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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2:13:07

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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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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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친일 행적으로 인한 서훈 취소 }}}}}}}}}}}}

헤이그 특사 3인
<rowcolor=#fff>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관 이위종
헤이그 특사
이위종
李瑋鍾|Yi Wijong[1]
파일:yiwijong.png
<colbgcolor=#b22222><colcolor=#fff> 별칭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2]
본관 전주 이씨(全州 李氏) 광평대군[3]
출생 1884년[4] 1월 9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
사망 1924년 이후(향년 40세 이상)
사망지 미상[5]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대한제국|]][[틀:국기|]][[틀:국기|]] →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
[[소련|]][[틀:국기|]][[틀:국기|]]
직업 독립운동가, 외교관(대한제국), 군인(러시아 제국)
학력 프랑스 장송드사이 고등학교
프랑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러시아 제국 블라디미르 사관학교
가족 조부 이경하(李景夏)
숙부 이범윤(李範允)
이범진(李範晋)
풍양 조씨(豐壤 趙氏)
형 이기종(李璣鍾)
부인 옐리자베타 놀켄(Елизавета Нолькен)
슬하 삼녀, 베라(Вера, 1906), 니나(Нина, 1909), 예브게니야(Евгения, 1912)
종교 유교 러시아 정교회 무종교( 무신론)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헤이그 특사2.3. 이후의 활동
3.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 외교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부친 이범진과 연해주 크라스키노(Краскино)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범진의 자결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 국적을 취득하여 육군 소위로 복무하였다. 러시아 내전 시기에는 볼셰비키 소련 공산당에 가담하여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유서 깊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국제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에서 최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한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이 근대 세계를 질주한 사람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84년 1월 9일 한성부에서 아버지 이범진과 어머니 풍양 조씨(1855 ~ ?)[6]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로 '낙동염라'로 통했던 흥선대원군의 심복 이경하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이경하가 기생 과의 사이에서 얻은 서자 이범진이었다. 이범진은 왈패 기질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오죽하면 장안에 소문난 주먹패의 두목 민영주와 마주치자 장작개비 하나로 민영주를 두들겨 패 놓았을 정도였다. 젊어서는 경력을 쌓으라는 고종의 배려로 지방관으로 나가면 탐관오리로 맹활약했는데 황현은 < 매천야록>에서 '젖먹이 호랑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7]

그랬던 인물이 나라 밖으로 나가고 외교관이 되면서 변했는데 1903년 용암포 조차 사건 당시에는 러시아 측에 용암포 조차 각서 제출을 거부해서 본국 송환 조치당했을 정도였다. 정가에서 유명한 친러파였고 억센 기질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춘생문 사건의 주역이었고 결국 아관파천을 성공시켰다. 이후 법부대신이 되어 을미사변 수사를 맡았는데 거침없는 수사로 일본의 기피 대상이 되었으며 일본의 견제가 심해지자 고종에 의해 1896년 주미 공사로 발령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둘째 아들이었던 이위종이 어머니 조씨와 함께 미국으로 동행했다.[8] 이후 긴 세월 서구 각국을 거쳐 성장하면서 머리가 이미 굳은[9] 아버지의 부족한 외국어 능력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범진이 미국으로 떠났을 때 이위종의 나이는 10살로 미국에서 4년을 보내고 러시아 공사가 된 이범진을 따라 다시 러시아로 떠났으며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중등 학교와 초급 장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아버지를 보좌했는데 그는 여러 언어에 능통해 7개 외국어가 가능했으며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에 특히 유창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러시아 귀족의 딸과 국제결혼을 했고 후일 러시아에 귀화했다. 이위종은 1905년 옐리자베타 놀켄(Елизавета Валерьяновна Нолькен)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발레리얀 놀켄(Валерьян Карлович Нолькен)은 남작 작위를 가진 독일계 러시아인 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주재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출신이었다. 관련 기사 집안에서는 이위종이 공연장에서 옐리자베타 놀켄을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의 오빠와 먼저 친구가 된 뒤 구애 작전을 펼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집안 구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라는 러시아어식 이름도 받았다고 한다.[10]

2.2. 헤이그 특사

파일:인디펜던트 이위종.jpg

1907년은 이위종의 생애 전체에서 가장 주목받는 해가 되었는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한 특사가 되어 활약했다. 이위종은 부사가 되어 경성에서 출발한 부사 이준, 이준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한 이상설과 함께 1907년 6월 중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독일 베를린을 거쳐 1907년 6월 24일~25일경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위종은 외국어 실력으로 모든 외교 문서 작성과 인터뷰를 전담하게 되었다. 이들 헤이그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했지만 이 와중에 이위종은 우연히 세 특사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의 눈에 띠어 1907년 7월 5일자 <만국평화회의보>에 대서 특필되었다. 이 신문은 당시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모인 와중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던 매체로 이위종은 이 인터뷰에서 직설적이면서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했다.
스테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 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
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위 인터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사 세 사람의 사진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되었는데 이것이 기회로 연결되어 4일 후인 1907년 7월 9일 세 특사는 각국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 초청받았다. 이위종은 이 자리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 코리아의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펼쳤는데 이 연설문 전문은 윌리엄 스테드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었고[11]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시민 활동가들을 상대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듯하다.
일본인들은 항상 큰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 문명인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개방 정책을 유지하며 모든 국가에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그들은 변합니다. 놀랍게도 원통하게도 그들은 모든 나라에 대한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 대신 추하게, 불의하게,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결정적로 야만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을사 조약은 우호적으로 체결되었지만,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그 뒤통수를 치는 일본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 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위종은 현지 언론에 '대한제국의 왕자' 쯤으로 소개되었는데 물론 이위종이 전주 이씨이기는 하지만 이미 조선 초에 왕통에서 갈라져나온 방계인 광평대군파다.[12] 1907년 7월 11일 이위종은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러시아로 떠났다.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죽음을 맞자 이위종은 1907년 7월 18일 헤이그로 돌아왔으며[13] 이상설과 이위종은 영국을 거쳐 1907년 8월 1일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고종 자신이 을사조약을 비준한 적이 없으며 조약은 무효임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상설과 이위종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들은 1907년 9월 1일 헤이그로 돌아와 뉴 아이큰다우 묘지에 묻혀있던 이준의 유해를 뉴브다이컨 묘지로 이장하고 파리, 런던,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에서 구국 연설회를 개최했다. 구국 연설회 후 이상설은 미국으로 향했고 이위종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이러는 사이 서울에서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에 대한 궐석 재판이 열렸으며 이상설은 사형, 이준과 이위종은 무기징역형이 내려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위종은 일본뿐 아니라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만행도 고발했다.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던 한국 국민과 정부는 애원과 희망으로 일본인들을 환영하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을 엄격히 처벌해 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 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해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 진출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문명국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 하기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이위종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15-16
이위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근대사상의 조류들이 유행하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철저한 근왕주의자인 이범진보다 정치사상 면에서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1896년 7월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부친의 영향으로 나이 어린 야무진 군권주의자의 면모를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07년 7월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을 때에 대한제국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 가혹한 행정 등으로 인해 인민이 고생하고 있음을 인정했을 뿐더러 그러한 정치를 ‘구체제하 정부의 잔혹한 정치’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는 이위종이 고종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1919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국민들만이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쫓지 않고 박해받는 자들의 자유를 위해 진정으로 투쟁할 수 있다”며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이위종의 정치사상이 군권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전환해 갔음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43-44

2.3. 이후의 활동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을 돕는 것으로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고 짧은 생애 중 대부분을 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이범진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의 연금을 받으면서 공관을 버리고 아파트로 옮겨 여권 발급 등의 공사 업무를 계속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를 돕는 것도 주요한 일이었는데 수입원이 없어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받는 상황[14]에서도 계속해서 신한촌 등에 자금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인 신문 창간 등을 주장하고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 연해주에서 크게 활약했던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과 형제였는데 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이범윤과 이위종은 당시 일본의 항의를 받아 연해주 일대의 한인 사회를 감시하던 러시아 측의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1908년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이 들려준 군자금 1만 루블을 들고 장인 놀켄 남작[15]과 함께 연해주를 방문했다.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리더 격으로 부상한 최재형과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을 중심으로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 조직이 구성되었는데 이위종은 자금 지원과 함께 이 조직의 회장으로 중심적인 활약을 했다. 1908년 7월 함경북도 회령 경성 등지로 진출하기도 했으며 # 블라디보스토크 경찰부장은 이위종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끈질기던 이범진도 경술국치 소식에 끝내는 탈진했는지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단 채 권총을 쏘아 자살했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 교외의 우스펜스키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한국, 서울, 덕수궁

황제 폐하께
"우리 나라 대한 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1911년 아버지가 사망한 그 해 이위종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는데 이때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이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1916년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군의 장교인 소위보로 임관한 이위종은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배치되었으며 부인 놀켄 여사는 1917년 이위종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놀켄 여사는 그의 사인이 전투 중 사망인지, 자살인지, 피살인지 확인하려고 애썼지만 사인은커녕 정확한 사망 지역도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었고 1918년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과 함께 러시아군의 동원 해제가 이루어지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1918년 5월 러시아 내전이 본격화되자 그는 놀랍게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고 붉은 군대 산하 '제3국제연대'에 입대했다. 이후 '우랄기관총연대'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초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백군을 격퇴해 이르쿠츠크 탈환에 공훈을 세웠다. 일본 밀정 보고서에서는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모든 재러시아 한인들의 두목'으로 묘사된다. 일제가 그만큼 경계할 정도로 거물급 지도자였던 모양.[16] 이르쿠츠크 탈환 이후 이위종은 군을 나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치타 등지에서 공산당 간부로 활동했다. 그가 자서전을 공산당에 제출한 것은 1924년이고 아쉽게도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이 모든 행적이 가족들에게조차 알려져있지 않았던 이유는 1917년 이후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혁명 활동에만 투신했기 때문이다.[17] 그는 자서전에조차 처자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국 해방과 세계 혁명에 모든 것을 바친 모양.

3. 기타



[1] 외국에 잘 알려진 표기는 'Yi Ouitjyong'으로, 프랑스어 표기이다. [2] 관련 자료 1, 관련 자료 2, 관련 자료 3. [3] 18대손 '종(鍾)'자 항렬이다. [4] 선원속보 무안대군파 권11 26쪽에는 1886년생,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88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5] 소련 추측. [6] 조병탁(趙秉鐸)의 딸이다. [7] 매천야록에 따르면 기생들을 발가 벗긴 다음에 성적인 놀이를 일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범진은 부사로는 임명된 적이 없다. 왈패 기질이나 탐관오리 성향은 있기는 했어도 과장된 소문으로 보인다. [8] 이범진의 장자이자 이위종의 형인 이기종은 나중에 따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며 이범진이 러시아로 옮겨간 후 귀국했는데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직후 일제에 체포당해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이미 객사했다. 이기종에게는 세 아들이 있으나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에 모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9] 원래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하던 인물이었다. [10]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이(Владимира Сергеевича И)로도 알려져 있다. [11] 당시 영미권 신문에 보도된 연설 전문은 링크 참고. [12] 이준 역시 전주 이씨인데 이준은 완풍대군파로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 후손이다. 이게 대놓고 사칭은 아니고 먼 친척이라도 왕족과 연관이 있으니까 왕자라고 소개한 것 같다. 이는 본국에서 들켰다면 큰 스캔들이 되었을런지 몰라도 외국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왕자라고 해야 이야기를 들어 주기라도 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리 칭한 듯하다. 훗날 양녕대군파의 이승만도 비슷하게 프린스로 대접받았으니... 유럽의 왕족 후손에 대한 작위 기준에 대해서는 프린스(작위) 항목을 참조. [13] 장례식에는 이상설만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준의 사망과 장례식은 7월 16일, 이준의 사인에 대한 이위종의 인터뷰는 7월 20일 보도됐다. [14] 러시아 제국은 한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지속한다는 의미에서 이범진에게 소환령이 떨어진 후에도 연금을 지급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연금 지급 기한 만기가 다가오자 대한제국에서 온 공사가 생계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방치당하는건 자존심 문제라는 이유로 2년간 연금 추가 지급을 약속했다. [15] 러시아 토볼 주의 총독이었다고 한다. [16] 이위종이 한인 7,800명을 징집했다고 보고하는데 일본군은 이를 과장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당장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제국이 1차 대전 당시 동원한 한인이 장교 약 100명과 하사관 및 사병 4,034명이었는데 이위종이 7,800명을 징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7] 1911년 부친의 자결 이후 처자식의 생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쓴 모양이다. 이범진의 사후에도 그가 받던 연금이 이위종에게 일부나마 지급되고 있었는데 1915년 이위종의 아내가 러시아 정부에 연금을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 달라는 청원을 보낸 문서가 남아 있다. [18]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 시기였던 2000년대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수훈됐지만 이명박근혜의 보수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수훈을 거부했으며 정권교체가 이뤄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김원봉 훈장 추서 논란을 보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요원했다. 다만 김원봉의 진짜 문제는 월북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북한 정권 설립에 도움을 준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 대접을 못받는다. 예를 들어 북한군의 명장이었던 김책도 충분히 독립유공자가 될만한 행적을 가지고 있지만 독립운동가보다는 민주주의를 위협하였던 장군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