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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0:16:48

전두환/다른 정치인 및 대통령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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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는 문서이다.

결론적으로 민주당계나 진보 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진영, 심지어 군사정권 관련자 내에서도 전두환에 적대적인 이들이 적지 않았다.

2. 대한민국 대통령

2.1. 박정희

파일:전두환대대장시절.jpg
박정희는 전두환이 반평생을 섬겼던 그의 상관이었다. 박정희가 소장이던 시절에 전두환은 대위에 불과했으니 계급 차이가 상당했었다. 나이 차이도 14살이니, 당연히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꼼짝 못했을 수밖에 없다.

5.16 직후 전두환은 대위(ROTC 교관)로 육사 생도들을 규합,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임으로써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두환에게 있어 박정희는 주군이자 은인인 셈이다.

소령 진급까지는 육사 11기생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빠른 선두주자는 전두환이 아닌 손영길[1]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총애 덕분에 소령은 짧은 기간 동안(1년 2개월)만 하고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2] 대령으로 진급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으나 현지에서 여러 대민 문제 행위, 허위 보고 등을 일삼아 훈장 수훈도 취소될 뻔하는 등 순탄치 않았으나 이후 제1공수특전단장으로 영전하며 입지를 다시 한번 다졌다. 하지만 얼마 뒤, 제1공수특전단이 준장을 여단장으로 하는 여단급으로 개편되며 대령 계급인 그의 위치가 문제가 되었다. 그가 아직 준장을 달기엔 너무 일렀던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인사에 개입하여 그를 여단장 직무대리라는 직책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을 계속 지휘할 수 있게 유지했고, 얼마 뒤 임기제 준장으로 진급시켜서 그는 정식으로 여단장이 되었다. 임기제 준장으로 있는 동안 나름 시간이 지나서 그는 정식 준장으로 장성이 되었고, 이 때 박정희는 일제 토요타 크라운을 하사하는 등 그에게 아낌없는 총애를 보여주었다. 정식 준장이 된 뒤에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제안으로 확대 개편된 대통령경호실의 작전차장보와 보안차장보를 겸임하였으며, 이 때부터 차지철과 함께 박정희의 곁을 보좌하며 공식 석상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다.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당시 장성급들도 못 건드리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이 3명의 중장들이 소장인 전두환의 부하로 활약했을 정도였다.[3] 중장이 소장의 부하로 활약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아래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정권 장악과정에서 박정희의 세 자녀를 유폐하고 박정희를 격하시키며 박정희 사후 그 가족과는 악연이 되었다. 이후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시대가 없는 전두환 시대도 없고, 반대로 자신의 시대가 있었기에 박정희 시대가 완성될 수 있었다며 박정희가 오히려 자신을 인정해 줬을 것이고 자신이 진정한 박정희의 후계자라는 말을 하는 등. 사적으로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평생 박정희를 존경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명백히 박정희의 후계자인 김종필을 탄압하고 박근혜 등 유족들의 추도식을 방해하고 감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2.2. 노태우

파일:전두환노태우.jpg
육사 11기 생도 시절의 전두환과 노태우
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 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갔던 것이다.
드라마 《 제5공화국》 마지막 회 中
교류가 잘 없어요. 요 옆에 사는데... 서로 나이도 들고 그러면 오히려 더 화해가 되고 이럴 텐데 별 접촉이 없어요. 접촉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중략) 참 이상해. 정치라는 게 참 더러운 거야. 권력이라는 게... 그 사람하고 나하고 대통령 되기 전에는 제일 친한 사람인데, 제일 친한 친구였었는데,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나를 제일 많이 헤쳤어. 서로 잘 아니까, 그 사람한테는 좀 섭섭한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잘 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이 그렇게 있잖아요?
2003년 SBS <뉴스추적> 인터뷰 中

노무현에게 문재인이 있다면 전두환에게는 노태우가 있다 할 정도로 일생의 전성기를 함께한 절친이었다. 말년에 노태우가 김영삼과의 합당을 추진하는 등 전두환과 거리를 심하게 두며 소원해졌으나 이후에 다소 화해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비슷한 나이, 비슷한 시기에 함께 세상을 떠났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6.25 전쟁 때 함께 학도병으로 참전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생사를 넘나들며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고, 이후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에도 상당히 가깝게 지냈고, 노태우와 김옥숙의 결혼 사회를 전두환이 봐주기도 했다. 함께 5.16 군사정변 지지시위를 하기도 하며 지근거리에서 활동했다. 가족끼리도 아내들, 자녀들끼리 교분이 깊었다. 서로 어렵던 시절 콩 한쪽도 나눠먹으며 양보하는 사이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쿠데타를 같이 일으킬때도 서로 협력하며 돕는 등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 후계자 싸움 과정에서 노태우의 설움이 쌓였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전두환이 상왕 정치[4]를 펴려는 모습도 보였다. 이에 노태우는 군정 종식, 민주화 선언 등으로 5공화국과 차별화된 움직임을 보이는 과정에서 전두환의 과오를 파헤쳤고,[5] 종내는 그를 백담사로 보내버리자 이때 "노태우 그 놈이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귀싸대기 맞는다"는 말을 했었다.[6] 하지만 1994년 6월 25일 육사 6.25 전쟁 기념식에서 만나 표면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1996년 재판 당시 같은 자리에 마주했을 때는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 주나? 하며 어느 정도 감정은 풀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1심 선고직후 두 사람이 수의를 입은 채 손을 굳게 맞잡는 매우 유명한 상황도 나왔다.[7] 두 사람은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의 사면 조치에 따라 같은 날 석방되었다.
파일:2004년 전적대통령 초청만찬.jpg
2004년 1월 13일, 두 사람이 함께 참석한 마지막 공식석상.

출소한 이후에는 공식 석상에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함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에 함께 참석했고,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과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식 때도 함께 참석해 옆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함께 공식 석상에 나온 건 2004년 1월 13일, 참여정부가 주최한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이 마지막이었다.[8] 이날 만남을 끝으로 두 사람은 10여년간 일절 교류를 나누지 않고 지냈으며, 2000년대 중반부터 노태우의 건강 상태가 나빠져 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는 모두 전두환 혼자만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아내들 및 자녀들끼리는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9]

그러던 2014년, 전두환이 사전 예고없이 혼자 노태우의 연희동 자택을 찾아가 문병하면서 극적으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때는 이미 노태우가 오랜 투병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민정기 전 비서관과 김옥숙의 도움으로 간단하게 대화했다고 한다.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겠는가?" 라고 물었고 노태우는 눈을 깜빡였다고 한다.

2021년 10월 26일 노태우가 사망하여 둘의 인연은 마감하게 되었다. 이순자의 말에 따르면 노태우의 부고를 들은 전두환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다만 다발성 골수종 투병으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 직접 조문을 가지 못했고 아내 이순자와 장남 전재국을 대신 보냈다. 그리고 4주 뒤, 전두환도 역시 세상을 떠나고 이번엔 노태우의 아내 김옥숙이 장례식장에 근조 화환을 보내는 것으로 둘 사이의 기나긴 관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3. 김영삼

파일:art_1488419868.jpg
김영삼은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킨 인물로, 김영삼은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전두환에게 모진 수난을 당했으며 가택 연금에 수시로 협박도 당할 정도였다. 당연히 전두환이 농담으로라도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추진한 전두환 사면공약에 따라 사면해주긴 했지만 전두환을 매우 경멸하며 대통령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퇴임 후 일본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이승만, 박정희는 꼬박꼬박 한국식 독음으로 불러주면서 전두환만은 일본식 독음으로 '젠또깡'이라고 칭할 정도. 해당 인터뷰 그러나 사석에서 1990년 전두환의 측근인 박근 전 UN대사를 불러 노태우가 아닌 나와 손잡고 6.29 선언을 했더라면 백담사에서 고초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으로부터 학살과 고초를 겪은 광주와 호남출신들이 그러한 김영삼의 군부화합을 용인해 줄것같진 않다. 87년 대선 당시 정승화 영입과 김대중과의 단일화 실패로 김영삼은 광주 전남 유세중 쫒겨나는 수모를 당했으며 결국 김영삼은 광주 전남지역에서 1%P도 득표하지 못하는 최악의 수모를 당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전직 대통령 초청 청와대 만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해 "경제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을 해서 나라가 절단났다" 비판했다. 이후 빡친 김영삼은 집으로 가버렸다. 이후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당시 역대 대통령 초청만찬에서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참석하여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만찬과 면담을 가졌으나 김영삼 대통령은 참석을 거절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였던 2010년에도 청와대에서 전직 대통령 연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김영삼이 이명박에게 대놓고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이다. 죽어도 국립묘지는 몬 간다."고 면전에서 반말로 삿대질을 했고[10], 뒤이어 만찬 시간에 전두환이 "와인(포도주) 더 없느냐"고 하며 와인을 찾자, 김영삼이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11] 하며 높은 언성으로 전두환을 호되게 혼내는 바람에 격노한 전두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집에 가버렸던 얘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다. 참조 기사 그리고 전두환을 사면해 준 것이 잘못이라고 후회하는 발언을 했다.

이토록 사이가 나빴던 두 사람이지만, 노태우가 투병으로 인해 칩거에 들어간 2000년대 중반부터는 꼭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기도 했다. 보통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순서대로 자리 배치를 해주는데, 가운데 사람이 못 나오니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 이러한 두 사람의 어색한 투샷은 2013년 박근혜의 취임식에서 마지막으로 포착되었다.

김영삼의 사망 후 전두환이 빈소에 가서 도의적인 조문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화해'를 하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침묵한 채 자리를 떴다. 그래도 조문을 와 주어서인지 전두환도 사망 후 손명순 여사 명의로 된 화환을 받았다.[12]

2.4.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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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당시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신군부와 전두환 정부에 대항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전두환은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을 비판하고 모욕했다. 전두환은 5.17 내란 이후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뒤집어 씌워 전격 체포했고, 군사법원에서 김대중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전두환은 하는 수 없이 사형 집행을 포기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지만, 1982년 김대중에게 굴욕적인 석방 편지를 쓰게 만들고 그를 미국으로 사실상 쫓아냈다. 3년 뒤인 1985년 김대중은 귀국을 결정했지만, 전두환은 김대중의 귀국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을 김포국제공항에 보냈고 결국 김대중은 귀국하자마자 동교동 자택으로 압송되어 가택연금 됐다. 이 때문에 DJ는 1987년 6.29 선언이 발표되기 전까지 가택연금 상태로 정치활동을 제약당했으며 일상생활 전체를 감시당해야 했다. 그리고 김영삼과의 결별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노태우와 김영삼에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 출범 이후 김대중은 1노 3김의 주축으로 5공 청문회를 주도, 전두환을 5.18 당시 발포명령을 내린 주동자로 지목하여 국회의 증언대에 세웠다. 이 자리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 발포에 대한 책임이 전두환에게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13]

김대중은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당시 신한국당을 중심으로 전노 사면을 주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자 대통령 후보 3명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을 내걸었고, 김대중은 당선되자 청와대에서 김영삼을 만나 두 사람의 사면복권을 논의했다. 이를 김영삼이 허가하면서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은 특별사면을 받아 출소하였다. 짧게 인터뷰를 하고 자택으로 돌아간 노태우와 달리, 전두환은 “여러분들은 교도소 가지 마시오!” 라며 농담을 하는 등 여유롭게 인터뷰를 했으며 과거에 본인이 사형선고까지 내렸던 김대중에 대해서는 “관록있고 믿음직한 사람” 이라고 호평을 하는 등 사면복권을 해준데에 노골적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과거에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사형 선고를 내리고, 그에 대해 막말까지 했던 걸 생각하면 평가를 180도 회전시킨 셈.[14]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전두환·노태우·최규하 전 대통령을 10여 차례 청와대에 초청해 국정에 대해서 의논하였으며, # 전두환도 이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말년까지 전두환을 맹비난했던 YS와 달리, DJ의 경우 전두환에게 직접적인 비판은 삼가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많이 갖춰주었기에 전두환은 훗날에도 김대중의 이런 대접을 고마워하는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전두환은 사면 복권된 이후 정치적인 발언을 삼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국민의 정부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평을 내려주었다. 새천년민주당 한광옥 대표가 자택을 찾아왔을 때 “햇볕정책에 대해 떠들려면 달빛정책이라도 하고 비판하라” 라고 멘트를 날렸고 전직 대통령 오찬에 갔을 때도 햇볕정책은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듯한 뉘양스가 남긴 말을 하기도 했다.[15]

그리고 임종 직전 김대중의 병문안을 가기도 했으며 이희호와 만담을 나누며 김대중 대통령이 계시는 동안 전직 대통령들이 너무 행복했다며 쾌유를 빌기도 했다. 또 사석에서 진심으로 김대중을 존경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김대중이 이희호 여사와 재혼하기 전 차용애 씨라는 사별한 아내가 있었는데, 차용애 씨가 바로 전두환의 먼 친인척 관계이므로 한때 먼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2.5. 노무현


국회의원 시절 5공 청문회 당시 청문회에서 전두환이 퇴장한 후 명패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나 2004년 대통령 임기 중 설에 유인태 정무수석을 보내서 세배를 한 것, 전두환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서 만찬을 대접하고, 해당 행사에 참석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등 과거의 악연은 잊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해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은 하지 않았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 좀 더 버티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라고 한탄하며 짧게 애도의 말을 전하면서 둘이 어느 정도 화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6. 이명박

이명박이 17대 대선 후보 시절에 정치 원로들 예방 차원에서 만난 것을 빼면 딱히 접점은 없지만, 훗날 전두환을 만찬에 초청해서 극진히 예우하는 등 그럭저럭 원만했던 관계로 보인다.

굳이 접점이라고 따지고 들어간다면 박정희 이상득인데 전두환은 박정희가 가장 아끼는 부하 중 하나였고, 이명박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현대건설 사장 자격으로 현장소장을 담당한 적이 있다.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은 육사 14기로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서울대로 갔는데, 육사 시절 동기가 이종구, 이춘구 같은 하나회였다. 이들과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가면서 정계입문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이 이상득이 민정계였기에 간접적인 접점은 있었다.

전두환 사망 당시 공교롭게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수감 중이라 조문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도 조화는 보냈다.

2.7. 박근혜

아버지 박정희 암살당하면서 박근혜가 청와대를 떠나게 되자, 전두환은 박근혜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6억을 건네주었다. 전두환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결혼도 안한 미혼녀, 기타 여성 비하발언을 하며 그닥 좋지는 않게 평가한 듯. # 박근혜 정부에서 전두환 추징금 환수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애초에 박근혜랑 전두환이 같은 보수 대통령이었다 하더라도 둘의 사이는 과거부터 정말 최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두환이 자신의 상관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박근혜도 사실상 탄압했기 때문. 또 이 과정에서 구 공화당계와 김종필을 축출하기도 했으니...

전여옥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가 전두환을 방문해 "박근혜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했더니, '꼭 그래야겠는가'라며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원래부터 박근혜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거나, 뭔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삼김 등 정계 원로들은 국정 농단의 예측 여부를 떠나서 최씨 일가의 존재는 알았다고 하며, 전두환의 최측근인 허화평이 10.26 사건 직후 조사 차원에서 최태민을 불러다가 조사한 일이 있다고 밝혔던 만큼[16] 최씨 일가와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이전에도 박근혜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정치경험이 많아서 머리는 상당히 좋은데[17] 인간관계가 폐쇄적이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2.8. 문재인

여단장 시절인 1976년, 문재인에게 특전병 최우수 표창을 직접 준 적이 있다. 집권 후에는 문재인이 전두환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대했고, 전두환은 이미 고령이라 딱히 대응하지 않은 채 그의 재임 막바지인 2021년 11월 사망했다. 문재인은 전두환의 장례에 조문하거나 조화를 보내지 않았고, 어떠한 국가 차원의 예우나 지원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고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렀던 노태우와는 대조적.

2.9. 윤석열

서울대학교 법대생 시절 윤석열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한 모의재판에서 판사 역할을 맡아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는데, 이 소식이 화제가 되어 결국 윤석열은 지명수배에 올랐고 강원도로 도주하였다.

이후 대선 후보 시절 전두환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으나, 이 무렵 전두환은 오늘내일하던 고령이었기에 이에 대해서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3. 정치인

3.1. 이회창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후보가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고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시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당시 이회창 후보는 추석 전 전두환 사면건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국민공감대 측면엔 소홀 시인 1997.10.11 한겨레

한나라당이 야당이 된 이후인 2002년 1월 8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방문해서 새해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가 나아져 다행이지만 정치가 잘 풀리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정치보복은 근절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회창 총재는 공감을 표시하면서 국민 대통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18]

파일:6876591.1.jpg

같은해인 2002년 11월 6일, 한나라당 이회창 당시 대통령후보(왼쪽)가 6일 오후 서울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친상때 이회창후보가 조문을 했던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19]

파일:20051025185406.892.0.jpg

2005년 10월 25일, 오후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전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 모친 김사순[20]의 빈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회창 전 총재를 위로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21]

3.2. 김종필

원래 전두환이 존경하는 군 선배였으나, 박정희는 임기 내내 김종필을 견제하며 그에게 군맥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해 큰 접점은 없었다. 12.12 직후 그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정국을 장악할 계획을 가졌으나 김종필이 유신헌법 체제를 비판하고 직선제와 민주주의를 외치자 박정희에 대한 패륜적 행위라고 간주했는지 5.17 직후 그를 감금해 재산을 빼앗고 정계은퇴를 시켰다. 이후 김종필은 전두환을 원망하며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6년 귀국직후 박정희의 추도식을 열었는데, 장세동을 시켜 끊임없이 방해하려다 김종필에게 일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전두환이 퇴임 뒤부터 공격당하자 5.18의 진상은 밝히되 그에 대한 사법처리는 반대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김종필에 대한 입장 뿐 아닌 자신이 탄압한 구 공화게계 인사들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이나 화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2006년 박정희의 27주기 추도식에서 김종필은 "전두환 장군은 그 어른의 슬하에서 자랐으면서 임기 내내 추도식도 방해하고 오늘도 참여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것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에 와서도 사죄해야한다. 그러나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며 분노어린 목소리로 비판하기도 했다. 2018년 김종필의 사망 직후 조문을 계획했으나 알츠하이머가 심해져 이미 2017년부터 두문불출하는 상황이라 조화만 보내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 1964년에 하나회를 만든 주역이다. [2] 전술한 것처럼 1962년 12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박정희가 차지철과 전두환을 불러 국회의원을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차지철은 의원직을 맡기로 하고 전두환은 군에 남기로 했다. 전두환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이었는데, "아직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답변을 했던 것.이 '의원 문답' 이후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빨리 진급하게 되었다. 1961년 11월에 소령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그로부터 불과 1년 2개월만인 1963년 1월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이 되었으니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기간이 무척이나 짧은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 중에는 고위 지휘관이 턱없이 부족해서 닥치는대로 진급시켜버리는 바람에 이보다 빠른 경우들이 많이 존재하긴 했다. 참고로 미국에서도 진급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했던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둘리틀 특공대 제임스 둘리틀이다. 둘리틀의 경우, 에서 준장까지 1년 조금 넘는 기간밖에 안 걸렸다. [3] 엄밀히 따지면 부하라기보단 계급이나 군 경력 면에서의 선배로서 전두환의 뒷배 내지는 후원자가 되어주었다는 해석이 올바르다. 실제로 하나회의 실권자이자 우두머리는 전두환이었으나 전두환은 이 선배들을 나름 깍듯이 대하고, 정권을 잡은 후 섭섭하지 않게 보답했다. [4]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다른 존재가 대통령의 통치 행위를 일일히 간섭하고 배후 조정하는 정치 [5] 시대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고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고 한다. 친구 사이라지만 2인자로 지내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트러블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6] 하지만 노태우의 입장에선 전두환이 군 주요 인사들을 자기 심복들로 깔아놓은 것도 모자라, 퇴임 이후에도 뭔가 이상한 기구를 만들어 대놓고 자신이 막후 실세가 되겠다는 식으로 나온 터라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낸 것은 배려를 한 것이다. 구속시킬 수도 있었던 일을 백담사로 보내서 조용해질 때까지 숨어 있게 했기 때문이다. [7] 좀 더 상세한 대화는 다음과 같다. "자네 구치소에서는 계란 후라이 주나?", "안 줘.", "우리도 안 주는데⋯"(...) [8] 당시 참석한 인원은 전노 2명과 김대중까지 3명이었다. 김영삼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다. [9] 사실 2007년에도 공식 석상이나 메스컴에 나오긴 했으나 이때는 이미 병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그래도 초기라서 그런지 지팡이를 짚으면서 홀로 걸을 수 있고, 어눌하지만 대화까지는 가능한 수준. [10] 사실 이 시점에 생존한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 전부였는데 노태우는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이 불가능했던 상황이라 초대할 사람이 이 둘뿐이었다.(...) [11] 과장이 아니라 두 말을 전부 반말로 했다. 사실 김영삼이 전두환보다 연상에 정치 경력도 훨씬 선배라 반말을 못할 건 없었다. [12] 사실 김영삼의 영결식 때에도 전두환이 조문을 와서 손명순 여사와 김현철의 손을 잡고 애 많이 썼다며 오랫동안 위로를 해주는 등, 본인들은 원수지간이었지만 김영삼 일가와 전두환 일가 두 가족간의 사이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사실 전두환의 아들들과 김영삼의 아들들이 동년배이기도 해서 무조건 적대적일 이유는 없긴 하다. 아버지들끼리는 견원지간이더라도 대통령의 자녀들은 갈등의 당사자도 아니고, 같은 입장에서의 동병상련 덕에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다. [13] 백담사에 은거중이던 전두환은 1989년의 마지막 날 국회에 출석해 증언을 했지만, 미리 작성해놓은 입장문만을 일방적으로 읽었을 뿐 질문은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두환이 입장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고성을 지르며 격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당시 퇴장하는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진 국회의원이 바로 훗날 16대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이다. [14] 그러나 전두환은 자신을 감옥에 보냈던 김영삼에 대한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앙금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15] 물론 이는 전두환이 진심으로 김대중의 정책을 지지해서 그런거라기 보단, 자신을 사면복권 시켜주고 이후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대한의 예우를 해주는 김대중에 대한 일종의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또 국민의 정부 당시 민정계 인사들이 많았던 자민련이 공동여당이었고 김대중에 의해 새천년민주당과 정부 내각으로 스카우트된 민정계 측근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 부분도 있다. 실제 전두환은 2004년 총선으로 민정계가 완전히 와해된 이후에는 특정 정부에 대해 국민의 정부만큼의 극찬성 멘트를 하지 않았다. [16]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었고 허화평은 그 비서실장이었기 때문에 허화평이 아는 걸 전두환이 몰랐을 리가 없다. [17] 비선실세가 시킨 대로 일처리만 하는 것조차도 머리가 나쁘면 불가능하다. 즉 아무리 무능해도 이런저런 내용을 암기하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수준의 지능은 갖췄다는 소리. [18] 이회창 총재, 전두환 전 대통령 방문 kbs 20020108 [19] 동아일보 2002 [20] 김사순은 1911년생으로 94세까지 살았기 때문에 이회창은 70세에 모친상을 당한 것이다. [21] 이회창 모친 빈소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2005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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