋭い刃物のようなクサビで、人と社会とを永遠に分断させよう。これら二つが美しく共存するというのはまったくの欺瞞だ。
このような映画製作に挑む若者を探している。それは大島渚が切り開いた道であり、決して閉ざしてはならないと思うから。
일본어 원문

There are too many films that go, "A lot happened, but all's well that ends well." If a lot really happened to someone, they would be profoundly, irreparably wounded, and society would swiftly attempt to ostracize them as something that should not exist. If a crack forms momentarily between someone and society, that must never be backtracked. The wedge that you modestly drive in is surprisingly powerful.

There's no need to make everything coherent in an "all's well" way. "It's just a movie," people might say. But what are movies? The ones people vaguely imagine aren't the only kinds out there. Find a sharp, knife-like wedge from the utmost limits of expression and divide people and society forever. It's utterly delusive to think that these two coexist beautifully.

We're looking for young filmmakers who take on moviemaking in this fashion. I believe that that is the path Oshima Nagisa forged, and it must never be closed.
영화제측 공식 영어 번역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엔 모두 다 잘 해결되었답니다." 식의 영화가 너무 많다. 하지만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정말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깊고 회복불가능한 상처를 입기 마련이고, (그가 속한) 사회는 그를 즉시 배척하여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려 한다. 그와 사회간에 발생한 갈라진 틈은 일시적일지라도, 이는 결코 원상태로 회복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그에게 (배척을 통해) 박아넣었던 쐐기는 별것 아니어 보여도, 실상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다.

(따라서) "모든 게 잘 끝났어요."라는 식으로 모든 영화를 만들 필요는 없다. 사람들을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냥 영화일 뿐이잖아요?" 하지만 영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그런 것만이 영화의 모든 것은 아니다. 표현의 극한으로부터 칼날같이 날카로운 쐐기를 찾아내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사회를 영구히 분단시켜라. 이 둘이 아름답게 공존한다는 것은 완전히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영화제)는 이런 사조로 영화를 만드는 젊은 영화인을 찾고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오시마 나기사가 (생전에) 추구했던 것이라 믿으며, 이런 노력이 중단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한국어 번역

2021년 일본의 문화계 훈장 중 하나인 자수포장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온 것이 이러한 평가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까지 간신히 끊김 없이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행운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혼자 찍을 수는 없으니까, 다 같이 작업하고, 저는 지켜보는, 즉 현장 감독입니다. 그런 장인으로서의 솜씨가 조금씩이긴 하지만, 올라간 증표로서의 자수포장이라고 하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 거장들에 비하면 저야 아직 햇병아리죠. 앞으로도 한눈 팔지 않고 그저 영화를 계속해 나갈 그런 각오가 굳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

3. 필모그래피

3.1. 영화

3.1.1. 데뷔 전 인디 및 단편 영화

3.1.2. 장편

3.2. 드라마

3.3. 오리지널 비디오

3.4. 뮤직비디오

4. 여담

5. 외부 링크



[1] 2023년 퇴임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제자기도 하다. [2] 스코세이지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표작 큐어를 호평하는 평론에서 쓴 문장. [3] 이 작품으로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4] 원출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올타임 베스트 1탄, 구로사와 기요시의 올타임 베스트 2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