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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21:01:56

정광조

<colbgcolor=#000><colcolor=#fff> 정광조
鄭廣朝
창씨명 가와카미 히로아사
川上廣朝
도호 현암(玄菴)
출생 1883년 8월 30일
충청도 음성현
(現 충청북도 음성군)
사망 1951년 3월 13일 (향년 67세)
부산광역시
가족 배우자 손광화
학력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 졸업)
종교 천도교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1]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독립운동2.3. 친일 행적2.4. 해방 이후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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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종교인. 한 때는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1996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2.1. 초기

1883년 8월 30일 충청도 음성현(現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1년 동학에 입도한 뒤 1905년 일본에 건너가 에도객사에서 공부하다가 도쿄 세이소쿠(正則)중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후 도쿄제일고등학교 제1부 법과에 입했다. 1년 후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했다.

2.2. 독립운동

졸업 후 귀국한 그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딸 손광화(孫廣嬅)와 결혼했고, 이후로 출세를 거듭하여 천도교 중앙종리원 현기사의 서계원에 선출되면서 중앙교단에서 활동했다. 이후 천도교 대종사장을 맡았던 그는 1919년 2월 손병희가 독립선언계획을 기획할 때 측근으로서 적극 가담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 박인호 등과 함께 실무를 맡았으며, 사후 수습을 위해 민족대표 33인에서는 빠졌다.

1919년 5월 의친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했던 전협 등 대동단의 계획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20년에는 신숙을 천도교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조달, 제공하기도 했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교감으로 취임했으며, 1922년에는 이사로 재직했다. 또한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을 맡았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신파 종리사, 포덕과 주임을 맡았다. 1930년 조선농민사 고문을 역임했으며, 1930년 12월 대령에 오른 후 1944년 4월까지 대도정, 고문, 상임헌법사, 상주선도사, 교령 등 천도교단의 최고위직을 역임했다.

2.3. 친일 행적

1934년 8월 친일단체인 시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친일 행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교단 내 주요 간부이자 최고책임자로서 '교발(敎發)' 등 천도교 공문과 각종 기고, 강연 등을 통해 천도교단과 교인의 전시체제 협력을 주도하고 일제의 침략전쟁과 황민화 정책을 지원했다.

1940년 4월 신파와 구파의 합동으로 구성된 천도교총부 상주선도사에 선출된 후 간부 공동 명의로 '교발 제2호'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아 신질서 건설, 도의적 신세계 창조, 팔굉일우의 사상 등은 세계 어떤 인류의 이성에도 적합한 보편타당한 이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는 위로 이 정신을 봉대하고 안으로 신앙통일, 규모일치를 견고히 하여 영육쌍전의 생활을 도모하여, 나아가 교화를 주로하여 포덕천하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써 교회의 이상을 삼고자 한다.

1942년 4월 천도교 교령에 선출된 그는 교령 명의로 교발 제3호를 발표해 자신의 뜻을 표명했다.
황민화 문제는 우리 반도인의 유일한 도표요, 최대한의 임무이다. 대동아전쟁은 우리 반도인으로서 황민화하는 천재일우의 대기회인 동시에 전쟁 우 우리 반도인의 행복도 오로지 황민화에 의하여 뿐 자자손손의 영광을 주리라.

1942년 7월에는 "황궁신민의 일원으로서 대동아건설의 중추 분자가 되어야 하며, 대동아 전쟁은 유사 이래 공전의 성전이므로, 우리는 이 성전의 필승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교발 4호를 천도교 교령 명의로 발표했다.

1943년 2월 국어 보급, 강습과 시일헌성에 대한 교령 명의의 '교발 제6호'에서 "황민화는 그 제목이요 국어해득은 그 순화이며, 시일헌성은 전력증강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무물불성(無物不誠)의 표현'이라고 역설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교발'을 발표해 일제를 찬양하고 신도들에게 적극 지원해줄 것을 역설했다. 특히 <교발 10호>에서, 그는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실어 각 부, 군 연맹에 발송했다.
징병제는 그 인식과 실행에 있어서 의무 관념 이상의 숭고한 신조로 생각하자. (중략) 기타 인적자원 징용에 있어서도 당국의 지도를 기다릴 것이 없이 용약자진하여 신국 국민의 본질을 발휘하자. (중략) 우리 반도에도 징병제와 해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었다. 이에 일반 군인 원호 정신을 더욱더 양양, 강화하여 전몰용사의 유가족, 상이군인, 전선 장변의 원호에 철저와 완벽을 기하자.

또, 그는 천도교인의 친일 협력을 촉구하는 강연을 했으며,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41년 3월 상주선도사로서 2차례 시국강연을 했다. 이 시국강연은 1940년 12월 천도교 신체제에 대한 선서식 이후 천도교총부에서 1941년 1월 교령 이종린 명의로 발표한 선서문을 일반 교인들이 철저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서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신국 대일본의 만세일계의 신통적 국체의 봉대를 무상의 광영으로 함. 이를 신의에 체하여 절대 신조로 함.
2.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 신이신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국가적 복지임을 신앙함.
3. 우리는 대정익찬의 정신을 체하여 신도 실천으로써 보국안민의 신조를 현현케 함.
4. 우리는 팔굉일우의 황도정신에 기초하여 세계 신질서 건설로써 포덕천하 동귀일체 이상 도달을 확신함.

한편, 그는 1939년 4월 대동일진회 주최로 열린 이용구, 송병준 추도제에 교단을 대표에 참석했으며, 1939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천도교 연맹이 조직되었을 때 이사에 선임되었다. 11월에 흑룡회가 주최한 일한합병 30주년 원훈 이용구, 송병준, 박영효, 이완용 등의 추도식에도 참석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최한 '애국두채권' 판매에 나서 청량리대 일원으로 채권 구입을 독려했으며,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이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3년 11월 학병 지원을 격려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종교전시보국단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12월에는 천도교에서 주최한 대동아전쟁 전물 장병 위령제에 참석해 초혼문을 낭독했다. 또한 1942년 천도교총부에서 교령 정광조 명의로 발표한 <교발 제3호> '애국헌금 수지명세표'에 따르면, 6월 26일 현재 총 8만 4454원이 모금되었고, 이중 7만 4159원 50전이 지출되었다. 그 내역에 따르면, 육군에 용담호 1대, 해군에 1만원, 방공협회에 1만원이 각각 헌납되었다.

1943년 8월에는 천도교 대표로서 직접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을 방문하여 교인들이 모인 징병제 실시 감사헌금 500원을 전달했다.

2.4.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정광조는 1945년 9월 천도교 총부가 주관한 전국대회준비위원회 교악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천도교총부 장로에 선출되었고, 12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위원, 1946년 1월 기미독립선언 기념 전국대회준비위원회 부회장,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원 등을 잇달아 역임했다.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신했다가 1951년 3월 13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3.1 운동에 가담하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던 계회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받는 등의 행적을 고려하여 1980년 정광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1996년 서훈 취소되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1] 친일 행적으로 인해 1996년 서훈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