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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7:20:37

박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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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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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월북, (日):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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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朴準承.jpg
출생 1866년 11월 24일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
사망 1927년 3월 23일(향년 61세)
묘소 전라북도 정읍시 수성동 충무공원
국적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본관 밀양 박씨
자암(泚菴)
직업 독립운동가, 종교인
종교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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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천도교 거두2.3. 3.1 운동2.4. 이후의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박준승은 1866년 11월 24일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박호진(朴昊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반 신분이었으며, 아버지가 부농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 여유로운 생활을 했고 6살 때 집안에서 초빙된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고 15살 때부터 사서삼경을 암송했다. 그는 16살 때인 1882년부터 농업에 종사하며 가사에 전념했고 이듬해 장환기의 둘째 딸 장승화와 결혼했다. 이후 1886년 부친이 사망하자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었다.

2.2. 천도교 거두

1890년 4월, 박준승은 스승 김영원을 통해 동학에 입교했다. 그가 동학에 입교한 배경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지켜보며 동학의 이념에 공감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1892년 교조 최제우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어난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했으며,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여기에 동참했다. 이후 1896년 3월 동학 접주로 임명되어 당국의 추적을 피해 각지를 전전하며 신도를 늘리고자 애썼고, 1897년에는 수접주(首接主)로 임명되었다.

1904년 일본에 체류 중이던 손병희 박인호, 이종훈 등 동학 간부 40여 명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불러들어 그들에게 민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1904년 9월 '진보회'라는 이름의 민회가 조직되었고 모든 동학인들이 단발하고 개화복을 입었다. 이때 박준승은 전라도 접주로서 이 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12월 1일, 동학은 천도교로 명칭을 바꿨고 손병희는 이듬해 초에 귀국해 천도교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는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었고 지방에 74개 교구를 설치했다. 박준승은 1907년 6월 천도교 임실교구 창립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그해 말 손병희로부터 자암(泚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받았다. 1909년 1월에는 의사원(議事員)으로, 1910년 4월에는 500호의 교인을 지도하는 도훈(道訓)이 되었다.

1912년 6월 19일, 손병희는 서울 우이동 자락에 봉황각을 건립해 천도교 간부들의 회의장소 겸 전국 신도들의 수련도장으로 사용했다. 그는 전국 각지의 지도급 간부들을 불러 49일 특별기도회를 열고 국권회복과 천도교 발전을 기원했다. 이때 박준승은 제1차 수련생 21명 중 한 명으로 뽑혀 봉황각에서 연성(鍊成) 공부를 했다. 1914년 7월, 그는 전남 장성 대교구장 겸 순유(巡諭)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천도교의 원로인 경도사(敬道師)에 추대되었고, 이듬해에는 도사실(道師室)의 도사(道師)로 추대되었다. 이 무렵 그는 천도교 내의 중요정책을 심의, 결정하는 중진의 위치에 있었다.

2.3. 3.1 운동

1919년 2월 24일 서울로 올라와 손병희에게 49일 기도회 보고를 하려던 박준승은 이튿날 천도교 중앙총부로 향했다가 문 앞에서 권동진을 만났다. 권동진은 그에게 "지금 정부에 조선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고 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처에 배포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하려고 한다"며 동참을 권했다. 그는 이에 대해 "청원해서 독립이 된다면 참가하겠다"며 참여의사를 밝혔다. 이틀 뒤인 27일, 권동진이 재동의 김상규 집으로 오라고 통지했다. 그는 오후 3시경 김상규 집에 가서 일본 정부에 제출할 청원서 초안 등을 검토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했다. 그리고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 가서 최종 점검회의에 참석했고 선언서 발표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했음을 통보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 박준승은 태화관에 가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 선언식이 끝나자마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했다. 이후 박준승은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조선 독립의 필요성 등에 대해 소신을 밝혔다.
문: 독립할 필요는 무엇인가.
답: 조선은 4천 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태어)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 회의를 하고 있으므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될 줄로 생각한다.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 신문조서
문: 피고는 조선 독립이 될 줄로 믿고 있는가.
답: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앞으로도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
1919년 3월 20일, 서대문형무소 신문조서
문: 독립운동이란 어떤 일은 하는 것인가.
답: 나는 그 방법은 모른다. 권동진이 일본정부에 청원서를 내면 한번으로는 되지 않을지 모르나, 두 번, 세 번 밀고 나가면 반드시 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대도 가입하라고 했으므로 나도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밤 생각해 보았더니 과연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대단한 후의로써 조선을 이끌어 주고 있다. 그러한 일본이므로 이때에 청원을 하면 역시 인자함이 깊은 일본은 반드시 독립을 허용해 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니 과연 그럴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여 청원서에 날인하게 되었다.
8월 23일, 고등법원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박준승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는 마포 공덕동에 있던 경성감옥에 수감되었고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소했다.

2.4. 이후의 경력

박준승은 출옥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천도교 포교 활동에 전념했다. 1922년 6월에는 중앙종리원 감사(監査)와 종리사(宗理師)로 활동했고, 1925년 4월에는 주간포덕사(主幹布德師)에 선임되었으며, 1926년 4월에는 천도교의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가 되었다. 이시기 천도교는 교리의 수정을 놓고 신파와 구파 간의 대립이 거세졌다. 신파는 최린, 정광조 등이 주도했고, 구파는 오세창, 권동진, 이종린 등이 주도했다. 박준승은 이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 1925년 8월에 결성된 통일기성회 상무위원으로 참여하여 조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천도교는 끝내 분열되었다. 이후 그는 1927년 3월 23일 고향에서 유행성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62세. 그의 유해는 전북 정읍군 북면 마청리 칠보산에 안장되었다가 1965년 6월 정읍시 수성동 충무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준승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