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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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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colbgcolor=#263633> 박연
朴堧
<colcolor=#fff> 출생 1378년 8월 20일
고려 경상도 상주목 영동현 고당리
(현 대한민국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08)[1]
사망 1458년 3월 23일 (향년 79세)
조선 강원도 평강현 고산 객저
본관 밀양 박씨 좌복야공후(后) 난계문헌공파 1세[2]
시호 문헌공(文獻公)
초명 박연(朴然)
난계(蘭溪)
당호 송설당(松雪堂)
탄보(坦父)[3]
부모 부친 - 박천석(朴天錫)
모친 - 경주 김씨 김오(金珸)의 딸
부인 정경부인 여산 송씨 송빈(宋贇)의 딸
자녀 (3남 4녀)
장남 - 박맹우(朴孟愚)
차남 - 박중우(朴仲愚)
3남 - 박계우(朴季愚)
딸 4명
종교 유교( 성리학)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세종 시기에 활동한 음악가. 정간보 제작 등에 관여하여 조선의 궁중음악을 아악(雅樂) 중심으로 정비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왕산악 우륵을 잇는 한국 역사상 3대 악성으로도 불린다.

2. 생애

1378년 8월 20일 경상도 상주목 영동현 고당리(현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4]에서 고려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아버지 박천석(朴天錫)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오(金珸)의 딸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 1411년 식년시 문과에 동진사 1위로 급제하였고 진사, 집현전의 교리, 사간원의 정언, 사헌부의 지평, 세자시강원의 문학을 역임하였다.[5] # 1423년 의영고 부사였다가 제생원의 의녀 중에 총명한 자를 골라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으며 1425년 음악에 대한 책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해주에서 발견한 기장 알갱이를 기준으로 1알을 1푼, 10알을 1촌으로 하여 9촌의 황종율관[6]을 만들었다. 1426년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를 지냈는데 봉상시판관을 지내면서 명나라에서 보낸 악기인 소관을 사용하기를 왕께 요청하거나 음악에 대한 상소를 왕께 올렸다. 1425년의 황종율관이 중국 아악기와 음률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편종과 편경을 기준으로 1427년에 2차 황종율관을 만들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였고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지난번에 해주의 기장으로 황종율관을 제작했을 때 그 황종음이 중국 편경보다 높았는데 그 원인은 땅이 메마르고 날이 가물어서 기장 알갱이가 작았던 까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그보다 알갱이가 굵은 남쪽 지방의 기장 알갱이를 대중소(大中小) 3가지로 나누어 3가지 기장 알갱이를 사용한 세 황종율관을 만들어 그 중에서 중국의 편경과 맞는 율관을 골라서 그것을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율관을 만드는 일이 지금 제일 급선무이오니 영단을 내리시어 곧 시행하도록 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중론이 벌떼같이 일어나면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3차 율관 제작이 결국 실행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427년 아악기 중 하나인 석경을 제작하여 왕께 올리기도 했으며 사직단의 신위를 고쳐 만드는 것에 대해 백관들이 논의할 때 악기에 대해서는 박연에게 맡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1430년 봉상시소윤을 지내면서 아악을 쓰고 향악을 쓰지 말자고 건의하였으며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자 이를 위해 힘을 쓰다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1432년 관습도감의 별감을 지낸다. 1433년 그가 건의한 아악이 처음으로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이후에도 음악에 관련된 여러 상소를 올렸다. 1439년 악학제조, 1453년 예문관의 대제학, 1455년 중추원의 제조를 역임하였다.

음악적인 재능은 뛰어나지만 <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인성과 관련된 기록들은 그가 인성이 바르지 못한 인물이였음을 알게 한다. 그는 궁의 악공들을 데리고 사사롭게 영업 행위를 하는가 하면 누이가 죽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유산만 챙겨서 얼른 돌아오는 등의 행동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 일로 1448년 잠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복직된 후에는 단종 대까지 음악 일을 맡다가 아들인 박계우가 단종 복위 운동에 연관되어 세조에게 숙청당할 때 그도 연좌되었으나 왕이 3번 바뀌는 동안 벼슬을 하며 왕실을 보좌한 원로라는 점이 참작되어 사형은 면하고 삭탈관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피리를 불고 자서전을 쓰며 여생을 보낸 후 1458년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세종의 눈에 들어 세종조에 조선의 음악을 정비하는데 힘썼지만 세종과는 견해가 많이 달랐다고 한다. 본류가 유학자라서 그런지 그는 아악 중심으로 궁중 음악을 재편하고자 했지만 세종은 중국인들은 생전에도 아악을 들었으니 제사에도 연주해도 무방하나 우리 조상들은 생전에 향악만 들었다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박연 생가. 고당리는 현재도 인근의 심천리·단전리·길현리·구탄리·기호리·용당리·약목리·초강리와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2] 박연은 밀양 박씨의 시조 박언침의 7대손인 좌복야 박언인의 8대손으로서 난계문헌공파(난계공파)의 파조다. [3] 는 아비란 뜻이 아니면 "보"로 읽는다. [4] 지금도 고당리에는 난계의 사당인 난계사(蘭溪祠)가 남아 있으며 근처에는 난계 국악기 체험장이 있다. 영동군에는 난계 박연이나 국악과 관련된 시설 및 행사가 많다. [5] 개명하기 전 이름인 박연(朴然)을 사용했다. [6] 황종율관은 삼분손익법에 의해 12율을 산출하려면 꼭 필요한 1번째 율관이다. [7] 음악가 박연의 연은 (빈땅 연)이고 박연폭포의 연은 (못 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