廖仲愷暗殺事件 |
Assassination of Liao Zhongk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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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된 랴오중카이와 랴오중카이 일가 |
1. 개요
1925년 8월 20일 중국국민당의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괴한의 총격에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당 우파가 대거 숙청되고 좌파 및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한국식 독음으로는 료중개 암살 사건이다.2. 배경
2.1. 국공갈등
1924년 쑨원은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1차 국공합작을 결정했다. 이로써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에 개인 자격으로 가입할 수 있었고 미하일 보로딘의 주도에 따라 국민당은 대중운동 역량 확보를 위해 소비에트식으로 개편되어 민주집중제 원칙을 채택했다. 또한 중앙집행위원과 후보위원에 다수의 공산당원이 진출하였다. 이에 국민당 내부에서는 공산당원들이 국민당 내부로 침투하여 국민당을 장악하려는 것이 목표가 아닌가 우려했다. 리다자오는 이에 대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으나 국민당 입장에서는 국민당에 입당한 공산당원들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려를 지울 수 없었고 우파를 중심으로 반발이 터져나왔다. 1924년 6월 1일 광저우 시 특별당부 집행위원 쑨커와 황계륙이 시당부 하부조직에 대한 공산당의 침투를 비난하며 중앙당부에 공산당의 제재를 요구했고 6월 18일 장쥐, 셰츠 등이 감찰위원 자격으로 공산당 탄핵안을 제출했다. 다이지타오는 <쑨원주의의 철학적 기초>, <중국혁명과 중국국민당> 등을 저술하여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고 있으며 순정 삼민주의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산당을 맹렬히 비판했다. 쑨원이 살아 있을때는 용공원칙을 재확인하고 자기 자신이 국민당을 탈퇴하여 공산당에 가입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로 반발을 억눌렀으나 쑨원이 죽은 후에는 이런 갈등을 억누를 구심점이 없었다.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발족되고 기존의 대원수부가 폐지, 왕징웨이가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연소용공을 주장하는 왕징웨이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1] 공산당원들은 보로딘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 내부에 깊숙히 침투했다. 이 때문에 국민당 우파들은 보로딘과 왕징웨이가 독선적 운영을 한다고 반발했다. 국민당 청년부장 겸 광동대학 교장 쩌우루가 "보로딘과 왕징웨이가 독선적인 운영을 계속하는 식이라면, 중앙당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공산당은 쩌우루가 반공교육을 하고 있는 광동대학을 '반혁명의 대본영'이라고 비난했고 보로딘은 재정통일이라는 명분으로 광동대학이 경상비 확보를 위해 가지고 있던 세수권을 몰수했다. 이는 쑨원이 교육경비 마련을 위해 특별히 인정했던 것으로 쩌우루는 교육경비 마련이 시급하다는 이유로 반발했으나 보로딘의 중앙정치위원회는 재정통일을 파괴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다고 이를 묵살했다. 쩌우루는 굴하지 않고 강경한 발언으로 비판을 계속하여 중앙정치위원회의 분노를 샀다.
국민당 내부의 좌우파 갈등은 격화되고 있었고,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를 주도하였던 국민당 좌파의 거두 랴오중카이는 국민당 우파들의 맹렬한 증오를 받게 되었다.
2.2. 국민당 내부의 대권분쟁
1924년 겨울, 쑨원이 시국을 논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하지만 베이징에 도착한 쑨원은 지병인 간암이 악화되어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와병한 쑨원과 베이징 정치위원회의 가교 역할을 하며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왕징웨이였다. 왕징웨이는 정치위원회 임시주석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함으로 좋은 인상을 얻었다. 이후 왕징웨이는 쑨원의 유서까지 기초하게 되면서 쑨원의 후계자로 자처했다.쑨원 사후 보로딘은 왕징웨이, 후한민, 다이지타오를 쑨원의 후계자로 거론하였다. '성망이 높고', '주의주장이 없으며 권력지향적인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검토에서 후한민은 '추진력이 부족하다', 다이지타오는 '줏대가 없다'는 이유로 부적격하다고 판정되었고 보로딘은 왕징웨이를 국민당의 차기 영수로 점찍게 되었다. 하지만 쑨원 사후 대원수 대리 자격으로 정무를 관장하던 후한민과 재정부장으로 소련과 연계하여 재정권을 장악한 랴오중카이, 군사력을 장악한 쉬충즈와 장제스 등의 세력이 건재하여 왕징웨이가 쑨원의 유일한 후계자를 자처하며 국민당의 영수 자리로 떠오르기에는 세력과 명분이 부족하였다. 이 때문에 왕징웨이는 보로딘과 더불어 국민당의 1차 동정 이후 수는 적지만 매우 정예화된 교군을 거느린 군사 실력자인 장제스와 손을 잡게 되었다. 장제스는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군사적 기반은 있었으나 광동에서의 지역적 기반이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고 따라서 왕징웨이와 합작하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기존에 연소용공에 반대했던 입장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연소용공을 주장하게 되었다.
1925년 3월, 광동군벌 천중밍이 광저우를 공격하려 하자 후한민은 국민당의 1차 동정을 지휘하여 이를 격퇴하고 동강을 점령했다. 이어 국민당 산하의 양시민, 유전환이 재정기관을 점령하고 반기를 들자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 이들에게 복종을 요구했으나 이들이 도리어 반란을 일으켜 광저우를 점거하자 6월 12일 이들을 완전히 토벌하였다. 6월 14일 대본영을 개편하여 국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왕징웨이는 보로딘의 지원사격 덕분에 만장일치로 주석 겸 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왕징웨이와 보로딘은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후한민을 견제하기 위해 매우 긴밀히 합작하게 되었다.
3. 전개
3.1. 랴오중카이 암살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는 중앙집행위원회에 출석하기 위해 중앙당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아내 허샹닝과 함께 자택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랴오중카이는 차를 타고 오전 10시 중앙당사 건물에 도착했다. 허샹닝은 소련 고문 체르파노프를 보고 얘기를 하기 위해 걸음을 멈춘 순간, 출입구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괴한 진순이 랴오중카이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허샹닝은 처음에 이것이 폭죽 소리라고 생각했으나 쓰러진 랴오중카이를 보고 그것이 총성임을 알았다. 랴오중카이의 경호원들이 진순을 향해 대응사격을 하여 진순의 머리를 맞추어 사살했다. 잇달아 총성이 울리자 중앙당사 내부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던 장제스, 왕징웨이, 미하일 보로딘, 후한민, 쉬충즈가 황급히 뛰쳐나왔다. 1931년 왕징웨이의 전기작가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왕징웨이와 장제스는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보로딘도 그랬다. 그런데 후한민과 쉬충즈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
랴오중카이는 광동대학 외과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진 후였다. 국민당의 원로이며 중진인 랴오중카이의 갑작스러운 비명횡사에 국민당은 큰 충격을 받고 3일 동안 반기를 게양하고 전 당원에게 1주일 간 상장을 달게 함으로 애도를 표했다. 랴오중카이의 미망인 허샹닝의 당시 반응에 대해서는 허샹닝 문서 참조.
3.2. 배후 조사
국민당 정부, 당중앙, 군사위원회는 보로딘의 제안에 따라 이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조직했다. 보로딘, 장제스, 왕징웨이, 쉬충즈가 위원에 임명되었다. 8월 21일 보로딘은 체포자 명단을 가져와 쩌우루, 후한민, 등택여, 셰츠 등 국민당 우파들을 체포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쉬충즈 등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공산당원 담평산도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랴오중카이 선생의 서거에 즈음하여 일반 혁명적 민중에게 삼가 아뢴다>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여러분은 현재 랴오중카이 선생과 동일한 목적을 위해 분투하는 까닭으로 제국주의자, 반혁명파로부터 위협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여러분을 죽이려 할 것이다. |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저우언라이 역시 <인민에 고하는 글>, <혁명군인에게 고한다>, <노농우인에게 고한다> 등의 글을 발표하여 당의 원수를 처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8월 25일 호의생, 임직면, 주탁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는 사살된 진순의 몸수색 결과 진순이 이들이 주도하는 반공단체와 연관이 깊었던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었다. 호의생은 후한민의 사촌동생으로, 반공단체인 혁명기념회와 문화당의 지도자였으며 평소에 랴오중카이의 용공방침을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임직면은 미국 화교 출신으로, 쑨원의 비서로 일한 바가 있으며 호의생처럼 혁명기념회 소속이었는데 평소에 랴오중카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주탁문은 하와이 흥중회 소속으로 범행에 사용된 권총의 주인으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호의생과 주탁문은 재빨리 도주했고 임직면만 체포되었다. 임직면은 체포된 후 "랴오중카이는 공산당이다. 그는 국민정부의 관리가 되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그는 제거되어 마땅하다."라며 범행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범행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상하이로 도피한 호의생도 <국내외 동지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범행을 부정했다. 주탁문은 1929년 <해내외 동지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여 랴오중카이의 죽음을 민중의 심판이라고 고소해했으며 1936년 자신이 창간한 중산일보에서 자신이 랴오중카이 암살 1주일 전에 보로딘, 왕징웨이, 랴오중카이를 모조리 암살할 계획을 실제로 꾸미긴 했으나 광저우 공안국장 우톄청의 저지로 실행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이후 100여명이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2명의 용의자가 황포군관학교 동교장에서 총살당했다.
3.3. 국민당 우파 숙청과 서산회의 개최
한편 외교부장 후한민은 랴오중카이 암살 이후 몸을 피했다가 체포되어 황포군관학교로 끌려왔다. 후한민의 사촌동생 호의성이 관련되어 있고 임직면 역시 후한민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후한민은 사건의 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였다. 특별위원회는 후한민을 암살범의 '정신적 지주'로 규정하고 축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9월 15일 왕징웨이의 대리인 임조함이 국민당 상무위원회에서 "후한민 동지가 외국과의 협의를 위한 출국을 요청했다."는 왕징웨이의 주장을 발표했다. 국민당 중정회 1기 52차 회의에서 왕징웨이는 후한민이 가지고 있던 중정회 주석 자리를 물려받았으며 장제스, 쑨커, 담평산을 정치위원으로 보선하였다. 그리고 9월 22일, 후한민은 요양, 정치경제의 중요문제 협의라는 명목으로[2] 소련선박 몽골호에 올라타 사실상 강제로 소련 외유를 떠나게 되었다. 말이 좋아 외유지 이는 추방이나 다름 없었다.후한민 다음에는 월군 사령관 겸 군정부장 겸 광동성장 쉬충즈가 목표가 되었다. 쉬충즈는 왕징웨이를 국민정부 주석후보로 추천한 인물이며 왕징웨이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국민당 우파에 속했으며 쉬충즈 본인은 후한민과 긴밀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쉬충즈 휘하의 장교들은 혁명기념회 등지에 참여하고 있었다.
수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9월 1일, 특별위원회는 재정의 통일을 위해 재정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위원장으로 쉬충즈를 임명하고 실무자도 쉬충즈가 추천하도록 했다. 그런데 쉬충즈는 아편과 재물을 좋아하는 인물로 공사를 멀리한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소련에서는 그가 매판 자본가 세력이라고 폄하하기도 했고 재정위원장으로서 필요한 '사심 없고 유능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쉬충즈가 위원장에 임명된 것은 월군의 일부 장교들이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포착된 가운에 월군이 이반을 일으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월군의 재정을 장악하여 여러 장령들의 불만을 사고 있던 쉬충즈에게 다른 군부 인사들의 불만을 집중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9월 9일 쉬충즈의 참모장인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만나 '특정인이 재정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했고 이날 저녁에 왕징웨이, 탄옌카이, 주페이더 등이 정국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9월 17일 왕징웨이와 리지선이 황포군관학교로 찾아와 장제스에게 월군에게 군향분배가 유리하다고 불만을 표했다. 국민정부 군사-재정 연석위원회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3개군으로 편성되었던 월군을 2개 군으로 감축시켰다. 9월 18일 군사위원회는 장제스를 광저우 위수사령으로 임명하고 광동의 현상처리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 장제스는 즉각 쉬충즈가 천중밍과 내통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1사단을 파견하여 광저우의 월군 3사단과 4사단을 제압하고 9월 19일 광저우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월군사령부를 포위하고 쉬충즈에게 장문의 편지와 상하이로 떠나는 배표를 보내 석달 정도 광동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쉬충즈는 장제스에게 두차례 전화를 걸어 자신에 대한 처우가 부당함을 주장하려 했지만 장제스는 통화를 거절했다. 쉬충즈는 왕징웨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장제스의 배후에 있는 왕징웨이가 쉬충즈에게 도움을 줄리는 없었고 도리어 대국을 위해 잠시 상하이에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다. 왕징웨이가 장제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을 확인한 쉬충즈는 9월 20일 중앙당부에 군정부장의 인장을 제출했고 9월 21일 중앙정치위원회는 쉬충즈에게 뇌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휴가 명목으로 상하이에 머물도록 하였다. 쉬충즈는 기선을 타고 상하이로 떠났고 이후 다시는 국민정부에서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쉬충즈까지 제거되자 보로딘이 당의 요인을 화북으로 보내 국민혁명의 취지를 통보하자고 정치위원회에 제안했다. 이 '당의 요인'으로 중앙상무위원 린썬과 쩌우루가 대표로 뽑혀 베이징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그 후임으로 공산당원인 담평산과 임조함이 임명되었다. 난데없이 쩌우루가 화북으로 떠나게 되자 중산대학[3] 교수와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며 동맹휴업을 실시하자 왕징웨이는 학내분규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대학가에 대한 감찰을 실시하여 쩌우루의 교장직을 박탈하고 왕징웨이의 심복 구멍위를 새 교장에 임명했다.
결국 격노한 린썬 등 국민당 원로들은 1925년 11월 23일 베이징 서산 벽운사에 모여 서산회의를 개최하고 국민당에서 공산당원을 축출한다는 결의를 발표했다. 이들 서산회의파는 독자적 상하이 당중앙을 창설하며 국민당 우파를 대변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서산회의 문서 참조.
4. 결과
광저우는 장제스 장군의 절대적 통치 아래 있다. 그는 소련의 최고 사령부에 소속되어 있다.
- 로이터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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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랴오중카이의 죽음으로 국민당이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천중밍의 부하 출신으로 국민당의 1차 동정 때 국민당에 합류한 홍조린과 임호 등이 3만명의 병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즉각 2차 동정을 결정, 9월 28일 장제스를 동정총지휘에 임명했고 장제스는 반란군을 궤멸시키고 천중밍 세력을 완전히 광동에서 축출했다. 자세한 것은 국민당의 2차 동정 문서 참조. 이로 인해 장제스의 입지는 더욱 강력해졌고 쉬충즈 숙청 등을 통해 랴오중카이 암살로 인한 최고 수혜자인 왕징웨이와 긴밀히 공조하며 장왕합작을 이룩하게 되었다.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단도 연소용공을 주장하는 왕징웨이와 그런 왕징웨이에게 협력하는 장제스를 지원하였다.
중국 공산당 역시 국민당 우파의 거물들이 거세된 빈틈을 타서 담평산, 임조함 등이 상무위원으로 진출하였는데 5인으로 구성된 상무위원 중 린썬과 쩌우루가 추방되고 정유분, 우수덕은 화북에 있어 활동이 불가능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왕징웨이였으니 상무위원회는 좌파와 공산당이 완전히 장악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1926년 개최된 중국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36명 중 임조함, 담평산, 리다자오 등 9명이, 후보중앙위원 24명 중 마오쩌둥 등 6명이, 중앙감찰위원 12명 중 고어한 등 2명이 공산당원으로 뽑혔고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 상무위원으로도 담평산, 임조함 등의 공산당원과 왕징웨이, 간나이광, 천궁보 등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선출되면서 공산당은 국민당 내부에서 대약진을 이룩하게 된다.
하지만 북벌을 주장하는 장제스를 타도하려는 공산당 급진파와 키산카를 비롯한 소련 고문들의 공격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는 중산함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5. 그래서 배후는 누군가?
일반적으로 국민당 우파의 소행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왕징웨이와 보로딘의 결론처럼 후한민이나 쉬충즈가 그 배후에 있었다거나 주요 용의자로 거론된 호의생 등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부족하다. 반대로 랴오중카이의 암살이 왕징웨이의 집권을 노리기 위한 국민당 좌파나 공산당의 음모라고 추정하는 쪽도 있지만 그렇다는 증거 역시 없다.6.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단국대학교 동약학연구원.
- 중국국민당 좌파의 기수 랴오충까이와 국민당 개조작업, 장공자, 글로벌정치연구 제2권 2호.
- 당무에 관한 결의를 통해 본 서산회의의 본질, 유지원, 김영신, 중국학연구 58.
- 제1차 국·공합작 : 성립배경과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김영숙, 호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제1차 국공합작기 汪精衛의 정치적 역할과 혁명전략의 변화 - 무한국민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이재령, 사학지 25권, 단국대학교사학회.
- 국민당중앙정치위원회의 조직과 인물의 변화, 1924-1927년, 왕기생, 박제균, 중국근현대사연구 33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國民政府 成立 前後의 軍政改革과 財政統一, 김영신, 중국학연구 38권, 38호, 중국학연구회.
- 改組, 國民政府 成立과 中國國民黨, 김영신, 중국학연구 21권, 중국학연구회.
- 北伐 前後 中國國民黨의 內紛 : '上海中央'의 활동과 廣州中央의 대응을 중심으로, 김영신, 중국근현대사연구 4권, 중국근현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