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7:48:26

윌리엄 스테드

<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윌리엄 스테드
William Stead
파일:1000138060.png
본명 윌리엄 토머스 스티드
William Thomas Stead
출생 1849년 7월 5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노섬벌랜드주 엠블레턴
사망 1912년 4월 15일 (향년 62세)
북대서양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언론인
자녀 6명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언론인.

2. 생애

노섬벌랜드주 엠블레턴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부터 영문학, 라틴어를 수학했으며 졸업 후 1870년 달링턴에 있는 진보 언론 노선 에코에 입사해 언론계에 투신했다.

최초로 신문과 잡지의 보도에 삽화를 삽입하는 보도 기법과 현재 모든 기자들이 조사를 위해 반드시 하게 되는 인터뷰 기사 형식을 만들어냈다. 진보적인 성향이였으며 사회 고발에 상당히 적극적인 인물이였다. 아동 매춘에 대해 폭로해 법 개정을 강하게 요구했고 1901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의 헤이그 특사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대한제국의 처지에 개인적으로 동정을 보인 각국 대표단들은 많았지만 러시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대표단들은 자국의 계산된 국익을 따라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다. 오직 스테드만이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을 거절당한 헤이그 특사 인터뷰를 당시 특별 발행되던 만국평화회의보에 실어주었으며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

이후에 헤이그 특사와 국제 기자단간의 기자간담회도 성사시켰다. 이준의 급사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특사의 목표는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노력 덕에 현재 알고 있는 헤이그 특사 관련 보도가 남아 있는 편이다.

1912년 뉴욕으로 향하는 타이타닉호 1등석에 승선했으며 항해 중 북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하자 자신이 탈 수 있는 구명정을 타인에게 양보했고 흡연실에서 독서를 하다가 같이 있던 인원들과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