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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8:31:40

제1차 장풍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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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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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국민당의 2차 북벌 1928년 6월 8일 북양정부 붕괴
탕산회의 1928년 7월 6일~7월 12일 신중국의 질서 논의
동북역치 1928년 12월 29일 봉천군벌의 항복
편견회의 1929년 1월 1일~1929년 12월 15일 군대 감축 시작
호남 사건 1929년 2월 21일 루디핑 해임
제1차 장계전쟁 1929년 3월 26일~1929년 6월 27일 리쭝런 바이충시의 1차 반란
제1차 장풍전쟁 1929년 5월 23일~7월 12일 펑위샹의 1차 반란
중동로 사건 1929년 7월 10일 장쉐량의 중동로 회수
봉소전쟁 1929년 7월 20일~1929년 12월 22일 소련의 만주 침공
제2차 장계전쟁 1929년 9월 7일~1929년 12월 19일 장파쿠이의 반란
제2차 장풍전쟁 1929년 10월 11일~1929년 11월 20일 펑위샹의 2차 반란
장당전쟁 1929년 12월 5일~1930년 1월 14일 탕성즈 스여우싼의 반란
중원대전 1930년 4월 5일~1930년 11월 4일 옌시산의 반란 }}}}}}}}}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펑위샹의 호당구국군 합류3.2. 국민정부의 펑위샹 체포령 발표3.3. 펑위샹 세력의 붕괴
4. 결말5. 여담6. 참고문헌7. 관련문서
7.1. 인물7.2. 사건

1. 개요

1차 장계전쟁 및 1차 장풍전쟁의 전개 과정

1929년 5월 23일에서 7월 12일 사이, 장제스 펑위샹 사이의 전쟁. 장제스, 옌시산, 장쉐량 사이의 삼각동맹이 형성되면서 펑위샹은 서산파의 정치적 후원 외는 별다른 지원을 얻지 못했고 결국 장제스에게 토벌됨으로 장제스가 승리했다.

2. 배경

리쭝런과 마찬가지로, 펑위샹 역시 정치분회 폐지와 편견회의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펑위샹은 장제스를 견제할 세력인 리쭝런이 1차 장계전쟁으로 토벌되는 것을 보고 크게 불만을 품었다. 이는 장제스가 옌시산과 합작하여 광서파 다음으로 자신을 토벌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군비 분배 문제로 장제스와 충돌했고 3월 12일, 불만의 표시로 군정부장 직을 사퇴했다.

그러던 중 국민당의 2차 북벌로부터 일본 제국의 거류민과 이권을 수호한다는 구실로 산동반도에 파견되었던 일본군이 1929년 3월 28일, 국민정부와의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1929년 4월 말에서 5월 초에 걸쳐 철수했다. 산동반도는 제남 사건 이후 장쭝창의 부하 유진년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유진년은 장쉐량에게 줄을 대면서 장제스에게 토벌당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장쉐량은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했음에도 난징의 간섭에 불만을 품고 유진년과 제휴했다.

장제스는 4월 26일, 구 일본군 점령지를 접수하기로 결정하여 45사단과 신편 3사단, 펑위샹의 부하인 손양성(孫良誠) 휘하의 제2집단군 소속 3군을 북상시켜 이곳을 분할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유진년과 제휴하던 장쉐량도 펑위샹이 1928년 7월, 만주 토벌을 주장한 바가 있고 과거 반봉사건으로 봉천군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장제스에게 탱크 2대 등을 지원하는 등 장제스와 불화가 있음에도 장제스의 산동 접수를 원조했고 또한 펑위샹 견제와 평진 지역의 잡색군 토벌을 위해 옌시산에게도 소총 3천정과 기타 무기, 탄약의 공급을 약속하며 치안유지 협정을 체결했다.

그런데 장제스의 직계군이 부유한 지역을 점령하고 펑위샹의 2집단군이 빈곤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고 45사단과 신편 3사단이 제2집단군 소속 병력을 포위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펑위샹은 격분했고 장풍관계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3. 전개

3.1. 펑위샹의 호당구국군 합류

1차 장계전쟁 당시 동북사성의 치안유지 때문에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던 장쉐량은 장풍관계의 악화가 가시화되자 전과 달리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양해를 얻어 장쭝창에게 탄환 70만 발을 제공했고 4월 19일 오전 5시, 경봉열차를 통해 군사 200명에게 38식 장총탄환 2화차, 추격포 20문, 수제식 기관총 1000정, 포탄 4회차를 산해관으로 수송함으로 펑위샹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했다. 장제스도 4월 28일 우톄성을 봉천에 파견하여 장쉐량과 반풍동맹 체결을 모색했다. 장쉐량은 매우 적극적인 중앙옹호를 표명했다.

한편 베이핑과 톈진의 서산파들은 반장선언을 발표,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반장세력들이 반장대동맹을 체결할 것을 호소하며 당무통일을 위한 국민회의 개최를 주장했다. 서산파는 쉬충즈를 중심으로 펑위샹과 접촉했다. 펑위샹은 이에 반색하며 쩌우루 등을 초청하여 회담했고 쩌우루는 펑위샹, 옌시산을 만나 인민 자유 보장, 기본법 제정, 당원에게 당권 반환 등을 주장했다.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 적극 동조했지만 옌시산은 애매한 반응을 보이면서 반장의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서산파와의 합작으로 고무된 펑위샹은 난징에 파견한 대표들을 카이펑으로 철수시키고 장계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장제스의 공세가 하남으로 향할 것이라 예상하여 카이펑에서 고급군사회의를 개최하여 4월 28일 장제스의 공격에 맞서 한푸쥐, 스여우싼, 마훙쿠이 등에게 병력을 통솔하여 하남성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산동반도의 병력도 철수시켰다. 이에 따라 5월 2일 난징에 머무르던 2집단군 소속 인물들이 일제히 철수했고 산동의 손양성도 철수함으로 펑위샹의 반중앙 움직임은 노골화되었다. 장제스는 4월과 5월에 걸쳐 펑위샹에게 난징으로 돌아와 군정부장 자리를 수행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펑위샹은 이를 거절했고 4월 22일에는 장제스가 친서까지 보내 5월 10일까지 와달라고 한 요청도 무시했다. 이에 장제스는 스여우싼, 한푸쥐 등을 포섭할 준비를 하면서 제2집단군 견제에 들어갔다. 5월 13일 펑위샹도 카이펑과 정저우에 주둔한 한푸쥐, 스여우싼의 병력을 섬서로 철수시키면서 장제스의 추격을 막기 위해 모든 철로를 파괴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명령으로 인하여 평한철로와 농해철로, 무승관 터널, 황하의 철교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하남의 부대들도 모두 흥안 일대로 철수시켰다. 펑위샹의 병력은 동관 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5월 13일 장제스는 펑위샹에게 전보를 보내 1집단군과 2집단군 사이의 군비 배분이 동등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차별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위형편 때문이었다고 변명하며 전국의 세금이 중앙에 귀속되면 더 이상 차별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니 입경하여 유언비어에 맞서자고 그를 회유하려 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장제스의 회유를 무시, 5월 15일 손양성, 한푸쥐(韓復榘)의 추대를 받아 '호당구국군 섬서로군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펑위샹은 3전대회와 중앙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장제스의 하야를 요구했다. 펑위샹은 중앙정부의 차별에 대항한 것이라고 병사들을 선동하는 한편 일부러 급료지급을 중단하여 병사들의 화를 부추겼다. 그리고 중앙에 반대하는 통전을 보내 중앙과 삼중전회의 잘못을 비판하며 장제스 하야를 요구했다.

3.2. 국민정부의 펑위샹 체포령 발표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펑위샹에게 설득 전보를 보내어 그의 반란을 막으려고 했으나 펑위샹은 정부에 대해서 불충한 행동을 취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결국 5월 23일 중앙정치회의 결과에 따라 펑위샹 제명을 결정했고, 5월 24일 국민정부는 펑위샹의 모든 공직과 당적을 박탈하고 체포령을 내리면서 급료지급을 막은 건 펑위샹이라고 선전하였다.
군벌이 탄생하고 그리고 멸망하는 원인은 그들이 국가, 군대를 사용하려고 하는 데에 있다. 이익을 얻지 못하면 그것을 우려하고 얻는 바가 있으면 그것을 잃는 것을 우려한다. 그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일이 도리어 반역으로 나와 스스로 운명의 종말을 앞당긴다. 군벌은 아낄 바가 못된다. 그러나 장병은 아껴야 한다. 장병은 모두 우리 국가의 기초가 되는 힘이다. 군벌이 시키는 대로 하여 인격이나 생명을 팔고 모든 것을 내던져보았자 악명을 받고 죽으면 가련히 여기는 사람도 없다. 정말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닌가. 본디 이 제2집단군에 속해 있던 장병은 모두 중화민국의 장병이지 펑위샹의 장병이 아니다. 제장병은 펑위샹과 오랫동안 유대관계로 맺어져 있겠지만 그 유대도 혁명이 있어야 비로소 유대이다. 펑위샹은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중앙이 전 제2집단군을 차별대우하고 곤궁에 빠져도 원조해 주지 않는다는 따위로 말하여 제장병을 부추겨 중앙에 반항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제장병은 실정을 모르고 있다. 북벌 이후 산동, 하남, 섬서 3개성의 세수입과 평한철로, 농해철로의 수입은 전부 펑위샹의 자유에 맡기고 있다. 게다가 중앙에서는 매월 50만원을 상하이에서 지급했다. 중앙의 재정은 지금 긴박하지만 가능한 만큼의 일은 하고 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펑위샹은 우한으로부터 1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만일 그에게 장병의 고난을 구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왜 급료를 지급치 않는 따위의 짓을 하겠는가. 그에게는 과연 인간의 마음이 있는지가 정말 의심스럽다.
국민정부의 선전

장제스는 주력부대를 하남 서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허잉친, 방본인을 타이위안에 파견하여 옌시산과 제휴하여 펑위샹을 견제하기 위한 장제스-옌시산-장쉐량 3각 동맹을 체결했다. 5월 17일, 장쉐량은 군사비밀회의를 열어 여차하면 장쭤린 시대의 기반을 회복하기 위한 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5월 23일, 장쉐량을 비롯한 동북지역의 장령들이 연명으로 중앙옹호를 통전했다. 허나 보경안민 정책에 입각하여 병력 파병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로 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옌시산의 차하얼 성을 봉천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봉천군의 파병을 제안했다. 장쉐량은 이에 반색했지만 열하주석 탕위린이 차하얼주석으로 이동하라는 지시에 열하와 차하얼을 모두 지배하게 해달라고 욕심을 부렸고 봉천의 원로 원금개 등이 반대하여 봉천의 파병은 없던 일이 되었다. 어쨌거나 장쉐량은 5월 28일 당국에 충성하며 중앙을 옹호한다는 통전을 다시 보냈지만 역시 군사 지원을 불가능하고 다만 군수품 지원은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3.3. 펑위샹 세력의 붕괴

국민정부의 선전과 더불어 전부터 장제스는 한푸쥐를 하남성 주석, 스여우싼을 안휘성 주석으로 임명하여 회유했고 이에 한푸쥐, 스여우싼 등이 동요, 펑위샹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뤄양의 한푸쥐가 호당구국군을 이탈하며 중앙 옹호의 통전을 보냈고 23일 장제스는 한푸쥐를 13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주었다. 이에 뤄양에서 한푸쥐와 펑위샹 부대들이 충돌하는 형국이 벌어졌다. 이에 스여우싼까지 동관에서 정주(鄭州)로 철수해버렸다.

이때 전 제3집단군 총사령 옌시산이 타이위안 회의를 발기하여 펑위샹에 대한 체포령을 취소하면 자신과 펑위샹이 함께 하야하여 외유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옌시산은 이때 장제스와 반풍 삼각동맹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장기적으로 장제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펑위샹의 병력이 보존될 필요가 있다는 현실주의적인 계산 아래에 펑위샹에 대한 유화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미 광서파가 궤멸했고 펑위샹마저 궤멸한다면 홀로 남은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대항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질 것이 틀림없었고 장제스의 목표도 자연스레 그로 집중될 것이었다. 펑위샹은 불리한 형국을 인정, 5월 27일 하야통전을 보내고 입산독서를 선언했다. 장쉐량 역시 펑위샹이 완전히 몰락하면 중국 내부의 세력균형이 무너진다고 여겨 펑위샹의 출국을 만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처음에는 토벌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탕성즈 등을 동원하여 하남으로 진군시키고 옌시산에게도 토벌 동참을 요구했다. 물론 6월 10일의 국민당 3기 2중전회에서 펑위샹 문제를 상정하지 않음으로 그를 완전히 몰아붙히진 않았다.

한편 장쉐량은 펑위샹의 붕괴가 확실시된 시점에서야 장제스를 위해 일부 병력을 출병시켜 산해관에 배치했는데 어디까지나 동맹자인 장제스와 옌시산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6월 15일, 장쉐량은 장쭤샹, 만푸린, 장징후이 등 50여명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동북사성 최고 군사회의 예비토론회를 개최하고 6월 24일 정식 군사회의를 열어 장제스와 옌시산이 베이핑, 톈진을 봉천에 양도하겠다고 표명했다면서 평진지역의 접수를 논했다. 하지만 만주 구파가 관내진출을 완강히 반대하여 봉천군벌의 관내진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결말

6월 16일, 펑위샹은 옌시산의 공동행동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이 출국하기를 원한다고 통전하며 옌시산에게 의탁했다. 펑위샹은 자신의 타이위안 행이 화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변명했으나 이미 상태가 너무 불리해져서 옌시산과 합작하지 않으면 세력 보존이 불가능해졌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제스는 리지천의 연금 조치를 해제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고 염풍합작을 우려하여 옌시산에게 펑위샹과 공동외유를 하지 말라면서 5월 29일부터 옌시산과 베이핑에서 협상했다. 여기서 옌시산은 펑위샹에 대한 체포령 취소를 얻어냈고 장제스는 옌시산의 선편견후출양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6월 25일, 옌시산은 펑위샹이 타이위안에 도착하자 오대현 건안촌의 건안사에 연금시켰다. 권고를 받아들여 그의 근거지 타이위안으로 도망쳤다. 옌시산은 펑위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편견을 위한 군사회의 소집에 들어갔고 국민정부도 7월 5일 펑위샹의 체포령을 취소를, 7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전시체제의 취소를 결정함으로 펑위샹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다.

궁지에 몰린 서산회의파도 쩌우루를 제외하고는 다시 평진 지역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여러 군사실력자들과 제휴하여 강경하고 지속적인 반장운동을 벌이는 서산파의 모습은 국내의 이목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9월에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키고 11월 광서파의 잔여세력이 합세하면서 2차 장계전쟁이, 12월에 스여우싼, 탕성즈가 합류하면서 장당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옌시산의 사주로 10월, 펑위샹의 잔여세력이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5. 여담

이때 소림사의 승려들이 장제스의 편을 들어 펑위샹의 군세를 공격하였는데 스여우싼의 공격으로 개박살나고 소림사가 불타버리는 참사가 있었다.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