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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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환조의 왕자 완풍대군 | 完豐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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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생전) |
척산군(陟山君), 완산군(完山君) | |
봉호 (추증) |
완산백(完山伯), 완풍대군(完豐大君) | |
시호 | 양평(襄平) | |
본관 | 전주(全州) | |
휘 | 원계(元桂) | |
호 | 불사재(不思齋) | |
부왕 | 조선 환조 | |
생모 | 한산 이씨 | |
부인 |
삼한국대부인
남평 문씨 (三韓國大夫人 南平 文氏)[1] 순정택주 안성 김씨 (順靜宅主 安城 金氏)[2][3] |
|
자녀 | 4남 4녀 | |
묘소 |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경흥리 (現 함경남도 함흥시 회상구역 동흥리) |
|
생몰 기간 |
음력 | 1330년 미상 ~ 1388년 10월 23일 |
[clearfix]
1. 개요
고려 후기의 무신. 환조 이자춘의 장남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 봉호는 왕조의 본관인 전주(완산)에서 따서 추봉했다.2. 생애
1330년(충숙왕 17년)에 환조 이자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한산 이씨는 이원계가 4살 때 죽었고 이자춘은 최씨와 결혼하여 이성계를 낳는다.[4] 또 이자춘은 김씨와도 결혼하여 이화를 낳는다.완풍대군 이원계는 환조 이자춘의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생모 한산 이씨가 이원계가 4살때 일찍 사망하자, 천호이면서 부유한 최한기의 딸 최씨 아래서 자라면서 후계자 경쟁에서 무력이 뛰어난 이성계에게 밀렸고, 조선 건국 후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이성계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서장자로 격하된 것으로 보인다.
추측이 아니라 문헌 증거가 있다. 군공과 혼맥을 바탕으로 고려의 권신으로 자리잡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전 당대 석학 목은 이색에게 아버지 이자춘의 신도비 작성을 의뢰한다. 이색이 지은 이자춘 신도비 원본(1387년, 우왕 13년 작성)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공은 무릇 세 번 장가들었다[三娶].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원계(元桂)이다. (중략)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는데 증 문하시중 영흥부원군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성계(成桂)라고 한다. (중략) 김씨(金氏)는 정안택주(貞安宅主)를 봉하였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화(和)라고 한다. -
동문선 제 1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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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계의 이름에 으뜸원 元을 사용하는 실질적 장자가 맞으며, 한국사 전체로 보아도 넉넉하게 명장 클라스에 들어가는 동생 이성계보다 무인으로서 자질은 열세였으나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결혼 풍속을 따른 환조 이자춘은 15세에 당시 기록에 남을 유력한 집안이 아닌 첫째 부인을 두어 2남1녀를 낳았고, 한산이씨가 사망(1334년) 후 재력이 있고 정치적으로 유력한 천호 집안인 조조(후에 최한기로 개명)의 딸과 재혼(1334년)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태조 이성계의 제1비인 신의 왕후 한씨 소생인 태종 이방원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제거한 명문에서 적서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사후 개국공신 녹권에서 위화도 회군이 있던 해에 사망한 이원계는 제외되고, 태종 때 작성한 태조실록과 신도비 등의 자료에서 한산이씨(이원계 4세 때인 1334년 사망, 환조는 의혜왕후와 재혼 후 1335년 태조 이성계 출생)는 제1부인이라는 말 대신 측실이란 표현이 생겨난다. 이에 대해 이원계의 장남 안소공 이양우는 병을 핑계로 등청을 하지 않는 등 강력한 불만제기를 했고, 이후 안소공 이양우는 공식적인 기록에는 회안대군 이방간과 연락한 것 때문에 귀양을 간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이 가족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1361년 홍건적 20만이 고려를 침공해 공민왕이 파천하고 개경이 함락되었다. 고려는 안우, 이방실, 김득배 3원수를 중심으로 개경 수복에 나섰는데 이원계는 안우 밑에서 종군해 조천주, 정리(鄭履), 장신보(張臣輔), 홍선(洪瑄), 정선(鄭詵) 등과 함께 보기 400을 거느리고 박주로 진격해 홍건적 100여 명을 참했다. 이 공으로 2등 공신에 녹훈. 척산군에 봉군되었다.
1377년 왜구가 강화를 노략질하자 나세 등과 함께 이를 요격했다. 1380년에는 원수(元帥)로서 전라도로 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동년에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로 재직하면서 변안열과 함께 이성계와 남원과 운봉에서 왜구와 전투를 벌여 이겼다. 황산대첩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해 함께 싸웠다.
1388년 제2차 요동정벌 때 우군도통사 이성계 밑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원정을 떠났으나 위화도 회군이 벌어졌고 바로 그 해에 사망했다. 무덤은 함흥의 정릉(아버지 이자춘(환조)의 능)의 우측에 있으며 선원사와 북청의 삼의사에 모셔져 있다.
3. 평가
흔히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여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원계가 위화도 회군에 반대한 정황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위화도 회군에 가담했던 이들 중에서 반역자 취급받고 제거된 6명을 제외한 이들을 1390년 무진회군공신으로 임명했는데 이원계는 이미 사망한 인물임에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조선 개국공신 명단에 없다는 걸 근거로 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성계의 명분 문제로 배제되었다고 봐야 한다. 즉, 우연히 위화도 회군이 발생한 1388년에 죽었을 뿐이다. 이원계가 자결했다는 주장조차 근거가 전혀 없다.무엇보다 위화도 회군은 당시로서는 고려에 대한 반역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몽주가 창왕 때까지 이성계의 국정 파트너로 있었다. 최영과 우왕의 요동정벌이 워낙 무리수라 회군의 명분은 충분히 있었고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 뜻이 맞았기 때문이다. 창왕이 명나라 조정에 친조할 수 있게 청하는 사신이 총 3번 파견되었는데, 이 때까지 이색과 이성계 측은 의견을 같이 했다. 이성계가 정창군 왕요를 밀고 이색과 조민수가 창왕을 밀었다는 < 고려사> 기록은 우창비왕설 등장 이후 꾸며낸 기록이다. 이색이 직접 참여한 1번째 사행 때는 이방원이 서장관, 강회백이 이끈 2번째 사행 때는 이방우가 부사로 참여할 정도로 양측은 호흡이 맞았다. 창왕의 친조가 받아들여지면 명나라가 창왕의 정통성을 보증해준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색 입장에서도 창왕이 폐위당한 우왕에게서 기인하지 않는 정통성을 가지고 지위를 굳힐 수 있으니 이득이고, 이성계 입장에서도 창왕의 즉위가 정당화되면 창왕의 즉위를 초래한 위화도 회군도 정당화되는 셈이니 역시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사신 파견에 맞춰 요동정벌의 책임자 최영을 처형하고 이를 명나라에 알리는 등 양측은 이 부분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다가 홍무제가 우왕을 유폐하고 창왕을 옹립한 것을 반역으로 보고 친조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온건파인 이색 측은 계속 창왕의 친조를 청하자고, 급진파인 이성계 측은 명나라에서 친조 요청을 거부한 것을 빌미로 창왕을 쳐내고 새 왕을 옹립하자고 하면서 갈등이 벌어지고 공양왕 시기 들어서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지만, 위화도 회군 시점에서 이걸 반역이라고 간주하며 절명시를 짓는다는 건 이원계에게 예언 능력이나 독심술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위화도 회군 참여자 내에서 다시 개국 찬성파와 반대파가 갈리고 대립하기 전까지는 똑같이 고려의 중흥공신이었다.
사망 후 490년이 지난 1872년이 되어서야 완풍대군(完豐大君)으로 봉해졌다. 태조 윗대 목조 이안사~환조 이자춘의 아들들은 1872년에 일괄적으로 봉군되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충성 여부와는 아무 상관없다. 차라리 정통성 문제로 묻어버렸다는 모를까.
애초에 이성계에 반발한 이들을 다 고려의 충신으로 뭉쳐서 봐서도 안 된다.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은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의도를 정몽주에게 몰래 알려줬던 인물인데, 조선 건국 이후에도 관직을 이어가다가 정도전의 사람이란 명목으로 1차 왕자의 난 때 제거되었다. 그런데 변중량의 아우 변계량은 형을 죽인 태종 아래서 아무 일 없이 봉직했다. 남은은 1차 왕자의 난 때 척살되었지만 그의 형 남재는 영의정부사까지 역임하고 세종 때까지 생존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관맥, 혼맥, 학연, 혈연 문제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어느 한 쪽으로 단언지을 수 없다.
이건 고려말의 소위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후대의 훈구와 사림 구분론이 지금은 별 의미없다는 결론이 난 것과 동일하다.
4. 여담
- 후대에 고려 충신설이 퍼지면서 아예 절명시가 만들어졌다. 실제 이원계가 지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사육신 절명시와 마찬가지로 후대에 누가 만들어 붙인 것이다. 이 절명시는 1908년 17대 종손 이철재가 진정(陳情)해 순종의 윤허를 받은 후 무덤을 수축할 때 지석(誌石)에 음각되어 있는게 발견되기도 했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三韓故國身何在 삼한고국신하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地下願從伯仲遊 지하원종백중유)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오, (同處休云裁處異 동처휴운재처이)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荊蠻不必海桴浮 형만불필해부부) |
5. 가족
- 부 환조
- 모 한산 이씨(李氏, ? ~ 1334년)
- 계모 의혜왕후
- 이복동생 태조 이성계
- 부인 삼한국대부인 남평 문씨
- 장남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
- 장손 선평군 이흥발
- 손자 선성군 이흥제
- 손자 선산군 이흥로
- 차남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 손자 여양군 이굉
- 손자 여성군 이완
- 손자 여흥군 이선
- 장녀 이씨
- 사위 : 고려 밀직부사, 삼사부사 이인우(홍건적 1차 침입 격퇴, 2차 침입때 전사)
- 부인 삼한국대부인 안성 김씨(안성군 찬성사 김용의 딸)
- 3남 완평군(完平君) 이조(李朝)
- 손자 여안군 이군실
- 4남 완녕군(完寧君) 이백온(李伯溫)
- 손자 여강군 이영석
- 차녀 신혜택주 이씨(信惠宅主 李氏)
- 사위 노신(盧愼)
- 사위 : 결성군(結城君) 장담(張湛) : 동지중추원사, 개국공신 2등, 정사공신 2등
- 3녀 화경택주 이씨(和敬宅主 李氏)
- 사위: 우부승지 변중량(변계량의 형) → 사위 유정현(柳廷顯)
- 4녀
- 사위 : 한림학사, 문하사인 홍로(洪魯) → 사위 청주목사, 판중추부사 변처후(邊處厚)에 재가
그의 아들들(이양우, 이천우, 이조, 이백온)은 작은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왔고 그의 5남이자 3대 국왕인 이방원의 집권을 돕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이 4명의 조카들을 우대하여 4형제 모두가 조선의 왕족으로서 주요 관직을 지내었다.
다만, 이백온의 경우는 분명하지 않은데, 1387년에 쓰인 이자춘 신도비문에는 이원계에게 네 아들(양우, 천우, 조, 서)이 있다고 나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서가 빠지고 이백온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
그런데 이백온이 이서와 동일인물이라면, 그 아들에 대한 사실이 엇갈린다.[5] 《선원계보기략》과《선원속보》에 따르면 이서에게는 이영석(李永錫)이라는 외아들이 있고, 《씨족원류(氏族源流)》에 따르면 이백온에게는 이석정(李石貞)을 포함하여 2남 2녀가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백온의 자식으로 이석정만이 등장한다. 참고로 이석정은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는데, 그 후 정조 때 장릉(莊陵) 묘역에 배향되었다.
대동종약원에 따르면 완풍대군파는 59,813명으로 파악된다고 한다. 장남 완원부원군의 후손은 묘소가 있는 양평과 종가가 있었던 서울에서 많이 살고, 총합은 12,000여 명 정도가 된다. 차남 완산부원군의 후손은 모시는 묘장서원이 있는 영광군에서 무려 500년간 20대째 정착해서 살았다. 현대에는 영광을 중심으로 전남 광주권에 12,040명, 전남 남부에 3,700명, 전북에 7,120명, 수도권에 10,000명으로 파악된다. . 완남군 후손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수여리를 중심으로 강원에 3,550명, 총 4,753명이다.
유명 인물로는 병조판서, 이조판서,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하고 종묘의 태종 묘정의 배향공신인 완산부원군 양도공 이천우, 고종때 중앙은행 총재, 탁지부 대신을 역임하고 일본의 한일의정서(1904년) 체결을 반대하다 일본에 납치되기도 한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이용익[6]과 그의 손자이자 보성전문학교 2대 교주(校主)인 독립운동가 이종호, 헤이그 특사사건의 이준[7], 국무총리를 역임한 민주당 당대표 이낙연[8] , 법제처장을 역임한 이석연, 노동부장관을 역임한 이기권, 전 국회의원 이성헌과 이진연- 이상일 부자 등이 있으며 임진왜란때 의병장 이응종, 조선말기에 많은 의병장 이기백, 이화삼 등이 있다 .
6. 대중매체에서
- 1994 <역사의 라이벌>에서는 고 박영목이 연기했다.
-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박해상이 연기했다. 이복동생인 우군도통사 이성계 아래에서 조전원수로 참전하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결정에 "이건 고려에 대한 반역"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회군 결정 철회를 요청한다. 허나 이성계의 마음은 정해졌고 그 와중에 다른 장수들이 회군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진중에서 처형당하자 집행을 막고자 급히 뛰어오나 이미 처형은 끝난 후였다.
[1]
문익점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문익점이 1329년생, 이원계가 1330년생, 이원계와 문씨 사이의 장남 이양우가 1346년생인 점을 보면 신빙성은 낮아 보인다.
[2]
안성군(安城君)
김용(金鏞)의 딸
[3]
《선원계보기략》이나 《전주이씨완풍대군파세보》 등에 모두 경주 김씨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착각이거나 오류인 듯하다.
[4]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보》.
[5]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양도공종중에서는 이백온과 이서의 동일인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된 게 없는데, 《전주이씨 양도공파세보》에서는 동일인물이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지만
홈페이지에서는 동일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6]
이원계의 맏아들인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5대손
[7]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6대손
[8]
이원계의 둘째 아들인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의 20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