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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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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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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5. 관련 항목

1. 개요

이제마(李濟馬)는 조선 후기와 구한말 무인이자 의학자이다.

1837년 또는 1838년 4월 23일( 음력 3월 19일)에 태어나서 1900년 8월 11일 향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1][2] 왕실의 종친이지만 서자다. 호는 동무().[3]

사상의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2. 생애

1837년 4월 23일 함경도 함흥부 주동사 회상리 둔지(現 함경남도 함흥시 회상일·이·삼·사동)에서 아버지 이반오(李攀五, 1812. 1. 7 ~ 1849. 4. 27)[4]와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함흥부 사촌(沙村)에 있던 조부댁에 살다가 함흥부 원천사 축상리 원곡(現 함경남도 신흥군 축상리)으로 이주해 아버지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서 이른바 '북도문장(北道文章)'으로 알려져 있던 큰아버지 이반린(李攀鱗, 1779. 10. 10 ~ 1853. 2. 14)[5]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기도 했다.

13세 되던 1849년에는 아버지와 조부를 잃게 된다. 이어 1852년에는 조모 의령 남씨(1779. 11. 7 ~ 1852. 4. 16)[6]를, 1853년에는 한문을 가르쳐 주던 큰아버지를 잃는다.

이 일은 겪은 후에 방황을 하게 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36세에 무과에 급제했고, 50세에 진해현감[7]이 되었으며 2년 10개월을 진해현감으로 지냈다.

1896년에는 60세가 다 된 나이에 최문환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워 고원군수로 임명받았으며 1897년 사직하였다. 이후 의술에 전념하여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한 후 향년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항목



[1] 안원대군파 20세 섭(燮) 항렬.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이섭운(李燮雲)으로 등재돼 있다. [2]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의 둘째아들 안원대군 이진의 후손이다. 같은 전주 이씨이기는 하지만 조상에 진짜 왕(추존왕 말고)이 하나도 없어 엄격하게 보면 왕손도 아니었다. 조선은 대군의 4세손, 군의 3세손, 공주 옹주 결혼 부마와 그 자녀들까지를 왕족으로 인정해 작위를 하사했으며 군-령-부령-정-도정-수-부수 같은 작위를 수여하였다. [3] 동방의 무인이란 의미로,과거시험 무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4] 자는 사교(士敎). [5] 1843년(헌종 9) 순릉 참봉( 純陵 參奉), 1846년 의릉 봉사( 義陵奉事), 1849년(철종 즉위년) 덕릉 직장( 德陵直長) 등을 역임했다. [6] 남광협(南光協)의 딸이다. [7]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 일대로 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와는 다른 곳 [8] 참고로 최린은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던 독립운동가였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인물이다.다만 특이하게 다른 지식인 계층 친일파들과 달리 광복 후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9] 생원시는 3등 49위, 진사시는 3등 63위 [10] 전기면(全基勉)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