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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정춘수
鄭春洙 | [ruby(禾谷春洙, ruby=かたに しゅんじゅ)] | 카타니 슌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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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5년 2월 11일 |
충청도
청주목 남일상면 두산리[1] (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두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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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1년 10월 27일[2] (향년 76세) |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現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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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저산리 은적산 |
본관 | 광주 정씨(光州 鄭氏)[3] |
자 / 호 | 명옥(明玉) / 청오(靑吾)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가톨릭 (세례명: 바오로)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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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종교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꼽히기도 한다.2. 생애
1875년 2월 11일 충청도 청주목 남일상면 두산리(現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두산리)에서 아버지 소릉(巢陵) 정석준(鄭錫駿, 1829. 1. 3 ~ 1885. 6. 13)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4] 이후 11살 되던 1885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인근의 문의현 동면 인차리·계산리(現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계산리)에서 살다가 작은아버지 석릉(石陵) 정석영(鄭錫永, 1840. 6. 29 ~ 1911. 11. 5)을 따라 청주목 서강내이상면 궁현리(現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궁현리)로 이주했다.1882년부터 1897년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1904년 감리회에 입교하였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원산부 남촌동 128번지(現 강원도 원산시 신흥동)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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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19년 2월 16일 박희도(朴熙道)의 권유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에 참여했고, 2월 26일 원산부에서 김성국(金成國)으로부터 3월 1일에 천도교측 대표들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오화영의 편지를 통해 외국에도 서면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3월 1일 당일, 아침 9, 10시에 원산부를 떠나 경기도 경성부에 도착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를 세 번 불렀다.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에서 본 건을 담당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이른 바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을 본 건의 관할 재판소로 지정했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에 대해 본 건에 대한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공소하여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대 중후반 신간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경기도 포천군(現 포천시)으로 이주했으며, 1949년 1월 16일 포천군 농업협동조합이 창설되자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수배를 받았고, 3월 12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중앙사무국 제3조사부에 자수한 뒤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4월 28일에 검찰부회의의 결의에 따라 불구속 기소되었으나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이 파면되고 출교되었고, 이에 11월 21일 오후 3시 명동성당에서 아내 임눌리(林訥利)와 함께 각각 바오로, 데레사로 영세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특별시에서 은거하다가, 1.4 후퇴 때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現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리에 있던 족손(族孫) 정인환(鄭仁煥)의 집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병석에 눕게 되었고, 1951년 10월 27일 그곳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청주 우암산 중턱에 조성된 삼일공원에 민족대표 33인 중 정춘수를 포함한 충북 출신 6인의 동상이 있었는데 정춘수의 친일 행적이 알려진 뒤 시민단체에 의해 정춘수의 동상이 철거되고 좌대만 남아 있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횃불 조형물이 대신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