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教仁暗殺事件 |
Assassination of Song Jiaoren |
사망 후 정장을 입힌 쑹자오런의 시신 |
1. 개요
1913년 3월 20일, 위안스카이의 사주로 중국국민당 정치인 쑹자오런에게 가해진 암살 시도. 결국 부상을 입은 쑹자오런은 3월 22일 사망했다. 한국식 독음으로는 송교인 암살 사건이다.2. 배경
쑨원과 위안스카이는 임시정부를 난징에 둘 것, 위안스카이가 난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할 것, 임시 참의원이 정하는 임시 약법을 준수할 것이라는 조건에 대해 합의했다. 1912년 2월 15일 임시 참의원은 위안스카이를 임시대총통에 선출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난징에서 취임하는 것을 거부하고 3월 10일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탕사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그 자신이 동맹회원이기도 한 탕사오이는 <동맹회내각>이라 불리는 동맹회 내각을 조직, 교육총장에 차이위안페이, 공상총장에 천치메이, 농림총장에 쑹자오런 등을 임명했다.1912년 3월 11일 임시 참의원이 쑹자오런의 주도로 1911년 12월 발표한 임시정부조직대강을 수정하여 임시 약법을 발표했다. 임시 약법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약법 시행 10개월 안에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 대총통을 선출해야 했다. 탕사오이는 차관 문제로 동맹회, 공화당, 통일당의 공격을 받아 6월 15일 금방 사퇴했고 외교총장 루정샹이 새로 총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루정샹 역시 내각 조각 문제로 곧 사퇴하여서 내무총장 자오빙쥔이 국무총리를 겸하게 되었고 농림총장에 진진선, 사법총장에 허세영, 공상총장에 유규일, 교통총장에 주계금, 재정총장에 주학희, 외교총장에 왕여호를 임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위안스카이가 동맹회에 우호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들은 국민당이 창당되자 모두 국민당 가입을 선언했다.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해군총장 유관웅은 군인이기 때문에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1912년 8월 10일 임시 참의원이 중화민국 국회조직법을 통과시켰고 8월 13일 중의원 선거법, 선거구역표가 공포되었다. 9월 5일에 1912년 12월 10일에 초선을, 1913년 1월 10일에 복선을 실시하겠다고 공포했다. 1912년 8월 비밀 조직이었던 중국 동맹회는 공개정당으로 거듭나 통일 공화당 등 여러 소수 정당을 흡수,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국민당의 지도자는 쑨원이었으나 실질적인 수반은 쑹자오런이었다.
선거 결과 국민당이 중의원 596석 중 269석을, 리위안훙의 공화당이 121석을, 통일당이 18석을, 량치차오의 민주당이 16석을 차지했고 참의원 중 국민당이 123석을, 공화당이 55석을, 통일당이 6석을, 민주당이 8석을 차지하는 등 국민당이 압승했다. 이중에 이중 당적을 가진 사람이 상당하긴 하였고 국민당 내부는 상우회, 정우회, 집익사, 계축동지회 등으로 분열되는 등의 양상이 있긴 하였으나 1912년 4월 8일 국회 개막 이후 참의원 의장에 국민당원 장쥐, 부의장에 국민당원 왕정팅이 당선되는 등 국민당의 위세는 대단했다. 선거 대승 이후 국민당의 실질적인 책임자 쑹자오런은 다음 총리가 될 것이 확실해보이는 인물로,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 헌법 제정 등을 주장하며 전국각지에서 유세를 돌고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무능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와 국무총리 자오빙쥔은 쑹자오런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3. 전개
3.1. 쑹자오런 저격
"국민당이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두려운 것은 그들이 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획득하려는 데 있다."
위안스카이가 심복 양탁에게 한 말.
위안스카이가 심복 양탁에게 한 말.
선거 이후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모두 베이징으로 모이게 되었다. 국민당 총리 쑨원은 쑹자오런을 국민당 이사장 대리로 임명하였다. 쑹자오런은 호남에서 출발하여 우한, 난징을 거쳐 상하이로 가면서도 유세를 하며 내각책임제 실시와 중의원에서 국무총리 선출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당시 임시 약법 체제는 의회에게 대총통 탄핵권을, 대총통에게는 의회 의결 거부권을 주는 등 내각 책임제와 대총통 중심제에서 상당히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국무원의 역할, 국무총리와 대총통의 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점 등의 한계가 있었다. 쑹자오런은 의회를 강화하여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려 한 것이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먼저 매수를 시도하여 상하이, 한커우, 난징 등에 사람을 파견해 의원들에게 여비와 교통비를 제공하는 한편 베이징에 도착한 의원들을 화류계, 기방, 요정에 초대하며 자기 편으로 포섭하려 했다.[1] 쑹자오런에게도 은행 수표장을 보내 매수하려 했지만 쑹자오런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이 총리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을 놔둘 수 없다고 여겨 국무총리 자오빙쥔에게 쑹자오런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3월 20일 오전 10시 40분, 호령철도 상하이역에서 쑹자오런은 동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베이징으로 떠나는 기차에 탑승하려고 하고 있었다. 황싱, 랴오중카이 등의 동지들이 배웅하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10여명의 의원 당선자들이 같이 있었다. 그러나 10시 45분, 쑹자오런이 개찰구에서 역원에게 기차표를 내미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놀란 황싱 등이 총성에 사방을 둘러보고 있을때 총알이 쑹자오런의 복부에 맞아 쑹자오런이 "맞았다!"라고 외치며 배를 잡고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이어 2발이 황싱과 랴오중카이를 노리고 각각 발사되었으나 빗나갔다. 총알을 발사한 검은 군복 차림의 괴한은 인파를 헤치고 달아났다. 쑹자오런은 비틀거리며 역의 철제의자까지 걸어갔으나 더 이상 힘이 없어 걷지 못했다.
황싱 등 동지들이 황급히 쑹자오런을 자동차에 실어 호령병원으로 이송했다. 12시 반, 병원에서 응급수술로 창자에 박힌 탄환을 빼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총탄이 간을 스치고 복부로 들어가 소장을 찢어놓았기 때문에 출혈이 심해 쑹자오런의 용태는 계속 악화되었다. 3월 21일 새벽에 깨어난 쑹자오런은 자신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위안스카이에게 보내는 전보를 작성하게 했다.
지금 나라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데 갑자기 떠나자니 유감이 많습니다. 총통께서 성심을 다하고 공정한 도리를 펼쳐 민권을 보장하기 바랍니다. 국회로 하여금 확고부동한 헌법을 만들게 한다면 저는 죽는다 해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
3월 21일 오후 1시에 다시 개복수술을 하여 창자를 봉합했지만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사건 배후인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배후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강서도독 민정장에게 범인의 수배령을 내리라고 지시하는 한편 3월 21일 위로전문을 보내왔다.
상하이의 쑹자오런 선생,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귀하가 폭도에게 피습되어 부상을 입으셨다 하니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얼마 후에 귀하의 전보를 받고서야 상세한 정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민국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찾기 어렵습니다. 귀하는 학식이 뛰어나고 일의 시기를 잘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귀하를 추앙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눈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그와 같은 암살을 꾀하는 자가 있다 하니 법치국가에서 이 무슨 해괴망칙한 일입니까. 원컨대 하늘이 도우셔서 하루바삐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실망의 말을 하지 말고 비관에 빠지기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 관리들에게 명하여 큰 상을 내걸고 반드시 범인을 잡을 것입니다. |
죽음이 임박하자 쑹자오런은 유언을 남겼다.
"남북의 화해를 위해 베이징으로 가서 대동단결하여 외환에 대비하려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하다니..."
머리맡의 황싱과 위유런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남북화해의 내 참뜻이 오해받는 일 없도록 해주시오. 그것마저 암살당해선 곤란하오."
이후 자꾸 의식을 잃던 쑹자오런은 3월 22일 오전 4시 47분에 평온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사망했다. 불과 만 31세의 창창한 나이었다. 임종에 참여했던 대륙낭인 기타 잇키는 당시 상황을 자신의 저작인 《중국혁명외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솟구쳐 오르는 피를 누르며 위유런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이런 말을 남겼다. "남북통일은 내가 평소 뜻하던 바이다. 여러 벗들은 부디 작은 일로 국가를 그르치지 말라." 그의 죽음은 혁명당의 뇌수를 깨버린 것이었다. 황싱은 관을 부여잡고 애끓는 소리로 울었다. 뒤늦게 도착한 탄런핑이 사자후를 토하자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
이때 황싱과 위유런이 쑹자오런의 시신 위에 엎드려 통곡했고 천치메이도 통곡하면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일체가 허무야!"
이후 동지들은 쑹자오런의 시신에 정장을 입혀 역사에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이후 쑹자오런의 유해는 현재 상하이의 송공공원에 위치한 바오산에 안치되었다. 묘비명은 위유런이 썼다.
선생의 죽음은 천하가 슬퍼할 일이다. 선생의 행적은 천하가 아는 바와 같다. 내가 다시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직필을 할까. 직필은 사람을 죽인다. 곡필을 할까. 곡필은 하늘을 죽인다. 구천의 눈물은 천하의 분노이고 늙은 벗의 붓은 적의 쇠와 같은 증거, 이 모두를 하늘에 새겨 훗날 훌륭한 사가를 다스린다.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고, 하나하나 천지에 물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
3.2. 범인의 체포
사건의 진상은 빨리 밝혀지기 시작했다. 3월 23일 상하이 골동품상 왕아발이 상하이 조계지 경찰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한 것이다."10일 전에 나는 응기승[2]이라는 사람의 집에 고서화를 팔러 갔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살인 청부를 권유받은 일이 있다. 그 사람은 사진 1매를 보여주면서 그 사나이를 암살하면 1천원을 주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없는 성품인지라 그 권유를 응락하지 않았다. 내가 그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는데, 오늘 신문에 게재된 사진을 보고 비로소 그게 쑹자오런 선생인 것을 알았다."
이에 경찰은 3월 23일 밤에 창녀촌에 투숙하던 응기승을 체포했고 다음날인 3월 24일 응기승의 하수인이자 쑹자오런을 저격한 범인인 22세의 무사영을 체포했다. 무사영은 쑹자오런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고 그저 200파운드의 돈을 받기 위해 범행을 했다고 자백했다. 응기승의 집에서는 암살을 위해 사용한 5연발 권총을 포함하여 총 53건의 증거품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국무총리 자오빙쥔과 자오빙쥔의 내무부 비서 홍술조가 직접 내린 1월 14일 부의 암살계획 전보, 암호코드, 편지 등이 있었다. 이에 자오빙쥔은 사직하여 혐의를 벗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위안스카이는 사직하면 혐의가 오히려 더욱 커진다면서 사직하지 말고 휴가를 낼 것을 지시하며 그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한편 쑨원은 1913년 2월 일본을 공식방문하여 가쓰라 다로 일본총리와 회견하고 일본의 철도를 시찰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던 중 나가사키에서 쑹자오런 암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쑨원은 즉각 베이징의 국민당 본부와 상하이의 국민당 교통부에 타전하여 당원들이 힘을 합쳐 사건의 배경을 추궁하라고 지시하고 즉각 귀국하여 3월 25일 상하이에 도착, 황싱, 천치메이, 쥐정 등의 동지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격분한 쑨원은 광동도독 후한민, 호남도독 탄옌카이 등에게 전보를 쳐서 거병하여 위안스카이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후한민과 탄옌카이 모두 반대했고 황싱 역시 법에 의한 타도를 주장하면서 일단 거병을 미루게 되었다. 국민당은 특별법정의 설치를 주장했다.
4월 26일 강소도독 정덕전과 응덕굉이 응기승의 집에서 나온 증거물들을 발표하자 전국에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정덕전은 특별법정을 설치하여 심리할 것을 건의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까 두려워 사법총장 허세영에게 특별법정을 허가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에 상하이 지방재판소에서 이 사건을 심리하기로 했는데 투옥된 무사영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독살되어 시체가 되어버렸고 홍술조는 베이징을 거쳐 칭다오의 독일 조계지에 숨어버렸다. 응기승 역시 탈옥하여 칭다오로 도망쳤는데 위안스카이에게 암살 보상금을 청구하는 짓을 했다가 위안스카이한테 역으로 암살당하여 입을 다물게 되었다.
3.3. 선후대차관 사건
분노한 국민당 측은 국무총리 자오빙쥔과 내무비서 홍술조의 소환을 요구했고 사법부도 응하여 이들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황싱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공안사건을 조작하여 베이징 지방재판소 명의로 황싱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여 여론을 무마시키는 한편 쑹자오런 암살이 국민당 내부의 소행이라는 선전을 하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 암살의 결정적인 증거물들이 발표된 4월 26일, 자오빙쥔, 재정총장 주학희, 루정샹[3] 등으로 하여금 국민당의 반대에 무릅쓰고 5개국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빌리는 협약을 강행했는데 이것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4] 이 대차관 사건의 파장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자오빙쥔은 국무총리에서 사직하여 직예총독으로 좌천되었고 1914년 2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 역시 위안스카이의 소행이라는 추정이 많다.4. 결과
쑹자오런 암살에 이어 선후대차관 사건까지 맞게 된 국민당은 더 이상 법으로 위안스카이에게 맞서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위안스카이에 맞서 2차 혁명을 일으키기로 했으니 이것이 바로 1913년 7월의 계축전쟁이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압도적인 무력과 열강 및 민중의 호응 부재로 인하여 2개월 만에 참담하게 진압당했고 쑨원 등은 해외로 망명했다. 위안스카이는 1913년 10월 10일 정식 대총통에 취임, 국민당을 해산하여 국회를 정회시킨 후 정치회의 결의를 구실로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했으며 5월에 신약법을 통과시켜 초급총통제라 불리는 황제적 총통제를 실현했다. 여기서도 만족을 하지 못한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급기야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를 칭하게 되었지만 호국전쟁이라는 전국적인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5. 사실 범인은 쑨원?
호사가들 사이에 떠도는 얘기 중 하나로 쑹자오런 암살의 진범이 쑨원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쑹자오런의 맹우였던 기타 잇키의 주장으로 그는 자신의 저서인 《중국혁명외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찌됐든 제2혁명의 원인이 된 쑹자오런의 횡사는 애도와 함께 분노를 일으킬만한 일이었다. 아아, 천인공노할 대악업이여! 3년 동안 원혼이 되어 떠돌아야 했던 벗의 가슴 속에 감춰진 대비밀이여! 위안스카이는 주범이 아니라 일개 종범이다. 암살 계획의 주모자는 그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혁명에 종사했던
천치메이이며, 또 한 사람의 종범은, 놀라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XX이 아니겠는가. 아아, 사람이 아무리 권세에 눈이 어둡다 한들 이렇듯 간악하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 북쪽의 종범 위안스카이는 주모자 천치메이와 다른 종범 쑨원의 배신에 분노한 나머지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스스로 결백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의외로 강경하게 바뀌었다. 그의 강경한 태도에 분노한 혁명당 여론은 그를 주범으로 몰아 세웠고, 다른 종범은 쑨원을 앞세워 진짜 주범자와 함께 불의의 군대를 일으키고자 했다. (...) 전 중국의 급진애국당은 쑹자오런의 죽음에 격동하여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고, 그의 유언을 거스르는 북원토버을 준비했다. 아아, 이리하여 쑹자오런을 죽인 흉악한 범죄자 천치메이와 쑨원은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구실로 제2혁명의 진두에 서고자 했다. |
기타 잇키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응계형이 과거 천치메이가 상하이 도독으로 있을 때 그의 정보과장으로 일한 적이 있으며 쑨원과 천치메이는 외국에서 들어온 주제에 쑹자오런의 공로를 가로채고 쑹자오런의 남북평화에 반대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쑹자오런이 위안스카이의 내각에서 총리가 되면 위안스카이를 무력으로 토벌하고 싶던 쑨원의 입장에서는 무력봉기의 명분이 약해지니까 방해가 되는 쑹자오런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허나 기타 잇키의 주장은 치명적 오류가 있는데 쑹자오런이 가장 강력한 반원파로 그의 밑에서 조각하기를 거부한 바가 있다는 점, 천치메이는 응계형이 혁명파인줄 알고 그저 고용한 일이 있을 뿐이라는 점, 무엇보다도 위안스카이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너무 많다는 점에서 그냥 기타 잇키가 쑨원이 싫어서 내놓은 음모론에 불과하다. 이후 기타는 꾸준히 쑨원 진범론을 밀다가 이누카이 쓰요시, 도야마 미쓰루 등 다른 대륙낭인들이나 황싱 등 중국의 혁명가들에게도 왕따당하는 처지가 되어 1913년 4월 8일, 3년간의 중국 퇴거를 명령받게 된다.
6.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호승, 인간사랑.
- 《다큐멘터리 중국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국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기타 잇키 평전》, 마쓰모토 켄이치, 교양인.
7. 관련 문서
- 신해혁명 (1911.10.10.~1912.2.12.)
-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1912.8.16)
- 쑨원-위안스카이 회담(1912.8.24)
- 선후대차관 사건 (1913.4.26.)
- 계축전쟁 (1913.7.12.~1913.9.21.)
- 중화민국 국회 해산 (1914.1.10.)
- 홍헌제제 (1915.12.12.)
- 호국전쟁 (1915.12.25.~1916.7.14.)
- 부원지쟁 (1916~1917)
- 장훈복벽 (1917.7.1.~1917.7.12.)
- 1차 호법운동 (1917.7.17.~1918.5.21.)
- 호법전쟁 (1917.9.19.~1918.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