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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옐친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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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08080> 일생 | 생애 | |
가족 |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 ·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 · 아내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 ·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 ·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 | ||
역대 선거 |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빌 클린턴 · 블라디미르 푸틴 | ||
사건 · 사고 |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 8월 쿠데타 | ||
관련 전쟁 | 제1차 체첸 전쟁(1994~1995) ·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 ||
기타 | 전략무기감축협정 | ||
평가 | 평가 | ||
보수주의 |
제1차 체첸 전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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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체첸 전쟁 First Chechen War Перв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а Дуьххьара нохчи-оьрсийн тӏо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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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94년 12월 11일 ~ 1996년 8월 31일 (약 2년) | |
장소 | |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 |
결과 | |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승리 | |
영향 | |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사실상(de facto) 독립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체첸 반대파 |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무자헤딘 UNSO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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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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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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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30,000명~80,000명 사망 체첸 외 지역 민간인 161명 사망 500,000명 실향민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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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hite 제1차 체첸 전쟁 관련 사진자료}}} | |
그로즈니 인근에 격추당한 러시아군 Mi-8 헬리콥터 | 전소되어 격파된 BMP-2에 몸을 숨기는 체첸군 |
그로즈니로 진격하는 러시아군 | 그로즈니 시가전에 의해 파괴된 체첸 공화국 대통령궁 |
BTR-80 장갑차로 폐허가 된 그로즈니 거리를 이동하는 러시아군 | 전쟁터에 버려진 피아노를 연주하는 러시아군 |
체첸 전쟁을 풍자한 그림 |
1994년과 1995년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 연방과 체첸 분리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2. 과정
2.1. 체첸의 독립선언
1991년 9월 6일, 조하르 두다예프와 지지자들은 KGB 본부 등 체첸 지역의 주요 공관들을 점령했다. 이후 두다예프는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1월 1일에는 독립을 선포하였다.2.2. 초기
그로즈니 전투의 러시아군 생존자 | 그로즈니 시내를 평정 중인 러시아군 BMP-2와 BTR-80들 |
총을 든 체첸 시민들 | 그로즈니 시내를 요새화하러 이동 중인 체첸 반군들 |
1994년 12월 체첸 내부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직접 정규군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은 1950~1960년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성공했던 것처럼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상대의 수도를 급습하여 정권을 전복시키고 친러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외과 수술적 공세를 통해 20일 내로 전쟁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제1차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장비
- 전차 : T-64, T-72A, T-72B1,T-72BV, T-80U, T-80BV
- 장갑차: BMP-1, BMP-2, BMP-3, BTR-80, BTR-40, 쉴카
- 포: 81mm 박격포, AGS-17, SPG-9, 9M113 콘쿠르스(BMP-2 거치형), 9K115 메티스, KPV
- 헬기: Mi-28 하보크, Mi-24 하인드, Mi-8 수송헬기
1994년 12월 11일 전쟁 개시와 함께 러시아 공군은 체첸을 공습하여 체첸 반군이 보유한 공군기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12월 31일에 본격적으로 러시아군 6천명이 북쪽, 동쪽, 서쪽 세 갈래 길로 나누어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향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당시 이 부대의 병력은 대부분 신병이었는데 공격 개시 직전까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6] 이후 목적지가 체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러시아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으며 3년 전 걸프 전쟁에서 러시아제 T-72 전차가 미군의 M1 에이브람스와 영국군의 챌린저 1, 심지어 프랑스군의 당시 주력전차였던 2세대 전차인 AMX-30B2에게도 압살당하면서[7] 러시아 전차의 취약성을 드러냈음에도 걸프전을 연구한 러시아군은 자신들은 이라크군과 다르다며 러시아 기갑부대를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었다.
걸프 전쟁의 이라크군과 제1차 체첸 전쟁의 러시아군의 훈련 상태를 떠나서 걸프전 당시 이라크군은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 등의 다국적군의 제대로 된 공세를 겪어 보기도 전에 겁을 먹고 제대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 점이 '러시아군은 이라크군과 다르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긴 했다. 걸프 전쟁에서의 이라크군과 달리 그로즈니 전투 이후 러시아군과 러시아인들은 많은 피해를 봤어도 사기가 꺾이긴커녕 오히려 체첸 반군에 대한 분노로 사기가 올라갔다.
러시아군은 진격로에서 산개된 체첸 반군과 민병대의 저항에 부딪혔는데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훈련이 부족한 러시아군은 독립 의지로 뭉친 체첸인들의 저항을 뚫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공군의 지원과 로켓포의 화력 지원을 통해 체첸 반군의 반격을 분쇄하면서 12월 31일 예정보다 늦게나마 그로즈니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체첸 정부 청사와 주요 정부시설 등의 요충지가 별 저항 없이 접수되면서 작전이 성공했다는 낙관론이 돌았다.
그러나...
2.3. 1차 그로즈니 전투 (1994.12.31~1995.2.8)
"동무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네."
그로즈니 중앙기차역을 공략하기 직전 러시아군 무전수가 체첸 반군으로부터 수신한 무전
그로즈니 중앙기차역을 공략하기 직전 러시아군 무전수가 체첸 반군으로부터 수신한 무전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그로즈니역 |
파괴된 러시아군의 T-80BV 뒤로 엄폐하는 체첸 반군 |
12월 31일 러시아군이 그로즈니 시가지에 진입하기 시작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민간인들 틈에 숨어 그로즈니 시내에 매복하고 있던 체첸 반군의 기습으로 러시아군은 많은 피해를 입어 그로즈니 시가전에서만 전차 62대, 기타 장갑차 163대를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다.
12월 31일에 총 6천명의 러시아군이 그로즈니로 진입했는데 이때 그로즈니에 주둔하던 체첸군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아서 자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무장한 시민군을 군인이라고 한다면 1만명이 러시아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정규군만 센다면 2천명 정도였다.
2.3.1. 중앙기차역
그로즈니로 진격하기 위해 준비 중인 러시아군 기갑 부대의 T-72A. 이때까지만 해도 이후에 일어날 비극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8] |
당시 131여단은 알파 대대와 베타 대대로 나뉘어서 기차역을 향해 진격했다. 이 중 알파 대대는 최선봉대대였는데 알파 대대의 BMP 장갑차와 T-80 전차들은 기차역을 보지도 못하고 파괴되었으며 대부분 장비가 파괴되기 직전에 승무원들과 탑승한 보병들이 탈출했다. 이때부터 제131 여단의 알파대대는 본격적으로 지옥을 보게 되었다. 탈출한 보병들과 승무원들은 각개전투를 실행했으며 알파 대대는 포병지원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의 알파 대원들은 포병지원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으며 이후에도 포병지원은 없었다. 알파 대대장은 공중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공군의 오사로 인해서 후방에 남아 있던 BMP가 모두 파괴되고 러시아군이 엄폐해 있던 건물을 무너뜨려 버렸다. 알파 대대장은 각개전투를 시작한 시점부터 계속해서 구조요청 무전을 보냈지만 본대에서는 수신된 바가 없었다고 한다. 알파 대대장은 최후의 명령으로 각자 알아서 이 지옥에서 어떻게든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알파 대대의 남은 생존자들은 3일간 사력을 다해 그로즈니를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탈출에 성공한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불타고 있는 그로즈니의 한 정유소 |
1월 1일 제131여단의 여단장이었던 이반 사빈(Иван Савин) 대령은 알파와 베타 대대의 보병과 승무원들 중 기차역에 도달한 인원들로 기차역을 사수하려고 했지만 부상자가 속출했고 상황은 러시아군에게 너무 불리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침에 131여단이 기차역에 도착한 뒤 원래는 503기계화보병여단과 8기갑대대가 지원을 해 줬어야 했지만 체첸 반군이 131여단을 포위하고 503여단을 함정으로 유인해 버리는 바람에 503여단도 포위되었다. 8기갑대대는 도시 진입 과정에서 먼저 도착해 있던 다른 부대들에게 오인사격을 받아 6시간 동안 서로 총격전을 벌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차역으로는 단 한 명도 지원을 오지 못했고 결국 1월 1일 저녁이 되자 여단장인 사빈 대령은 부상병 40여명을 5대의 APC에 태우고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체첸 반군의 RPG 로켓 공격으로 27명이 즉사하고 13명은 체첸의 포로가 되었으며 사빈 대령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그는 1월 2일 기차역에 남은 다른 장교들과 의논해 결국 기차역을 버리고 후퇴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들은 쓸만한 BMP-2를 찾았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시가지에서 체첸 반군의 공격을 받아 사빈 대령은 전사했다. 그의 시체는 파괴된 차량 근처에 있었으며 파편에 짓이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시내에서 교전 중인 체첸 반군. 뒤에 파괴된 러시아군의 BMP-2가 보인다. |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러시아 전차의 취약점을 노린 체첸 반군의 전술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전차는 피탄면적을 줄이기 위해 크기가 작은 포탑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차포의 최대 부양각이 낮아서 높은 곳을 공격할 수 없다.[9]
이를 노려 체첸 반군은 시내 건물의 2층이나 3층에 매복하고 있다가 진격해 오는 러시아군 전차의 취약한 전차 상부를 노리고 대물저격총으로 반응장갑을 기폭시킨 후 RPG-7 등의 휴대용 대전차로켓으로 공격했고 건물 사이의 길을 따라 일렬로 진격해 오는 전차 대열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먼저 공격해 격파하거나 건물을 무너뜨려 전차의 이동을 차단한 다음 오도가도 못하는 전차들에게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속수무책으로 격파당하거나 전차를 버리고 탈출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러시아군이 제대로 싸웠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러시아군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그깟 체첸 반군의 저항은 미약할 거라고 예상했고 "상대 수도로 진격하면 전쟁 끝"이라고 안일한 계획을 세운 나머지 시가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으며 러시아군 정보부는 체첸 반군이 그로즈니 시내에 긴급히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교전 중인 체첸 반군 |
이 때문에 시가전에서는 적 대전차보병으로부터 전차를 엄호해 줄 보병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장갑차에 승차할 보병이 아예 없거나 운전병이 없어 영관급 장교가 차량을 운전하는 경우가 빈번할 정도로 보병 전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물론 이는 대다수의 보병과 승무원들이 전투 중 전사해서 후퇴할 때 벌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러시아군 전차들이 장착한 반응장갑 중 상당수가 화약 없이 벽돌만 넣은 종이호랑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RPG에 맞으면 여지없이 파괴되는 셈이었다.
지도조차 소축척 지도뿐이어서 단위 부대들은 시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저격수와 부비트랩의 희생양이 되었다. 부대 간 지경선은 복잡한 시가에 모호하게 그어졌고 위에서 서술되어 있듯이 인접 부대 사이에 통신 수단도 부족해서 오인 사격과 오폭이 잇달았다. 러시아 기갑부대의 장교들은 지원 포격이나 근접항공지원 유도에 서툴렀다.
시가전 교리도 제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은 내다버리기라도 했는지, 81전차연대의 총 120여대의 T-80BV 전차와 장갑차가 투입되었지만 유기적인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가 중심부로 돌진하다가 무려 105대가 파괴되어 버렸다.
이 사진 하나로 당시 상황 설명이 가능하다. 서로 담장 뒤로 은폐하려다 서로 뒤엉킨 것이다. 사진의 전차는 T-72A(좌)와 T-72B obr.1989(우). |
반대로 체첸 반군은 조하르 두다예프가 소련 공군 소장 출신에 참모총장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소련 육군 기갑사단 사단장 출신이었던 데다 소련군 복무자, 러시아에서 훈련받은 압하지야 전쟁 참전자가 부대의 핵심을 이루어 경험도 풍부했고 러시아의 전술에 능통했다. 3일간의 기갑부대를 앞세운 혼란스러운 공격이 처절한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 지휘부도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고 야포와 로켓포의 포격과 공군의 공습을 동원하여 건물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시내로 진격해 나갔다. 결국 1995년 1월 대통령 관저를 장악했고 2월 말에는 그로즈니 전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당시 시내에는 민간인들과 체첸군이 뒤섞여 있었는데[10] 포격을 동원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수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그로즈니 전투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는 3만 5천명을 집계되는데 그 중 5천명이 어린이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확보하는데 당초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피해를 업었다. 전사자만 최소 1,426명에서 2,000명에 달했고, 실종자도 500명[11], 부상자는 4,630명, 포로는 96명에 달했다.
2.4. 그로즈니, 그 이후
러시아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그로즈니 시내 |
한편 체첸 반군은 러시아가 확보한 체첸 지역 뿐만 아니라 체첸 바깥의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도 각종 테러를 벌였는데 특히 1995년 6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끈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극으로 러시아군의 발목이 잡히면서 체첸 반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체첸 각지에 민병대가 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이슬람 국가들에서 최대 5,000명으로 추정되는 지하드 전사들이 자원해 왔다. 1996년에 이르면 러시아가 점령한 그로즈니조차 안전하지 않게 된다. 1996년 3월 체첸 반군이 그로즈니 시내에 3방향으로 대거 난입하여 러시아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다시 후퇴했다.
러시아군은 1996년 6월 두다예프를 공습으로 암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체첸 반군의 게릴라전에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당했으며 1996년 8월 19일 샤밀 바사예프의 지휘 하에 체첸 반군은 그로즈니 중심가를 성공적으로 기습하여 3,000여 명의 러시아군 병력을 포위하였다. 러시아군의 거듭된 구출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시내를 향한 대규모 무차별 폭격을 예고하며 체첸 반군에게 항복을 종용하였지만 많은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폭격 위협은 오히려 대내, 대외적 여론의 악화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8월 31일 러시아와 체첸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막을 내렸다.
러시아는 개전 초기 3만 8천명을 동원하고 이후 추가로 증원하여 최종적으로 7만명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약 21개월의 전쟁 기간 동안 최소 5,732명의 전사자만을 남기고 체첸을 정복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 결과 체첸 전쟁 이후 대한민국 국군 등 일부를 제외하면[12] 전 세계적으로 냉전 시대의 대규모 정규전보다는 소규모 국지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일었다.
제1차 체첸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탑이 세워졌다.
평화 협정의 내용은 1997년 1월 1일까지 러시아군의 철군, 5년간 체첸의 지위에 대한 결정 유보, 러시아-체첸 연합 행정 기구 구성, 체첸 정규군의 유지 등으로 사실상 러시아의 패배로 볼 수 있으며 러시아는 체첸 전쟁에서의 잔혹한 전쟁범죄를 이유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선진국들에게 경제제재를 받았다.
여기서 굴욕을 맛본 러시아는 1999년에 제2차 체첸 전쟁에서 그로즈니를 초토화하고 분리독립 세력을 박멸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제2차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는 제1차 체첸 전쟁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일명 소탕(Зачистка)이라는 이름으로 체첸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고 오늘날까지도 이 당시 러시아군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로 얼마나 많은 체첸인들이 죽었는지는 추산이 불가능하다.
3. 참상
위 동영상의 5분대는 1차 체첸 전쟁 당시 그로즈니 시가전의 131st Maikop Motor-Rifle Brigade(제131 마이코프 차량화보병여단)의 최선봉대대였던 알파 대대의 생존자의 인터뷰인데 인터뷰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 왜 체첸 전쟁에 JOURNEY TO HELL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제1차 체첸 전쟁의 그로즈니 전투에서 생존한 제131 마이코프 여단 소속 알파 대대의 중대장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기자: 여러분의 현재 소속과, 현재 그로즈니에 잔존해 있을 병력은 얼마나 될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중대장 : (저희 부대는) 12월 31일에 진입하기로 했을 겁니다. 근데 막상 기차역에 진입한건 1월 1일 오전 10시였어요. 우리는 별다른 문제 없이 도심지를 돌파했습니다. 곧 우리는 도시 중심부(중앙기차역, 대통령 관저 근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잠시 대기했습니다. 정말 많은 전차들이 그곳에 뭉쳐 있었습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장비들이 파손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쏘면 그들도 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이겼고, 그게 다입니다.
기자: 그러고 나서요? 어떻게 탈출하셨나요?
중대장 : 우선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채로 도시에 진입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요. 아무런 주의나 상부로부터 온 정보도 없었고, 보급된 지도는 우리의 현위치를 알기엔 아무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가했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막무가내로 도심지에 진입했습니다. 저의 중대는 궤멸되었고, (우리가 도착한) 기차역은 지옥이었습니다. 모두가 사력을 다해 그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했습니다.
기자: 아군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중대장 : 우리는 3일 동안 걸었습니다.
기자: 그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중대장 : 그다지... 별 거 없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 병사들과 만났고, 우리 131연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종자 목록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13]
기자: 두다예프측 병사들(체첸 반군)과 교전하지 않았나요?[14]
중대장 : 네, 교전했죠.[15] 그들은 우리를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습니다. 제 APC는 완파되었고요.
기자: 그럼 거기서(기차역) 당신과 당신 친구(옆에 앉아있는 병사)만 그곳에서 탈출하신 건가요?
중대장 : 아니요. 전 제 중대원들에게 먼저 기차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장갑차 3대를 타고서요. 나중에 제가 기차역에 도착해 보니, 역에는 훨씬 더 많은 체첸군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공격하는지도 모른채로 당했습니다. (무전으로) 장갑차 5대로 다른 중대와 같이 탈출을 한다고 들었는데, 전 그들의 행방을 모릅니다.[16] 아무튼 제가 탄 장갑차는 (진입) 도중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저와 비슷한 상황이여서 도보로 탈출해야하는 소대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작했습니다.
기자: 주로 어디에 숨었나요?
중대장 : 당연히 빌딩, 야지에 숨었고, 웬만하면 밤에만 움직였습니다. 3일 뒤에 우리들만 시가지를 벗어나왔습니다.[17] 그리고 어떤 연대를 만났습니다. 어떤 연대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본대는 시가지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BMP-3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쪽 연대 병사들과 합류해 제 중대원들과 다른 생존자들을 구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연대는 시가지 진입을 포기했다 하더군요... 모두가 다른 방향으로 각자가 무사히 탈출했을 겁니다.
(잠깐의 정적)
기자: (옆의 병사에게) 더 붙이고 싶은 말이 있나요?
병사 :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중대장 : (저희 부대는) 12월 31일에 진입하기로 했을 겁니다. 근데 막상 기차역에 진입한건 1월 1일 오전 10시였어요. 우리는 별다른 문제 없이 도심지를 돌파했습니다. 곧 우리는 도시 중심부(중앙기차역, 대통령 관저 근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잠시 대기했습니다. 정말 많은 전차들이 그곳에 뭉쳐 있었습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장비들이 파손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쏘면 그들도 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이겼고, 그게 다입니다.
기자: 그러고 나서요? 어떻게 탈출하셨나요?
중대장 : 우선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채로 도시에 진입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요. 아무런 주의나 상부로부터 온 정보도 없었고, 보급된 지도는 우리의 현위치를 알기엔 아무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가했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막무가내로 도심지에 진입했습니다. 저의 중대는 궤멸되었고, (우리가 도착한) 기차역은 지옥이었습니다. 모두가 사력을 다해 그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했습니다.
기자: 아군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중대장 : 우리는 3일 동안 걸었습니다.
기자: 그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중대장 : 그다지... 별 거 없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 병사들과 만났고, 우리 131연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종자 목록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13]
기자: 두다예프측 병사들(체첸 반군)과 교전하지 않았나요?[14]
중대장 : 네, 교전했죠.[15] 그들은 우리를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습니다. 제 APC는 완파되었고요.
기자: 그럼 거기서(기차역) 당신과 당신 친구(옆에 앉아있는 병사)만 그곳에서 탈출하신 건가요?
중대장 : 아니요. 전 제 중대원들에게 먼저 기차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장갑차 3대를 타고서요. 나중에 제가 기차역에 도착해 보니, 역에는 훨씬 더 많은 체첸군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공격하는지도 모른채로 당했습니다. (무전으로) 장갑차 5대로 다른 중대와 같이 탈출을 한다고 들었는데, 전 그들의 행방을 모릅니다.[16] 아무튼 제가 탄 장갑차는 (진입) 도중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저와 비슷한 상황이여서 도보로 탈출해야하는 소대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작했습니다.
기자: 주로 어디에 숨었나요?
중대장 : 당연히 빌딩, 야지에 숨었고, 웬만하면 밤에만 움직였습니다. 3일 뒤에 우리들만 시가지를 벗어나왔습니다.[17] 그리고 어떤 연대를 만났습니다. 어떤 연대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본대는 시가지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BMP-3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쪽 연대 병사들과 합류해 제 중대원들과 다른 생존자들을 구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연대는 시가지 진입을 포기했다 하더군요... 모두가 다른 방향으로 각자가 무사히 탈출했을 겁니다.
(잠깐의 정적)
기자: (옆의 병사에게) 더 붙이고 싶은 말이 있나요?
병사 :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정당성이나 피해와는 별개로 제1차 체첸 전쟁은 러시아 사회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러시아 언론에서는 체첸 전쟁을 비교적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고 덕분에 러시아인들은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병사들의 어머니 같은 단체들을 통해 체첸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포로를 개별적으로 송환시키거나 러시아 방송에서는 다큐멘터리나 르포를 통해 체첸인들과 인터뷰하면서 러시아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보도했다. 러시아 예술인들 중 데데테 같은 락 그룹은 전선을 직접 방문하는가 하면 공연을 통해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다음 동영상은 1994~1995년 전투나 1996년 8월 전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1996년 3월 그로즈니 전투 당시 러시아군의 영상이다. 이 3월 전투는 8월에 있을 체첸군 대공세의 리허설 격이었다. 해당 영상은 내무군 특수부대 오몬(ОМОН)의 알렉산드르 키르사노프(Александр Кирсанов) 소령이 촬영했고 게시자가 영어로 단 자막을 역자가 한국어로 번역했다. 번역 출처
지휘소(이하 "지"): 헬기들이 8번 검문소를 지원할 것이다. 라디우스(지휘부). 오버.
검문소(이하 "검"): 이미 30시간째 고립되었다. 우릴 지원할 계획은 있는 건가?
지: 이제 몇 분 내로 지원이 도착할 것이다. 금방 도착할 것이다. 라디우스. 오버.
검: 이봐. 우린 이미 9명이 죽고 부상자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도 아직도 지원을 기다려야 한다. 모스크바와 연결 좀 시켜줘라. 그들은 TV에 대고 우리가 "사소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고립되고 검문소가 파괴되는 상황을 그렇게들 부르고 있다.[18]
검: "새벽!" "새벽!(체첸 주둔 내무군 사령부)" 우리 부대 장갑차 한 대가 13번 검문소와 92번 검문소 사이의 철로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격됐다. 안에 있던 우리 애들은 근거리에서 사격당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지원바란다. 전달됐나, 새벽?
지: 전달됐다. 하지만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 8번 검문소에서 탄약이 다 떨어졌다는 무전을 받았다.
검: 헬기, 헬기 지원을 부탁한다. 전차들의 위치를 묻고 있다. 아직 헬기가 도착하지 않았나?
지: 4번 검문소에서, 15분 내로 전차부대가 8번 검문소에 도착한다는 무전을 보냈다.
검: 이봐, 빨리 좀 움직여. 여기 40명이 있다. 뭔 소린지 이해 못하겠어? 그 중 얼마나 많이 죽고 다쳤는지 이젠 알지도 못하겠다. 우리 검문소가 완전히 파괴됐다! 완전히! 여기서 뭘 더 기다리라고? 398연대, 도대체 어디 있어? 어디야? 우린 외곽으로 빠지려고 했지만 아파트에서 계속해서 사격하고 있다. 이상.
검: 우린 완전히 포위되었다. 지금 지원이 너무도 절실히 필요하다. 10분, 15분만 지나면 날이 어두워진다.
지: 이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기습당했다. 각자 최선을 다하게. 연대가 어딨는지 교신조차 안된다. 5번 검문소를 지났다는 무전을 들었다.
검: "800" (지휘소), 헬기가 보인다. 우리한테 바로 오라는 무전 부탁한다. 방금 지나갔다. 200-300미터 밖에 안 떨어졌다.
지: "6번" 근처에 부대가 있다고 한다. 확인됐나?
검: 교신명을 알려줘라. 직접 무전하겠다.
지: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무전해라. 그들은 지금 교신 가능하다. 그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라
검: 헬기, 지금 너네 승무원이 고개도 내밀지 못하는데 도대체 공중지원을 하긴 하는 건가? 낮게 나는 게 겁나냐? 거기서 지금 자빠져 자고 있냐?
지: 6번 검문소. 진입로를 현재 박격포로 날려버렸다.
검: 우리 부대 폭발물이 안 보이냐? 조준을 조심해라. 박격포 따윈 필요 없고 우린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전사자와 부상자를 데리고 빠져나가기를 원한다. 10분 15분 내로 놈들이 우릴 전부 쓸어버릴 것이다. 조준을 우리가 원하는 도로 위로 똑바로 해라. 지금 머리도 못들고 있다. 지금 체첸군이 모든 방향에서 우릴 공격하고 있다. 다 필요 없고 연대를 동원해서 우릴 여기서 빼내달라.
지: "6번" 연대는 기습당했다. 그만 질질 짜라. 박격포 조준을 조절하고 있다. 알아들었나? 연대는 기습당했다. 걱정하지 마라. 해가 떨어지면 근처에 있는 체첸인 가족을 인질로 잡아라. 놈들을 방패 삼아서 건물에서 버텨라.[19] 둥글게 뭉쳐 있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다.
검: 전달됐다. 하지만 체첸 놈들은 여기 누가 있던 신경쓰지 않는다. 그놈들은 우릴 날려버리기만을 원한다. 따라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됐나?
지: "6번" 진정해라. 지금 무슨 생각이 드는 지 잘 알고 있다. 나도 하루종일 똑같은 기분이었다. 제발 진정해라. 해가 떨어지면 근처에 있는 우리 지휘소까지 자력으로 올 수 있다. 뛰다가 포복해라. 소규모 분대로 서로 지원사격하면서 조심해서 와라. 5명이 움직이고 5명이 엄호해라.
검: 우린 1명이 죽고 2명이 다쳤다. 남은 사람이 별로 없다. 추가로, 지금 현재 소지한 총은 모두 갖고 있다.
지: 뭘 더 원하나? 지금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알아들었나?
검: 부하들한테 그렇게 전하겠다. 우리끼리 어떻게 해보도록 하겠다. 도움에 감사한다. 건물에 저격수! 지금 쏘고 있다. 건물에서 기관총을 갈기고 있다.
검문소(이하 "검"): 이미 30시간째 고립되었다. 우릴 지원할 계획은 있는 건가?
지: 이제 몇 분 내로 지원이 도착할 것이다. 금방 도착할 것이다. 라디우스. 오버.
검: 이봐. 우린 이미 9명이 죽고 부상자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도 아직도 지원을 기다려야 한다. 모스크바와 연결 좀 시켜줘라. 그들은 TV에 대고 우리가 "사소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고립되고 검문소가 파괴되는 상황을 그렇게들 부르고 있다.[18]
검: "새벽!" "새벽!(체첸 주둔 내무군 사령부)" 우리 부대 장갑차 한 대가 13번 검문소와 92번 검문소 사이의 철로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격됐다. 안에 있던 우리 애들은 근거리에서 사격당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지원바란다. 전달됐나, 새벽?
지: 전달됐다. 하지만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 8번 검문소에서 탄약이 다 떨어졌다는 무전을 받았다.
검: 헬기, 헬기 지원을 부탁한다. 전차들의 위치를 묻고 있다. 아직 헬기가 도착하지 않았나?
지: 4번 검문소에서, 15분 내로 전차부대가 8번 검문소에 도착한다는 무전을 보냈다.
검: 이봐, 빨리 좀 움직여. 여기 40명이 있다. 뭔 소린지 이해 못하겠어? 그 중 얼마나 많이 죽고 다쳤는지 이젠 알지도 못하겠다. 우리 검문소가 완전히 파괴됐다! 완전히! 여기서 뭘 더 기다리라고? 398연대, 도대체 어디 있어? 어디야? 우린 외곽으로 빠지려고 했지만 아파트에서 계속해서 사격하고 있다. 이상.
검: 우린 완전히 포위되었다. 지금 지원이 너무도 절실히 필요하다. 10분, 15분만 지나면 날이 어두워진다.
지: 이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기습당했다. 각자 최선을 다하게. 연대가 어딨는지 교신조차 안된다. 5번 검문소를 지났다는 무전을 들었다.
검: "800" (지휘소), 헬기가 보인다. 우리한테 바로 오라는 무전 부탁한다. 방금 지나갔다. 200-300미터 밖에 안 떨어졌다.
지: "6번" 근처에 부대가 있다고 한다. 확인됐나?
검: 교신명을 알려줘라. 직접 무전하겠다.
지: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무전해라. 그들은 지금 교신 가능하다. 그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라
검: 헬기, 지금 너네 승무원이 고개도 내밀지 못하는데 도대체 공중지원을 하긴 하는 건가? 낮게 나는 게 겁나냐? 거기서 지금 자빠져 자고 있냐?
지: 6번 검문소. 진입로를 현재 박격포로 날려버렸다.
검: 우리 부대 폭발물이 안 보이냐? 조준을 조심해라. 박격포 따윈 필요 없고 우린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전사자와 부상자를 데리고 빠져나가기를 원한다. 10분 15분 내로 놈들이 우릴 전부 쓸어버릴 것이다. 조준을 우리가 원하는 도로 위로 똑바로 해라. 지금 머리도 못들고 있다. 지금 체첸군이 모든 방향에서 우릴 공격하고 있다. 다 필요 없고 연대를 동원해서 우릴 여기서 빼내달라.
지: "6번" 연대는 기습당했다. 그만 질질 짜라. 박격포 조준을 조절하고 있다. 알아들었나? 연대는 기습당했다. 걱정하지 마라. 해가 떨어지면 근처에 있는 체첸인 가족을 인질로 잡아라. 놈들을 방패 삼아서 건물에서 버텨라.[19] 둥글게 뭉쳐 있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다.
검: 전달됐다. 하지만 체첸 놈들은 여기 누가 있던 신경쓰지 않는다. 그놈들은 우릴 날려버리기만을 원한다. 따라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됐나?
지: "6번" 진정해라. 지금 무슨 생각이 드는 지 잘 알고 있다. 나도 하루종일 똑같은 기분이었다. 제발 진정해라. 해가 떨어지면 근처에 있는 우리 지휘소까지 자력으로 올 수 있다. 뛰다가 포복해라. 소규모 분대로 서로 지원사격하면서 조심해서 와라. 5명이 움직이고 5명이 엄호해라.
검: 우린 1명이 죽고 2명이 다쳤다. 남은 사람이 별로 없다. 추가로, 지금 현재 소지한 총은 모두 갖고 있다.
지: 뭘 더 원하나? 지금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알아들었나?
검: 부하들한테 그렇게 전하겠다. 우리끼리 어떻게 해보도록 하겠다. 도움에 감사한다. 건물에 저격수! 지금 쏘고 있다. 건물에서 기관총을 갈기고 있다.
러시아 군인가요[20] 중 체첸 전쟁을 다룬 대표적인 곡인 내가 체첸에 있다고 엄마에게 말하지 마'(Ты только маме что я в Чечне не говори)'. 체첸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목격했던 참상을 묘사한 러시아 군인가요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버전으로 개사되어 불리기도 했다.
4. 관련 문서
[1]
당시 러시아 국방장관
[2]
러시아 통합군집단 사령관.
[3]
두다예프 사망 뒤 임시 대통령을 역임했을 정도의 고위층 인사였으며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의 주도자이기도 했다. 미국도 그가
알카에다와 연계되어 있다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을 정도였으며 결국 2004년 카타르에서
GRU에 의해 암살당했다.
[4]
소련군 장성 출신으로 1997년 체첸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옐친과 평화협상을 할 정도로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던 인물이었으나 1999년 샤밀 바사예프의 다게스탄 침공이라는
트롤링에 결국 그로즈니를 점령한 러시아군에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5년에 러시아 특수부대에게 암살당했다.
[출처]
Oryx
#
[6]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최소한 전쟁 준비는 제대로 해서 정예부대를 파병했고 특수부대가 활약하는 등 시대보정을 감안하면 잘 싸웠다.
[7]
챌린저 1의 걸프전 성적: 157대의 챌린저1을 파견하여 300대가 넘는
이라크군 전차를 파괴하면서 단 한 대도 손실되지 않았으며 4.7km 밖에 있는
T-55를 날탄 일격에 격파하는 등의 우수한 업적을 달성했다.
[8]
여담이지만 러시아 육군 보병이 여전히 소련 시절 상징을 단 우샨카 모자를 쓰고 있다.
[9]
산악 지대처럼 높낮이가 심한 지역에서 산 아래에 있을 경우 높은 곳을 차지한 적 전차를 공격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고 이 때문에 러시아 전차는 포발사 대전차 유도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초근거리 교전이 발생하는 시가전에서는 이러한 포발사 대전차 미사일을 사용할 수 없었다.
[10]
현대 시가전에서 열세의 방어군이 민간인 사이에 섞여 방어전을 치르는 것은 기본과도 같다. 그렇지 않으면 우세한 공격군이 민간인 피해를 걱정하지 않고 모든 건물에 포탄을 박아 넣으면서 쉽게 진격해 올 테니까.
[11]
건물 잔해에 깔려 시신 수습 불가 / 시신의 심각한 훼손으로 신원 파악 불가.
[12]
공통점은 전면전 상황에 우선 대비해야 할 만큼 강력한 적과 대치한다는 것이다.
[13]
이 사람들은 돌아오기 전까진 모두 사망 처리가 되어 있었다.
[14]
중앙기차역에서의 교전을 묻는 질문이다.
[15]
이때 화면에 잡히는 병사의 손이 가관이다. 검은 때와 그을음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었있다.
[16]
이후 이것은 이 중대장이 살아남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위에서 서술되었듯 이 5대의 APC로 탈출하는 계획은 체첸군의 공격에 의해 부상병들이 모조리 사살당하고 포로로 잡히는 결과로 끝났고 장갑차 5대는 모두 파괴되었다.
[17]
같이 도보 탈출을 시도한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
[18]
실제로 이 전투 당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반군 수괴"인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이 시내의 방송국을 방문하여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시내를 접수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19]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군은 위험하다 싶으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체첸 민간인들을 인간 방패로 삼았다. 실제로 체첸군의 8월 공세에서도 인질을 붙잡아 체첸군의 포위망을 탈출한 사례가 있다.
[20]
속칭 '사가(혹은 싸가)' 일반적으로 가수가 작곡한 노래가 아닌 군인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온 노래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