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생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김만복(187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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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복(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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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8대 국가정보원장 김만복 金萬福 | Kim Man-bok |
|||
출생 | 1946년 4월 25일 ([age(1945-04-25)]세) | ||
경상남도 동래군[1] | |||
현직 | 제이엠어셋 주식회사 회장 | ||
재임기간 | 제5대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차관급) | ||
2004년 2월 10일 ~ 2006년 4월 24일 | |||
제6대 국가정보원 제1차장 | |||
2006년 4월 26일 ~ 2006년 11월 23일 | |||
제28대 국가정보원장 | |||
2006년 11월 24일 ~ 2008년 1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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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377a><colcolor=#fff> 배우자 | 김미자 | |
자녀 | 슬하 3남 | ||
학력 |
부산고등학교 (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 |
||
소속 정당 |
[[자유통일당| |
||
약력 |
주자메이카 대한민국 대사관 1등서기관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정보관리실장 제5대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 참여정부) 제6대 국가정보원 제1차장 (참여정부) 제28대 국가정보원장 (참여정부) 재단법인 안중근장학회 이사장 제이엠어셋 주식회사 회장 대한행정사회 초대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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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보관료. 첫 공채 출신 국가정보원장이다.2. 생애
2.1. 초년 시절
1946년 4월 25일, 경상남도 동래군(현 기장군)에서 태어나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 뒤 졸업했다. 동기들 중에 출세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2]2.2. 국가정보원장 취임 전
1974년 중앙정보부 공채로 공무원이 되어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일하였다. 당시 수많은 대학생들이 유신에 반대하며 데모를 하고 있을 동안,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의 대학 담당관으로 학원을 출입하며 운동권 학생들의 정보를 캐내는 일을 했다.1988~1991년, 주자메이카 대사관 1등 서기관, 1993~1996년에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활동하는 등 외교관 역할도 수행하였다.
1998∼1999년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한 가운데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한 제3차∼제6차 4자 회담에 우리측 대표로 뛰었다. 2000년 6월에는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평양도 다녀왔다.
2002년에는 세종연구소에 파견 가 있었다. 그때는 그를 거의 꺼져가는 불꽃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던 이종석 NSC 사무차장의 저서 집필을 도와주는 등 깊은 교분을 맺어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에는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활동하였다.
2003년 다시 국가정보원에 복귀하여 정보관리실장, 기획조정실장, 해외담당 제1차장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이라크 파병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던 가운데 남들이 기피하던 이라크 파병안 수립을 위한 제2차 정부합동조사단장을 맡아 노무현의 눈에 들었다. 기조실장으로 있을 때는 탈정치, 탈권력화와 전문성 및 효율성 제고를 골자로 담은 국정원 개혁 청사진인 `비전 2005' 작성을 주도했다. 특히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출범과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과거사 반성과 청산이라는 참여정부의 코드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2.3. 국가정보원장 시절
그 덕분인지 2006년 11월 국가정보원장이 되었다.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과 함께 초대 수장으로 김종필 부장이 취임한 이래 45년 만에 배출된 첫 공개채용 출신 국정원장이 된 것이다.2007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였고, 2007년 8월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과 관련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잡힌 샘물교회 교인들을 석방시킨 후 귀국길에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켰다. 이에 대하여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주한미국대사관의 비밀전문을 보면, 청와대는 김만복 국정원장에게 아프간 인질석방 과정에서 그림자처럼 행동할 것을 지시했으나, 김만복 원장은 2008년 18대 총선 출마를 희망했기 때문에 언론에 자기 모습을 일부러 노출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2007년 10월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 자리에 배석하였다.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 임동원 선생 건강하지요?"라고 비꼬듯이 묻자[3], 노 대통령을 대신하여 "예, 건강합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바로 전날인 2007년 12월 18일에는 갑자기 방북하여 김양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만났다. 방북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기념식수 표지석 설치’ 를 들었지만, 국내 정치 상황이 최정점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대선 전날 극비 방북한 것 치고는 누가 들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궁색한 사유였다.[4] 일각에서는 이명박 당선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처음부터 의도된 방북이 아니었나 하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 후 2008년 1월 9일 국정원 관계관을 통해 모 언론사 간부에게 김양건과의 면담록이 포함된 방북 배경 및 경과 관련 자료를 비보도를 전제로 전달했다. 대화록에서 김만복은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며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명박 후보가 더 과감한 대북정책을 펼 수 있다”며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한 마디로 대화록은 이명박이 김만복에게 호의를 가질만한 내용들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대화록을 왜 유출했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12월 18일 나의 방북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소위 ‘북풍공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됨에 따라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반응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대선과정에서 김만복 국정원의 ‘이명박 뒷조사’ 의혹과 BBK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경준의 기획입국설을 계속 제기해 왔고, 검찰 수사도 진행중인 상황이어서 김만복의 입장에선 이명박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이 컸다는 것.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김만복이 오히려 대화록 내용이 보도되리란 걸 노리고 언론사 간부에게 전달했을 것을 가능성이 높다. 김만복은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언론플레이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김만복이 흘린 대화록이 과연 사실 그대로인지도 의심스럽긴 하다. 관련기사
결국 이러한 대화록 유출에 책임을 지고 2008년 1월 28일, 국가정보원장직 사의를 표명했다.
2.4. 국가정보원장 퇴임 후
2010년 10월 ‘다시, 한반도의 길을 묻다’라는 책에서 “10·4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평화지대 구상을 밝히고 설득하자 처음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군부와 상의해 흔쾌히 수용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국가정보원은 2011년 1월 직무상 비밀을 누설한 혐의로 김만복 전 원장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왕년의 부하들에게 고발을 당한 것.2015년 8월에 직업을 행정사라고 기재하고 새누리당에 팩스로 몰래 입당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에 대해 새누리당이 알았다면 공작정치라고 항의하였다. 이에 새누리당은 자기들도 몰랐다며 억울함을 표시했다. 그냥 지역 사무실 당직자가 팩스 입당원서에 대해 김만복이 누군지 모르고 별 생각없이 입당 처리하고 당비 자동이체를 걸어놓은 것이니 당 지도부는 억울할 만 했다. 여튼 정상적으로 입당 처리된 거라 새누리당은 내보낼 방법을 고민하는데... 당 입당 후 부산 재보궐에서 야권 후보 사무소를 지지, 격려 방문한 것이 확인되자 이것을 해당행위로 걸어버리고 잽싸게 탈당권고(탈당 거부시 자동제명) 징계를 때려버린다. 여담으로 이 사실을 숨기고 야당 성향의 팟캐스트 방송인 정봉주의 전국구에도 출연했었다. 이러고도 김만복은 탈당 권고를 따르지 않았고, 결국 새누리당으로부터 제명당한다. 이에 김만복은 제명 조치가 부당하다고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링크 이후 김만복은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부산 기장군에 출마하려 했지만 비판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퇴하였다.
2021년 5월 26일 오후 2시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하나로빌딩에서 개최된 대한행정사회 대의원총회에서 총 대의원 120명, 투표 참석 대의원 96명 중 찬성 93표, 반대 3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한 행정사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
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2]
1966년 160명이 입학한 '서울대 법대 66학번'은 법조계는 물론이고 정계 관계 재계 학계에 두루 진출해 있어 법대 내부에서는 '실력은 물론 관운(官運)도 두루 갖춘 학번'으로 세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우선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법대 66학번이고,
김용담 대법관도 서울법대 66학번이다.
김학원 전 의원(15∼17대),
박세일 한반도재단 이사장(17대 국회의원)도 서울법대 66학번이다.
양건 감사원장, 딸 외교부 특채 파동으로 사임한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김상철 전 서울시장,
안경환 서울법대 교수 등도 서울법대 66학번이다.
관련기사
[3]
왜 '비꼬듯이'라는 표현을 썼냐하면, 당시 임동원은 2005년에 드러난 국정원의 과거 감청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첫 해에 전임 김대중 대통령의 첫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대북 송금에 대해 특검 수사를 승인한 것에 불만을 표한 것이기도 했다.
[4]
더구나 북한은 정치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웃집 나들이 하듯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