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공식적인 명칭은 대북화해협력정책(Engagement Policy)으로, 국민의 정부에서 내세웠던 갈라진 남북의 화해와 교류, 협력 증대를 추구한 김대중 정부의 대북 유화를 목적으로 시도한 정책. 1998년 금강산 관광을 시작으로 첫 물꼬를 튼 이후 18년간 다양한 남북교류 사업을 진행했으나 2016년 개성공단 폐쇄 이후로 진행되는 사업이 없어 사실상 폐기되었다. 현재까지 재개된 사업이 없다."햇볕"정책이라는 용어는 이솝 우화 " 북풍과 태양" 에서 착안됐다고 전해진다. "행인의 외투를 벗게 한 것은 북풍이 아니라 햇볕이므로 우리도 북한을 몰아칠 것이 아니라 햇볕을 쬐어서 마음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 요점.[1] 독일이 분단국가였던 시절 서독이 동독을 향해 추진했던 동방 정책(Ostpolitik)을 많이 참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1.1. 동방 정책과의 비교
우선, 두 정책을 추진한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이라는 인물 사이에도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빌리 브란트는 사생아로 태어나 정치에 뛰어들기 이전 반 나치 투쟁에 뛰어들어 망명생활을 이어갔다. 냉전시대 분단국이었던 서독에서, 그것도 동독으로 둘러싸인 서베를린이라는 변방에서 정치가 생활을 시작했다. 김대중은 서자로 태어났고 빌리 브란트의 경우에서처럼 정치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에서 정치를 시작했다.[2] 또 정계 입문 이후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 두 차례의 망명[3] 등 시련을 겪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빌리 브란트는 초국가주의 유럽통합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전쟁과 전체주의 독재 체제의 원인을 민족주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의 일환으로써 유럽통합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며, 우선적으로 서독과 서유럽에서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시키고 이를 동독과 동유럽에 전파하는 것을 핵심으로 봤다. 이를 위해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의 나라들과 화해, 교류, 협력 정책을 펼쳐나가고자 하였다. 이후 소련을 시작으로 해 본격적으로 동방정책이 추진됐으며, 서독-동독 간 정상회담과 유엔 동시 가입, 외교관계 체결 등의 성과도 얻었다. 자세한 내용은 동방정책 문서로.
김대중은 6.25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평화의 가치를 깨달았고, 남북 관계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봤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및 협력하면서 점진적으로 통일을 달성한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1971년 2월 3일 미국 내셔널프레스 클럽 기자회견에서 이 3단계 통일방안을 설명하면서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을 지지하고 공감한다는 말을 한 바 있으며, 이후로도 다수의 연설 등에서 언급하는 등 대북정책을 정립해 가면서 동방정책의 큰 영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방정책은 통일의 방안이 아닌, 통일을 먼 미래의 과제로 설정하고 그 미래를 위한 준비로서 통합과 평화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햇볕정책은 한반도의 분단 자체가 부당한 것으로 생각해 일찍이 통일을 위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3단계 통일과정[4]의 첫 번째 단계[5]로서 기능한다. 이처럼 두 정책의 탄생 배경과 분단을 바라보는 시각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유사한 신념과 세계관을 관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2. 배경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하는 등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노태우 정부 이래 남북관계는 서서히 해빙무드를 빚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시기 여러 원인에 의해 대북정책이 일관되지 못한 채 표류하게 된다. 이는 1993년 2월부터 1998년 2월까지의 문민정부 5년간 통일원 장관(당시 부총리직을 겸임했으므로 통일부총리라고도 한다. 현재는 통일부 장관.)이 5번이나 교체된 사실로부터도 엿볼 수 있다. 특히 민주화 이후의 대북관계는 대한민국 내부의 정치적 갈등 혹은 대립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즉, 다양한 이념의 대립 속에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시점에는 태생적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남북관계 악화로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남북관계에 있어 굵직한 사건들 역시 다수 발생했는데,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 선언과 대북 선제 타격론이 대표적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통한 중재에 힘입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기 직전이었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처럼 크고 작은 사건들로 형성된 외부적 요인과 보수세력의 영향력은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이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6]이런 상황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측은 이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위해 남북문제에 능통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이는 점차 유화정책에 호의적이 된 빌 클린턴 행정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7] 하지만 집권여당 새정치국민회의는 자민련과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고, 임기 시작부터 IMF 사태 수습 등으로 당장 유화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북한 역시 이 정책을 남한의 흡수통일 전략으로 간주하고 이를 경계했다. 특히 햇볕정책 추진에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후 자신의 대북정책에 대한 주변국들의 지지와 공조를 확보하는 사전 작업에 임했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공조와 함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이래 일본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공조를 확보했으며[8] 중국과 러시아로부터도 지지를 확보했다.[9][10] 이후 2000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를린자유대학에서 " 베를린 선언"[11]을 갑자기 발표하면서 순식간에 남북화해와 정상회담이 정치문제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고, 6월에는 사상 최초로 2000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그 뒤를 이은 참여정부에서도 이러한 기조에 따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의 사업을 계속하고 개성관광 등 새로운 사업도 추가로 시행했다. 그 외에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평양 관광이나 중국을 거치지 않는 삼지연공항을 통한 백두산 관광도 논의된 적이 있었다. # 이러한 대북 사업 뿐만 아니라, 국제 체육 대회 남북동시입장과 한정적인 왕래도 주요한 부분이었다. 이때 북한 사절단이 현충원을 참배한 적도 있다.
3. 목표[12]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튼튼한 안보태세에 바탕을 두고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실현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정책적 노선이다. 이 정책은 안보와 대화라는 이중적 프로그램을 동시에 작동 포용정책하려는 것으로서, 남북관계를 특징짓는 현재의 분단 상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되 평화정착을 실현하여 통일로 나아가겠다는 이중적인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대북화해협력정책은 평화, 화해, 협력이라는 3가지 개념으로서 첫째, 과거의 긴장과 대결, 그리고 항상적 갈등 대신에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북한의 정치·군사적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은 이른바 ‘포괄적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이었다. 둘째,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남과 북이 상호 상승적으로 강화시켜왔던 불신과 대결 대신에 화해를 정착시키려는 것이었다. 남북관계에 현실로 존재하는 ‘적성(敵性)'과 미래를 지향하는 ‘동포성’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엄격한 타산에 입각한 거래식 상호주의가 아니라 적성을 완화하면서 동포성을 확대시키기 위한 포괄적 상호주의를 채용하였다. 셋째,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50여 년간의 소모적 경쟁 대신에 남북한 상호공영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이었다. 남북한 협력을 위해 ‘정경분리’ 원칙을 견지하였고 정치·군사적 갈등과 별개로 남북경협을 스스로 기업적 방식과 경제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자율적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총괄했던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은 중국에게 햇볕정책을 설명하기 위해서 4개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활용했는데, 햇볕정책의 기조를 보다 명징하게 알 수 있다.
1)선경후정(先經後政): 경제 먼저, 정치 나중에
2)선이후난(先易後難): 쉬운 것 먼저, 어려운 것 나중에
3)선민후관(先民後官): 민간 먼저, 관(官)은 나중에
4)선공후득(先供後得): 주는 것 먼저, 받는 것 나중에
간단히 말해서 북한으로의 시장경제의 확대를 통해 민간에서 시작한 협력관계를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것이었다.
4. 3대 원칙과 6대 정책기조
햇볕정책의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첫 번째, 북측의 무력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 번째, 남측은 흡수 통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세 번째, 남측은 화해와 협력을 추진한다.
햇볕정책의 6대 정책기조는 아래와 같다.
- 보다 많은 접촉·대화·협력의 추구
-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한 경제교류의 활성화
-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동포의 식량난 해결 지원
- 남북이산가족 문제의 조속한 해결 노력
- 남북대화를 통한 상호주의적 협력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
-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통한 군비통제의 실현 노력
5. 햇볕정책 기간의 일들
5.1. 북한 관광 프로그램
금강산 관광지 설명하는 북한 안내원 (2008년 3월 촬영)
금강산 관광, 개성관광 문서 참조
5.2. 노벨평화상 수상
2000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한국과 동아시아 전반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햇볕정책 문서지만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햇볕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1987년부터 매년 14번이나 후보에 오른 결과 수상한 것이다. 링크 김대중은 유신시절부터 세계적으로 민주화 운동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유럽[13]과 미국을 중심으로 인맥을 구축하여 이름을 알리는 등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14] 또한 1999년 동티모르 민간인 학살사건을 제지할 것을 APEC 등 국제무대에서 주도적으로 건의해 학살을 막아낸 것도 수상 이유 중 하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5.3. 개성공단
개성공단 문서 참조.5.4. 무력도발
그러나 햇볕정책이 시행된 기간에도 북한의 무력도발과 핵, 미사일 개발이 지속되었다.대표적으로 NLL을 침범하며 일어난 제1연평해전(1999년), 제2연평해전(2002년), 미사일 시험발사인 대포동 2호 발사 사건, 그리고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를 들 수 있다.
자세한 도발 내역은 북한/대남 도발 문서 참조.
5.5. 논란
10.4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경의선과 해주항 개방 문제, 황해도의 경제특구 문제가 거론되었다. 래리 닉시 미 의회조사국 선임연구원은 이때 송금됐던 금액이 북핵개발에 전용되었다는 주장의 보고서를 작성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불법 대북송금 사건으로 인해 여기에 현대 아산의 정몽헌 회장이 수사 끝에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고,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 전 의원은 수감되어 복권에 상당한 기간을 보냈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함과 동시에 대공요원 및 대북 휴민트(HUMINT(human intelligence))[15]가 조직적으로 숙청된 사건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이종찬 안기부장이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면서 있었던 논란으로 언론인터뷰에서 해명한적이 있으니 참조하자.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2000년 햇볕정책 추진전인 1998년에 있었던 사안이다.[16] 구체적인 내용은 휴민트 사건 문서 참조.
6. 참여정부 이후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에 나서면 10년 안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이른바 '비핵 개방 3000 구상'을 대북 노선으로 견지하였다. 북한이 이에 반발하여 남북관계는 경색되었고,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과 2차 핵실험,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폭격 사건 등이 이어지면서 남북교류는 서서히 단절되었다. #이명박 정부 후임인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기조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였다. 기본적인 형태는 조건부 협력의 회유책으로, 비핵개방 3000과 같은 맥락이다.
2016년 2월 10일 한국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2016년 북한 광명성호 발사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개성공단 가동에 대한 무기한 전면 중단 결정을 내렸고, 이어 북한이 폐쇄 조치를 내리며 한국 기업인들을 전부 추방했다.
7. 종료
대한민국 정부는 햇볕정책의 폐기를 발표한 적이 없기에, 일단 공식적으로 햇볕정책은 폐기된 적이 없으나 실질적으론 폐기되었다고 본다. 다만 폐기된 시점에 대해선 의견이 다양하게 갈리는 편이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햇볕정책 대신 대북화해협력정책이란 명칭을 사용했기에 이때부터 햇볕정책이 끝났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대북 정책은 김대중 정권을 계승하였으며, 노무현 본인도 대선공약에서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말한 적 있다. 즉 이름만 바꾸었을 뿐 노무현 정권 때의 대북정책은 일반적으로 햇볕정책의 연장으로 보는 편이다.
-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해 사실상 폐기 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해당 사건으로 북미 제네바 합의가 파기 되었으며 야심차게 출범한 KEDO도 해체 되는 등 2000년대 초반의 남북대화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핵개방 3000'을 발표한 시점부터 종료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조건부 협력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햇볕정책의 기조와는 기본 틀을 달리한다.
-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인해 금강산 관광과 개성 관광이 갑작스레 끝난 시점부터 종료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사건은 일반인 입장에서 충격파가 큰 사건이며 또한 이 사건 이후로 남북관계 회복이라 말할 수 있는 대사건이 8년간 없어온 것도 사실이다. 햇볕정책의 가시적 양대 성과 중 하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전로 인해 남북관계가 경직되었을 시점부터 종료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부터 시행된 5.24 조치로 인해 개성공단 이외의 남북교류가 대부분 단절되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서 햇볕정책의 실패가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 정말 마지막으로 보자면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 시점부터 종료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도발을 계기로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시키면서 햇볕정책의 가시적 양대 성과가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
8.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2017년 19대 대선에서 개성공단 재개 및 확장을 공약한 문재인이 당선되었다. 서울시장 박원순, 경기도지사 남경필, 강원도지사 최문순 등은 남북교류 재개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인수기간이 없어서 조각이 늦어지고,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끊어지지 않고, 한미 합동 군사훈련도 계속되었기에 당장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민간차원의 방북은 허용한다는 진전이 있었을 뿐이다. 기대를 모았던 6.15 공동선언 공동 축전은 북한 당국이 불허해 성사되지 못했다.한미정상회담, G20 정상회의에서 정부는 대북제재를 유지하되, 북한의 대화를 이끈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햤다. 대화를 통한 북핵폐기를 목표로 하여 선 핵폐기를 주장한 전 정권과 기조가 다르다. 이에 대해 야당들은 실패한 정책을 재개한다고 비판했다. 일단 대북 주도권은 가져왔다는 평이지만, 주변국 정상이 북한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북은 귀순한 여성종업원 송환과 국내 수구세력 척결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며 대화에 미온적이라 과거와는 상황이 크게 다른게 걸림돌이다. 김정은의 지도력이 김정일에 미친다고 말할 수 없고 금강산과 개성 공단 등 전 정권에서의 가시적 성과도 현재의 대북제재 하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이후 북은 거듭된 대화 요청을 진정성 부족을 이유로 무시하고,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였다.
따라서 당장 큰 변화를 노리기 보다는,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적인 대북기조가 유지될 수 있도록 물밑작업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햇볕정책/평가에서 나와 있듯이 햇볕정책의 비판점이 제2 연평해전과 북핵 개발 재선언에 미온적인 대처했다는 것이 었는데, 이를 수용하고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고 북의 도발을 규탄하지만 대화의 끈은 놓치 않겠다는 방향으로 잡은 것이다.
2017년 김대중 전 대통령 제8회 추모행사에서도 보수와 비보수간의 견해차가 드러났는데, 문재인은 공식적으로 정책계승을 천명했다. 여당 대표인 추미애는 만약 정책이 보수 정부에서 제대로 계승되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당 대표들은 같이 추모행사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에 날개를 달아준 실패한 정책이라는 견해를 표현했으며, 국민의당 박주선 전 대표는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전직 대통령과 정책을 높게 평가했지만, 그렇다고 현 정권의 방향은 마음에 안든다고 주장했다.
북의 6차 핵실험 이후 야당에서는 당장 미군 전술핵을 들여오고 핵무장하자고 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문재인은 핵무장은 없다고 못박았으며, 유엔기구를 통한 인도적지원을 결정하였다. 전량 현물이지만, 보수야당들은 국민이 핵인질로 잡혀있는 시국에 있을 수 없는 일리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반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비보수야권은 긍정적으로 평했다.
대북제재의 흐름에 거스르지 못한 정책의 부활은 그냥 선언에 불과한 사항이다. 2018년에 들어서 신년& 평창올림픽 준비기간과 맞추어 국군과 인민군간의 서해통신선이 복구되는 등 의미있는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호간 직통 연락처가 복구된 것이다. 판문점에서 고위급 회담도 열렸는데, 경과는 2018년 남북고위급회담을 참고.
평창올림픽에서 2007년 장춘 동계 아시안게임 이후로 없었던 남북 대표팀 개회식 동시 입장이 이루어 졌으며, 김여정은 이 기간 직접 방남하여 개회식 참관과 함께 김정은의 친서를 문재인에게 전달했다. 친서는 남북정상회담의 의사를 담고 있었던 것이 확실시 되어, 여러 실무 접촉을 통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회담이 개최되는 것이 확인 되었다. 여당, 민평당, 정의당은 일제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자유한국당은 위장평화에 속지 말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당과 대통령의 지지요인과 부정요인도 남북관계인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햇볕정책의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은 계속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대화는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문재인 정부의 대북특사를 맞아 김정은이 직접 "체제 보장시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 라고 말해 사실상 비핵화에 나설 수 있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남북정상회담은 예정된 수순처럼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경과는 2018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선언을 참고. 북핵의 최우선 존재이유가 남한에 비해 절대열세인 대칭전력 극복과 미국과의 협상카드인 만큼, 완전한 비핵화와 이에 대한 합의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CVID 대신 VI가 빠진 CD만을 확인한 채 회담이 끝났다. 그리고 회담 후 북한이 비핵화를 질질 끄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서 앞날을 쉽사리 낙관하기 어려워졌다. 국제 사회의 제재 해지와 함께 과거 남북경협의 상징인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다시 열렸을 때야말로 진정으로 햇볕정책이 부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햇볕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퍼주기"의 재개라고 비판하였다.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이 나왔다. 이 선언에서 판문점선언이행 군사분야합의서를 채택하였다. 내용이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군축, 평화적 공존을 위한 실제적인 방안을 상당히 많이 담고 있다. 청와대는 스스로 사실상 남북 간 종전선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 선언에는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개설, 화상 상봉 등의 인도적 문제, 금강관 관광, 개성공단 재개 의지 확인, 산림분야 협력, 북한과 철도와 도로의 연결, 산림, 의료, 문화 등에서 협력을 약속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 최고 지도자 최초의 남한 방한을 약속했다. 일각에선 2018년 연말에 방한을 한다는 설이 나왔으나 그런거 없이 한 해가 저물었고 새해가 찾아온 뒤 베트남에서 2월에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양 측의 입장차로 결국 결렬이 되어버렸기에 각종 대북지원 및 협력에 차질이 오게 됐다. 게다가 2020년 6월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로 남북한관계가 다시 급격하게 냉각되기 시작해 햇볕정책의 부활은 요원해 보인다는 평이 다수다.
WSJ “文대통령, 북한이 무슨 짓 하든 원조 추진… 김씨 왕조만 배불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유사해보이지만, 주변국의 이해를 구하는 치밀한 외교술을 생략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문 정부가 충분한 사전 정지 작업 없이 남북 교류를 중심으로 추진한 것이 미·북 회담의 결렬 등으로 이어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
9. 평가
자세한 내용은 햇볕정책/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10. 관련 문서
- 남북한관계
- 남북기본합의서
- 개성공단
- 개성관광
- 금강산 관광
- 남북 이산가족 상봉
- 조 바이든
- 김대중
- 김정일
- 문민정부
- 박지원
- 박근혜 편지 사태[17]
- 노르웨이의 왕세자 호콘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위키리크스
- 노무현
- 불법 대북송금 사건
- 동방 정책
- 데탕트
- 북한의 핵개발
-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 대북 지원
- 6자회담
[1]
그런데 해당 우화의 내용은 태양의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는 수준이 아니라 강하게 내리쬐어 행인이 더워서 외투를 벗지 않고는 괴로워 못 견디게 만들었던 것이다. 애초에 태양과 북풍의 대결에서 기인한 이야기였으니 이야기만 놓고 봤을 땐 단순한 유화정책과는 거리가 있다.
[2]
2022년 현재까지도 유일한 호남 출신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3]
김대중 납치 사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문서 참고
[4]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 - 평화적 교류와 교섭 - 평화통일'
#
[5]
베를린 선언에서는 "현 단계에서 우리의 당면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다."라고 선언했다.
[6]
1993년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라고 말했으며, 3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조건없이 북에 송환하겠다고 밝혔는데, 과거 북한이 그의 송환을 요구할 때 한국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등의 조건을 내세워왔지만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조건없이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8월에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 언제 갑자기 통일이 눈앞에 닥쳐올지 모른다”면서 북한 붕괴 가능성(
북한 붕괴론)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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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신년연설에선 "북한 경제난(
고난의 행군)의 근본원인은 과다한 군사비와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비능률에 있다. 북한이 동족을 위협하는 군사력 유지에 모든 국력을 쏟아넣으면서 구호를 바라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죄악이다. 북한이 화해와 협력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직시하고 대남(對南) 자세를 바꿀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임기 막바지인
1997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은 "
남북통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 원칙으로 '무력포기', '상호존중', '신뢰구축', '상호협력'을 제시했으며, 북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 전반을 회생시킬 수 있는 민족개발 공동계획을 남북대화를 통해 추진하자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이 변화의 길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면서 북한 당국의 호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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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클린턴 행정부가 유화적이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유럽 코소보 사태에는 무력 공습(
코소보 전쟁)을 감행했으며,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한때
대북 선제 타격을 계획했으나 한국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어 그만뒀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한바 있다.
[8]
일례로
문재인 정부 시기를 보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상황이었다.
# 하지만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았는데, 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의 회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만나 종전 선언을 하려고 했으며 볼턴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종전 선언’에 대한 대가로 북한으로부터 핵무기나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기준선 선언 등을 포함해 무엇을 뽑아낼지 논의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일본
아베 총리가 직접
워싱턴 D.C.를 방문해 “북한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하지 말라”는 등의 설득을 했고 결국 북미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종전선언이 빠졌다고 전했다.
# 이후 언론에서는
미국의 대북 정책 결정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본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패싱(passing)'한다면 한국 주도의 대북 정책도 힘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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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당시 주변 강대국과 대북 정책에 관한 합의를 본 다음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을 열었고, 외교적으로 포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이 달리 움직일 공간이 크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기사 그외 관련기사.
<'99 정치 결산>김 대통령의 4강 외교
김 대통령 APEC 정상외교
[10]
또한 1999년 작성된 정부문서에 의하면 혹시 모를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전략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DJ시절 작성된 북한 급변사태 매뉴얼 그외 김대중의
북한관련 어록도 참조.
[11]
"현 단계에서 우리의 당면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남북한 당국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특사 교환 제의를 수락할 것을 촉구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베를린선언
[12]
목표와 3대 원칙, 6대 정책기조는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함
[13]
1987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14]
DJ 귀국시 동행했던 인사 중 하나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이다.
[15]
'휴민트'란 '휴먼(human)'과 '인텔리전스(intelligence)'의 합성어로, '인적정보(人的情報)'를 의미하며,쉽게 말해 온갖 형태의
스파이를 생각할수 있다. 정보를 넘길만한 고위층중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고 시간과 돈,인연을 가장하여 여러번 접촉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겨우 정보를 넘기게 되는데 신뢰관계이든 거래관계이든 인적 정보망을 만들고 유지,재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6]
햇볕정책은
2000년부터 추진한것이고, 그 전에는 북한은 김대중에게도 적대적이었다.
99년 미국에서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받자 "미국상전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는다 어쩐다 하면서 자유타령을 늘어놓아 사람들을 우롱하고 있다. 역겨운 자유타령을 더 이상 늘어놓지 못하게 당장 목을 비틀어 놓아야 한다"고 비난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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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에는 한총련에 대해 자진해산 해야한다고 주장하자 "너절한 인간"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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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조웅 목사 폭로 연관성. 2002년쯤때
박근혜가
김정일한테 몰래 돈도 갖다줬다고 하며 이것 때문에 햇볕정책 논란에다가
기름을 더 붓는 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