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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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합중국 (1964 ~ 1967) Estados Unidos do Bras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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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연방 공화국 (1967 ~ 1985) 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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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 국장 | |
Ordem e progresso 질서와 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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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1일 ~ 1985년 3월 15일 | ||
성립 이전 | 성립 이후 | |
브라질 제4공화국 | 브라질 제6공화국 | |
수도 | 브라질리아 | |
언어 | 포르투갈어 | |
종교 | 가톨릭 | |
민족 | 브라질인 | |
정치체제 |
대통령제 군정 권위주의 연방제 |
|
국가원수 | 대통령 | |
통화 | 크루제이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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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itadura militar브라질 군부가 브라질 제4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세운 군사정권.
2. 역사
1964년 대통령이었던 주앙 굴라르는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제2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시절 재무장관을 역임한 사람으로써 군부의 강한 반대를 받고 있었다. 대통령이었던 자니우 쿠아드루스가 1961년 사임하여 굴라르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군부가 그의 취임을 거부하여 한동한 정치적 혼란이 있었다. 비록 군부가 양보하여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군부는 사사건건 굴라르의 정책을 방해했고, 1964년에는 결국 미국 국무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쿠데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주도자인 카스텔루 브랑쿠는 헌법을 정지시켰고, 대통령이 되었다. 브랑쿠는 그리고 여러 반대파 세력들과 야당 세력들을 추방이나 자격 박탈, 검열 내지는 고문 등의 방법으로 억압하면서[2] 친미, 반공 노선의 외교 정책을 내걸어 외국 자본 도입에 의한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참고로 이 당시 CIA는 고문기술을 브라질 군부에게 전수해주었다고.집권 초기의 군사 정권은 다른 신흥국가들처럼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에 주력하며 90%대인 인플레이션을 20%대까지 낮추고 실업률은 3% 이내의 완전고용을 이룩했으며, 특히 1968년부터 197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이 연 평균 10%를 넘기는 호황세를 보였다. 이 당시 텔레비전과 자동차가 부유층의 전유물에서 중산층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는데 브라질 군사정부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이러한 호황을 브라질의 기적이라며 홍보하고 다녔다. 특히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팀이 우승한 것과 엮어서 브라질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라는 식의 국뽕 캠페인들을 홍보했고, 또한 브라질이 2000년까지 현재의 경제발전을 지속한다면 일본 수준의 1인당 국민소득을 지닐 수 있다고 홍보하기도 했는데 당시 브라질의 노인들이 2000년까지 살지 못해서 안타까워했다는 소리가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호황 속에도 문제가 많았다. 브라질 정부에서 자본 축적을 위해 임금 인상률을 물가상승률보다도 낮게 책정했는데 이로 인해서 실질 임금증가율은 경제성장률에 훨씬 못 미쳤고 브라질의 최저임금 수준은 구매력 기준으로 쿠비체크 정권때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여 1960년 대비로 하면 브라질 노동자의 1/3 가량이 50%에 달하는 구매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하니 고도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면 보통 빈곤율이 괄목하게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브라질은 빈곤율은 괄목할정도로 줄어들지 않았고,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3] 또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군사정부에서 외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들여놓았는데 단기적으로 공장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도로포장하는 데 썼으니 브라질 경제에 도움을 주었지만 1971년도에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조짐이 나타났고, 또한 외채를 구조조정해야할 타이밍을 놓쳐서 결국 오일쇼크와 함께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하강하고 물가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1978년 제2차 오일쇼크와 1980년 외채위기로 브라질의 경제성장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67년에 브랑쿠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이에 군사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이 헌법에 근거해 코스타 이 시우바 장군이 역시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군사정권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1968년 6월 리우데자네이루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공산주의자들은 무장 투쟁에 들어갔다.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은 제도법령 5호를 선포해 의회를 폐쇄하고 반정부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이후 1969년 에밀리우 가하스타주 메디시 장군이 대통령에 올랐고, 메디시는 아마존 지역을 개발하려고 하였으나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1974년 취임한 에르네스투 가이제우 대통령은 일부 억압적인 정책을 완화하였으나 오일쇼크 등에 따른 불황과 초인플레이션, 외채 문제로 경제는 파탄 상태에 빠졌다. 집권 군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해서 이어져 군사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련 링크
1978년 취임한 주앙 피게이레두 대통령은 브라질 군사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이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군부 지도자였지만 브라질의 민주화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몇년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게이레두 정권 시절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의 비밀문서 1만 9400건이 파기되었다고 한다. 한편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80년대 들어 마이너스로 전환되었고, 1984년 인플레이션율은 223.8%까지 급증했으며, 대외채무도 910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이로 인해 생필품 부족까지 수반되기도 했다.
1985년 1월 탄크레두 네베스가 민간 출신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20년간의 군정은 끝나게 되었다.[4]
[1]
1968년부터 1992년까지 사용되었다. 그 전에는 G 아래에 별이 없었다. 현재의 국기는 1992년에 디자인된 것이다.
[2]
브라질 음악 장르인
MPB와
트로피칼리아도 이 탄압에 호된 된서리를 맞았다. 일례로
지우베르투 지우와
카에타누 벨로주는 이 탄압 때문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특히 벨로주는 투옥된 상태에서 앨범을 녹음했을 정도.
[3]
군사독재정권에서 이런 경제정책을 편것이 빈곤층들이 돈을 벌면 그걸 다 소비하는데 써서 재분배 정책을 쓸모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개돼지론이었던것인데, 이 당시에야 도시화로 임금하락을 중화시켰다지만 지금 기준에서 보면 폭동이 일어나도 할말이 없는 경제정책을 편것이다,
[4]
그러나 네비스는 취임식을 치르기 전에 급사하여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조제 사르네이가 대통령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