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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드 세쿠 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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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 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
Ahmed Sékou Touré | ߛߋߞߎ߬ ߕߎ߬ߙߋ [1]
파일:Ahmed Sékou Touré.webp
출생 1922년 1월 9일
프랑스령 기니 파라나(ߝߙߊߣߊ߫߫)
사망 1984년 3월 26일 (향년 62세)
미국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국적 파일:기니 국기.svg 기니
종교 이슬람교
재임 기니 초대 대통령
1958년 10월 2일 ~ 1984년 3월 26일

1. 소개2. 생애
2.1. 기니의 독립 전2.2. 기니의 독립 후
2.2.1. 프랑스의 보복2.2.2. 독재 행각
2.2.2.1. 캠프 보이로(Camp Boiro)
2.2.3. 외교 정책2.2.4. 경제 정책
2.3. 최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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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우리는 풍요로운 예속보다 빈곤한 자유를 원한다!(Nous préférons la Pauvreté dans la Liberté à la richesse dans l'esclavage!)
아메드 세쿠 투레, 1958년 8월 25일에 샤를 드골에 반대하며 남긴 말 # 연설 당시 실황 녹음(0:53~0:56)

기니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기니 대통령, 그리고 독재자.

기니의 독립 전에는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며 기니의 독립을 전적으로 주도한 독립영웅이었지만[2], 독립 후에는 26년간 장기 집권하며 무려 5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폭압적인 독재자가 되었다.[3]

2. 생애

2.1. 기니의 독립 전

세쿠 투레는 1922년 1월 9일에 프랑스령 기니 파라나의 만딘카족 이슬람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겉보기에는 여느 농가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사실 세쿠 투레는 귀족 혈통을 가졌는데, 그의 증조부 사모리 투레는 오늘날의 기니와 말리 지역에 와술루 제국(Wassoulou Empire)을 건국하고 1882년부터 1898년까지 프랑스 식민지배에 무장 저항한 독립운동가였다.

어린 투레는 프랑스 계열 학교에 진학했으나 학교 급식에 대한 항의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15살에 퇴학당했고, 이후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며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1941년부터는 코나크리에서 프랑스의 우편, 전신, 전화 서비스 기업 PTT의 우편 사무원으로 근무하면서도 공산주의의 영향이 우세하던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와 협력하기도 했다. 1945년에는 프랑스령 기니 최초의 노동조합인 우편전기통신노동조합(SPTT)을 설립하고 사무총장에 올랐으며, 1952년에는 아프리카 민주 집회(RDA)[4]의 한 분파로 1947년에 자신의 참여 하에 창당된 기니 민주당(PDG)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1953년에는 프랑스 군의관과 기니 여성과의 혼혈인 앙드레 코우로우마(Andrée Kourouma, 1934~)와 결혼해[5] 딸 아미나타(Aminata Touré, 1954~ 2022)와 아들 모하메드(Mohamed Touré, 1961~)을 낳는다.

투레는 무장 투쟁에 나선 증조부와는 달리 강력한 노동운동과 뛰어난 연설 능력을 통해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저항했는데, 새쿠 투레는 1953년에 프랑스령 기니 전역의 노동자들이 새로운 해외 노동법 시행을 요구하기 위해 71일간의 총파업을 한 것을 주도한 것으로 본토 사람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줘 같은 해에 프랑스령 기니 의회에 입석하고는 1954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의 노동총연맹(CGT)의 서기장 3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1956년에는 RDA 소속으로서 프랑스 국회의원과 코나크리 시장이 되어 프랑스에서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면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을 위한 협상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1957년 3월 31일에 열린 총선에서 PDG는 60석 가운데 56석을 석권했으며, 같은 해에 투레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노동조합의 90%를 모아 흑인 아프리카 노동자 일반 연합(UGTAN)을 설립하고는 UGTAN의 리더가 되었다.

가나 콰메 은크루마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투레는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와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와는 다르게 친불보다는 강력한 반불성향이 강했다. 1958년 8월 25일 샤를 드 골이 기니의 코나크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며 드골과 반목했는데, 드골은 투레가 상술한 연설을 남기며 식민지 체제 유지에 반대한 강경 입장을 보이는 것을 보고 '프랑스는 기니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것에 투표할 경우 기니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1958년 9월 28일에 열린 프랑스의 헌법 개정에 대한 프랑스 연합 국민투표에서 기니는 압도적인 반대표를 던졌는데, 찬성표가 4,78%였던 것과 달리 반대표는 무려 95.22%에 달했다고 한다. # 사실 이 투표에서 프랑스의 새 헌법이 승인되면 프랑스의 해외 영토는 기존 지위를 계속 유지하거나, 프랑스 본토로 완전히 통합되거나, 새로운 준연방 프랑스 공동체에서 자치 공화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게 되지만, 그들이 새 헌법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즉시 독립할 것으로 조건을 뒀다. 그러나 드골은 '독립 노선을 추구하는 국가는 더 이상 프랑스의 경제 및 재정 지원, 프랑스 기술 및 행정 관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사실상의 협박을 했고, 이 때문에 이 투표에서 기니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프랑스의 식민지 국가들은 90%대의 찬성표를 던졌다[6] 물론 상술한 것처럼 기니 유권자들은 새 헌법을 거의 버렸고, 이에 따라 기니는 1958년 10월 2일에 당당히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국가 중 최초의 독립국이자 1957년 3월 6일에 독립한 가나에 이어 서아프리카 식민지 국가 중에서 2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되었다.

2.2. 기니의 독립 후

2.2.1. 프랑스의 보복

전술한 국민투표에서 프랑스령으로 남는 것을 선택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1960년에 무더기로 독립하게 되지만, 이 투표에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독립하는 것을 선택한 유일한 나라였던 기니는 그 자긍심을 안고 새로운 프랑스 공동체에 대한 참여를 거부한 유일한 프랑스 식민지로 남게 되었으며, CFA 프랑 사용 역시 거부하며 고유 화폐단위인 기니 프랑을 쓰게 된다.[7]

기니가 독립한 지 고작 며칠 후에 드골은 "이것(기니의 독립)은 단지 며칠만 지속된 다음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니가 '식민지의 지속으로 우리와의 협력을 받아들인 다른 아프리카 민족에게 나쁜 선례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다른 프랑스어권 국가들에 '프랑스를 배척하면 너희도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 차원으로 기니에 대한 보복을 결정하고는 '프랑스가 기니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했는데, 드골은 기니에 대한 예산 등의 원조를 중단한 것은 기본에 기니의 경제와 민정, 보건을 담당했던 공무원, 행정관, 판사, 교사, 의사, 기술자, 사업가 등 기니에 상주하던 프랑스인 4천여 명을 모조리 철수시키도록 지시했다.

기니에서 철수하는 프랑스인들은 기니인 공무원들의 업무를 방해하기 위해 정부 문서와 청사진, 매뉴얼 등의 기록들을 불태우거나 본토로 가져갔고, 기니의 프랑스 정착민들도 이에 따라 기니에서 철수하는 2개월 동안 사무실에 설치한 가구와 전화, 전구를 걷어가거나[8] 전화선, 수도의 상하수도 배관도 철거하거나 군 시설, 병원, 학교 등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놓은 건물들을 보이는 즉즉 폭파, 방화하는 등 사회기반시설들을 파괴했다. 심지어는 이도 모자라 기니 사람들이 써야 할 서양식 약을 기니 사람들에게 단 한 알도 주지 않고 모조리 불태웠다는 극악무도한 이야기까지 전해진다.[9]

결국 프랑스의 만행으로 기니는 국가 재건에 필요한 많은 기반들을 잃었고, 프랑스의 자본이 모조리 빠져나가며 기니의 경제는 붕괴해버린다. 프랑스 본토에서도 이 철수를 '위자료 없는 이혼(un divorce sans pension alimentaire)'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며, 이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다른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니에 대한 프랑스의 치졸한 보복에 겁을 먹고는 오늘날에도 프랑스에 복속된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기니 출신 군인들의 연금 지급을 전면 중단하고는 기니의 유엔 가입까지 막으려고 했고[10], 이걸로도 만족하지 못하며 1960년 초에 '대량의 위조지폐를 유통시켜 기니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투레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기니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유도해 투레를 몰아내게 한다'는 취지의 '퍼실 작전(Operation Persil)'을 시행해 기니에 막대한 양의 고품질 위조지폐를 살포했는데, 이 작전은 전직 프랑스 비밀경호국 요원 모리스 로베르(Maurice Robert)가 회고록에서 '이 작전은 진정한 성공이었고 이미 나쁜 상태에 있던 기니 경제는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언급할 정도로 이미 프랑스의 공작으로 악화된 기니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와 함께 '기니의 야당 인사들을 무장시키고 이들을 준군사 조직으로 조직시키고는 이들에게 내전을 일으키게 해 궁극적으로 투레 정권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계획도 짰고, 이것도 모자라 아예 '기니에 불안정한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이 틈을 타 기니를 침공해 투레를 전복시켜야 한다'며 세네갈 코트디부아르와의 국경 인근에 캠프와 무기 보관소를 설치하고 현지 용병을 주둔시키기까지 했으나, 물자를 수송하던 비행기를 세네갈에서 압수당하는 바람에 들통나서 1960년 4월에 기니 정부가 이 작전을 공식적으로 불평하며 퍼실 작전의 실체가 폭로되었고,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갓 독립한 국가였던 세네갈 정부도 프랑스 정부에 퍼실 작전에 대한 항의 서안을 보내고 프랑스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며 결국 프랑스 정부는 퍼실 작전을 포기했다.

드골의 후임 대통령이 될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총리는 1962년에 프랑 존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는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 국가들에게 "세쿠 투레의 경험이 펼쳐지도록 합시다.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기니 정치가 자살 행위이며 아프리카 전체의 이익에 반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

2.2.2. 독재 행각

프랑스의 방해 공작들의 영향으로 투레는 점차 극단적인 면모를 보여주다가 결국 잔인하기 그지없는 독재자가 되고 만다. 그의 독재가 어느 정도였는지 해외에서 기니는 '열대의 굴라그'로 불렸으며, 세계의 자유 지수가 처음 발표된 1972년부터 투레가 사망한 1984년까지 기니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11] 매해 정치적 권리 7, 시민적 자유 7, 평균 7점으로 최하점을 기록했을 정도였다.[12] 실제로 투레의 폭정은 독립 초기 프랑스의 방해 공작들이 극심했던 것을 감안해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투레는 1960년부터 나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을 PDG 하나만 허용하는 일당독재를 구축한 뒤 1961년, 1968년, 1974년, 1982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 어떠한 반대표도 없이 당선되었고, PDG 국회의원 목록은 5년마다 1번씩 국회에 제출되었으며, 1958년부터 1972년까지 기니의 국무총리 역시 투레가 역임했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운명은 독립적인 사법부가 아니라 고위 정치 관리들과 대통령의 친척들로 구성된 기구인 혁명위원회(Comité révolutionnaire)가 결정지었으며, 덤으로 투레는 노조 운동으로 나라를 독립시켰으면서 나라의 노조도 국가가 승인한 단체 1곳만 허용했다. 게다가 투레는 1961, 1968, 1974, 1982년에 4번이나 보여주기식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모두 거의 100%에 육박하는 찬성율을 기록했으며, 심지어 1982년 선거에서는 투표에 참여한 3,063,700명 중 투레에 투표하지 않은 사람이 단 8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투레는 모든 마을, 도시 지역, 군 막사, 학교, 심지어 해외에까지 기니인들이 있는 모든 곳에 PDG 조직이 있는 피라미드형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는 모든 기니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PDG 당원으로 가입하도록 했으며, 출국을 위해서는 투레가 직접 서명한 출국 비자가 필요했다. 거기에 학생 시위 참여자는 물론이고 영화관에서 나갈 때 신원 확인에 걸린 것을 넘어 정권 고위층 마음에 든 아내, 별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구금되는 등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구금되는 경우가 흔했으며, 심지어 드골을 닮은 손잡이가 달린 병따개를 가졌다는 이유[13]로 옥사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 거기에 투레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면 군사 재판을 거친 후 몇 시간 내에 처형하게 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할 때 그 모습을 10살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도 지켜보게 했고, # 이런 상황인 만큼 기니는 가족 사이에도 의심이 오가는 사회가 되었다.

그는 여러가지 음모들을 구실로 정적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했으며 여론 조작과 공개처형, 비밀 경찰, 암의적인 구금, 고문의 일상화로 오명을 남겼다. 이러한 혼란에 수많은 기니 국민들이 이웃 서아프리카 국가들로 이주했는데, 그가 집권할 동안 도피한 국민이 전체 국민의 1/5~1/3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14] 또한 50명이 넘는 각료들이 총살형과 교수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했으며, 국제앰네스티는 그의 정권 하에서 무려 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15] 그리고 앰네스티에 따르면 1969년에서 1976년 사이에 기니에서 4,000명이 정치적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2,900명은 생사를 알 수 없었다고 하고, 이후 1982년에 앰네스티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기니에서 최소 1만 명이 구금되고 2,800명이 '실종'되었다고 보고했다.

1960년에 그는 프랑스인과 기니의 불만 세력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했다고 발표한 뒤 수십명을 체포하고 일부는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1961년 교사들이 동일업무 동일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자 그는 교사들의 음모를 적발했다고 하면서 수많은 교사들과 지식인들이 구금되었다. 1965년에는 어느 상인 조직이 야당 결성을 시도하고 선거에서 투레에 맞설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다 모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1970년 11월 22일에는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수행중이던 포르투갈군 220명이 기니인 200명과 함께 투레 정부를 전복시키고 반포르투갈 활동을 해오던 코나크리의 민족주의 게릴라 본부를 파괴하기 위해 녹색바다작전(Operação Mar Verde)을 시행하고 수도를 침투해 일부 정치범들을 석방했다가 원래 목표도 이루지 못한 채 기니 정규군에게 격퇴되었다. 투레는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의 측근 10인으로 구성된 위원회 '최고사령부'를 만들고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서면서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 앞잡이'들이 활동한다는 이유 아래 각료와 대사, 정당 지도자 등 수백 명이 체포하고는 재판 없이 구금했다. 그리고 1971년 1월 23일에 '특별 혁명법원'은 62건의 사형 선고[16], 68건의 종신형 선고, 17건의 전 재산 몰수 선고라는 중형을 남발했으며, 재판도 거치지 않고 초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976년 5월에 투레를 암살하려는 풀라니족들의 음모가 폭로된 후 투레는 수천 명을 구금했는데, 그 일례로 동년 7월 18일에 풀라니족 출신이던 현직 법무부 장관이자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의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디알로 텔리(Diallo Telli, 1925~1977)[17]가 투레 암살 음모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18]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강제로 구금되고는 1977년 2월에 감옥에서 후술할 '검은 다이어트'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그와 같이 체포된 다른 4명도 그 방법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투레는 1983년에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앰네스티가 비판한 인권 탄압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인권 탄압을 인정하기는 커녕 " 인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국가의 인권 관행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으며, # 자신의 독재에 대해서도 "나는 반역자들만 투옥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반역자들에게 무엇을 하는가?"라는 말로 정당화했다.
2.2.2.1. 캠프 보이로(Camp Boiro)
당시 기니의 강제 수용소 중 가장 악명 높은 곳은 수도 코나크리 근처에 있는 캠프 보이로(Camp Boiro)였다. 프랑스 식민 통치 하에서 공화국 수비대를 수용했던 캠프 카미엔(Camp Camyenne)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지원 하에 1960년 리모델링한 이 수용소에서 식사는 처음 수감된 9일 동안은 전혀 제공하지 않았고, 아침에 성냥갑만한 빵 한 조각, 저녁에는 더러운 물에 지은 쌀밥 한 국자 외에는 거의 음식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고기도 투레가 희생을 치르는 날[19] 외에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감방은 부실한 철제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고 위생 상태도 열악했으며, 한낮에는 끔찍하게 더웠고, 모기 등의 곤충들이 번성했던 데다가, 특히 이 감옥에는 상하수도 시설도 전혀 없어 장마 때면 감방에 물이 허리 높이까지 차오르기도 했고, 수감자들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다.[20] 게다가 이 수용소에서는 재판 없는 초법적인 처형도 많아 죄수가 한 번 들어가면 수용소 밖에서는 아무도 그를 보거나 듣지 못했으며, 들어간 사람도 살아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이 수용소 안에서만 5천 명이 사망한 것로 추정된다.[21] #

투레 시기 수용소에 수감된 수감자들은 구타, 전기고문, 성폭력, 신체를 담뱃불로 지지기, 고통스러운 자세 유지하기, 며칠 내내 발을 묶고 매달기 등의 참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특히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 의하면 투레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즐겨 썼던 데다가,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고문 방법은 '검은 다이어트'라고 불리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투레는 캠프 보이로에 창이 없고 철문이 달린 콘크리트 감방을 세우고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지목된 사람들을 이 감방에 가뒀는데, 이 감방에 갇힌 사람들은 콘크리트 바닥과 문 사이의 틈을 통해 약간의 공기만 들어갈 뿐, 그야말로 완전히 폐쇄된 공간에서 먹을 것은 물론 마실 것도 없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수감된 사람들은 CIA나 프랑스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거나, 뇌물을 받았다거나, ' 제5열' 요원이 되었다는 등 허위 자백을 해야 했으며, 피해자가 (허위로) 자백하지 않는 한 고문은 멈추지 않았고, 수감자들은 라디오로 중계되는 가운데 거짓 자백을 읽어야 했고 이는 다른 체포에 대한 '합리성'을 제공했다. 심지어 수감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재산이 '국유화', 즉 정부에 몰수되거나 잠깐 구금되기도 하는 등 사회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캠프 보이로 희생자 추모 사이트 이 사이트에 캠프 보이로 수감자 명단이 있는데, 이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듯 투레는 캠프 보이로에 자국인 장관들은 물론이고 가나인, 말리인, 세네갈인 등 외국인들도 관광객까지 봐주지 않고 수감했으며, 심지어 7세 소년과 100세 노인도 이 수용소에 구금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2.2.3. 외교 정책

투레는 "식민지 시절에 많은 것을 잃은 아프리카는 이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이전 식민지배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많은 반식민주의 및 범아프리카 단체들의 호응을 얻었고, 투레는 제1세계 대신 제2세계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친소, 친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며 특히 가나 콰메 은크루마 말리 모디보 케이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은크루마가 1966년에 쿠데타로 축출된 후 투레는 은크루마에게 기니로의 망명을 받아주고는 아예 '명예 공동 대통령' 직함을 수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투레는 자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것도 모자라 떠날 때에도 온 나라를 약탈하다시피 한 프랑스를 너무도 싫어하여 1965년부터 1975년까지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를 완전히 끊었는데[22], 투레가 얼마나 프랑스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는지 다른 아프리카 국가는 물론이고 기니의 국민들까지 그의 반프랑스 행동을 납득하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23] 그러나 투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는 프랑스와 화해하며 1978년에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을 화해의 표시로 공식 방문하기에 이른다.

2.2.4. 경제 정책

투레의 경제 정책은 외국 기업의 국유화 및 중앙 집중식 경제 계획, 지주의 재산과 농지 몰수 등 사회주의 성향을 강하게 띄어 1961년에 레닌 평화상을 수상받을 정도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정책들은 실패로 끝났음에도 투레는 뻔뻔한 태도를 보이다가 말년인 1982년 여름에 기니의 광물 자원 개발을 위한 서방권의 투자를 모색하며 미국을 방문할 때에야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72년에 의약품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투레는 이를 의사들의 음모라고 말했으며, 1973년에 전국에 콜레라가 퍼진 것 역시 반혁명 음모라고 일축했다. 1977년에는 정부 포고령을 공포하여 기니 주민 생활의 주요 상징이던 시장들을 모두 폐쇄하고 지방 상업에 대한 완전한 독점권을 국영기업에게 부여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 3명의 지역지사가 살해되자 당황한 투레는 제한 조치를 완화하고는 귀국한 수천 명의 망명자들을 모조리 사면한 후 수백 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이 외에도 일관성이 없는 파행적인 경제정책들로 인해 시민들의 원성이 쌓이면서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했으나 투레는 정부군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서 진압했다. 그러나 이후 보크사이트와 알루미늄 생산이 늘어나자 강압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완화하고 일부 민간기업과 무역회사들의 활동을 허용하고 경제 경찰을 해제하는 한편 원조와 민간 투자를 받고자 서방권에 접근하기 시작하며 오히려 소비에트 블록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만다. 한편 투레는 1978년에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서방과의 무역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그가 사망한 1984년 기준으로 기니는 평균 수명은 41세에 문해율은 무려 10%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파탄국가가 되었다.[24] 더구나 식민지 시절에 기니는 비옥한 토지과 풍부한 천연 자원으로 인해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중 가장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널리 여겨졌으나, 프랑스가 벌인 온갖 방해공작을 수습한답시고 투레도 실정을 거듭했으니 경제가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5]

2.3. 최후

1984년 3월 26일에 투레는 그 전날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쇼크를 겪은 후 급히 미국 클리블랜드로 이송되어 심장 수술을 받던 도중 심장마비로 향년 62세라는 이른 나이로 사망했다.[26]

4월 3일에 PDG 정치국이 새 대통령을 선출할 때까지 임시 대통령은 1972년부터 기니 총리를 역임한 루이스 란사나 베아보기(Louis Lansana Beavogui, 1923~1984)[27]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회의 시작 몇 시간 전에 란사나 콩테(Lansana Conté, 1934~2008) 대령이 무혈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시키고는 PDG를 금지하고는[28] 국회를 해산하며 헌법을 정지시키는 한편 투레의 폭정을 비판하며 250~1,000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20만 명의 망명자들의 귀국을 허락했고, 2008년에 죽을 때까지 26년간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도 사회주의 정책과 일당제를 폐기하고 양당제를 도입하는 면모를 보여 투레보다는 온건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콩테가 죽자 무사 다디스 카마라(Moussa Dadis Camara, 1964~)라는 대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는 2009년 9월 28일에 있던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가 동년 12월 3일에 암살 미수 사건을 겪고는 사실상 사임했으며, 이후 임시 대통령이 된 세쿠바 코나테(Sékouba Konaté) 국방부 장관은 민정 이양을 승인하고는 2010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알파 콩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11년간 독재정치를 펼쳤으나, 2021년에 마마디 둠부야라는 이름의 특수부대 지휘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콩데를 몰아내고 2024년 현재까지도 임시 대통령직[29]을 역임하는 등 기니의 정치 상황은 바람 질 날을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투레의 딸 아미나타는 투레의 사후에 모로코로 도피했으나 얼마 안 가 어머니, 남동생 부부, 아버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연좌제에 연루되어 군부 쿠데타로 체포되어 8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나 1988년 1월에 조기 석방되었고, 이후 이들은 아프리카를 전전하다가 2000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모하메드는 미국 텍사스에서 살다가 2018년에 가정부를 강제 노동시킨 혐의로 아내와 함께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피해자에게 30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는 겨우 석방되기도 했으며, 아미나타는 이후 모로코에서 통신 사업을 하는 기업가로 지내다가 귀국한 뒤인 2018년에 칼룸에서 열린 지방 선거에서 자신이 만든 당인 칼룸 이구이(Kaloum Yigui) 소속으로 출마하고는 승리하며 정계에 입문했으며, 투레의 지지자들은 그녀가 아버지랑 닮았다며 그녀를 보면 세쿠를 보는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후 아미나타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프랑스에 기니의 식민 통치와 그로 인한 악영향에 대해 사과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 지병 때문에 거물급 인사로 성장하지 못하고 2022년 1월 12일에 향년 67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0]

그의 무덤은 수도 코나크리의 코나크리 대모스크 내의 정원에 있는 국가적 인물들이 묻힌 영묘에 안장되었으나, 2020년 7월 14일에 한 신원미상자가 그의 무덤에 꽂힌 기니 국기를 불태우고는 무덤 위에 액체를 뿌린 것이 발각되어 그의 미망인 앙드레 투레가 기겁했다고 한다. #

3. 기타

참고로 아미니타 투레는 아버지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상냥하면서 자녀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이해심 많은 사람이었으며, 아버지가 '모든 기니 청년들의 아버지'라고 말하며 "모든 기니 청년을 그의 자녀로 여겼다"고 말하는 등 아버지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1] 응코 문자 표기. [2] 노조를 통해 사실상의 독립을 이끈 것은 레흐 바웬사와도 유사하다.(공산정권 시기 폴란드 소련 위성국 신세였다) [3] 다만 후술하듯 그가 전적으로 기니 경제를 파탄냈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면이 매우 크다. 후술하듯 프랑스가 기니의 독립 초기에 보복 차원으로 국가의 인프라를 망쳐놓고는 이후에도 방해 공작을 거듭했기 때문. 다만 투레의 사회주의 경제 정책이 실패하며 기니 경제에 똑같이 악영향을 준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프랑스가 교육 인프라를 파괴했단 것을 감안해도 사반세기 동안 교육 인프라를 재건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문해율이 10%가 되도록 방치한 것은 명백한 투레의 잘못이다. [4] Rassemblement Démocratique Africain,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존속했던 프랑스령 서부와 적도 아프리카의 정당 및 계열사 연합.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전역에 걸친 다양한 정당들로 구성되었으며, 아프리카의 탈식민화를 제창했다. [5] 사실 그 이전에 투레는 2번 결혼했으나, 2번 다 3~4년도 가지 못하고 이혼했다고 한다. [6] 특히 콩고 공화국 오트볼타 공화국(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도 찬성표가 99%대를 차지했으며, 코트디부아르는 찬성 1,595,238명, 반대 216명, 즉 찬성 99.99%를 던졌다. 직접 선거에서 가히 북한 엔베르 호자 시기 알바니아,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기 아이티에서나 나올 찬성율이 나올 정도면 얼마나 이들 나라의 국민들이 엄청난 공포에 떨었는지 체감할 수 있는 셈이었다. [7] 이후 기니 프랑은 세쿠 투레의 재임 기간 도중인 1972년 1/10의 비율로 기니 실리로 개혁되었다가 1986년 1대 1의 비율로 다시 프랑으로 전환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8] 이 때문에 총독 거처를 대통령 관저로 쓰려던 투레는 관저 안이 난장판이 되어있는 모습을 목도해야만 했다. [9] 다만 일각에서는 몇몇 에피소드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지만, 적어도 여러 기록들을 교차검증해보면 프랑스가 인력을 모두 철수시키고 이 과정에서 기니에 남아있던 기록물들과 인프라를 파괴한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0] 그나마 기니는 프랑스의 방해를 뚫고 1958년 12월 12일에 겨우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1] 세계의 자유 지수는 0에 가까울수록 자유롭고 7에 가까울수록 자유롭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12] 1972년 세계의 자유 지수에서 평균 7점을 차지한 나라는 공산권 국가 중에서는 알바니아, 불가리아, 중국, 북한, 콩고 공화국,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몽골, 북베트남, 남예멘 이렇게 총 11개국이 있었으며, 비공산권 국가 중에서는 이라크, 시리아, 부룬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우간다, 기니 이렇게 총 6개국이 있었다. 당시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우간다의 대통령이 당대 아프리카 독재자 중 가장 악명이 높은 장 베델 보카사 이디 아민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투레의 폭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3] 정확히는 감옥에 갇힐 것이 두려워 이를 정원에 묻어 감추려고 했으나, 폭우 때문에 땅으로 밀려와서 걸린 거라고 한다. [14] 심지어는 그가 집권할 동안 무려 150만 명의 국민들이 해외로 도피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런 주장들은 기니의 독립 직후인 1959년의 기니 인구는 346만 명도 되지 않았으나 투레가 사망한 1984년에는 약 540만 명으로 오히려 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이 정도 비율의 인구 감소면 마시아스 응게마 적도 기니 폴 포트 캄보디아처럼 국가 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투레의 독재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 수만~수십만 단위에 이를 가능성은 매우 높다. [15] 실제로 2002년에 투레 시기에 처형당한 사람들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16] 그 중 33명은 피고들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궐석재판으로 선고한 거였고, 나머지 29명은 사형 선고 3일 뒤에 모조리 처형되었다. 1971년 1월 26일에 코니크리에서 58명이 공개처형을 당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바로 다음 날에 뉴욕 타임즈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 [17] 투레는 1975년 7월에 프랑스와 기니가 재수교하자 텔리를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도 점찍기도 했다. [18]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혐의'를 (고문을 통해) '자백'했다는 문서는 재판소에서 편집한 후에도 일관성이 없었을 정도로 조악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19] 이는 직역한 것으로, 의역하자면 투레가 제사를 치르는 날로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하다. [20] '쥐가 인간보다 더 나은 치료를 받았다'라고 증언한 사람도 있다. # [21] 사실 캠프 보이로 내에서 정확한 사망자 수는 불명인데, 이는 캠프 보이로와 관련된 모든 문서들이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2007년에 투레 시기의 고위 관리 보보 디엥(Bobo Dieng)은 이 수용소에서의 사망자가 117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22]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외교관은 이탈리아 외교 기관을 통해 기니 외교관과 소통했다고 한다. [23] 물론 기니 주민들은 지금도 반불 성향이 강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투레가 독립 직후 프랑스가 저지른 온갖 추악한 방해 공작들을 명분삼아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며 반정부 인사들을 탄압했기에 기니 국민들이 투레의 과격한 반불 행각에 납득을 하지 못하는 게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북한의 위협으로 인한 반공 의식과는 별개로 박정희, 전두환이 이를 명분으로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며 반독재 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것을 납득하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24] 다만 적어도 이는 투레만의 잘못이 아닌, 프랑스가 기니의 독립 과정에서 기니의 의료, 교육 인프라 대부분을 파괴한 것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5] IMF에 따르면 투레 정권 말기인 1984년 말리의 GDP는 23.3억 달러였고, UN 경제사회국(UN DESA)에 따르면 1985년 기니 인구는 492만 4천명이었다(IMF는 1984년 인구자료가 없으므로 대신 인용함). 두 데이터를 모두 신뢰하여 계산하면 1984년 말리의 1인당 GDP는 대략 473.2달러가 나오며 2023년 현재 가치로 1,350.2달러이다. 참고로 같은 기관에서 추산한 에티오피아 미얀마의 2023년 1인당 GDP가 각각 1,475달러, 1,180달러이다. [26] 물론 당시 기니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장수한 셈이다. [27] 후술할 쿠데타 후 교도소에 수감되고는 4개월 뒤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28] 이후 1992년에 다시 활동이 허용되었다. [29] 말이 임시 대통령이지 사실상 정규 대통령이라 봐도 무방하다. [30] 다만 기니의 평균 수명이 2020년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도 195개국 중 187위인 59.33세란 것을 감안하면 이것도 장수한 셈이긴 하다. [31] 다만 그의 집권 당시에는 국민들의 학교 취학률이 낮긴 했지만, 애초에 명색이 국가원수의 자식들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32]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호세 무히카(이쪽은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중고 폭스바겐 비틀을 애용했다) 정도가 전용 운전수 없이 본인의 차를 직접 운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투레가 시트로엥을 보유한 것은 사치가 아닌 국가원수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유지의 일환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비슷하게 투레 뺨칠 정도로 막강한 위력의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도 운전수를 넘어 전용 요리사와 별장까지 두긴 했으나 이는 일반적인 나라들의 국가원수들도 다 두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