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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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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장지연
張志淵
파일:external/www.mcst.go.kr/1290396330437.jpg
본명 장지윤(張志尹)
화명(和明)·순소(舜韶 또는 舜紹)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출생 1864년 11월 30일
경상도 상주목 내동면 동곽리
(現 경상북도 상주시)
사망 1921년 10월 2일 (향년 56세)
러시아 SSR 블라디보스토크 주우찌하
(現 러시아 연방 블라디보스토크)
본관 인동 장씨[1]
가족 아버지 장용상, 어머니 문화 류씨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2]

1. 개요2. 생애3. 건국훈장 수여와 취소
3.1. 소송
3.1.1. 1심과 2심, 승소3.1.2. 3심, 파기환송3.1.3. 파기환송심, 패소
4.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인동(仁同)[3],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또는 舜紹), 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본명은 장지윤(張志尹).

1905년 < 황성신문>[4]의 주필로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기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구한말에 애국·계몽 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4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 < 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 730여 편이 문제가 되어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말년에 시베리아에서 의병 활동을 지휘했다는 일본 외무성의 문서가 2009년에 공개되었다.

사후 한국사 교과서에는 긍정적인 면으로, 행정법 교과서에는 친일행위로 인한 서훈취소처분, 그리고 그 처분의 피고적격 및 통치행위의 범위를 명시한 판례로 남은 오욕의 역사 그자체이다.

2. 생애

1864년 11월 30일 경상도 상주목 내동면 동곽리(現 경상북도 상주시 인봉동·성동동 근처)에서 아버지 장용상(張龍相, 1839 ~ 1887. 10. 17)과 어머니 문화 류씨[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에 향시(鄕試) 응제과(應製科)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으며 이후에도 과거에 4차례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1894년 2월 식년 진사시에 3등 683위로 입격했으나 이 무렵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을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8년 4월에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개칭하여 발행에 참여했고 9월에 < 황성신문>으로 개편할 때에도 참여했으며 1898년 10월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 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바로 다음 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11월 21일 투옥되었고 이어 <황성신문>도 정간되었는데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도 장지연은 구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수많은 교육 활동에 앞장섰으며 1907년에는 '애국 부인전'이라는 책을 냈는데 바로 잔 다르크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초기 신채호처럼 역사적 인물로서 애국 영웅 정신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한국 사상 최초로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언급된 사례이다. 친일 단체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6]의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면서 1년 가량 머물렀고 이후 귀국해 경상남도 진주에서 1910년 경술국치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되기도 했던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그러나 1914년부터의 행적 탓에 논란이 상당하다. 1914년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라는 조선총독부 인사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어용 신문사인 <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친일 한시와 사설 730여 편을 기고했던 것 때문이다. 친일 전력이 밝혀진 후 관련 연구 학자 대다수와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친일 행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언론 활동을 두고 장지연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원고 내용은 "일사유사",[7] 종교 풍속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조건에 입각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논설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성을 띤 연설이 많다.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됨은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1918년 12월 1일자 <매일신보>에의 논설 기고를 마지막으로 1919년 4월 경상남도 양산군을 유람했으며 3.1 운동이 발생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1921년 초에 생활 습관으로 결국 술병이 들었는데 일본 외무성의 문서에 의하면 1921년 5월경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경천의 초청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마을인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후 술병으로 인한 병세가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을 끊으면서까지 치료에 몰두했지만 결국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3. 건국훈장 수여와 취소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으나 1990년대부터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강명관과 재야 사학자 이이화 등이 진행한 연구에서 친일 의혹이 제기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이에 2010년 12월, 국무회의에서 건국훈장 서훈 취소를 의결했고 이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후손에게 서훈 취소 및 회수 통보를 했다. 하지만 후손들은 이에 반발하여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3.1. 소송

3.1.1. 1심과 2심, 승소


1심 서울행정법원은 후손의 승소로 판결했다. 서훈을 취소한 기관이 서훈 처분권자인 대통령이 아닌 국가보훈처라는 이유로 무효라고 판단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이에 대해 항소했으나 2심 서울고등법원도 원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유는 원심과 똑같다.

3.1.2. 3심, 파기환송

국가보훈처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하였고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2013두2518

이유는 피고 부적격, 즉 피고를 잘못 지정했다는 뜻으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거쳐서 서훈 취소를 했으며 국가보훈처는 대통령의 결정을 알려준 것에 불과하므로 서훈 취소에 불복하겠다면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서훈 처분 권한이 없는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피고 정정을 통해 피고를 바꿔야 하는데 1심과 2심은 국가보훈처가 서훈 취소 처분을 내린 것으로 보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 판례도 행정법 관련 시험에서 나오는 편이니 기억해두록 하자.

3.1.3. 파기환송심, 패소


대법원 판결에 따라 피고는 대통령으로 변경되었고 국가보훈처는 피고소송참가인으로 들어갔다.

서울고등법원은 장지연의 친일 행위가 확실하다고 보고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4. 기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물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선정한(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은 동일한지 궁금합니다. 만약 동일하다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물을 기반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동일하지 않습니다. 위원회는 죄질이 무거운 반민족행위자를 선정대상으로 한 반면 연구소는 반민족행위자는 물론 부일협력자까지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

[1] 상장군 금용(金用)계 남산(南山)파 17대손 지(志) 병(炳) 항렬. 인동 장씨 32세. [2]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 취소. [3] 상장군 금용(金用)계 남산(南山)파 17대손 지(志) 병(炳) 항렬. 인동 장씨 32세. [4] < 대한매일신보>에도 실렸다. [5] 류성림(柳成霖)의 딸이다. [6]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단체로, 후에 일진회와 타협해 국권 피탈 후 해산한다. [7] 장지연이 편찬한 조선 시대 중ㆍ하층민들의 열전. [8] 2번은 박은식, 3번은 신채호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