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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8:10

박동완(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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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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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월북, (日):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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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동완.jpg
출생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
사망 1941년 2월 23일 (향년 57세)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근곡(槿谷)
국적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국
본관 함양 박씨
직업 독립운동가, 목사
종교 개신교( 감리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3.1 운동2.3. 신생명운동2.4. 신간회2.5. 하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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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박동완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박형순(朴馨淳)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감목관(監牧官)을 역임했고, 형 박동원(朴東元)은 유생으로 1894년 식년생원시에 응시해 3등 202위로 급제하였다. # 박동완은 5살 때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13세에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했다. 그는 양사동소학교, 관립고등소학교,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해 영어를 배웠고, 한성외국어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했다. 그가 기독교 신자가 된 때가 언제이며 그 계기는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그가 배재학당 대학부에서 공부하는 동안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확실하다. 그는 1908년 G.H. 존스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고 정동제일교회에 꾸준히 출석했다.
1915년, 박동완은 31세의 나이로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설립된 기독신보사에 입사해 서기와 주필로 활동했다. 또한 정동제일교회 본처전도사로서 사역하기 시작했고, 주일학교 교장과 엡윕청년회 회장을 겸임했다. 그는 주일학교운동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1919년 1월 <주일학계>에 기고한 '무디선생과 주일학교'는 십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아가던 무디가 1856년 5월 18살의 나이에 보스턴에서 주일학교에 출석한 뒤부터 음주와 오락을 금하고 주일학교 교사 킴볼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새사람이 된 것을 강조했으며, 무디의 주일학교운동을 모범으로 삼아 유익함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일학교의 조직'라는 글을 기재했는데, 이 글은 주일학교는 일반학교와는 다리지만 교육학의 원리로 가르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면서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구원의 가치가 크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2. 3.1 운동

1919년 2월 중순, 박동완은 기독신보사에서 YMCA 간사 박희도를 만나 3.1만세운동 계획에 대해 전해들었다. 이후 2월 27일 박희도로부터 3.1운동에 가담할 것을 요청받은 그는 이를 수락하고 이필주의 사택에서 열린 기독교 대표자 모임에 삼석해 이승훈, 이갑성, 함태영, 박희도, 최성모, 김창준, 오화영, 신석구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초안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심의했다. 또한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개최된 회의에도 참석한 그는 3.1운동의 거사 장소와 일정 등을 논의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박동완은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전화를 받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경성지방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진심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앞으로도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문 : 피고는 조선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 그렇다. 일본과 여러 나라가 허락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문 :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 물론 그렇다.
경성지방법원 심문조서
문 : 피고는 이러한 운동방법을 실행하면 어떻게 해서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는가.
답 :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을 병합했으나 그처럼 조선이 독립을 바란다면 한층 동양의 평화를 완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독립을 승인해 주자고 승인할 것으로 생각했다.
문 : 피고들이 말하는 민족자결은 어떤 의미인가.
답 : 자기의 나라를 자기가 다스려가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한다.
문 :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이 피고의 소위 민족자결에 해당한다는 의사가 아닌가.
답 :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문 : 독립한다는 의사를 발표하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답 : 나는 조선민족이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독립시키고, 그렇게 승인 받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나는 독립하는 것이 민족자결이 아니라 독립을 하면 그것이 민족자결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 : 요컨대 열국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움직여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다는 취지가 아닌가.
답 : 그렇지는 않다.
문 : 그러면 미국 대통령 또는 열국 대표자에게 청원서를 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답 : 그것은 단순히 열국에게 조선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을 알리는 통고에 지나지 않는다.
문 : 그러면 독립을 선언하기만 하면 벌써 독립한 것이 되는가.
답 : 그렇다.
문 : 그러면 3월 1일로써 조선은 독립되었고 자주민이 되었다는 것인가.
답 : 그렇다.
문 : 그렇다면 피고의 민족자결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답 : 나는 그런 식으로 하여 독립하고, 그리고 뒤에 우리들이 우리들의 나라의 정치를 하는 것이 민족자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경성고등법원 심문조서
이후 박동완은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소했다.

2.3. 신생명운동

박동완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이 아파서 1년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1년간 몸을 추스른 그는 기독신보사에 복직했고, 1923년 7월 <신생명(新生命)>이 창간되자 <신생명>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생명>에 여려 편의 논설을 게재했다. <그리스도의 감화력>이라는 논설에서, 박동완은 윤리학자가 힘주어 설복하여도 어찌하지 못하는 죄인을 기독교의 전도인들은 성경 한 구절로 회개시키며, 정부의 위력과 철학자의 박식으로도 감화시키지 못하는 사회를 세인이 경시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복음을 전하여 그것이 마음에 부딪칠 때 사회가 진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사회가 여러 가지로 무력의 부르짖음이 있는 이때가 그리스도교의 힘의 실현을 재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즉, 그는 기독교가 무기력한 조선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느 가장 강력한 힘의 원천이라고 인식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종교와 우리의 사명>이라는 글에서, 박동완은 현재의 우리는 시대문명에는 뒤졌으나 영적신앙에서는 앞서나가는 민족이라고 주장했고, '권두언'이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는 살을 점이는 듯한 겨울바람이 지나가면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오듯이 우리의 인생에서도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快樂으로, 눌림에서 자유로의 기쁜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의 맞고자 하는 예수'라는 글에서는 금력(金力)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의 정신으로 감화케 하는 예수를 맞고자 하며, 부의 힘을 빙자(憑藉)하지 않고 오직 인생을 구원코자 하시는 예수를 맞이하며, 금력을 본위삼아 참 예수의 정신을 잃은 자들이 내세우는 예수는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박동완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와 '계급투쟁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기했다. 그는 자본가와 노동계급이 충돌하는 현실사회에서 자본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불완전한 사회조직을 변경해야하며, 노동계급은 투쟁으로서 파괴만을 주장하지 말고 이타주의와 서로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이상적인 새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맑스 사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금전만을 강조하여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비판했으며, ‘물질주의에 기울어지는 배금주의의 파문이 신성한 그리스도교회까지 파급’된 점을 지적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불철저한 물질생활에 어리석은 노예가 되지 말고 참 생명을 위하여 초월적 신생활로 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동완은 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하는 일요강화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의로운 청년’, ‘우리의 준비’, ‘우리의 자랑’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분발을 독려했으며, 주일학교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1923년 여름에 한국 최초의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설립하고 개회사에서 실업을 장려하는 것보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려는 아동과 청년을 구하여 고결하고 쾌활한 인격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최고이자 최선의 방책이며, 나무를 심는데도 100년을 내다보는데 하물며 사람을 받꾸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니 어릴 때 인격을 제대로 잡아주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25년 3월 23일, 박동완은 신흥우의 집에서 이상재, 안재홍, 윤치호 등 국내의 기독교계 명망가들과 함께 흥업구락부를 조직했다. 흥업구락부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지회의 국내조직이었다. 조선민립대학 설립과 기독교청년회를 통한 농촌운동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박동완은 1924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로 촉발된 감리교 감독 웰치의 친일 발언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웰치 박사는 조선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던 배 안에서 기자들에게 "한국은 독립사상을 포기했으며, 조선은 점차 안정되어 물질적으로 향상되는 중이며, 지금은 그전의 평화를 되찾았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감리교 청년회 회원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이에 박동완은 청년회를 대표해 이에 대한 진상을 조사했다. 그는 자신의 명의로 뉴욕에 있는 웰치에게 전보를 보냈다. 웰치는 노불 목사를 통해 신문이 거짓말을 했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 사실을 대외에 알리면서, 당국이 웰치의 답변이 게재되었던 신문을 압수해버려 일반인들이 이를 알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운동에 힘을 기울이는 <신생명>을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번의 발행중지 조치를 내리다가 1924년 4월에 폐간시켰다.

2.4. 신간회

박동완은 1926년 3월 천도교 구파와 제2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의 주도하에 개최된 회의에 참석하여 민족협동전선 단체로서 국민당을 결성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1926년 말에는 권동진, 한용운, 최익한(崔益漢), 홍명희 등과 함께 신간회를 창립하기 위해 개최된 협의에 참석하여 신간회 내에서 기독교 세력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이상재가 기독교계를 대표해 신간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박동완은 총무간사로 선임되었다.
1927년 5월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를 설립하고 신간회 내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려 하자, 박동완은 그해 11월 안재홍, 권동진, 이관용, 신석우 등과 함께 '신간그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자들의 대두를 견제하는 동시에 자치운동파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었다. 또한 그해 12월 10일에 개최된 경성지회 정기대회에서 임시집행부의 부의장 및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2월 20일엔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이관구(李觀求) 등과 함께 본부대표로서 신간회의 취지에 대해 연설했다. 그리고 1928년 3월 21일에넌 경서지회 설립대회에 참가하여 연설했으며, 1928년 7월 16일에는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창립된 근위회의 전국대의원 초청대회에 참석하여 '환영사'를 발표했다.
1927년 7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수리관개사업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한국과 중국 사람이 사망하는 피해와 막대한 재산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만보산 사건) 박동완은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과 같이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설립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실태를 조사하고 한국과 중국 양국민의 화합에 힘썼다. 그러나 일제는 신간회에 참여한 인사들의 대한 견제를 점차 강화했고, 박동완은 이대로 가다간 일제에게 체포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1928년 8월 25일 하와이로 떠났다. 실제로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광주 학생운동의 배후에 신간회가 있다고 판단하여 안재홍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을 구속시켰고, 신간회는 얼마 후 해산되었다.

2.5. 하와이

박동완은 하와이에서 '와히아와교회의 초대 목사로 부임해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열어 교포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또한 1931년 6월에는 하와이학생 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일시 귀국하여 동포들의 근황을 전하고 화와이 교민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강연했다. 그리고 1934년에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보>를 재창간해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한인기독교보>에서 '생명은 힘이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다. 그는 이 논설에서 조선 사람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힘이 아니고는 구원할 힘이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신실하게 살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조선감리교회 선교 50주년을 맞으면서>라는 제목의 논설에서는 국내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합쳐 완전한 조선교회를 만들자는 여론이 차차 불거지고 있다며 그 귀추에 주목했다.
1935년 1월, 박동완은 중앙이사국장에 취임해 이승만 등과 함께 한인기독교회를 이끌었으며, 동지회의 와히아와지방 대표로도 활동했다. 또한 1938년 8월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으로 제28주년 국치기념대회를 거행했을 때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이렇듯 하와이에서 목회활동을 벌이던 그는 1941년 2월 23일 호놀룰루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57세. 그의 유해는 한달 뒤 국내로 돌아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동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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