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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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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영세교 교주
최태민
崔太敏 | Choi Te-min
파일:최태민.png
본명 최도원 (崔道源)
출생 1918년 12월 8일[1]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 서동 34
(現 황해북도 사리원시 서리동)
사망 1994년 5월 1일[2] (향년 75세)
경력 前 경찰 공무원
前 군무원
前 종교인
민주공화당 서대문구 중앙위원장
학력 재령보통학교
부모 아버지 최윤성, 어머니 김윤옥
가족 배우자 임선이[3], 슬하 3남 6녀
4녀 최순득, 5녀 최순실, 6녀 최순천

1. 개요2. 상세3. 일생
3.1. 초년시절3.2. 사이비 교주 시절3.3. 박근혜와의 접촉3.4. 전두환 정부 이후 행보
4. 경력5. 가족 관계6. 비리
6.1. 인사 청탁6.2. 재산 관련6.3. 여자관계에 대한 다른 이야기
7. 사망
7.1. 사망에 대한 타살 의혹7.2. 무덤
8. 매체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사이비 종교 영세교의 교주.

공식적인 신상명세는 위 표와 같지만, 호적을 여러 번 세탁해서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다. 국가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초창기에 활동한 인물이라 가능했던 경우다.[4]

2. 상세

역사상 유일무이한 승려 목사 사이비 종교 교주인 인물이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후계자인 최순실이 지속적으로 박근혜 곁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것은 결국 2010년대 희대의 정치 스캔들로 커졌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통틀어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말이자 민족말살통치 시기인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순사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5][6] 해방 후에도 경찰로 근무하며 경위에 올랐다고 한다.

해방과 전쟁 이후에는 1970년대 들어 서울특별시 대전광역시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이다가 1975년부터 박근혜와의 인연으로 막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최고위원은 구국봉사단 시절 최태민이 박근혜를 총재에 앉히고 온갖 전횡을 저질렀다며 많은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각출하게 하고, 정부 행정기관의 지원 속에 세력을 확장해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것에 박근혜는 모든 의혹이 음해라고 반발했지만, 수사 결과 최태민은 2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처벌받았다고 언급했다. #

김태형 심리연구소장은 박 대통령에 대해 최태민-최순실 부녀에 의해 40년간 (정신적) 포로 상태였다고 말했다. # 그의 딸 최순실 박근혜를 조종하며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 2022년에 최순실 자신이 JTBC 및 당시 담당 기자를 상대로 거짓 보도라고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

사이비 종교인이자 권력자의 가족의 환심을 사고 붙어서 부당하게 이익을 챙기고 국가에 해악을 끼치고, 2대에 걸쳐 국정을 농단한 행보 등으로 인해 한국의 그리고리 라스푸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름을 총 7번 개명했으며, 성범죄 전과 12건을 포함해 총 전과 56범이다.

3. 일생

3.1. 초년시절

주민등록에 따르면 1918년[7] 황해북도 봉산군 사리원읍 서동에서 아버지 최윤성 어머니 김윤옥()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본관은 수성 최씨.[8]

최태민의 아버지 최윤성(, 1892-1945)은 독립유공자다. 최윤성은 1919년 3.1 운동 기미독립선언서 1천여 장을 인쇄해 배부한 뒤 피신했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8월을 선고받고 1년여 정도 감옥에서 지냈다.

그는 1990년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최태민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최태민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순사로 근무한 식민부역자이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음을 생각하면, 당연히 호부견자. 최윤성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한 사람이 바로 최태민이다. 상식적으로 독립운동하던 사람의 아들이 일본 제국 경찰 순사로 채용되었다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에, 최윤성이 이후 변절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재심사를 요청하는 주장도 있다. 월간조선 기자수첩 일단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은 최윤성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기 위해 일제가 학력이 부족한 최태민을 일부러 순사로 임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태민이 최씨 호적에 올라 있지 않으며, 나이도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최윤성의 아들인가부터 불분명하다. 나이야 그 당시 사람들은 안 맞는 경우가 제법 많으니 그렇다 쳐도, 호적이 파인 건지 족보를 위조한 건지도 알 수 없다.[9] 그리고 최태민이 워낙 사기꾼이었던지라 최태민이 순사로 일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처음 이름은 최도원()이었다고 하며, 1927년 황해도 재령군의 재령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1977년 중앙정보부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 개명한 것은 광복 직후였다고 한다. 광복 전에 일제에 부역하던 순사였기 때문에 과거를 숨기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광복 직후 이름을 최상훈()으로 개명하고, 강원도에서 경찰 생활을 했다.

이후, 대전시 인천시 등으로 옮기기도 하다가 1949년부터 대한민국 육군 헌병대 비공식 문관(군무원)으로 들어갔다고 조사되었다. 이후 해병대 비공식 문관(군무원)으로 근무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전쟁 중이었던 1951년 3월, 갑자기 문관(군무원)을 그만두고 이름을 최봉수()로 바꾸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1951년 3월이면 1.4 후퇴 이후 국군이 다시 반격하여 서울 재탈환을 하던 무렵으로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인데, 어떻게 문관(군무원)을 그만둘 수 있었는지 여러모로 알 수가 없는 인물이다. 여담으로 박정희도 군인이다가 잠시 군무원으로 복무했는데, 6.25가 터지자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복귀해서 싸웠다.

이후 최태민은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10] 1969년에는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기도 했다.[11]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아내와 다툼이 심해 도망치듯 경상도의 어느 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름도 최퇴운(崔退雲), 공해남(孔亥南), 최방민(崔房敏), 최태민 등 알려진 것만 7개로 다양하게 바꾸며 살았다. 이 정도로 이름을 자주 바꿈은 굉장히 드문 경우. 범죄전문가들은 '개명이 잦은 사람들은 신분을 계속 세탁해야 하는 간첩이거나, 사기꾼, 연쇄살인마, 테러리스트 등 죄질이 무거운 중범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단 법적으로 바꾸기는 박근혜를 만난 뒤의 최태민으로 바꾼 개명 한 번 뿐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다 가명이었다고. 단, 황해도에서 강원도로 온 뒤 공무원인 경찰과 군무원 생활 등을 했는데, 그때 이름 최상훈이 가명이었다면 그 이름을 공무원으로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본명이 2개였던 것이 아니라 이름은 3개고 개명을 2번 했다.'는 주장도 있다.

본명이 몇 개인가가 논란이 됨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 정도로 행적이 불분명한 인물. 물론 이 시기가 6.25 전쟁 이후로 대한민국의 행정체계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행정체계가 전산화된 것이 아니라 종이 문서로 처리가 되었기에, 전쟁으로 서류 분실이 생기면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참고로 1977년 중앙정보부 조사 보고서[12][13]에 따르면, 1958년 2월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에 비당원 공천을 신청한 것을 계기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당시 기사[14]

5년 후인 1963년 5월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 서대문구 중앙위원장[15]이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3.2. 사이비 교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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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 최태민은 서울특별시 경기도 일대나 대전시[16] 충청남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17]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다. 그는 이를 '영혼합일법'[18]이라 칭하며, 영세계[19]의 교리라고 주장했다.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 태자 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고 스스로를 ' 단군', ' 미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영세교[20] 제1대 교주라는 카더라도 있다.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큰무당 원자경으로 무당들 사이에 유명했었다고 한다. 기사 그 당시 최태민은 1973년 7월에서 대전시 선화 1동 동사무소 앞으로 숙소를 옮기고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색색의 둥근 원을 벽에 붙여 놓고 "나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외우며 그 원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도록 했다. 일종의 최면술에 가까웠다고 한다.

얼핏 보면 대단한 사이비 종교 교주쯤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후세에 그에 대해 조사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1975년 이전까지 큰 사이비 종교 조직이었던 적은 전혀 없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구성원 10명에서 30명 사이로 유지되는 소형 집단이었다고 알려진다.

박근혜를 만나기 몇 개월 전까지도 동대문구 제기동이나 서대문구 북아현동[21] 등 당시 별로 서울 중심지가 아닌 곳을 이리저리 떠돌아 전세를 살며 계속 저런 걸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신자들 뜯어먹고 한탕한 부자 교주이기는커녕 잘 사는 편이 아니었다.[22]

당시에도 저거보다 훨씬 큰 집단의 사이비 교주들이 꽤 있었고[23], 현대에는 그것보다 더 큰 집단들이 있을 정도라[24] 그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 걔네들이 같은 류로도 안 쳐줬을 법 하다.

3.3. 박근혜와의 접촉

최태민이 박정희 생전에 국정농단을 했다는 전두환의 증언 박정희 정권 차원에서 홍보한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날 영부인 육영수 1년 1주일 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에 격분하여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한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25][26] 완전히 멘붕 상태였던 박근혜에게 1975년 2월경 위로하는 편지를 3차례 보내 박근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에 의하면 편지는 죽은 육영수가 최태민의 꿈에 나타나 '딸은 한국의 지도자, 더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것이며 자신은 그러기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 '내 딸 근혜가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니 가서 그녀를 도우라'[27] '내( 육영수)가 보고싶거든 언제든지 최태민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28] 이후 편지를 본 박근혜가 최태민을 직접 만나기로 결정하게 되고, 실제로 1975년 3월에 직접 만나게 된다.[29] ' 육영수 여사를 꿈에서 만났다.'며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설은, 전여옥 전 의원이 "박근혜에게 직접 들은 사실"이라며 최근 저서에서 밝힌 바 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이 당시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의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상태였는데, 어머니의 영혼에 빙의되었다며 어머니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하는 최태민에게 심리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고도 한다.[30]

다만 박근혜의 여동생 박근령 측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말했다. 2016년 11월 1일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이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한 말에 의하면, 최태민은 육영수의 사망 이전부터 이미 박근혜에게 여러 번 접근했고 육영수는 그에 관하여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박근령 "육 여사, 생전에 '최태민 조심하라' 경고" 이 말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인 최태민과 박근혜, 두 사람의 만남의 과정과 두 사람의 관계부터가 불확실하다는 이야기다.[31]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의 취재결과, 최태민이 육영수 저격 사건 이전에 청와대에 들락거렸으며, 그 이유는 육영수가 최태민의 최면술에 흥미를 갖고 불러들였기 때문이라는 증거를 11월 26일 방송에서 밝혔다.

또한 새로운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최태민은 육영수 박근혜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가 최태민의 현몽설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비밀을 최태민이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현재 개신교에서는 최태민이 목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노컷뉴스 단독보도로 최태민이 이전에 떠돌던 말처럼 돈 주고 목사 안수를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이하 예장종합총회)로부터 안수를 받은 것. 나중엔 주술사스러운 행동 탓에 교단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 #2

그 후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하였다.

1975년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되었다.[32][33][34]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여기서 최태민은 목사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그 후 최태민은 새마음운동본부의 비공식 고문으로서 박근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새마음운동본부의 모든 업무를 관장했다. 새마음운동본부를 기반으로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다음 문단에서 서술하는 최태민에 대한 1977년 중앙정보부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한 봉사단 관계자는 새마음운동본부를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심지어 박근혜의 이름을 앞세워 구국십자군 이름으로 국민 1인당 1,000원씩을 걷어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각계에서 불만과 제보가 속출하자 대통령비서실에서 나섰다. 1977년 봄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35]이 산하기관을 동원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최태민의 비리 보고서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라갔는데, 정말 이상한 것은 박정희의 반응이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이다.[36]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자, 이번에는 실세 중의 실세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나서 최태민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김재규의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박승규 민정수석이 자신( 김재규)한테 와서 "제발 최태민을 정리해 달라"고 하소연해서 조사에 착수했으며, 최태민의 비리행적을 조사해서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중정이 그런 것도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민정수석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9월 12일 직접 최태민을 불러서 심문을 했다. 이른바 ‘친국’(親鞠:임금이 직접 중죄를 지은 자에게 일일이 따져 묻는 일).[37] 청와대에서 극비리에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조사 실무를 담당했던 백광현[38]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 김재규가 최태민을 모함하는 것이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39]

파일:bak503.jpg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보고를 받고도 최태민을 벌하고 박근혜를 구국봉사단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박근혜를 총재, 최태민을 명예총재에 임명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이후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한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최태민은 무고하며, 나 역시 결백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40][41]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은 ' 김재규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영애( 박근혜)가 엮인 문제를 아버지( 박정희) 앞에 사실대로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친국 자체가 부실했다는 증언을 방송했다.

지금껏 대통령 박정희를 포함해 청와대 안에서 발언권이 강한 영부인 육영수, 감찰권한을 가지고 있는 민정수석실을 포함한 비서동, 실세로 알려진 김재규를 위시한 중정인사들을 비롯해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모든 이들이 최태민을 싫어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42] 최태민이 어떻게 잘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소위 친국을 통해 최태민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43]

한편 정권의 실세였던 김재규가 바로 1977년 최태민 친국 때부터 박정희한테 불만(혹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시 박정희의 친국이 실제로는 최태민과 김재규의 대질심문처럼 진행되었는데, 김재규 입장에선 자신은 평생 박정희에게 충성했고 정권을 떠받드는 천하의 중앙정보부장인데 자신이 올린 자료를 믿지 않고 근본도 알 수 없는 웬 잡놈과 동등하게 취급한다고 받아들여서 엄청난 굴욕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박정희가 '최태민은 무고하다'는 박근혜의 호소에 넘어가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미 박정희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정상적으로 국가를 통치할 만한 판단력을 상실한 것으로 봤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 김재규 스스로도, 박정희가 최태민을 제어하지 않고 놔둔 것을 10.26 사건의 간접적이지만 주요한 원인으로 꼽기도 했을 정도다.

박정희 정부 말기 실세 중의 실세였던 이는 경호실장 차지철이었는데, 차지철은 최태민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이며 이 때문에 김재규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비서실장 김계원의 증언도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이 당시 청와대의 권력암투 구도가 비슷하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차지철이 실세가 된 것도 최태민과 가까웠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는 이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차지철이라는 인물이 국정보다는 박정희라는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깊다고 알려진 인물이라 그 충성 때문에 실세가 된 것이고, 실세에 오른 것과는 별개로 박근혜가 지나치게 최태민을 싸고 돌며 울기 까지 하니 영애에 대한 삐뚤어진 충성심으로 최태민과 가까이했다는 설과, 차지철 본인이 최태민에게서 따로 이권을 받거나 최태민을 이용하기도 한 것 아니냐는 설도 있다. 현재까지는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박정희는 이 모든 것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태민의 전횡을 참지 못한 김재규 박정희 살해의 동기에 자신이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그를 비호하는 바람에 박정희에게 오히려 대질심문을 당한 것도 있다고 하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의 집회는 청와대에서 열렸다. 약 200명의 재벌들과 함께 집회를 열었는데, 김재규와 중앙정보부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출입을 눈감아 줬던 부서가 바로 경호실이었고, 경호실의 실장은 바로 그 차지철이다.[44] 참고로 당시 구국봉사단 등 박근혜-최태민이 운영한 단체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잘 드러내는 증언이 있다. 당시 정치자금을 관리하던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박근혜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와서 '모 건설회사의 현안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해서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이 기업이 최태민이 운영하는 구국봉사단에 거액의 기부를 했다는 것이다.[45] 그래서 김정렴 비서실장이 직접 박정희 대통령한테 "근혜 영애의 활동 자금은 제가 마련해서 드릴 테니, 돈이나 이권에는 절대 개입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건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근혜-최태민-구국봉사단이 어떤 식으로 운영됐는지 알게 해주는 증언이다.[46]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979년 10.26 사건 때도 박근혜의 옆을 계속 지켰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는 전두환이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받았다. 그 결과 최태민은 산골 지역에 있는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제21보병사단 군부대에서 6개월 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연금이 해제되자 다시 박근혜 곁으로 돌아온 최태민은 이 일을 박근혜에게 그대로 일러바쳤고, 박근혜는 이 일로 전두환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찮게도 박근혜 정부 초창기 큰 이슈 중 하나가 전두환 추징금 환수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실세’로 꼽힌 허화평 전 의원은 “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 뒤에서 여러 가지를 했다면 최순실의 원수는 전두환”이라고 말했다. 최순실이 아버지 최태민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두환에게 보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 [47]

3.3.1.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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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션

박근혜와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냐 하면, (위에 쓰여져 있듯) 박정희가 살아 있었던 시절, 중앙정보부, 대한민국 검찰청, 경찰청 박정희 정권의 사정 기관들이 '이런 사기꾼이 영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최태민을 잡아들여서 족치고 박정희에게 이 인물을 '처리'해야 한다고 건의할 때마다 박근혜 본인이 직접 나서서 이 사람을 비호하고 지켜줬다.

최태민이 직접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근화봉사단에 맡아달라는 것이다. #

1990년 8월엔 친동생들이 직접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에게 편지를 써서 최태민을 족쳐줄 것을 요구했었다.[48] 노태우가 경찰청장 등을 시켜 최태민을 조사하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는 먼 훗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 사람을 마치 인생의 가장 큰 은인인 것처럼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낸 바 있었다. 박근혜는 늘 "가장 어려울 때 곁에서 여러가지로 도와주신 분"이라는 말을 반복해왔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도왔는가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해명을 한 적이 없다. 다만 박정희가 피격된 후 아버지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인사도 하지 않고 피해다니는 광경을 보며 배신에 대한 큰 정신적 트라우마를 앓아왔다는 사실만 재확인될 뿐이다.

박근혜와 최태민 사이에 사생아가 있다는 의혹도 여러 차례 제기된 바가 있다.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가 박근혜가 정계에 입문한다고 하자 "최태민의 자식까지 있는 애가 무슨 정치를 한다는 거야!?"라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는 루머까지 흘러나왔었다.[49] 박근혜는 '원한다면 DNA 검사라도 받겠다'며 이러한 의혹을 일절 부정하였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최태민이 생전부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는 탐사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현몽설부터 시작해 박근혜의 인생, 발언과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지라 종교나 세뇌 관련 이야기가 무성하다. 고발뉴스, “박근혜-최태민 아지트에 금은보화 가득”

1990년에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랑 똑같은 방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업고 대기업을 압박해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됐다. #

팬티까지 사주는 관계였다는 증언도 나왔다. #

이 의혹에 대해 외손녀 정유라 측은 2023년 3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해당 추문에 대한 인터넷 게시글 제보를 받는다고 했고, 친족 자격으로 사자명예훼손죄에 대한 고소 권한이 있다며 법적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정유라 측 입장문, 조선일보 기사)

3.4. 전두환 정부 이후 행보

전두환 정부 박근혜에게 "최태민이 문제가 많으니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국가를 위한 일인데 꼭 해체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래도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30일에 자진 해산하였다. 물론 전두환의 압력이 있을수도 있지만 이사 9명이 모여서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해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새마음봉사단이 해산된 이후 새마음봉사단 소유 토지, 건물, 자동차 등은 사회복지법인 경로마을에 기증되었다. 그런데 경로마을 이사장은 박근혜였다. 1979년 11월 17일에 작성된 재산수증증명서에는 기증인은 '새마음봉사단 총재 박근혜', 수증인은 '사회복지법인 경로마을 이사장 박근혜'로 적혀있다. #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최태민을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50]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이학봉, < 신동아> 2007년 6월호

그 후 1982년 박근혜 육영재단 영남대학교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가자 최태민은 슬그머니 거기에 동참했다. 1984년에 최태민은 해동검도의 창시자 나한일과 그의 친구인 김정호가 하는 무술에 해동검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책 출판을 도와주었다. #[51] 그러다가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녀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 파업과 직원들 농성도, 모두 ‘외부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 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분란은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가 여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박근혜는 물러나면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 칩거하다가, 1994년 5월에 노환으로 숨졌다. 이때가 향년 81세다. 그런데 사망시점에 대한 의혹이 존재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에 의하면, 최태민은 1994년 1월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5월에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는지 의문이라고. [단독] 박근혜 대통령, 최태민·최순실 주술에 홀렸다 2016.11.11일자 MBN '아주 궁금한 이야기'를 통해 "최태민의 가족들이 부활의식을 하느라 사망을 제 때 발표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취재내용까지 나왔다. 그런데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이 타살설의 주장을 제기했다. [단독] 최태민 아들 “내 아버지는 타살됐다”

4. 경력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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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1205호, ‘마침내 실마리 드러난 최태민 가계도의 미스터리’ 기사 참조

1954년엔 김 아무개와 6번째 결혼을 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하는 등 여자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그 후 최태민은 5번째 부인 임씨와 재결합 하였다.

그 결과 부인 5명으로부터 자식을 3남 6녀나 두었다.
박근혜와의 인연이 5녀 최순실[54]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은 자매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정윤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초선의원이었을 때 첫 비서실장을 지냈던 사람이며,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의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이다.

최순실은 이때 잠깐 이름이 언급되었다가, 미르재단 & K스포츠재단 사건의 흑막으로 지목되면서 우리나라 뉴스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CBS 시사자키 '최태민 패밀리와 박근혜 대통령, 그 40년의 역사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최태민 특집 1편, 이 박사와 이 작가의 이이제이 최태민 특집 2편

6. 비리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70년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중앙정보부, 내무부 치안본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등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여러차례 조사를 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6.1. 인사 청탁

1975년 9월 15일 2군 이모 대령의 부인 김OO에게 "국방부 장관에게 청탁하여 이OO을 준장으로 진급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 원 수수. 1976년 6월 4일 H사 사장 김OO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 서울시 비상유류 저장탱크 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5,000만 원 수수. 1976년 10월 초순 한국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이OO에게 내무부 차관에게 청탁하여 "소방기구 신규제조 허가를 억제해주고 동 기구검정권을 동 조합에 주도록 해준다."는 조건으로 200만원 수수.

1976년 8월 전 중앙정보부 강원지부장 김OO의 부인 박OO에게 "남편을 중정에 복직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차에 걸쳐 150만 원 수수. 1976년 9월 초순 S관광 대표 진OO에게 "대덕-연기 지역구 차기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게 해준다."고 하고 1976년 9월 17일 ~ 12월 10일 5회에 걸쳐 500만 원 수수

1977년 3월 24일 H사 K회장에게 "구국봉사단 부산지단장에 임명해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 원 수수. 1975년 9월 27일 H사 사장 K회장에게 "대한화재보험협회에 청탁하여 동 협회 청사 신축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7,000만 원 수수

6.2. 재산 관련

최태민은 각종 비리 의혹과 함께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내세워 재산을 부정 축적하였고, 이를 자녀들에게 상속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최태민의 5녀 최순실- 정윤회 부부는 강남의 200억 원 빌딩의 소유주이고, 6녀 부부는 150억 원 규모의 부동산 소유주다. 최태민과 박근혜 사이에 숨겨둔 아이가 있다는 의혹이 있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이 의혹을 제기한 백은종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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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 일가는 노태우 정부에서 1989년 사정(司正) 당국이 집중 조사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당시 이미 강남 등지에 백억대 부동산 보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태민 일가 재산 보고서

이미 80년대부터 부를 축적했으며, 조순제의 육성녹음이 맞다는 것이다. #

육영재단도 역시 재단 직원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업무를 지시하고 채용 면접에도 참석하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

6.3. 여자관계에 대한 다른 이야기

미주한인신문 선데이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1979년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관련 보고서에 그의 난잡한 여성편력에 관한 구체적인 수사기록이 나온다. 관련 기사 @ 기사에 나온 내용을 보면 성기불발기로 실패했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한마디로 발기가 될때도 있었고 안될때도 있었다.

자진해서 한 경우는 전 00병원 경리담당(24), 전 총재 비서(27), 전 부단장(31), 사무총장(35, 유부녀), 전 00병원 간호과장(40), 전 여군국장(41), 전 부총재(45) 7명이었다.

항간에 최태민과 박근혜의 '통정설'이 회자되고 있다. 김종필이 박근혜를 보고 "최태민의 애를 낳은 여자"라고 했다는 인터뷰 기록도 있었다. 그러나 2016년 11월 시사저널의 인터뷰에서 김종필 총재는 자신의 종전 발언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하면서 "당시 최태민은 나이가 많아 박 대통령을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라며 부인하였다.

신동아 16년 12월호에서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의 특별보좌관 박병률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는 중정 최태민 보고서에서 나오는 12건의 여성 추문에서 나오는 여성들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한다. 이중에서 1건만 사실에 부합하다고 했다. 바로 구국봉사단 간부 김모 씨로 오랫동안 내연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김씨는 젊은 나이에 이혼한 상태로 외모가 빼어났으며, 최 총재 가까이에서 일하면서 그가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을 차단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와 최태민의 '통정설'도 근거가 없다고 한다.

7. 사망

7.1. 사망에 대한 타살 의혹


최태민은 대외적으로는 1994년 5월 1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있다. 정리를 하면 '말년에 변심한 최태민이[55] 최씨 일가가 관리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차명재산을 박근혜에게 재단의 형태로 다시 돌려주려 하자 자식들이 반발하여 자식들이 최태민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최태민의 친아들이자 최순실 일가와 이복형제 최재석은 '아버지의 죽음은 타살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최태민은 죽기 수개월 전부터 "그분( 박근혜)에게 재산을 돌려드려야겠다. 그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접어야겠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최재석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최태민 본가 내실에는 1994년 당시 기준으로 약 1조원 정도의 동산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최태민이 돈을 돌려주겠다고 한 몇 개월 후에 최태민은 석연치 않게 죽는다. 재산에 욕심이 많던 최순실 일가에 의해 최태민이 살해당한 것 아니냐는 게 그의 주장. 최태민은 당시 건강을 위해 비타민 정맥 주사를 맞았는데, 이 주사제에 몰래 약물을 넣어 살해한 것 아니냐고 최재석은 의심했다. 실제로 최태민이 죽은 후 그 재산은 그의 재산은 최순실 일가에게만 분배되었고, 이복형제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최태민이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말한 박근혜에게도 물론이다.

타살의 이유가 상당히 그럴듯하며, 최태민 사망당시 재산 분배와 관련된 주변인물에게는 사망 통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태민의 배다른 형제 및 친아들 최재석과 심지어 최태민이 돈을 돌려줘야 겠다고 말한 대상인 박근혜도 죽음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한다. 최태민은 최재석에게 평소에 "이건 내 돈이 아냐. 이걸 내가 널 줄 수는 없어. 그리고 주면 나중에 사달이 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태민이 "돈을 돌려줘야겠다." 하자 최순실 일가가 화들짝 놀라 당시 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을 편취할 목적으로 최태민을 몰래 살해하고, 최태민의 죽음을 숨기고 최순실 일가가 재산 분배를 독단적으로 비밀리에 추진했다고 의심되는 정황. 최재석에 의하면, 최태민의 진짜 사망일은 5.1이 아니라 4.18이고, 최재석이 한국에 왔을 때 최태민은 이미 암매장이 끝난 상태였다고 한다. 박근혜도 최태민이 죽음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최재석과 박근혜가 최태민의 사망을 알았을 때, 최태민 금고의 돈은 이미 사라진 후며 이미 재산분할은 끝나, 친아들인 최재석에게는 한 푼의 상속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브란스 병원의 의료 기록에도 최태민의 건강 상태가 죽음을 앞둘 정도로 오늘 내일 한다는 기록도 없었고,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집에서 죽었기 때문에 제3의 목격자나 사망 당시의 진료 기록도 없고, 만성신부전증 때문에 의료진도 예측 못할 정도로 급사함도 희귀한 사례라 하므로, 최재석의 주장대로 사인이 상당히 의심스럽다.

7.2.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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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 언론들이 취재경쟁을 시작하자 최태민의 무덤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유방동 산 81-3번지에서 발견되었다. #( @) 구글어스 좌표는 37°15’48.43” N 127°11’17.62” E이다. 카카오맵 스카이뷰

그런데 처인구는 이 무덤은 묘지 조성 신고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하여 행정절차를 진행할 방침이다. 먼저 최태민 무덤의 위반사항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묘지 조성 미신고)와 산지관리법(산지 묘지 전용 미허가) 위반이다. 최씨 가족의 주소지로 공문을 보냈으나 아무도 수령하지 않아 1년 내내 지지부진되었다가 최순실이 수령함에 따라 행정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행되지 않자 이행강제금 500만원을 부과하고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최순실 측은 이행강제금은 부당하다며 처분취소 소송을 제기, 승소했다. 이에 처인구는 최태민 자녀에게 해당 묘지 문제를 해결할 것을 추구하는 행정명령을 내렸고 자녀가 묘지를 이장하겠다고 밝혔으며, 현재 이장되었다. #

8. 매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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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태민의 묘비에 따르면 1918년 음력 11월 5일(양력 12월 8일)생이다. [2] 1994년 4월 16일 타살됐다는 의혹이 있다. [3] 최태민은 총 6번의 결혼을 하였고, 그 중 임선이는 5번째 부인이다. [4] 당장 친일 고문경찰 하판락이 저런 혼란스러운 시대의 덕을 보며 신분을 세탁할 수 있었다. [5] 그런데 최태민의 아들 최재순에 따르면 할아버지 최윤성은 독립운동가였다고 한다. 실제로 본인은 할아버지 덕분에 독립유공자 혜택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데 아들은 식민부역자인 웃픈 상황이었던 것. [6]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는데, 사실 친일인명사전에는 순사와 면서기 같은 말단 부역자들은 등재하지 않았다. [7] 채널 A 보도내용에 따르면 주민등록에는 1912년 5월 5일생이라고 하지만, 묘비에는 1918년생이라고 써 있다. 채널 A 보도영상 중 2분 55초에 비석 옆면이 나오는데, 한자로 '1918년 음 11월 5일'이라고 조각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8일이다. [8] 경기도 수원시의 옛 지명이다. 그러나 수성 최씨 종친회에서 "최태민은 우리 혈족이 아니다"라며 정면 반박에 나섰다. # [9]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이 됐는지 최태민의 아들 최재성은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혜택을 받는다고 한다. [10] 이 때 승려 시절에 경상도에 위치한 어느 사립학교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2016년 11월 26일에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채현국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 학교의 초대 교장이 자신이 직접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웠는데, 학교 건립에 너무 많은 자금을 투입해 교사들의 월급도 주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당시 승려였던 최태민이 나타나 '내가 교사들의 월급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초대 교장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며 최태민에게 아예 교장 자리까지 맡으라고 권했지만, 정작 그 학교에 최태민에게 구미가 당길 만한 이권이 없었는지 도로 잠적했다고 한다. [11] 천주교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받았다고 한다. 일부 신문보도에는 '공해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류. 가톨릭에 이런 세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태민이 공해남이란 속명을 사용하며 성당 예비신자 교리 과정에 등록해서 세례성사를 받았을 텐데, 언론에서 착각했다. 성당 세례대장에는 공해남+세례명의 형태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12] 수사가 아니다!!! 정보기관은 원칙적으로 경찰이 아니라서 수사 권한은 없고 정보 수집/배포 권한만 있다. 국내 치안정보 수집/배포/분석 차원에서 조사한 것이며, 이 보고서는 당시 치안본부인 현 대한민국 경찰청의 수사국 특수수사과, 당시 형사국 특별수사대[56]으로 이첩된다. [13] 이전에 중앙정보부가 수사권이 있었다고 하는데 후신인 안기부나 현재 국정원처럼 대공 사건에만 있었고 사정당국은 아닌지라 국내 파트에서 정보 수집 정도에만 그쳤다. 만일 중정이 직접수사권을 대공사건 외 분야까지 갖고 있었다면 굳이 사직동팀을 경찰에 두진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학원 관련 수사는 국가보안법 상 간첩죄 누명을 씌워서 가능했고 그나마 민주정부인 1993년 이후부터는 사라졌다. [14] 기사 맨 마지막에 언급되어 있다. [15] 요즘 기준이면, 서대문구 국회의원 후보가 확실한 자리다. '대체 어떻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마 1958년의 공천 신청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6] 대전광역시. 1989년 대덕군과 통합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7]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일부 언론에서는 ' 천주교'라고 보도가 나갔는데 위 신문광고에서 보듯이 '천도교'가 맞다. [18] 말은 교리인데, 최면술을 통해 영혼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라고 한다. 최태민의 조카 최용석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최태민이 최면술에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실 최태민을 종교 자체보다 최면술을 깊게 연구한 사람이라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최용석이 삼촌 최태민과 오랜 기간 같이 살거나 할 만큼 친한 가족이었던 것은 아니고 최용석의 어머니, 즉 최태민의 형수가 최태민에게 최면을 체험하고 나서 몸이 안 움직였다가 다시 움직였다가 하는 걸 겪었다는데 아들에게 그 경험을 얘기하며 '니네 삼촌 능력이 엄청나더라'라고 말한 것을 인터뷰한 것이라 실제 본인 체험담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관계 인물의 증언 측면으로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19] 영혼할 때 그 영이다. 영혼세계를 의미 [20] 영생교는 잘못 알려진 이름이다. 이 종교 교주는 살인특공대로 유명한 조희성으로 2004년 살인교사 혐의로 수감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물론 박태선계 계보라는 공통점이 있단 설도 있는데 워낙 최태민의 과거 행적이 불투명해서 조희성과 연계가 있을 수도 있다. [21] 당시 이 지역인 굴레방 다리에서 영세계를 포교하는 사이비 교주를 했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서울에서 가난한 축에 속하는 동네. [22] 그렇다고 안 뜯어먹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뜯어먹었는데, 신자들 수가 적고 가난해서 뜯어낼 것이 별로 없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23] 대표적으로 천부교 즉 전도관이 있다. 천부교가 지금은 몰락했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꽤 활발했었다. [24] 대표적으로 신천지. 이들의 능력은 뭐… [25] 육영수가 정말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죽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냥 떠도는 음모론이 아니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주제로 다룬 적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6] 박근혜의 여동생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에 발언에 따르면, 박근령이 주장하기로 편지나 육영수 사망보다 전인 1974년 3월 이전에 최태민과 박근혜와 교류가 있었을 거라고 한다. 육영수조차 사이비 느낌나는 최태민을 경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팩트 부분 이해에 대해서는 주의할 것이 있는데, 물론 박근혜와 직접 관계 있는 인물인 박근령과 그 남편의 주장이라 신뢰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증거자료가 밝혀진 것은 없다. 증언 자체도 박근령은 저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었다는 것이지 직접 봤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 신뢰도가 있는 발언은 아니다. 박근령은 최태민을 처음으로 직접 얼굴 보고 만난 시점이 박정희 사망 후 전두환 정부까지 다 들어선 1981년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니 박근령의 입장에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1970년대 친분관계 시작에 대해서는 당시 어머니 육영수나 언니 박근혜 정도에게 전해 들은 내용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7] 일각에서는 '별 볼일 없던 일개 사이비 종교 교주인 최태민이, 어떻게 청와대에서, 그것도 그 서슬퍼런 박정희 시대의 철통 경호를 받고 있던 영애인 박근혜가 우매하단 것을 알았는가'라며 진짜로 뭔가 신통력 같은 것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도 있긴 했었다. 그러나 박근령 측의 주장에 따르면, 최태민이 이전부터 박근혜 주변에서 그녀가 우매하단 것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 [28] 이이제이 최태민 특집(1) [29]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는 23세였으나, 최태민은 60대 노인이었다. 두 사람의 추정 나이차는 40살 근처다. [30] 위키리크스에 의해 폭로된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2007년 본국으로 송고한 비밀문서에는 "최태민은 박근혜의 몸과 정신을 지배했다."라 언급되어있다. [31] '어머니를 잃은 심적인 큰 고통'은 그동안 박근혜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최태민과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도 쉽게 납득했다.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진 어린 여자에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며 접근한 사이비 종교 교주라는 논리는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 논리를 만드는 근간이 뒤흔들린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두 사람이 이토록 밀접한 관계가 되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시점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중요하다. 훗날 대한민국을 뒤집어놓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거대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제대로 있어야 한다. [32] 박근령& 신동욱 부부는 이 시점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어떻게 최태민이 고작 2월에 편지 보내고 3월에 처음 직접 만난 상황에서 5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대통령 딸 박근혜를 자기 단체의 명예총재로 만드는, 이 수준의 대형 이벤트를 연출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신동욱은 "오늘날의 번개팅도 이보다는 빠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농담 섞인 말을 했다.) 그러므로 신동욱은 '1974년 이전에 반드시 박근혜-최태민의 기본적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3] 사이비종교연구가 탁명환의 기록을 봐도 무당, 사이비 종교 교주였던 그가 공식적으로 활동하면서 청와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자 매우 의아하게 여겼다 한다. [34]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6.11.26일자 방송분에서 육영수가 최태민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들였음이 밝혀졌다 [35] 민정수석비서관은 대한민국 검찰청 대한민국 경찰청을 관할하면서 공직자 기강 관리, 부정부패 단속 그리고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는 보직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로 이 때문에 민정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최측근 인사가 발탁되는 자리. [36] 현대사 연구자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는 “자네가 직접 근혜한테 얘기 좀 해봐. 나한테 보고 안 한 걸로 하고…”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관련 칼럼. [37] 즉 경찰, 검찰을 통한 정식수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서 심문했다는 것이다. 국가기관에서 정식으로 수사에 돌입하면 당연히 공문서에 기록을 남겨야 하며, 나중에라도 정권의 치부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 또한 수사 중에 외부에 소문이 나서 야당의 공격대상이 되고, 여론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는 박근혜가 연루된 일이기 때문에, 최대한 비공식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박근혜가 세간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38] 당시 검찰에서 공안수사를 위해서 중앙정보부에 파견 나온 검사였다. [39] 그런데 이 친국이 사실상 김재규와 박근혜의 대질심문의 형태로 진행되면서, 오히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굴욕감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있다. [40] 대통령은 수사권한이 없다. 한마디로 '우리 아빠가 잘못 없댔어.'라는 주장이다. [41] 한편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이 최태민의 생식능력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카더라도 있다. 다만 김종필은 2016년 11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때 최태민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애를 만들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42] 실제 김정렴 비서실장이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새마음운동본부, 구국봉사단 등 최태민이 하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는 증언이 있다. [43] 그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등 정식 조사기관을 통해 조사받지 않았는데도 이 친국 사건을 박근혜와 최태민은 이후 자신들이 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했다. [44] 청와대를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재벌들과 만나 축재를 저지른 민간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랑 참 닮았다.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최태민이 대통령과 박근혜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상당히 불만스럽게 생각했으나, 차지철 경호실장은 오히려 최태민을 싸고 돌았다. 이것이 김재규와 차지철이 대립한 직접적인 계기라는 게 당시 주변인사들의 증언이다. [45] 박근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혐의점인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과 똑같다! 박근혜는 현재 대기업에게 돈을 받아 재단에 넣고, 대신 규제완화, 노동개혁 추진, 법인세 인상반대, 경영권 승계, 회장 사면 등의 현안을 챙겨준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고 있다. [46] 또한 최근까지 국정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지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 [47] 진짜 전두환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와 이후 정권인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에서도 안 했던 것을 유독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자마자 전두환에게 부정축재 재산환수 등의 이유로 아들과 처남을 교도소로 보내는 등 정치보복을 했다.하지만 아마 이것만큼은 박근혜 정부의 실책이 되진 않을 것이다. [48] 박근혜의 재산을 모두 최태민이 운용하면서 육영재단이나 영남대 등에서 여전히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근혜를 최태민에게서 빼내기 위해 박근령 박지만 엔테베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군사작전에 필적하는 물리적 구출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진입로와 탈출로, 인원과 차량 등까지 세세하게 짜인 작전이었으나 경찰에게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다. [49] 이 소문을 보도한 서울의소리 백은종 대표는 박근혜 측에게 고소당했다가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 # 그런데 정작 김종필은 최근 인터뷰에서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벌컥 화를 내면서 부인하고, 인터뷰 당시에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 # [50] 앞서 설명되어 있지만, 최태민의 비리혐의가 밝혀지면 박근혜가 공범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암살 당한 전직 대통령의 딸을 범죄자로 잡아넣는 것은, 쿠테타로 정권을 창출해 국민에게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군부에게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다. 박정희가 적잖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옳은 일이더라도 정치보복으로 비춰질 모습을 보여준다면 국민들로부터 지탄받을 가능성이 컸던 상황이다.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인물이었다면, 공직에 올랐던 적도 없는 사이비교주 최태민을 군 부대에 연금할 이유도 없다. [51] 1978년부터 나한일이 운영하는 서초동 도장에 새벽마다 운동하러 가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안양에서 도장을 운영하던 김정호는 1982년에 안양 도장을 접고 나한일의 도장에 합류하였고 1986년에 김정호가 서울 삼성동에 도장을 차리고 나한일은 해동검도 연구소장에 취임해 해동검도 보급에 힘쓴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이르러 둘의 갈등이 극심해져 둘의 사이는 파멸에 이르렀고 김정호는 세계해동검도연맹을, 나한일은 한국해동검도협회를 차린다. [52] 2016년 11월 26일 방영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채현국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 학교 초대 교장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학교를 설립했으나 이 과정에서 재산을 너무 많이 쏟아서 교사들 월급을 못 줄 정도로 쪼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당시 승려였던 최태민이 나타나 자신이 교사들의 월급을 주겠다고 하자 교장이 매우 감사해 하며 아예 최태민에게 교장 자리까지 넘겨주려고 했으나 정작 이 학교에 별 구미가 당기는 이권이 없었던 모양인지 그 길로 곧장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53] 여러차례 언급된 적이 있지만 의혹이 있는 부분이다 [54] 현재는 최서원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55] 이 의혹을 제기한 최재석은 아버지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보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던 본인의 계획이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박정희 사후 서울의 봄이 실패로 돌아가고 (어차피 과도 대통령일 것이라고 여겨지긴 했지만) 최규하가 무력하게 쫓겨난 뒤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박정희의 사망과는 별개로 독재 정부 내부 인사가 정권을 승계하는 형태로 군사독재 정권 자체는 계속되는 것(제3세계식 독재 체제)이 아니냐는 예상이 가능했다. 이후 직선제 개헌이 일어나긴 했지만 첫번째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은 민정당 후보로 나선 노태우였다. 이 역시 명목상 선거와 다당제를 시행할 뿐 실질적으로는 군사독재세력이 정당화하여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냐 볼 수 있는 근거였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지도자 출신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독재시대 청산이 명확해졌다. 최태민에게 정상적인 정치적 판단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최태민은 '군사정권의 정치논리가 유지된다면 한국 군사정권의 개창자 박정희의 후광에 힘입어 박근혜의 정통성을 주장한다.'는 집권 모델이 작동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군사 정권의 정치 논리 자체가 청산된 것이 명확해진 이상 박근혜의 혈통을 내세워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계획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박근혜는 이후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이는 당시 상황에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정치적 상황들이 겹쳐 일어난 결과물로, 초대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혈통임을 내세워 정통성을 주장한다는 계획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