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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합중 공화국 República dos Estados Unidos do Brasil República Vel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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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 국장 | |
Ordem e progresso[2] 질서와 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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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1월 15일 ~ 1930년 10월 24일 | ||
성립 이전 | 성립 이후 | |
브라질 제국 |
바르가스 시대 (제2, 제3공화국) |
|
수도 | 리우데자네이루 | |
언어 | 포르투갈어 | |
종교 | 가톨릭 | |
민족 | 브라질인 | |
정치체제 |
대통령제 양당제 연방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통화 | 헤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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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ira República Brasileira.
1. 개요
브라질의 첫 공화국 체제. '구 공화국'(República Velha)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2. 역사
2.1. 설립 이전
브라질은 페드루 1세의 주도로 포르투갈 왕국에서 독립해 브라질 제국이 되었으나 500일 전쟁, 내전 등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다가 1841년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페드루 2세가 직접적 통치를 시작하면서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초기 페드루 2세 황제는 커피 재배의 장려 및 보급과 유럽 국가들의 이민을 받아들이는 등의 강력한 경제발전 정책을 취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대립이 잦아졌다.브라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제가 유지되는 마지막 나라였는데, 페드루 2세는 1888년 노예제 완전 폐지를 선언했다. 허나 이 과격한 개혁은 농장주들과 자본가들의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이들 중 상당수를 공화주의자로 전향하게 만들었다. 또한 페드루 2세의 치세 기간 동안 나라가 안정되면서 식자층이 크게 늘었고 왕정 자체를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화주의자들이 매우 늘었다. 1889년 11월,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1889년 11월 15일 브라질 의회는 제정의 폐지를 선포했고 페드루 2세와 그 가족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이후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1891년 1월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2.2. 공화국 설립 초기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둘러싼 거의 모든 브라질의 이익집단이 1889년 11월 15일 이후 브라질의 패권을 놓고 권력투쟁에 뛰어들었다. 공화국의 수립과 체제방식 따위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여주었다.[3] 또 하나 주목을 받은 집단은 군부였다. 공화국 초기 이들의 영향을 막강했다. 데오도루 다 폰세카 원수가 임시정부 수반에 선출되었으며, 제정의회의 절반 가까이 되는 의원들이 군인 출신이었다.[4] 브라질의 국가수반으로 선출된 데오도루 다 폰세카 원수와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파라과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야전장교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실증주의와 같은 ‘국가 바로잡기’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이들이 군사혁명을 통해 군주정을 끌어내린 것도 단지 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이었지 새로운 공화정 체제를 어떻게 국가에 잘 적용시킬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 초기 군부의 모습은 이후 공화국 설립 초기 나타나게 될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불확실성의 연속에 기여하는 꼴이었다.육군 내부에서 데오도루 다 폰세카 원수의 가장 큰 라이벌은 플로리아누 페이쇼투 장군인데, 그의 지지자들 또한 파라과이 전쟁 참전경험은 있었으나, 실제론 젊고 유능한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자신들은 단순히 군인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혁명 이후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하는 사명을 띄웠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실증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근대화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두 그룹간에 의견이 합치하는 부분도 있었다. 당시 다른 브라질의 이익집단은 자유주의를 내세웠지만 군대라는 특성상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상당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군 장교들이 볼 때, 신생 공화정이 가장 필요로 하는 능력은 강력한 행정부나 질서였고 일부 거대한 지방세력이 주창하는 연방제는 언젠가 각 지자체가 세력을 키워 중앙정부를 전복하고 연방구성원간 싸움으로 번질 수 밖에 없는 국가분열의 주범일 뿐이었다.
2.3. 헌법 제정
헌법 제정은 "공화정을 어떤 모습으로 이끌 것인가?" 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고, 나아가 신체제를 향한 유럽의 불신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해외에서 차관을 들여와 서둘러 국가다운 모습으로 발전하는 해결책이었기 때문에 제헌의회 소집을 서둘렀다.[5]최초의 공화주의 헌법은 1891년 2월에 공포되었다. 브라질은 미국 헌법을 바탕으로 삼아 브라질이 자유주의적 연방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각 주에는 주방위군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과 외국의 차관을 들여오는 개별적인 자유가 부여되었다.[6] 물론 우니앙으로 불리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한것은 아니었다. 중앙정부는 통화량 조절, 수입물품에 대한 과세권, 국가정규군 조직 그리고 공화정의 질서 유지를 위해 각 주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있었다.
신헌법과 함께 4년을 임기로 하는 대통령제가 시작되었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행정권은 이제 공화국 대통령에게 이전되었다. 입법부는 브라질 제국 시기와 동일한 양원제를 채택하였으나 상원의 종신제를 폐지하고 임기를 하원 3년 상원 9년으로 하는 제한을 두었다. 보통 선거 및 직접 선거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원칙적으로 21세 이상의 모든 브라질 성인[7]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으나, 군인, 문맹자[8], 금치산자 등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초대 정 부통령의 경우 예외적인 절차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제헌의회가 끝나고 일반의회로 전환된 이후 정 부통령의 선거는 의회를 통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바뀌었다.
헌법은 브라질인과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에 대해 기본권을 보장했다. 사형제도가 폐지되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와 종교를 분리하여 더 이상 가톨릭이 브라질의 국교가 아니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지금까지 제 2의 국가 역할을 하며 많은 권력을 쌓은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노력했다. 1883년 헌법보완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독점하고 있던 출생, 결혼, 그리고 사망신고는 이제 국가가 문서를 통해 특정한 공공기관에서 신고를 받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장례를 치를 땐 다른 종교의 장례의식을 시행할 수 있었다. 당시 브라질 이민자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독일계 루터교인들은 헌법을 환영했으며, 브라질의 빠른 사회적 통합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민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1889년 11월 15일을 기준으로 브라질에 체류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에겐 브라질 시민권이 부여되었는데, 브라질 국민으로 살지, 본국의 국적을 유지할지에 대해선 6개월 이내에 의사표명을 하도록 하는 조항도 존재했다.
2.4. 주변국의 반응
브라질에 공화국이 수립되자, 석연찮은 반응을 보인 영국과는 달리 신생독립국인 아르헨티나는 열광적인 환영을 표했다. 특히 미국은 브라질의 독립과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국 대표가 한 자리에 모이는 제1회 미주국제회의를 개최했는데, 브라질 정부는 대표단 단장으로 사우바도르 지 멘도사를 선임했다.[9]히우 브랑쿠 남작이 초대 외무장관에 취임하면서 그는 미국과의 관계를 좁히는데 많은 노력을 가했다. 브라질 외교의 중심축은 더 이상 런던이 아니었고, 완전히 워싱턴 D.C.로 옮겨간 것으로 보였다. 다만 그는 무조건적인 친미주의가 아닌 북중미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처럼 남미의 최강국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쥐고 접근한 것이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친선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두 국가는 공공연히 군비를 늘리며 공개적인 군사력 경쟁에 돌입했다. 이 때 브라질은 주변국인 우루과이나 파라과이 같은 중소 국가들과의 밀월을 통해 아르헨티나를 압박하려는 노력을 가했지만, 그리 성공적인 결과는 내지 못하였다.
브라질 접경국에 대한 국경재조정이 이루어졌는데 볼리비아와는 사소한 무력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고무생산량이 늘어난 아크리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볼리비아가 주장하면서 일어났다.[10] 양국은 1903년 페트로폴리스 조약을 통해 브라질이 볼리비아에 250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대신 아크리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2.5. 초기 경제
공화국 설립 첫 해 과도한 통화발행과 신용대출은 금융투기현상을 불러왔다. 1891년 투기현상이 꺼지면서 주식이 폭락했고, 파운드에 대한 브라질 헤이스화의 가치가 급격히 낮아졌다.[11]2.6. 코로넬리즈무
제1공화국 시기의 브라질에는 코로넬리즈무(coronelismo)라고 불리는 정치체제가 들어섰는데, 이는 코로넬리스(coroneles)라고 일컬어진 대지주들과 그들 영향력 하에 놓인 유권자들의 몰표에 기반한 일종의 후견주의 체제였다.이 시기에는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대지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상파울루 공화당과 미나스제라이스 공화당이 일종의 정치적 동맹을 맺고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았는데, 커피 재배지가 몰린 두 주의 연립정권을 가리켜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즉 ' 커피와 우유의 시대'라고 일컫는다.[12]'* 포르투갈어에서 카페 콩 레이치는 카페라테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카페라테의 시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두 주의 공화당은 모두 커피 대지주의 영향력이 컸는데 상파울루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한편 남부 히우그란지두술의 경우 전통적으로 접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군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 지주들에 의해 결성된 히우그란지 공화당 역시 정치에서 군부와 많은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에서도 서서히 산업화가 진행되어 도시 노동자 계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자신의 권리 신장을 위해 전통적인 대지주 중심의 코로넬리즈무를 깨뜨리려 했다. 더불어 대지주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는데,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정치적 동맹은 1929년 상파울루 공화당의 와싱톤 루이스 대통령이 차기 대선 후보로 같은 상파울루 공화당 출신인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임명하면서 깨지게 되고, 이에 미나스제라이스는 다음해 치러진 1930년 대선에서 히우그란지두술과 동맹을 맺고 히우그란지두술의 주지사 제툴리우 바르가스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다.
하지만 1930년 대선에서 줄리우 프레스치스가 승리를 거두었고, 바르가스의 러닝메이트였던 부통령 후보인 주앙 페소아가 선거 이후 피살당하기도 하였다. 선거 결과에 불복한 히우그란지두술과 미나스제라이스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고, 이어진 군사 쿠데타로 제1공화국은 붕괴되었다.
[1]
1889년 11월 19일부터는 현재의 도안과 같은 브라질 국기를 사용했으며, 시대 구분을 위해 구 깃발을 사용.
[2]
이 표어는 브라질 국기에도 써져있다.
[3]
미나스제라이스,
상파울루와 같은 거대한 지방의 세력은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연방제적
공화제를 옹호하는데 혈안이었다.
[4]
다만 내부적으로 육군과 해군 사이의 갈등이 있었는데, 육군은 신체제를 옹호한 반면 해군은 오래 전부터
군주정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5]
물론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은
데오도루 다 폰세카의 장기집권을 막기 위해 의회 소집에 앞장섰다.
[6]
특히
상파울루주는
커피수출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헌법이 각 주정부가 수출품목에 대한 자율적인 과세율 결정을 보장함으로써, 이들은 막대한 주 정부재원으로 폭넓은 자치권을 행사했다.
[7]
헌법에서 성인에 여성이 포함되는지는 명확히 하지 않아 법률상 투표가 가능했으나 암묵적으로 제한되었다.
[8]
1890년 기준으로 문해율은 17%였으며 30년이 지난 1920년에도 28%에 불과했다. 브라질에서 보통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지부진했고, 문맹퇴치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밀어붙이게 된 것은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부였다. 바르가스 역시 문맹퇴치 노력만 했지 문맹자에게 투표권을 주지는 않았다. 브라질에서 문맹자에게 투표권을 준 건 1988년이 되어서였다.
[9]
제정시대부터 활동한 골수
공화주의자로 대표적인
친미주의자였다.
[10]
아마존 북부에 위치한 아크리 지역은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나, 실질적으로 해당지역을 개발하여 고무산업 붐을 가져온 사람들은 브라질계 이민자들 이었다.
[11]
1890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이후 영국자본이 남미 대부분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금융위기가 예상보다 빨리 촉진되었다.
[12]
낙농업 위주로 알려진 미나스제라이스는 실제로는 커피 위주 경제였다. 다만 브라질 낙농업의 중심지인 것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