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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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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운규.jpg
출생 1902년 10월 17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이동[1]
사망 1937년 8월 9일 (향년 34세)
경기도 경성부[2]
본관 나주 나씨
가족 아버지 나형권
부인 조정옥 차남 나봉한
춘사(春史)
소속 대한국민회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은관문화훈장 (추서)
종교 기독교 ( 개신교, 장로회)

1. 개요2. 생애3. 성씨4. 아리랑5. 작품 목록6. 대중매체에서7. 기타
7.1. 영화인으로서 선각자의 식견
8.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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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paxcinema_190420_1%5B243026%5D.jpg
교과서에 실린 나운규 사진은 대부분 이 사진이다.
파일:external/movie.phinf.naver.net/01.jpg
아리랑 3편의 스틸.[3] 주인공 김영진이 오기호를 낫으로 찍어버리기 전 장면.[4]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한국의 영화감독이자 배우. 호는 춘사().

영화 아리랑의 감독으로 유명하며, 해당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의 창작자이기도 하다.


1931년에 녹음된 연극 레코드를 통하여 나운규와 심영 생전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2. 생애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이동 #에서 구한말의 군관을 지냈던 나형권(, 1869년 1월 18일 ~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형권은 구한말 부교()로 있었다가 군대 해산 이후 교원검정에 합격하여 1907년 7월 23일부터 그해 9월 17일까지 공립장진보통학교 부교원으로 재직하였다.

9월 26일, 공립회령보통학교 부교원에 임명되어 11월 28일 동교 본과 부훈도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12월 29일까지 근무했다. #

한편, 1914년 5월 28일 이전에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 일종의 종두의사)으로 근무한 사실이 있으며, 그해 9월 4일 의사면허 1499호로 회령군 부남면 이리에서 개업한 사실이 나타난다. #

1910년 2월 5일, 대한흥학회에 의연금 50전을 기부한 사실로 보아 당시 애국계몽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

1912년, 회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7년에 조정옥과 결혼하고, 1918년 만주 간도의 명동중학을 다니며 이듬해 3.1 운동에도 참가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됨에 따라 1여 년간 북간도 등 만주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1920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며 활동하거나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에 들어가서 독립투쟁에 투신했고, 같은 시기 '청회선 터널 폭파 미수사건'의 용의자로 붙잡혀 친구 윤봉춘과 함께 고문을 당한 끝에 2년형을 선고받고 1923년에 출소했다.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윤봉춘보다 형기가 6개월 길었는데, 3.1 운동 때 피신해서 옥살이를 하지 않은 것이 더해져서였다.

1924년, 부산에서 일본 자금으로 돌아가던 영화사 '조선키네마'에 들어가 윤백남 감독이 만든 < 운영전>에서 가마꾼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윤백남이 1925년에 독립해서 차린 윤백남프로덕션의 첫 작품 < 심청전>에서 심 봉사 역을 맡아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5] 이듬해에 < 농중조>에서 탁월한 연기력으로[6] 관객들의 박수를 받아 큰 인기를 끌었다.

1926년, 연기를 넘어 직접 메가폰을 잡아 영화 아리랑을 제작해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불러오면서 스타급 감독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영화평론가 조희문은 1997년에 낸 저서 <나운규>를 통해 "아리랑은 나운규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 스모리 슈이치가 연출한 작품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1926년 10월 1일자 <조선일보> 및 3일자 <매일신보> 광고에서 스모리 감독의 명의로 나왔기에 1980년대부터 연출자 논쟁이 벌어졌다가, 1990년대 초반에 나운규가 <아리랑>을 제작/연출했다고 언급한 <조선영화> 1936년 11월호가 발견되면서 일단락되는 듯하다가 조희문이 그 책을 내면서 또 의혹이 증폭됐다. 조선일보 기사 사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제작된 반일 영화였기 때문에 심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일본인 이름으로 심의를 넣어 무삭제로 통과시킨 것이었다. 상술했듯이 일본계 통속극인 농중조를 직접 수정해서 엄청난 흥행을 이끌어낸 것도 일본계 경영진의 도움을 받을 때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제작한 작품들은 심의 통과가 어려워진 데다, 심의 통과를 해도 가위질을 엄청나게 당하는 등 영화 제작을 하면서 끊임없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1927년에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서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등을 만들었고, 특히 1929년에는 나도향 작가의 소설 < 벙어리 삼룡이>를 영화화한 < 벙어리 삼룡>을 만들어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치솟는 인기와는 별개로 여전히 심의 통과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사랑을 찾아서>를 만들 당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될 뻔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랑을 찾아서'의 원제는 ' 두만강을 건너서'였는데, 독립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들락날락하던 지역이라며 일본군에게 지적을 당했고, '저 강을 건너서'도 안 된다며 우겨대서 결국 '사랑을 찾아서'라는 어색한 제목이 된 것이다. 물론 항일적인 내용도 다 가위질당했다. 벙어리 삼룡은 원작에 충실한 편이었으나 사랑에 대한 묘사가 천편일률적이고 구제도를 옹호하는 모습도 엿보인다는 둥의 이유로 흥행에는 실패했다.

거기에 후술할 무절제한 사생활 때문에 회원들이 독자 영화사를 차려 독립해서 나운규 프로덕션은 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에 그는 박정현의 원방각사와 손잡아 < 아리랑 후편>, <철인도> 등을 만들고, 일본 국수회 회원인 배우 도야마 미츠루[7]가 세운 '도야마 미츠루 프로덕션'의 <금강한>에도 나왔으나 반일정서를 자극하는 전개라 실패했다.[8] 결국 그는 생계를 위해 배구자 일행의 악극단 무대에 나오는가 하면, 1931년부터 1여 년간 일본 도쿄의 영화계를 시찰하기도 했다.

1932년, 귀국 후 그는 윤봉춘 등 옛 동료들을 모아 김옥균의 일대기를 다룬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으나 검열로 인해 흥행을 못했다.[9] 다행히 같은 해에 만든 이규환 감독 작품의 <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주연으로 나와 호평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감독부터 각본, 주연까지 모조리 자기가 혼자 맡아서 (작업 자체는 수월할지언정) 다소 매너리즘적인 면이 있었으나, <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는 각본이 마음에 들어 삭발하고 주연만 맡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후 <무화과> 등과 같이 사회/문명비판적 작품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외에 <종로>, <칠번통의 소사건> 등을 만들거나 출연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같은 시기에는 극단 신무대와 형제좌를 위해서 연쇄극을 만들어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다.

1936년, < 아리랑 제3편>을 당대 최첨단 기술이던 유성영화로 제작했고, 문예영화로 방향을 틀어 이태준 작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화해서 죽기 7개월 전인 1937년 1월 20일에 개봉했다. 특히 <오몽녀>는 대흥행하면서 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존의 작품들은 제작, 시나리오, 감독, 주연 등을 혼자 다 했다면, 오몽녀는 오로지 감독으로만 참여하여 이목을 끌었다.

이후 <황무지>의 각본을 써 나갔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난치병이던 결핵에 걸려 완성하지 못한 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홍제동 화장장에서 유해가 화장되어 한 암자에 안치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1993년, 같은 독립운동 동지이자 동료 영화인이었던 친구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 성씨

나운규의 성은 로서, 해당 한자는 신라(新)와 같이 어두에 오지 않을 경우에 '라'로 발음된다. 통상 알려진 이름인 '나운규'는 두음법칙이 적용된 결과이고 나운규 본인도 학교에 다닐 때부터 성인 이후까지 나씨로 계속 등록되어 본인도 그냥 '나운규'라고 쓰며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만약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시 '라운규'로도 표기가 가능하다. 일례로 대전현충원에 있는 묘의 비석에는 '라운규'로 새겼다. 자세한 사항은 나(성씨) 참고.

4. 아리랑

나운규는 1926년 개봉한 영화 < 아리랑>에서 주제가인 '아리랑'을 단성사 음악대와 함께 작곡, 작사하였다. '아라리'라는 노랫말을 담은 민요는 각 지역마다 널리 불리워지고 있었고 종류가 많으나,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해외에도 소개되고 있는 것은 나운규가 작곡, 작사한 '본조 아리랑(주제가 아리랑)'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뒤,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즐겨 불렀다는데, 아리랑이 만들어진 유래에 대해 나운규 본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기자 曰 : ​

“한동안은 그것이 벌써 10년은 되었지만, 그때 서울이든 시골이든 어디에서든지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즐겨 부르던 아리랑의 이 주제가를 누가 지었어요?”

나운규 曰 :

“내가 지었소이다.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을 울려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랫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외어 보았답니다. ​(……)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나운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고향 함경북도에서 살던 어린 시절 남쪽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부르던 구슬픈 곡조를 기억하고,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멜로디는 단성사 음악대가, 가사는 본인이 쓴 창작곡이라는 것이다.

흔히 나운규 아리랑을 '경기 아리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영화가 개봉된 서울이 경기도 지역에 속하기 때문이고, 또한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노동자들이 당연히 경기도 출신이겠거니 하는데서 이름 붙인 것이다. 하지만, 그 노동요가 현재 그 흔적도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오직 추정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 나운규의 아리랑은 그가 작사 작곡한 순수 창작곡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940년대 말, 성경린·장사훈이 최초의 민요 개론서인 『조선의 민요』에서도 나운규 아리랑을 '본조 아리랑'이라고 체계화시켜 소개하고, 그것이 다른 지역의 아리랑과는 달리 나운규 개인의 노력에 의해 독창적으로 유래한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한국민속대백과


5. 작품 목록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파일:external/rikszine.korea.ac.kr/%EC%9B%901411-%EC%82%AC%EB%9E%91%EC%9D%84%EC%B0%BE%EC%95%84%EC%84%9C.jpg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나운규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강렬한 시선이다. 딱 봐도 포스가 느껴진다. 실제로 같은 영화사 소속의 선배 배우가 이 눈빛을 보고 "너는 악역이나 범죄자 같은 배역이 어울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Na_Woon-gyu.jpg

그런데 의외로 평상시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윗사진처럼 강렬하지는 않은 편이다.[12][13]

< 벙어리 삼룡>을 촬영할 때 굉장한 직업정신으로 주위 사람들을 감탄시킨 일화가 있다. 컴퓨터와 CG 기술이 없던 시대에는 배우들이 직접 다 표현해야 했는데, 최후반부의 화재 장면을 찍을 때 몸에 불이 붙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나운규는 솜옷을 두껍게 껴입고 등에 석유를 뿌리고는 자신에게 불을 붙였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불이 잔잔하게 골고루 붙지 않고 화약 터지듯 한꺼번에 치솟아 버렸고, 촬영장에도 불길이 일어났지만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 그만둬 버리면 다 허사가 되기 때문에 나운규는 그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함께 촬영에 임하던 여자 배우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나운규는 끝내 필요한 만큼이 다 찍히고 나서야 땅을 굴러 불을 껐고, 이때 입은 큰 화상을 치료받느라 한 달 넘게 고생한다.

한편으로는 무절제한 여자관계로 인해 비난도 받았다. 가정이 있었지만, 오향선이라는 기생과 동거하였으며, 심지어 기생과 뱃놀이를 하기 위해 촬영 장비들을 팔았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였다. 오향선은 유신방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까칠한 편이어서 당대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도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나운규는 결혼을 하고서도 윤마리아라는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던 친일파 허진종(許振鍾)의 협박과 구타 등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윤마리아와 헤어졌다.

나운규의 말기 작품들에 출연했던 배우 전택이가 남긴 증언에 의하면, 어떤 여성이 배우가 되고 싶어서 나운규가 묵는 여관까지 찾아 왔는데, 그러다가 어느새 나운규와 눈이 맞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여성의 남편이 격분하여 여관에 쳐들어와 각목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전택이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나운규를 보호한 덕분에 나운규가 간신히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고.

이처럼 나윤규는 평가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인물이라 볼 수 있겠다. 어쩔 때는 천재적인 영화감독, 어쩔 때는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사람, 어쩔 때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갔다.

특이 사항으로는 연극에 입문할 때까지도 함경도 사투리를 썼다는 점이다. 육진 방언이라고 하여 제주도 다음으로 심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곳 출신이다. 게다가 고향 말에는 경상도에 비견되는 성조 억양이 있다. 이것 때문에 연기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도 있었으나 치밀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연기의 대가가 된다. #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한국영화감독협회 주관으로 1990년에 한국 영화/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춘사영화상이 제정되었다. 목록 특이한 점은, 그 해에 춘사영화상을 받을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상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 2014년에는 감독상 수상자가 없었다.

나운규의 2남 1녀 중 차남 나봉한도 1960~1970년대에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그 중 하나가 속 꼬마신랑 제3편.

2016년, 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을 맞아 나운규 사망 후 여배우들이 썼던 추모글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

2021년 8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독립군 시절 자신이 상관으로 모셨던 홍범도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7.1. 영화인으로서 선각자의 식견

김동환[14]의 주관으로 그 당시의 영화인들이 모여서 대담[15]한 내용이 김동환이 발행하는 잡지 삼천리 1936년 11월호에 에 실렸다. 여기서 영화인[16]으로서 그의 생각을 밝힌 부분이 있는데, 지금 읽어봐도 시대를 앞서간 그의 식견에 감탄하게 된다.[17]
사회자 曰 : ​

" 조선 영화가 국제적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즉 외국시장에 소화시킬 수가 있으리까?

나운규 曰 :

세계 각국 사람이 다 느낄 수 있는 공통된 감성을 잘 붙잡아, 조선의 산하와 정조를 기조로 하고 만들어낸다면 나는 세계시장 진출에 어렵지 않을 줄 알아요. (중략) 우리 속에서도 명배우가 나고, 명감독이 나고, 큰 문호가 나서 본질적으로 그네들을 이길 생각을 해야 하겠어요.
[18]

위 발언은 2004년 올드보이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2020년 기생충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함으로써 실현되었다.[19] 그리고 2024년에는 소설가 한강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에 성공하며 나운규가 말한 명배우, 명감독, 큰 문호가 모두 실현되었다.

8. 참고 자료



[1]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동 [2] 서울특별시 [3] 흔히 아리랑 1편의 스틸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아리랑 3편( #)의 스틸이다. [4] 이 스틸컷 하나로 나운규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저 주인공과 하나된 광기에 찬 눈을 보자. [5] 심청이가 물에 빠지는 장면을 대역이 아니라 인형을 던지는 식으로 찍어서인지 영화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으나, 나운규의 연기만큼은 호평이었다고 한다. [6] (아마도 최남선· 이광수가 주장한 자유연애론이 포함된) 내용에 불만을 느껴서인지, 자신이 출연하는 부분을 직접 수정하는 조건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7] 1893~1952, 제국주의 사상가 도야마 미츠루와는 동명이인. 본명은 오하라 미도리, 결혼 전 성은 시마다. [8] 왓챠의 줄거리를 보면 '일본인의 딸을 사랑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다 결국 눈물로 이별한다'는 내용인데, 그 아리랑으로 항일정신을 불태웠던 사람이 돈에 급급해서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9] 1/7 정도를 잘라내고 나서야 겨우 상영할 수 있었는데, 저만큼이 사라지니 당연히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 않아 어색했고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울 만큼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10] 나운규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영화이다. [11] 각본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 하고 사망했다. 이후 2022년에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에서 황무지의 각본으로 낭독공연을 했다. [12] 세상을 떠나기 불과 2달 전인 1937년 6월에 찍은 사진. [13] 이것은 연극식 화장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흑백영화시대의 전형적인 눈화장이기도 하다. 눈이 퀭하면서도 커보이게 강조하는 형태의 화장법인데, 이게 모조리 검은색은 아니겠지만 흑백영화라는 특징으로 더 강하게 인상이 주어지는 것에 더해서, 원래 멀리 떨어져서 보는 연극과 달리 얼굴만 강조되기도 하는 영화라는 특성상 눈이 엄청나게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나운규는 원래 연극으로 시작해서 연극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나운규를 찍은 사진은 대부분 영화 스틸컷이어서 그대로 분장이 반영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영화 스틸컷이나 영화를 찍기 위해서 분장한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인상 자체가 다른 것. [14]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한국 최초의 서사시라고 배우는 국경의 밤의 그 사람이다. [15] 김동환의 사회로 영화인 나운규, 문예봉, 복혜숙, 김유영, 박상엽, 이명우, 김연실, 박기채가 참여했고, 그 밖에 박상희, 임부원이 참여했다. [16] 특히 조선 영화 [17] '이다북스'에서 2020년에 발행한 나운규의 말(엮은이 조일동)에서 발췌함. [18] 이 뒤에 사회자(김동환)가 또 "조선 영화계의 발전을 위해 외국 명감독, 명배우를 누구를 초청해오는게 좋겠느냐"고 눈치 없이 물어보는데, 나운규가 할리우드에서 초청하는 건 할리우드 동물원의 동물들이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자뻑 조선 영화계의 가능성을 믿는 내용도 나온다. [19] 특히 후자인 기생충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우리나라 배경으로 리메이크해도 자연스럽다'라고 할 정도로 만국공통적인 감성을 담아냈기에 더욱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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