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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직봉전쟁 第二次直奉戰爭 Second Zhili–Fengtian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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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직봉전쟁 전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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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924년 9월 13일 - 1924년 11월 3일 | |
장소 | 중국 동북 지역 | |
교전세력 | 직계군벌 |
봉천군벌 국민혁명군 안휘군벌 |
지휘관 |
차오쿤 우페이푸 치셰위안 왕회경 팽수신 |
장쭤린 양위팅 장쉐량 장덩쉬안 쑨촨팡 궈쑹링 쑨원 돤치루이 루융샹 허펑린 펑위샹 우광신 옌시산 |
병력규모 | 8만 5천~10만 | 17만 |
결과 | 직계군벌의 실각, 봉천군벌의 흥기 |
1. 개요
1924년 9월, 차오쿤, 우페이푸의 직계군벌과 장쭤린의 봉천군벌 사이에 벌어진 두번째 격전. 6일 만에 직예파가 압승을 거둔 1차 직봉전쟁과 달리 2년 간 현대화 사업을 통해 전투력을 증강한 봉천군벌이 우페이푸에게 불만이 많던 펑위샹 등을 포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2차 봉직전쟁, 2차 직예-봉천전쟁, 2차 봉천-직예전쟁, 2차 즈리-펑톈전쟁, 2차 펑톈-즈리전쟁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직계는 대총통 쉬스창이 정통성이 없는 대총통이라고 공격하여 법통중광의 구호를 내걸고 1917년 장훈복벽으로 해산된 구 국회와 약법 체제를 부활, 쉬스창을 압박하여 하야시켰으며 2대 대총통 리위안훙을 총통으로 추대했다. 직계군벌의 수령 차오쿤은 헌법 제정과 총통 선거를 통해 자신이 총통이 됨으로 베이징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 권위를 회복시켜 이를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대국을 안정시킨 후에 차오쿤이 총통이 되는 편이 낫다고 여겼는데 결국 직계군벌은 리위안훙 총통을 핍박하여 하야시키고 1923년 10월 회선 사건을 통해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절강독군 루융샹 등이 중앙과 단절을 선언하였고 천중밍을 몰아내고 다시 남방에서 정부를 수립한 쑨원의 중국국민당, 북방의 봉천군벌과 연계하여 직계에 대항하려 했다. 총통 선출을 통해 중앙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던 차오쿤의 구상과는 달리 회선은 중앙의 정통성을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계기가 되었다.한편 직계군벌 내부에서는 1차 직봉전쟁 때 군공을 세운 펑위샹, 왕승빈 등이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장쭤린과 접촉하고 있었다. 장쭤린이 루융샹, 쑨원 등 막강한 반직 세력들을 포섭한 데에 반해 1924년 시점에서 직계군벌은 기껏해야 산동독군 정사기와 좀 친한 정도였고 반면 1차 직봉전쟁 때 직계의 편이었던 하남, 열하의 세력이 이탈하여 봉천에 기울고 있었다. 거기에 우페이푸와 소요남이 재정 궁핍으로 인하여 마찰을 빚고 있었으며 사천, 호남, 복건, 강소, 절강에서 벌어진 여러 전쟁에서 소모된 직군은 장비와 물자가 모두 부족하여 사기가 크게 낮아졌다. 그리고 우페이푸와 연합한 천중밍, 양썬 등도 모두 패퇴하여 세력이 축소되었다.
즉 1924년 시점은 봉천군벌의 세력은 가장 강성해지고 직계군벌의 세력은 가장 취약해진 시점이었다.
3. 전개
3.1. 반직 삼각동맹의 결성
직계군벌이 쇠약해지는 가운데 봉천군벌의 장쭤린, 안휘군벌의 돤치루이, 중국국민당의 쑨원은 직계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그 시작은 안직전쟁이 발생하기도 전인 1919년으로, 쑨원은 동맹회 회원이었던 동북 출신의 영무를 상하이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국제적으로 러시아와 연합하여
레닌의 혁명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5.4운동을 활발히 진행시키려면 중국의 신청년이 일어나야 한다. 중국 혁명의 새로운 피로 새로운 힘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들은 시기를 잘 파악해 정권을 잡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잘라내야 한다. 먼저 북양 직계군벌을 타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즉시 광동으로 돌아가 정부를 새로 조직하고 친히 대군을 인솔하여 북벌을 단행할 계획이다. 또 하나는 우리는 북방군벌을 분화해야 하며 직계와 환계의 이해 충돌을 이용해야 하며
돤치루이와 연락을 취하고 특별히 관외 실력파
장쭤린과도 연락해 셋이 합작하여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몰아내야 한다."
1920년 여름, 장쭤린이 호로도 항만 건설을 위해 투자회를 열자 영무는 화교 자본가들의 서신을 받아 장징후이의 주선으로 장쭤린과 만날 수 있었다. 영무는 돤치루이는 이미 쑨원과 손잡기로 결정했으니 공동으로 직계와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장쭤린은 부관 장아동을 보내 쑨원을 만나게 했고 지속적으로 쑨원과 접촉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차오쿤에게 새어나가자 차오쿤이 직접 장쭤린을 찾아와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장쭤린은 책임을 봉군 총사령부 비서장 송문림에게 모두 뒤집어씌운 다음에 봉천으로 돌아가 쑨원과의 접촉을 이어나갔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터졌을 때는 쑨원은 영풍함 사건을 맞이하여 도리어 기반을 잃었고 장쭤린을 도울 수 없었지만 장쭤린은 영풍함 사건 이후 영무를 찾아 계속 국민당과 합작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하며 쑨원에게 동북으로 이주할 것을 권하기도 했지만 쑨원은 거주하였고 이에 장쭤린은 10만원의 자금을 생활비 명목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쑨원 측은 왕징웨이, 청첸, 쑨커 등을 파견하여 연락을 취했고 장쭤린은 장덩쉬안, 한린춘, 양내실 등을 파견하였다. 1923년 11월 25일에는 쑨원이 장쭤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정 총사령관 귀하. 작년부터 천중밍이 우페이푸의 사주를 받고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나의 북벌 계획은 중도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봉군 역시 적을 소탕하지 못해 국적을 참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 실패 이후 저는 단지 몸만 상하이로 빠져 나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적수공권으로 우페이푸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여러 번에 걸쳐 자금 지원을 해 주어 남은 여력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또 복건성으로 철군을 할 수 있었으며 정의를 위해 일어선 운남성군[1]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국적이 서남에서 세력을 떨치지만 사천성 민중이 우페이푸를 쫓고 있으며, 계속 진압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광저우는 본거지가 되므로 공의 큰 힘에 의해 광저우 회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광저우를 회복하고 잔당을 없애려고 하는 마당에 사기가 일시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재정이 곤란하여 날마다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속히 잔당소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도들은 아직도 동강의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어 지금 골칫덩어리들입니다. 우페이푸와 치셰위안이 많은 물자를 동원하여 건너와 공격하여 10일 내에 석룡을 지키지 못하면 광저우가 또한 위기가 될 뻔 하였지만 이달 18일, 19일 양일간 우리는 배수의 진을 치고 병사들이 잘 싸워주어 적의 주력부대를 완전히 격파하였습니다. 광저우는 위기에서 벗어났고 안정을 취하게 되어 이때부터 광동 내부는 평정을 기약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벌 계획도 역시 시행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고로 엽예호를 파견하오니 잘 지도 바랍니다. 아울러 상세한 군정을 알려드릴 것이니 의견 교환의 기회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한편 환계의 루융샹도 아들 노소가를 봉천에 보내 장쭤린에게 기계와 장비 지원을 청하는 한편 비행기를 빌려줄 것을 청했다. 장쭤린은 이를 승낙하는 한편 쑨커, 장쉐량, 노소가의 만남을 주선하여 소위 삼공자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휘, 봉천, 국민당 3파벌이 직계에 공동으로 대항하자는 반직삼각동맹이 완성되었다.
3.2. 강절전쟁
그러던 중 강소독군 치셰위안이 부유한 상하이를 탐내어 복건독군 주음인, 민월변방독판 쑨촨팡과 연합하여 4성 연군 총사령관에 취임, 절강독군 루융샹을 공격하였다. 루융샹과 동맹관계에 있던 장쭤린은 즉시 이를 비난, 개입을 준비하였다.강절전쟁의 자세한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3.3. 양군의 배치
9월 4일, 쑨원이 대본영에서 북벌을 선포하고 탄옌카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북벌을 시작한 가운데 같은날 저녁 장쭤린은 여단장급 이상 고급장령 긴급회의를 소집, 직계군벌 토벌을 결정하고 진위군을 편성했다. 9월 13일, 장쭤린은 경봉선의 보통열차 운행을 중단시키고 9월 15일 산해관과 열하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장쭤린은 진위군 총사령관에 취임, 휘하의 부대를 6개로로 나누었다.- 1군 군장 장덩쉬안, 부군장 한린춘
- 4군 군장 장쭤샹, 부군장 급군순: 흥성 수중 일대에 주둔하며 후방을 맡든다.
- 5군 군장 우쥔성, 부군장 감조새: 적봉으로 진군하여 승덕까지 진격하다.
- 6군 군장 허란주, 부군좡 우광신: 건평 평원선으로 나와 직군 배후를 교란시킨다.
9월 10일, 차오쿤이 급전을 보내 우페이푸를 베이징으로 소환, 9월 17일 우페이푸를 토역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왕승빈을 토역군 부사령관 겸 직노 후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3로군을 편성했다.
- 1로군 총사령관 팽수신: 산해관에서 정면으로 봉군을 막는다.
- 2로군 총사령관 왕희경: 조양으로 진격한다.
-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 적봉으로 나와 봉군 후방을 교란시킨다.
우페이푸는 팽수신을 제외한 전 부대를 란저우, 유관에 주둔하게 하고 후방에 육군 10개 지대를 배치, 두시구이를 해군 총사령관에, 온수덕을 해군 부사령관에 임명하여 요동의 항구를 공격하게 했으며 공군 4개 부대를 편성해서 각각 북대하, 남현, 조양, 항공처에 주둔시켰다.
3.4. 장쭤린의 관내진출
9월 13일, 열하의 조양사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마침내 직봉은 서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봉군의 본격적인 진격이 시작되었다. 봉군의 공격으로 열하의 지방 수비군은 삽시간에 궤멸, 9월 말에 2군의 선발부대가 10일만에 조양을 점령하여 직군을 포위하였다. 9월 18일에 산해관에서 격전이 벌어져 9월 20일에 봉군이 구문구 동구까지 진격했고 봉군 1군이 구문구를 돌파하여 황산구에 이르렀다. 하지만 직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진군하진 못했다.10월 10일, 우페이푸가 직접 산해관으로 왔으며 10월 12일 유관에 이르러 대규모 지원군을 집결, 전선에 투입하며 독전했지만 투입하는 부대마다 잇달아 패했다. 10월 13일, 우페이푸는 군함 해기호에 탑승하여 초예, 영상 두 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호로도 향하여 봉군의 배후를 습격하고자 했으나 봉군 공군의 공격에 진황도로 퇴각하였다. 10월 22일, 3군 부군장 궈쑹링과 1군 군장 장덩쉬안의 싸움이 벌어져 궈쑹링이 휘하 병력을 거느려 멋대로 철수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퇴각하던 궈쑹링은 뒤쫓아온 장쉐량의 만류에 10월 27일 밤, 송구령 여단을 거느려 구문구를 습격하여 점령했고 10월 29일 구문구 석문채와 북대하를 함락시켜 진황도까지 수중에 넣었다. 궈쑹링은 직계의 모든 직군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진황도에 1개 보병단만 남기고 남하하였다.
3.5. 북경정변과 톈진회의
그러던 중 10월 23일,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이 장쭤린에 호응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장악, 황부의 섭정내각을 조직하였다. 펑위샹은 차오쿤을 위협하여 산해관 일대의 직군을 직례군무 독리 왕승빈과 직례군무 방판 팽수신에게 접수하게 하였고 손악의 국민군 3군으로 하여금 바오딩의 16혼성여단을 인수하게 하였으며 국민군 1군과 2군을 북상시켜 우페이푸를 견제하게 했다. 차오쿤은 펑위샹의 강요로 인하여 10월 24일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통전하며 3가지 사항을 발표했다.- 1. 즉각적인 정전.
- 2. 우페이푸의 모든 직위 박탈.
- 3. 우페이푸의 즉각적인 하야.
차오쿤은 우페이푸를 청해성 독판에 임명, 변방으로 보내라는 지시까지 수용했으나 우페이푸는 란현에서 차오쿤의 정지 명령은 가짜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선포, 1만명의 잔여병력을 통솔하여 호헌군을 조직하여 베이징을 구하기 위해 남하했다.
하지만 10월 22일 장쭝창이 마보군 2만을 거느려 냉구에서 나와 란저우를 공격했고 같은날 리징린도 창려를 점령했다. 10월 25일에 국민군이 조직, 돤치루이를 초청했다. 10월 28일 장쭝창이 란저우를 함락시켰고 장쭝창과 리징린이 톈진을 향해 남하했다. 봉군은 진유선에 집결, 진유 주둔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장쉐량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봉군과 국민군의 습격에 우페이푸는 수천명의 병력을 잃고 사실상 붕괴되어 3~5천명의 잔여병력만 남게 되었다. 11월 2일에는 봉군의 강요로 차오쿤이 하야했다. 원래 펑위샹은 차오쿤을 쫓아낼 계획은 없었으나 우페이푸가 정전령을 듣지 않자 우페이푸의 정당성을 완전히 박탈하기 위해 차오쿤 하야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페이푸는 11월 3일 당고에서 화갑운수선에 탑승, 패잔병들을 거느려 11월 5일 장강 유역으로 피하여 재기를 도모했다. 11월 8일 장쭤린이 위풍당당하게 베이징에 입성, 11월 10일 텐진으로 가서 돤치루이를 방문하였다.
10월 10일 오후, 돤치루이, 펑위샹, 장쉐량, 루융샹이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비공개로 1차 톈진회의를 열었고 이날 저녁 리징린이 직례독군 왕승빈의 23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왕승빈을 톈진의 조계지로 추방했다. 또한 손직부의 20사단 역시 무장해제당하였다. 이들은 봉군에 흡수, 4개 혼성여단으로 편성되어 리징린, 우광신의 병력은 7만명으로 증가했다. 돤치루이는 안휘군벌의 수장이었으나 또한 북양군벌의 존경받는 원로이기도 하였고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치셰위안, 소요남, 쑨촨팡, 주음인, 최성훈, 마연갑, 이제신, 이병지, 두시구이 등이 난징에서 연명으로 돤치루이 지지를 선포했다.
11월 12일, 리징린은 직례인은 직례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구소를 내걸고 직례성 의회를 통해 직례보안사령관 겸 직례성장에 추대되었다. 11월 12일 오전, 장쭤린과 펑위샹이 따로 돤치루이와 만났고 지휘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오후에 돤치루이가 봉군 장령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으나 장쭤린은 참여하지 않았다. 돤치루이는 경봉선, 진포선을 봉군이 수비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리징린에게 녹종린을 대신하여 경기경비사령관을 맡아달라고 청했으나 리징린이 거절했다. 이날 강소독군 치셰위안이 난징에서 강소, 절강, 강서, 안휘, 섬서, 복건, 사천, 호북, 호남, 하남 10성 동맹회의를 개최, 돤치루이 지지를 선포했다.
11월 15일, 펑위샹, 루융샹, 호경익, 손악, 장쭤린이 연명으로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하였다.
"국시를 아직 정하지 못했고 국가에 중추적인 주인이 없다. 합비의 돤치루이 공은 원로로서 신망이 높아 나라 안의 사람들이 추대하기로 모두 동의하였다. (...) 개혁이 중단이냐 지속이냐 하는 것은 권한과 책임을 장악하는 것이 잠정적이지 아니어야 한다. 비상시국을 지탱하기 어려우면 돤치루이 공을 바로 오시게 하여 중화민국 임시 집정으로 추대하고 이 어렵고 위험한 시기를 이겨 나가도록 한다."
또한 리징린을 직례독판에 임명, 장쭝창을 강소, 안휘, 산동 삼성토벌군 사령관에 임명했으며 펑위샹에게 경수선, 경한선 방비와 서북둔간 독판직을 맡겼다. 손악은 하남, 섬서, 감숙 삼성 토벌군 사령관에, 호경익은 하남독판에, 장지강은 차하얼 도통에, 이명종은 수원 도통에 임명되었다. 11월 19일 신강, 강소, 섬서, 산서의 4개 성의 독리와 열하, 차하얼, 수원 3개 성의 도통이 돤치루이 추대를 지지했고 치셰위안, 소요남, 쑨촨팡, 두시구이, 주음인, 채성훈, 왕보, 이병지도 다시 돤치루이의 베이징 입성과 국시 해결을 촉구했다. 11월 21일, 돤치루이는 집정 추대를 수락, 11월 22일 베이징에 입성, 23일에 황부 내각이 다음날에 해산될 것임을 전국에 통전했고 11월 24일, 돤치루이가 중화민국 임시 집정에 취임했다.
"공화정을 공고히 하고 민의 뜻을 펼치며 안으로는 더욱 새롭게 하고 밖으로는 국가의 신의를 숭상토록 한다."
3.6. 제노전쟁과 호감전쟁
1924년 12월, 돤치루이는 치셰위안을 면직하고 강소성장 한국균을 임시 독판에 임명, 루융샹을 소환선무사로 삼아 장쭝창과 함께 치셰위안을 공격하게 했으니 이것이 바로 2차 제노전쟁이다. 치셰위안은 패하여 일븐으로 달아났고 쑨촨팡은 절강독판에 임명되어 중앙에 복종하게 되었다.또한 하남성에서 국민군 2군 사령관 호경익이 펑위샹의 지시로 남하했는데 돤치루이는 섬서독판 유진화에게 출병하여 호경익을 지원하게 했다. 유진화는 감옥곤을 보내 우페이푸를 위협하게 했고 이로 인하여 하남성의 우페이푸 세력도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에 돤치루이는 호경익을 하남독판에 임명, 감옥곤을 예섬감 초비부사령관에 임명했는데 감옥곤은 이에 불만을 품고 호경익을 공격했으나 감옥곤이 패하여 자결했고 유진화도 책임을 지고 사직하여 하남성은 국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3.7. 선후회의
한편 북방군벌들의 초청을 받은 쑨원이 국민대회 소집을 주장하며 북상하였다. 이에 돤치루이는 쑨원을 정치에서 배제하기 위해 선후회의를 소집,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려 했으나 선후회의는 전국적인 반발만 낳을 뿐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반봉사건, 서산회의 등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돤치루이 정권은 열강에 아첨하는 매국적 정권으로 비난을 받게 된다.4. 결과
당연히 최대 수혜자는 장쭤린의 봉천군벌이었다. 봉천군벌은 직계군을 대거 흡수, 기존의 17만에서 35만으로 군세가 불어났으며 장강 하류에 이르는 부유한 지역을 차지하였다. 펑위샹 역시 기존의 2개 사단 6개 여단에서 8개 사단 11개 여단으로 세력이 급성장하였고 비록 섬서와 수원의 척박한 땅이나마 기반을 가지게 되어 정착할 곳이 생겼다. 하지만 펑위샹은 비옥한 지역을 죄다 차지하고 자신의 부대를 멋대로 무장해제시켜 흡수한 장쭤린의 행태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직계는 강소, 호북, 강서, 안휘의 일부 지역은 사수할 수 있었으나 6개 혼성여단이 취소되고 9개 사단만 남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그나마 이 피해는 1925년 손봉전쟁에서 쑨촨팡이 봉군을 격파하고 크게 승리, 5성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어느 정도 만회하게 된다. 결국 전쟁의 논공행상에서 발생한 불만은 새로운 전쟁인 반봉사건과 직봉풍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중국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동양학 49권 49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6. 관련문서
- 홍헌제제(1915.12.12)
- 호국전쟁(1915.12.25~1916.7.14)
- 부원지쟁(1916~1917)
- 장훈복벽(1917.7.1~1917.7.12)
- 1차 호법운동(1917.7.17~1918.5.21)
- 호법전쟁(1917.9.19~1918.11.22)
- 외몽골 출병(1919~1921)
- 하남독군 교체 파동(1920.2.23)
- 안직전쟁(1920.7.14~1920.7.23)
- 2차 호법운동(1920.11.28~1922.8.9)
- 1922년 홍콩 선원 파업(1922.1.13~1922.3.8)
- 영풍함 사건(1922.6.16)
- 2.7 사건(1923.2.7)
- 1차 직봉전쟁(1922.4~1922.6)
- 담조전쟁(1923)
- 회선 사건(1923.10)
- 광저우 상단 사건(1924.8~1924.10)
- 강절전쟁(1924)
- 북경정변(1924)
- 핍궁사건(1924)
- 제노전쟁(1924)
- 1차 국공합작(1924)
- 선후회의(1925)
- 손봉전쟁(1925)
[1]
양시민, 유진환의 객군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국민정부에 불복종하여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