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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21 18:49:01

루디핑

파일:노척평.jpg
중화민국 호남성 정부주석
중화민국 강서성 정부주석 겸 난창 행영주임
정체 魯滌平
간체 鲁涤平
한국식 독음 노척평
영문 Lu Diping
출생 1887년 청나라 호남성 영향현
사망 1935년 1월 31일 중화민국 난징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호남변자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상계군벌이었으며 1923년 중국 국민당에 가입했다. 滌자와 條자가 비슷해서 노조평이라고 잘못 표기한 경우도 보인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7년 호남성에서 태어났다. 호남성 육군소학, 호남변자학당을 졸업하고 신해혁명 이후 호남성장이 된 탄옌카이 산하의 상군에 들어갔다. 1915년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청첸, 자오헝티 등과 함께 호국전쟁에 가담하여 호남장군 탕향명을 축출했다. 호국전쟁 이후 1917년의 군제개혁에서 2사단 3여단 6단 단장이 되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나자 역시 가담했고 탄옌카이 휘하에서 주페이더의 운남군과 함께 강서성을 공격했었으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920년 자오헝티가 평강정변으로 탄옌카이가 몰락한 이후 1921년 자치군 제3군 사령에 임명되었으며 1923년 탄옌카이가 정권을 탈환하기 위해 호남으로 출병한 담조전쟁이 발생하자 초기에는 중립을 지키며 자오헝티로부터 중재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10월 14일 탄옌카이에 합류하여 자오헝티를 공격하였으나 10월 17일 자오헝티가 우페이푸에게 원병을 요청하면서 악주의 직예군벌 군대가 개입하여 패배했다. 이후 탄옌카이와 따라 중국 국민당에 합류, 광동정부의 건국상군에 편입되었다.

2.2. 국민혁명 반장전쟁

쑨원에 의해 상군총지휘관에 임명되었으며 1924년 대원수 대본영 금연독판, 건국상군 제2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민혁명에 참여하여 국민혁명군 2군 부군장으로 국민당의 1차 북벌에서 활약, 중로군의 강우군에 소속되어 탄옌카이를 대신하여 2군 군장을 대리했다. 강소, 절강으로 진격하여 쑨촨팡, 장쭝창의 병력을 몰아내고 상하이,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사건 발생 이후 허잉친, 청첸, 하요조와 함께 난징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이후 청첸의 6군과 함께 송호 지역의 수비를 맡았는데 공산당원 임조함이 당대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2군 안에서는 반장, 좌경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2군을 믿지 못하고 40군장 하요조에게 난징위수사령을 맡겼다. 이후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1927년 12월, 바이충시, 청첸 등과 연명으로 광동파 위원의 4중전회 출석 반대를 통전하고 왕징웨이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의 배후자로 지목하여 체포하라고 요구하였으며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 국민혁명군 4집단군 제2군 군장 겸 1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5월 반장파였던 청첸 장제스에게 항복한 이후 호남성 정부 주석에 임명되어 호남, 강서 지역의 공산당 토벌에 나섰고 계계군벌을 견제하기 위한 장제스의 의도에 따라 많은 군비와 무기를 지원받았는데 이 때문에 탕성즈 토벌 이후 양호 지역을 장악했던 계계군벌의 적으로 찍히게 된다. 10월 8일, 18사단장으로 재임명되었다.

급기야 1929년 2월 21일 우한정치분회 주석 겸 군사참의원장 리쭝런에게 50사단장 담도원과 결탁하여 군비를 유용했다는 혐의로 무단해임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호남 사건이다. 루디핑은 군비지급을 통해 이를 유화적으로 처리하려 했으나 계계군벌 섭기와 하위의 공격을 받아 장사에서 퇴출당했고 강서성으로 밀려났다. 국민정부는 리쭝런이 임명한 35군 군장 허젠을 새로운 호남성 주석으로 인정하면서 사건을 유화적으로 처리하려 했으나 리쭝런이 저항하면서 1차 장계전쟁으로 번졌고 결국 반장전쟁이 폭발했다. 4월 4일 우한이 국민정부에게 탈환된 이후 4월 15일 우한위수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3. 초공작전과 말년

1929년 강서성 주석 겸 제9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었으며 난창행영 주임으로 제1차 초공작전에 나섰으나 유격전을 활용한 마오쩌둥의 전술에 휘말려 패배했다. 1931년 강서성 주석에서 절강성 주석으로 이동했으나 언론인 사량재 암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1934년 국민정부 군사참의원 부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35년 난징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