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내전 관련 사건 | ||||
시리아 민주화 운동 | → |
시리아 내전 (2011 ~ 현재진행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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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라크 내전 (2014 ~ 2017) |
시리아 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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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 الْحَرْبُ الْأَهْلِيَّةُ السُّورِيَّةُ Syrian Civil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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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전황 지도[1] | ||||||||||
기간 | ||||||||||
2011년
3월 15일 ~ 진행 중 ([dday(2011-03-15)]일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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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
시리아 전역 | ||||||||||
원인 | ||||||||||
시리아 민주화 운동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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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르 알아사드 마헤르 알아사드 알리 압둘라 아유브 이삼 할라크 아세프 쇼카트† 수헤일 알하산 다우드 라지하† 알리 맘루크 라피크 샤하다 모하메드 딥 자이툰 압델파타 쿠드시예 두 알히마 샬리시 이삼 자흐레딘† 알리 하메네이 가셈 솔레이마니† 블라디미르 푸틴 세르게이 쇼이구 알렉산드르 드보르니코프 빅토르 본다레프 세르게이 수로비킨 안드레이 세르듀코프 알렉산드르 주라블료프 안드레이 카르타폴로프 발레리 아사포프† 세르게이 루드스코이 알렉산드르 라핀 알렉산드르 차이코 예브게니 니키포로프 로만 베르드니코프 예브게니 프리고진† 드미트리 웃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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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드 다라르[MSD] 아미나 오마르[MSD]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프랑수아 올랑드 에마뉘엘 마크롱 앙겔라 메르켈 마르크 뤼터 에르나 솔베르크 압둘라 2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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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 | ||||||||||
정부군의 시리아 영토 대부분 수복 시리아 및 이라크 내 ISIL 세력 약화 2017년 ~ 2018년을 기점으로 서방의 반군 지원 종료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독재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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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엠빅뉴스 - 시리아 사태는 왜 일어났나? 왜 계속되나? |
2. 배경
2.1. 시리아를 구성하는 주체
시리아는 중동에 위치한 다민족·다종교 국가로, 다양한 종파와 민족 집단이 복잡한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 시리아의 정체성은 다양한 세력이 갈등과 연대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내전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아래 표는 시리아 국민을 종파와 민족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세력 | 인구 수 (명) | 갈등 상대 | 영향력 및 주요 불만 |
수니파 | 약 16,100,000(70%) | 알라위파(시리아 정부) |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며 시리아 전역에 분포. 알라위파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경제적 특권에서 배제되었다. 훨씬 많은 정치참여 권리와 공정한 자원 분배를 원함. |
알라위파 | 약 2,760,000(10%) | 수니파, 이슬람주의 세력 | 프랑스 식민지 시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군대·정권 장악한게 현재까지 이어져 옴. 수니파로부터 생존 위협을 받음, 아사드 정권 주도로 시리아 내 안정을 원함 |
쿠르드족 | 약 2,300,000(9%) | 수니파, 알라위파, 튀르키예 | 민족적 차별 반대, 우리는 수니파도 알라위파도 아닌 순수 쿠르드족이다. 우리를 아랍화 하려고 하지 말라. 시리아 북부와 튀르키예 남부에 쿠르드족 자치구역 건설을 원한다. |
기독교 공동체 | 약 2,300,000(9%) | 이슬람주의 세력 | 도시 중산층과 부유층으로서 안정과 평화를 원함. ISIS가 급증하면서 생존 위협을 느끼고 시리아 정부에 협력함 |
시아파 | 약 460,000(2%) | 수니파, 이슬람주의 세력 | 이란의 지원을 받음. 수니파와 ISIS로부터 생존 위협을 받고 시리아 정부에 협력함 |
이슬람주의 세력 | 극소수 | 알라위파, 기독교 공동체, 시아파 | 무장 반군, 알카에다와 연결, 극단주의 수니파라고 할 수 있음(다른 수니파와 갈등관계에 있거나 사상이 더 강경함) "시리아 내 알라위파, 기독교도, 시아파, 쿠르드족은 이단이며 적대자다." "시리아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
2.2. 각 집단 간의 관계
주요 집단 | 수니파 | 알라위파 | 쿠르드족 | 기독교 공동체 | 시아파 | 이슬람주의 세력 |
수니파 | - | 긴장 (정부와의 갈등) | 중립 또는 긴장 (민족적 차이) | 중립 (종파 차이, 큰 갈등 없음) | 긴장 (시아파와 종파적 차이) | 경쟁 또는 협력 (종파 내 이념 차이) |
알라위파 | 긴장 (다수파 수니파와 갈등) | - | 중립 | 중립 (상대적으로 우호적) | 협력 (종교적 연대) | 적대 (과격 이슬람주의의 위협) |
쿠르드족 | 중립 또는 긴장 (민족적 차이) | 중립 (종파 차이, 큰 갈등 없음) | - | 중립 (공동체 내 영향 제한적) | 중립 (종파적 갈등 없음) | 적대 (이슬람주의의 위협) |
기독교 공동체 | 중립 (종파적 차이 있지만 큰 갈등 없음) | 중립 (알라위파 정부의 보호) | 중립 (상호 갈등 적음) | - | 중립 (갈등 없음) | 적대 (과격 이슬람주의의 위협) |
시아파 | 긴장 (종파적 차이) | 협력 (알라위파와 연대) | 중립 (민족적 차이로 큰 갈등 없음) | 중립 (큰 갈등 없음) | - | 적대 (과격 이슬람주의의 위협) |
이슬람주의 세력 | 경쟁 또는 협력 (수니파 내 과격 집단) | 적대 (알라위파를 이교도로 간주) | 적대 (민족적·이념적 적대) | 적대 (종파적·이념적 차이) | 적대 (시아파를 이교도로 간주) | - |
2.3. 시리아 내전 이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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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시리아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의 시리아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여러 제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이 시기 시리아 내에는 기독교, 수니파, 알라위파, 시아파, 쿠르드족이 살지 않았다. 있더라도 소규모 공동체로 산발적으로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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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 형성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시리아 지역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슬람이 7세기 중반에 시리아로 확산되기 전까지, 시리아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다수인 지역이었으며, 기독교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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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수니파 이슬람의 유입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후 강력한 이슬람 군대가 당시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비잔틴 제국을 크게 무찌르면서 시리아 전역이 이슬람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이슬람 제국은 "책의 사람들"인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지즈야(인두세)를 내는 조건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이슬람 통치자를 덜 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으며, 군사적 저항이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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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알라위파 이슬람의 유입
알라위파는 시아파의 독특한 분파로, 시리아 서북부의 산악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 덕분에 외부 세력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으며 오랜 기간 독자적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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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시리아 내 최초의 시아파 이슬람의 유입
10세기 이슬람 세계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당시 시리아 지역은 시리아 전역을 통치하는 세력이 없었고 지역 왕조들이 각자의 시리아 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0세기 후반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 서부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해 시리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시키면서 시리아 내에 시아파가 유입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시아파를 국교로 삼았지만 다른 종파에 대해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시리아 내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고 공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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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본격적인 유입[21]
16세기 이전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동부와 이라크 북부를 중심으로 수천년 간 살아왔으며 그들은 이 지역을 '쿠르디스탄'이라고 부른다. 16세기 초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과 시아파인 페르시아 제국이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고 쿠르디스탄은 전쟁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펼쳤고,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여 시아파와 싸웠다. 한편으로는 조금 더 안전지대인 시리아 북부 쪽으로 이동하면서 이 시기 시리아 내 쿠르드족이 엄청 많이 들어와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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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통치
오스만 제국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붕괴했고, 공식적으로는 1922년에 해체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여러 승전국들이 분할하였고, 그 중 시리아 지역은 프랑스가 관리하게 되었다. 1920년 7월, 프랑스는 시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미살룬 전투에서 시리아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시리아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23년에 국제 연맹의 공식 승인을 받아 프랑스의 위임통치가 확립되었고, 이는 1946년 시리아가 완전 독립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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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1946년 프랑스 식민지 시대
프랑스는 시리아 내 다수파인 수니파를 견제하기 위해 소수파를 알라위파, 드루즈파 등 소수 종파 출신을 군대와 경찰에 적극 채용하는 전략을 썼다. 이로 인해 알라위파는 다른 종파에 비해 군대 내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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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시리아 독립
프랑스 군대는 시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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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정치적 혼란기
독립 후, 시리아는 군부, 여러 정치 세력 간에 민족적, 종교적 갈등으로 엄청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 동안 시리아는 4번의 군사 쿠데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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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1961년 시리아와 이집트의 통합(아랍 연방)
1958년, 시리아는 이집트와 함께 '아랍 연방'을 결성하였으나[22], 이 연방은 3년 만인 1961년 무너졌다.[23] 시리아는 다시 독립국가로 돌아갔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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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바트당 쿠데타로 하페즈 알 아사드의 정권 장악
1963년, 시리아에서는 바트당(Ba'ath Party)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 1966년, 하페즈 알 아사드는 바트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 '백색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시리아의 대통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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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하마 봉기
시리아 내 다수 민족인 수니파는 정치적 권력이 알라위파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을 이끌어낸다. 하페즈 알 아사드는 군을 동원해 하마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으로 시리아 내 수니파와 알라위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시리아 내 정치적 불안이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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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취임
2000년, 하페즈 알 아사드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약속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며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정치적 반대파 억압과 권위주의적 통치로 돌아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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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르 알 아사드의 정치적 반대파는 누구이며, 바샤르는 왜 그들을 억압하였는가
바샤르 알 아사드에 대항하는 정치적 반대파는 크게 민주화 운동가, 이슬람주의자들(특히 무슬림형제단), 쿠르드족 정치 세력, 그리고 일반 시민과 청년 시위자들로 나눌 수 있다.
바샤르 정권 반대파 | 주요 요구 사항 | 바샤르의 입장 |
민주화 운동가[25] | 다당제 도입과 정치적 자유, 언론 자유 보장, 선거제도 도입 | 바샤르의 정권 유지를 위해 권력 분산과 정치적 자유를 허용할 수 없음, 처음에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으나 연일 언론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수니파 세력이 집단적인 행동을 보일 조짐이 보이자 다시 언론을 검열하고 탄압하기 시작함. 선거제도를 도입하긴 했으나 형식적임[26] |
일반 시민과 청년들[27] | 경제적 기회 확대와 고용 창출. 사회적 불평등 해소. 정부 부패 척결. | 기존 경제 질서에서 정부와 친밀한 기업들이 경제적 이득을 가져가고 있기 때문에 급진적 변화는 불가능. 아사드 정권의 정체성은 기득권층으로부터 나오며,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불평등을 유지할 수밖에 없음. 부패와 불평등을 변화시키려면 아사드 정권의 붕괴는 필연적임. |
수니파 극단적 이슬람주의자 | 이슬람 법에 기반한 국가 건설. 수니파의 정치적 권한 강화 | 시리아 정부는 세속 국가로의 방향성을 잡았기 때문에 이슬람 법을 채택할 수 없음. 수니파의 정치적 권한을 확대할 경우 정권의 핵심 세력인 군대의 반발을 일으킬 수 있음. 이슬람주의자들이 국가의 주요 권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음. |
쿠르드족 정치 세력 | 쿠르드족의 자치권 보장 | 쿠르드족의 자치를 인정할 경우 다른 지역의 자치 요구도 커지면서 국가의 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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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시위는 결국 자이르 벤 알리 대통령의 축출로 이어졌다. 이후 이집트와 리비아 등 다른 아랍 국가들도 튀니지 혁명에 영향을 받아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집트에서 물러나는 결과를 낳았다. 리비아에서는 카다피 정권에 대한 시위가 폭력적인 내전으로 발전하면서 국제적인 군사 개입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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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2011년, 시리아 역시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아 시리아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와 반정부 운동이 일어난다.
2.4. 시리아 내전 이후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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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사드 정부의 시위대 무력 진압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이에 반정부 세력은 정부군에 맞서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정부군과 반군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민주주의 요구 시위와 정부의 진압이 핵심이었지만, 점차 군사적 충돌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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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반군의 세력 확장과 이슬람주의 그룹의 부상
2012년부터 반군 세력이 점차 시리아 북부와 동부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반군 내에서는 다양한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나타났고,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 알누스라 전선이 두각을 드러내면서 내전의 성격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로 인해 아사드 정부와 반군, 그리고 이슬람주의 단체 간의 삼각 구도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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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헤즈볼라의 시리아 내전 개입
2013년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조직 헤즈볼라가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내전에 개입했다. 헤즈볼라는 시아파 세력을 지지하기 위해 주요 전투에 참여하며 시리아 정부군의 중요한 군사적 지원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헤즈볼라의 개입은 레바논 국경 지역에서 반군에 맞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시리아 내전에 종파적 요소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아사드 정부와 헤즈볼라 연합군 대 반군 간의 대립 구도가 확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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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ISIS의 등장과 영토 장악
2014년 ISIS(이슬람 국가)가 이라크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시리아 동부까지 진출했다. ISIS는 급속히 영토를 장악하며 "칼리프 국가"를 선포했다. 이로 인해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 반군, 그리고 ISIS 간의 다자간 갈등으로 변모했다. 특히 ISIS는 반군과 정부군 모두를 공격하며 스스로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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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러시아의 개입
2015년 시리아 정부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러시아의 공습은 반군 지역을 겨냥했고, 이를 통해 아사드 정부는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간의 구도에 외세 개입이라는 요소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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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알레포 전투
2016년 알레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는 정부군과 반군 간의 주요 격전지였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은 결국 알레포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알레포 전투는 정부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군이 주요 도시에서 후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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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ISIS의 쇠퇴
미국과 쿠르드 민병대(YPG)로 구성된 시리아민주군(SDF)이 주도한 공세로 ISIS는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시리아 북부의 락까가 함락되면서 ISIS의 주요 거점이 상실되었다. 이로 인해 ISIS는 시리아 내 주요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잃게 되었고, 내전의 양상이 다시 정부군과 반군 간의 대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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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이들리브 휴전과 반군 재편성
시리아 정부군은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이들리브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으나,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중재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군과 반군 간의 충돌이 일시적으로 감소했다. 반군 세력은 이들리브에 집중되었고, 튀르키예가 이 지역에서 반군을 지원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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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튀르키예의 북동부 공습과 쿠르드 민병대의 후퇴
2019년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 민병대(YPG)를 목표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미국의 철수와 함께 튀르키예가 시리아 북동부를 공습하였고 쿠르드 민병대와 튀르키예군 간의 갈등 구도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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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COVID-19와 내전의 장기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리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내전 상황은 일시적으로 정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부군과 반군이 계속 대치하는 구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내전은 좀처럼 소강기에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국제 사회는 하나둘 시리아 내전에 대한 개입을 줄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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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시리아 대선과 아사드의 재선
2021년 시리아는 전쟁 중 세 번째 대통령 선거를 진행했으며, 바샤르 알-아사드가 대선에서 95% 이상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반군과 서방은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아사드는 이 선거를 통해 국제 사회와 국내에 자신의 권력을 재확인하려 했다. 이로 인해 시리아 내전은 아사드 정권의 지속 여부를 둘러싼 외부 세력과의 대립 구도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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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이들리브에서의 분쟁과 인도주의적 위기
2022년 이들리브 지역에서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간의 충돌이 다시 격화되었다. 튀르키예의 영향력이 미치는 이들리브 지역은 반군의 마지막 주요 거점으로 남아 있었으며, 시리아 정부군은 이를 다시 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다.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난을 떠나며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이들리브의 충돌은 시리아 정부군과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반군 간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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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이들리브의 휴전 붕괴
이들리브에서의 휴전이 점차 무너지고, 정부군은 반군에 대한 공세를 재개했다. 러시아의 공습 지원을 받은 정부군은 반군 거점을 재탈환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로 인해 내전은 다시 정부군과 반군 간의 격렬한 충돌 구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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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재건을 둘러싼 외교적 경쟁 심화
2024년 시리아 내전이 정체기에 들어서면서 조만간 소강기에 접어들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겼고, 여러 나라가 재건 과정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 이란, 중국이 시리아의 주요 재건 지원국으로 나서며 시리아 내전 이후 복구 사업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로 인해 재건을 둘러싼 외교적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고,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 및 중국 간의 대립이 시리아 내전의 경제적 측면으로 확대되고 있다.
3. 원인
3.1. 시리아 내전이 일어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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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억압과 알라위파 위주의 독재 체제
시리아는 수니파가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지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가 권력의 중심에 있다. 이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형성된 구조적 불평등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군과 행정 요직에 임명하며 소수 지배 체제를 강화했고, 이 체제가 독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알라위파는 군사와 정치권을 장악해왔으며, 하페즈 알-아사드와 바샤르 알-아사드 부자의 독재 통치로 이어졌다. 알라위파는 석유, 군사, 행정과 같은 주요 산업을 통제한 반면, 수니파는 농업과 저소득 직종에 몰려 있다.[28] 수니파는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차별로 인해 불만을 품었다.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종교와 민족적 갈등으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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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2010년대 초,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며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시리아 국민도 이에 영향을 받아 정치적 개혁과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사드 정권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경하게 진압했으며, 이로 인해 시위는 무장 충돌로 발전했다. 초기 시위는 주로 정치적 개혁을 요구했지만, 점차 종교적·민족적 갈등과 경제적 불만이 결합되어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수니파 중심 지역에서는 정부의 폭력적 대응에 반발해 반군 세력이 조직되었고, 이는 종파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내전/원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3.2. 시리아 내전이 복잡해진 원인
시리아 내전은 원래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ISIS, 쿠르드족 자치 세력(YPG), 튀르키예가 개입하면서 복잡해졌다.-
시리아 반군의 시리아 북부지역 진출
시리아 내전 초기 반군은 남부의 도시 다라, 중부 지역의 홈스,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 동구타를 장악하였고, 이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반군은 계속해서 비대해져 가는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자원과 물자 보급이 필요했는데 시리아 남부와 중부지역에는 반군을 충분히 보급할 자원, 물자, 식량이 부족한 환경이다. 서부 해안 도시와 수도 다마스쿠스 중심부는 아사드 정권의 지지 기반이 강한 지역이고, 정부군이 강력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반군이 진입할 수 없었다. 시리아 북부는 정부군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이고, 튀르키예는 시리아 반군을 지원했기 때문에 반군이 시리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면 튀르키예로부터 보급과 물자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다. 또한 시리아 북부에는 하사카 주와 데이르 에조르 주를 중심으로 넓은 유전 지대가 있어 반군이 시리아 북부를 확보한다면 이 유전 지대를 발판 삼아 재정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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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북부에서 반군과 쿠르드족 간의 충돌
시리아 반군과 쿠르드족은 시리아 정부군에 반대하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전 초기 두 세력은 연합이나 협력 가능성이 있었다.[29] 실제로 반군이 시리아 북부로 처음 올라왔을 때 양측은 서로 간의 충돌을 피하고 탐색하며 상호불간섭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리아 정부군의 힘이 약해진 이 기회를 살려 독립적인 자치권을 확보하는데 집중했으며, 시리아 북부의 영토나 자원을 반군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반군 역시 거대한 세력을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북부 지역 유전지대를 장악해야 하고, 튀르키예로부터 지속적인 물자 보급을 받아야 했는데 여기에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반군에게 물자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쿠르드족을 억제하거나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30] 결국 시간이 지나며 북부 지역에서 영토와 영향력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었고, 쿠르드족이 자치구역을 확장하며 독립적인 입장을 고수하자, 반군과 쿠르드족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서로 간에 적대적인 교전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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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ISIS의 등장
2014년경 ISIS가 시리아에 진입하여 영토 장악을 시도하면서, 내전 구도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ISIS는 이라크 북부 모술을 점령하면서 '이슬람 칼리프국'을 선포했다. 이후 다양한 언어로 된 선전 영상으로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 수니파 이슬람 지지자들에게 합류를 독려했다. 이 메시지를 본 수많은 외국인 전투원이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등 각지에서 튀르키예를 경유해 시리아와 이라크로 이동하였다.[31] ISIS의 목표는 이라크를 넘어서 광범위한 지역에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시리아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자신들에게 세력을 넓힐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였다.[32] 또한 시리아 북부 방향으로 진격할수록 튀르키예를 경유해 ISIS에 합류하려는 외국인 전투원들을 받기 수월해진다.[33] 수많은 외국인 전투원을 흡수하고 거대해진 ISIS는 전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시리아 북부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였다. ISIS는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석유를 밀수하거나 암시장에서 판매해 막대한 자금을 마련했고, 이를 통해 무기와 물자를 확보하면서 전력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당시 쿠르드족은 초기 ISIS의 급속한 진격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유전지대를 방어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내주었다.[34] 시리아 반군은 정부군과의 전투에 많은 자원을 집중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ISIS와의 전면전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반군은 조직이 파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부 유전지대 방어에 있어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결국 기존의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간의 대립에 더해 ISIS가 정부군, 반군, 쿠르드족 등 모든 세력과 충돌하면서 각 세력의 이해관계가 더욱 얽히고 다자간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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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침공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침공으로 인해, 기존의 전투 구도에 튀르키예와 쿠르드족 간의 새로운 전선이 추가되었다. 쿠르드족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ISIS에 대항해 왔는데, 튀르키예의 침공으로 미국과 튀르키예의 갈등이 발생했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복잡해졌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더욱 얽히면서 내전은 국제적 갈등 양상으로 확산되었다.
3.3.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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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시아파 등 소수파들의 아사드 정권 협력
기독교와 시아파 등의 소수파가 정부군에 협력한 배경에는 정권 교체 이후 자신들의 안전과 지위가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들은 시리아 반군이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서방세계 민주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보았다. 시리아 반군은 여러 파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파벌은 독자적인 이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특정 파벌이 권력을 잡게 되면, 민주적 권력이 시리아 국민 전체로 분산되기보다는 특정 세력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서방 민주주의는 종교적 중립성과 사상,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지만, 시리아 반군 내 일부 세력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종교적 이념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나 사상, 표현의 자유가 서방 민주주의처럼 보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권 교체 후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가 득세할 경우 종교적 탄압이나 소외를 겪을 것이라 우려했고 결국 종교적 소수파들은 정부군을 지지하였다.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는 순간 소수인 드루즈, 알라위, 동방 정교회, 야지디[35], 시아파 계열은 자기들은 다 죽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어 정부군에 협력한 세력 중에는 극단주의에 반대하는 세속주의 성향의 수니파도 있었다. 이들의 협력으로 정부군은 반군을 상대할 병력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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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 반군에 대한 외부의 지원
수니파는 수니파대로 이슬람주의 성향의 반군들까지 용인하고 있는 수니파 세계 양대 강호인 사우디아라비아와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았다. # 그 외 카타르 등의 군소 수니파 국가들도 알 자지라의 인기와 저명도를 무기 삼아 수니파 반군의 투쟁을 미화하고 홍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정부군과 반군 모두 이렇게 지원을 빵빵하게 받다보니 전력이 팽팽하게 되었고 이는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된 원인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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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협상의 실패
여러 차례 평화 협상이 시도되었지만, 각 세력이 타협을 이루지 못해 협상이 실패했다. 시리아 반군은 아사드 대통령이 퇴진하고 아사드 정권이 억류한 수니파 정치범들을 석방해야만 협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리아 정부는 반군에게 정권을 내주면 알라위파 및 소수 종파에 대한 보복과 탄압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수니파 정치범들은 ISIS와 같은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에 절대 석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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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의 개입
미국, 러시아, 이란, 튀르키예 등 여러 국가가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미국과 서방 국가는 일부 반군을 지원했고, 러시아와 이란은 아사드 정권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전쟁이 더 복잡해지고, 종전이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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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조직의 확산
내전 초기 시리아 내 혼란을 틈타 이슬람 국가(ISIS)와 같은 극단주의 조직들이 세력을 확장하였고, 시리아 내전은 단순한 정권 교체의 문제에서 극단주의와의 싸움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내전 상황을 악용해 세력을 넓히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4. 주요 세력
시리아 내전의 주요 세력은 크게 시리아 정부군, 시리아 반정부군, ISIS군, 쿠르드족 4개로 나뉜다. 그 외에 쿠르드족과 국경 부근에서 갈등을 벌이는 튀르키예군이 있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는 다양한 국가들이 있다.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내전/주요 세력 문서 참고하십시오.
4.1. 주요 세력 간의 관계도
주요 세력 | 시리아 정부군 | 시리아 반군 | ISIS | 쿠르드족 (YPG) | 튀르키예군 |
시리아 정부군[36] | - | 적대 (2011년부터 내전 시작) | 적대 (ISIS와 격렬한 전투) | 협력 또는 중립 (2018년부터 대체로 중립적) | 긴장 (튀르키예군의 시리아 북부 진입) |
시리아 반군[37] | 적대 (정부 전복 목표) | - | 적대 (ISIS와 종종 교전) | 긴장 또는 협력 (지역별 차이 있음) | 협력 (튀르키예의 지원 받음) |
ISIS | 적대 (시리아 정부 타도 목표) | 적대 (반군과 경쟁 및 교전) | - | 적대 (쿠르드족이 주요 적대 세력) | 긴장 (튀르키예군의 ISIS 타격) |
쿠르드족 (YPG) | 협력 또는 중립 (정부군과 대립 최소화) | 긴장 또는 협력 (필요 시 협력) | 적대 (ISIS의 주요 타격 대상) | - | 적대 (튀르키예군의 주요 타격 대상) |
튀르키예군 | 긴장 (튀르키예군의 시리아 북부 개입) | 협력 (반군에 대한 지원 제공) | 적대 (ISIS에 대한 군사 공격 수행) | 적대 (YPG를 테러 조직으로 간주) | - |
4.2. 시리아 정부군
- 시리아 정부군 -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이끄는 세력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군과의 전투에 나선다.[38]
세력 | 규모 | 간략 소개 |
시리아군 | 약 100,000명 이상 | 시리아 정부군으로 내전 동안 주요 전투를 수행하고 정부 방어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 | 수천 명 | 시리아 정부군의 정예 부대로 주요 도시 방어 임무를 수행. |
국가방위대(NDF) | 약 90,000~100,000명 | 친정부 지역 방어와 치안 유지를 위한 향토 예비군 성격의 민병대, 통합 작전이 어려움. |
시리아 보안군 | 비공개 | 경찰과 군의 중간 성격을 지닌 준군사 조직으로 아사드 가문에 충성. |
바트당 여단 | 약 7,000명 | 시리아 여당인 바트당의 자위조직으로, 알레포 지역에서 정부군을 보조. |
시리아 사회국가당(SSNP) 여단 | 약 6,000~8,000명 | 시리아 제1 야당의 민병대, 정부군과 협력해 세속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를 수호. |
시리아 저항군 | 약 2,000명 | 튀르키예 출신의 알레비파 시민으로 구성된 조직,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 |
자이쉬 알 무와히둔 | 드루즈 민병대로, 드루즈 공동체 보호를 목적으로 활동. | |
수토로 | 카미쉴리에서 활동하는 기독교 친정부 민병대. |
- 시리아 정부군 외부 지원 세력 - 러시아는 중동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란은 시아파의 영향력을 확산하려는 목적으로 지원한다.
세력 | 규모 | 간략 소개 |
이란 혁명수비대 | 약 2,000~3,000명(장교단) | 내전 개입 초기부터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며 주요 민병대를 훈련 및 지휘. |
파테미욘 여단 | 약 14,000명 | 아프간 난민들로 구성된 친이란 부대, 주요 보조 병력으로 시리아 정부군 지원. |
자이나비욘 여단 | 약 1,000명 | 파키스탄 난민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 이란 혁명수비대 지휘 하에 활동. |
시아파 민중기동대 | 수천 명 |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연합체로, 시리아에 파견되어 정부군 지원 및 성지 수호 임무 수행. |
헤즈볼라 | 수천 명 |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로, 시리아 내전에 참여해 주요 전투에서 보병 역할 수행. |
러시아군 | 공군과 특수부대 파견을 통해 시리아 정부를 지원, 반군과 ISIS의 주요 거점을 타격. | |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총사령부(PFLP-GC) | 공산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로, 아사드 정부와 연계해 FSA와 전투. | |
북한군 | 고문단과 지원 인원 파견, 화학무기 및 군수품 제공, 일부 비공식 병력 참전. | |
하라카 알 누자바 (Harakat al-Nujaba) |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시리아 정부군 지원 및 성지 방어를 위해 전투에 참가. | |
카타이브 히즈볼라 (Kata’ib Hezbollah) |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로, 반군과의 전투에서 시리아 정부를 지원. | |
아말 운동 (Amal Movement) | 레바논 시아파 조직, 시리아 정부와의 친밀한 관계로 소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지원. | |
바그너 그룹 (Wagner Group) | 러시아의 민간 군사 회사(PMC), 정부군 작전 지원 및 주요 전투에서 반군 거점 공격 수행. |
4.3. 시리아 반군
- 시리아 반군 - 대다수가 시리아 내 수니파 국민이며 독재 체제에 반대하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한다.[39] 이들은 시리아 내전 초기 시리아 정부군과 주로 싸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정부군보다 쿠르드족과 많이 충돌했다. 내전 초기 상당한 영토를 확보했지만, 점차 정부군이 주요 도시들을 재탈환하면서 시리아 북부로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쿠르드족과 서로의 이익이 겹치고 통제 지역이 겹쳤기 때문이다.[40]
세력명 | 규모 | 간략 소개 |
시리아 국민연합 | 서구권에 알려진 대표적인 시리아 반군의 정치적 조직으로, 외부 지원을 조정. | |
자유 시리아군 | 튀르키예 지원 반군, 초기 주요 반군 조직이었으나 내전 후반부에는 분열과 재편이 많음. | |
시리아 혁명전선 | 세속주의 성향의 반군 조직으로, 이슬람주의 세력과의 갈등으로 약화. | |
자유 시리아군 남부 전선 | 다라 지역 기반의 군벌 연합체, 자유 시리아군을 자처하지만 지방 군벌 성격 강함. | |
제1해안사단, 제2해안사단 | 해안 지역 중심의 반군 단체들로, 알레포 전투 등에 참여. | |
13사단 | 시리아 북부에서 활동한 세속주의 반군 그룹으로 TOW 미사일 지원을 받았음. | |
이슬람 전선 | 수천 명 | 시리아 반군 연합체로, 샤리아 법 도입을 목표로 하며 정부군과 자유 시리아군을 공격. |
자이쉬 알 이슬람 | 수천 명 | 사우디 지원을 받은 주요 반군 세력으로, 샤리아 법에 기반한 통치를 목표로 함. |
하라캇 아흐라르 알 샴 알 이슬라미야 | 수천 명 |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을 가진 반군 세력으로, 알레포와 다마스커스 지역에서 활동. |
누르 알 딘 알 젠키 운동 | 서방 지원을 받은 반군이나 이후 극단주의 성향으로 전환. | |
자이쉬 알 파타 | 알 누스라 전선 주도로 창설된 반군 연합체로, 이들리브와 알레포 탈환 작전에 참여. | |
알 누스라 전선 (타흐리르 알 샴) | 약 15,000명 | 알 카에다 산하 시리아 반군으로, 반군 연합체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샤리아 법 도입 목표. |
투르키스탄 이슬람 정당 (TIP) |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이 주축으로 참여한 이슬람주의 반군, 알 누스라 전선과 동맹. | |
카우카즈 이슬람 토후국 | 체첸 출신의 반군, 특수부대급 전투력으로 시리아 정부군을 공격. | |
탄잠 후라스 알 딘 | 알 카에다 지부로 출범, 알 누스라 전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 | |
시리아 투르크멘 여단 | 시리아 내의 투르크멘 주민들로 구성된 반군 조직, 주로 북부에서 활동. | |
준드 알 아크사 | 알 누스라와 동맹한 반군으로, 시리아 북서부에서 정부군과 전투. | |
아지나드 알 카우카즈 | 체첸 출신 전사들로 구성된 소수 정예 반군, 라타키아 지역에서 활동. | |
말하마 택티컬 | 약 100~200명 | 중앙아시아와 체첸 출신의 반군 교관 조직으로, 반군들에게 전술 교육을 제공. |
자이쉬 알 무하지린 알 안사르 | 외국인 전사들로 구성된 반군 조직, 주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출신. | |
이슬람 국가 해방 전선 | 최대 약 70,000명 | 이들리브 지역 중심의 친 튀르키예 반군 연합체, 타흐리르 알 샴과 충돌하며 세력 축소. |
- 시리아 반군 외부지원 세력 -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아사드 정권의 인권 탄압과 독재를 비판하며 반군을 지원하였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반군을 지원했다.[41]
세력명 | 규모 | 간략 소개 |
튀르키예 | 자유 시리아군 및 친 튀르키예 반군을 지원, 시리아 북부 점령지 내 세력 구축. | |
사우디아라비아 | 자이쉬 알 이슬람 등 이슬람주의 세력을 재정적으로 지원. | |
카타르 | 이슬람 전선과 다양한 반군 세력에 자금과 물자 제공. | |
미국 | 자유 시리아군과 다양한 세속주의 반군에 물자 및 자금 지원. | |
영국 | 세속주의 반군과 자유 시리아군에 지원을 제공. | |
프랑스 | 반군에 대해 외교적, 군사적 지원 제공. | |
요르단 | 남부 전선 반군 및 남부 시리아 내 반군을 지원. | |
아랍에미리트 | 세속주의 성향의 반군 일부를 재정적으로 지원. | |
리비아 이슬람 전사 (Libyan Islamic Fighters) | 리비아 출신의 외국인 전사들로 구성,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투 참여. |
4.4. ISIS
- ISIS -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 이라크에서 알카에다 분파로 시작되었고 다양한 국적과 출신을 가진 다국적 집단으로 상당수가 시리아 외부에서 온 외국인 전투원이며 그 중에서도 이라크 출신이 특히 많다. 이들은 시리아 내전 중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시리아와 이라크 전역에 칼리프 국가를 세우려 했다. 시리아 내 수니파 반군 중 뜻이 맞는 세력들을 흡수하면서 급격히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정부군과 반군 모두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점차 국제적 연합군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세력명 | 규모 | 간략 소개 |
이슬람국가(ISIS) | 초창기 5000명 -> 전성기 30,000명 -> 쇠퇴기 1000명 |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 중심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으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급속히 세력 확장. |
4.5. 쿠르드족
- 쿠르드족 - 시리아 북부에서 쿠르드 민족 자치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싸운 세력으로, ISIS와의 전투에서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 정부의 묵인 하에 시리아 북부에 거대한 자치구역 '로자바'를 형성하였다. 이 움직임은 단순히 시리아 북부에서 멈추지 않고 시리아 북부 국경을 넘어 튀르키예 남동부 PKK와 연대하며 팽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튀르키예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세력명 | 규모 | 간략 소개 |
시리아 민주군 (SDF) | 약 50,000~60,000명 | 주로 쿠르드족 YPG가 주축이 된 다민족 군사 연합으로, 북부 시리아에서 IS에 대항하며 세력 확장. |
인민수비대 (YPG) | 약 30,000명 | 시리아 쿠르드족 주도 무장조직으로, 북부 시리아에서 IS와 전투 및 자치권 수호에 중점. |
여성수비대 (YPJ) | 약 10,000명 | YPG의 여성 부대로, 주요 전투에 참가하며 북부 시리아의 여성 자치와 방어에 기여. |
알 바가라 부족 민병대 | 수천 명 | 북부 시리아의 아랍 부족 민병대, SDF와 협력하며 IS와의 전투에 참여. |
알 샤이타트 부족 민병대 | 수천 명 | 아랍계 민병대로, SDF에 합류하여 북부 시리아의 방어에 참여. |
하라비야 부족 민병대 | 수백 명 | 쿠르드족과 연계된 북부 시리아의 민병대로 SDF 소속으로 활동. |
주바이드 부족 민병대 | 수백 명 | 아랍계 민병대로 SDF에 속해 북부 시리아 방어에 기여. |
알 사나디드 군 | 약 1,000명 | 시리아 동부 샤메르 부족으로 구성된 민병대, SDF와 협력하여 북부 방어. |
혁명군 (Army of Revolutionaries) | 지하디스트 반군과 IS 사이에서 팽 당한 반군 및 세속주의자들로 구성된 연합군. | |
북부 민주 연대 | SDF의 일원으로 민주주의와 자치를 지지하는 반군 연합체. | |
라카 혁명가 전선 | 라카 지역 중심의 아랍계 반군 세력으로, SDF와 함께 IS와의 전투에 참여. | |
라카의 매 여단 | 라카 지역 중심으로 활동하며 IS에 대항해 SDF에 속해 활동. | |
유프라테스 해방 연대 | SDF에 속한 반군 연합체로,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IS와 전투. | |
만비즈 혁명가 여단 | 만비즈 지역 반군으로 SDF와 협력하여 IS에 대항. | |
자유 장교 연합 | SDF에 협력하는 군 장교들의 연합체, 시리아 북부에서 활동. | |
알 밥 군사 평의회 | 알 밥 지역 중심의 반군 조직으로 SDF의 일원으로 활동. | |
아사이쉬 (Asayish) | 로자바 정부의 자체 경찰 조직으로 북부 시리아의 치안 유지. |
- 쿠르드족을 지원한 외부세력 - 미국은 ISIS를 격퇴하는 데 있어 쿠르드족(YPG)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ISIS 격퇴 이후에는 튀르키예와의 관계를 의식하여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였다.
세력명 | 규모 | 간략 소개 |
미국 (CJTF-OIR) | 국제연합군(CJTF-OIR)으로 SDF에 물자, 공습 지원 제공. | |
쿠르디스탄 노동자당 (PKK) | 튀르키예의 쿠르드 반군으로, 북부 시리아의 쿠르드 자치와 연계되어 협력 관계. | |
이라크 쿠르디스탄 (페쉬메르가) | 수천 명 |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군대로 SDF와 협력하여 IS에 대항. |
국제자유여단 |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을 계승한 극좌 공산주의 성향의 외국인 지원군으로 SDF와 협력. | |
러시아 | 초기 YPG에 공습 및 물자 지원을 제공하며, 튀르키예와의 관계 조정 중에도 정치적 지지 유지. | |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 | 회원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쿠르드 지원군 파병 및 물자 지원. | |
아랍 연맹 | 일부 국가들이 간접적 지원을 통해 쿠르드 자치권 지지. |
4.6. 튀르키예군
- 튀르키예군 - 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며 반군을 지지했으며[42], 이를 통해 시리아에서 쿠르드족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려 했다. 또한 쿠르드족이 시리아 북부에 '로자바'라는 거대한 자치구역을 형성하며 튀르키예 남동부 방향으로 팽창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직접 쿠르드족을 침공하였다.
세력명 | 규모 | 간략 설명 |
튀르키예군 | 약 10,000명[43] | "유프라테스의 방패" 작전(2016)과 "올리브 가지" 작전(2018)으로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지역을 침공하여 쿠르드 세력 확장 견제. |
- 쿠르드족 침공 당시 튀르키예를 지원한 반쿠르드족 성향의 시리아 반군 세력[44]
세력명 | 규모 | 간략 설명 |
튀르키예 지원 시리아국가군 (SNA) | 약 25,000~30,000명 |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반군 연합체로, 쿠르드족 지역 침공 작전에 주력 병력으로 투입. |
아흐라르 알 샴 | 수천 명 | 시리아 반군 중 이슬람주의 성향을 가진 조직으로, 튀르키예와 협력하여 쿠르드족 지역에서 활동. |
수레야 만수라 부대 | 수백 명 | 튀르키예의 훈련과 지원을 받은 시리아 반군 소규모 부대로, 쿠르드족과의 전투에 참여. |
술탄 무라드 사단 | 약 3,000명 | 시리아 투르크멘으로 구성된 반군 조직으로, 튀르키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쿠르드 지역 공격에 참여. |
하마자 사단 | 약 2,000명 | 튀르키예 지원을 받는 시리아 반군의 한 조직으로, 쿠르드 지역 점령 작전에 적극 가담. |
누르 알 딘 알 젠키 운동 | 수백 명 | 튀르키예와 연계된 시리아 반군 조직으로, 쿠르드족과의 전투에 가담하며 반쿠르드 성향이 강함. |
4.7. 시리아 외 주요 국가
시리아의 위치가 갖는 지정학적 장점 때문에, 자원이나 인구 등 경제적 이권이 없음에도 동서남북 모든 나라가 시리아를 자기 영향력 하에 두기 위해 개입했다. 심지어 개입 국가들의 목적도 각각 다르다 보니 그들끼리도 패가 갈려서 도저히 내전이 진정되는 것이 불가능해보이는 상황으로, 가히 20세기 한반도가 당했던 고통과 비슷한 지정학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
이란 - 아사드 정권 지지
시아파 정권을 유지함으로써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을 잇는 시아파 벨트를 완성하여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루트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중동 패권을 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을 시아파 정권 국가로 포위하기 위해 아사드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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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 아사드 정권 지지
사담 후세인 정권 때는 하마 학살 당시 시리아 수니파의 봉기를 지원하는 등 반 시리아 국가였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인구 다수였던 시아파가 집권하고 나서는 시리아와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종파적인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들은 시리아로 건너가 내전에 참전하고 이라크 공군도 시리아 내 ISIL과 알카에다 목표물을 공습하는 등 우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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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 아사드 정권 지지
러시아 유일의 부동항 타르투스 해군 기지의 보호 및 지중해 장악, 남진 정책의 교두보 유지, ISIL 및 알카에다 계열 극단주의 반군을 공격하면서 체첸 등의 캅카스 무슬림 지역들의 반란과 동요 방지를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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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 부분적 개입, 헤즈볼라 억제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시리아와 헤즈볼라를 공격하며, 이에 따라 헤즈볼라의 활동 억제 및 시리아의 골란 고원 점령을 위해 공격하고 있으나 시리아 반군들 일부가 이슬람 근본주의 반군 쪽에 있다 보니 아사드 정권 축출에는 그렇게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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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 복잡한 상황, 시리아 내전 초기 반군 지원
레바논은 시리아 내전 초기 반정부 세력을 비밀리에 지원하며 정권 교체를 기대했다. 그러나 레바논 내 헤즈볼라는 종파적 동지이자 후원자인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레바논 내 수니파는 ISIL과 알 누스라 전선을 지지하며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후 시리아 정부군이 국경 지대를 장악하고 시리아에서 유입된 난민 부담이 커지자 레바논 정부는 내전 개입을 조기에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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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시리아 반군, 쿠르드 민병대(YPG), 시리아 민주군(SDF) 지지
미국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아사드 정권의 화학 무기 사용을 규탄하기 위해 개입했다. ISIS의 테러 위협을 억제하고자 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아사드 정권에 반대했다. 또한, ISIS 격퇴를 목표로 쿠르드 민병대(YPG)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민주군(SDF)과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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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 시리아 반군 지지
튀르키예는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시리아 내전의 주요 영향을 받는 국가이다. 특히 시리아 북부를 장악한 쿠르드 민병대(YPG)가 자국 내 쿠르드 분리주의 성향의 PKK와 연대하여 독립 국가를 세울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는 튀르키예의 영토 통합과 국내 안정성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어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부에서 YPG의 세력 확대를 억제하고, 반군이 해당 지역을 장악하기를 희망했다. 또한, 튀르키예는 아사드 정권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며 시리아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시리아 반군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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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시리아 반군 지지
시리아 내 친러정권 축출로 프랑스 영향력 재확대, 자유 시리아군과 친서방 쿠르드 반군 후원으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와 러시아 견제, 식민지 시절부터 밀접하던 시리아인 인사들을 이용해 레바논 등 과거 식민지 지역에 프랑코포니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등의 목표.[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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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 시리아 반군 지지
원래 반군의 목표인 민주화 실현보다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 수립과 상술한 이란의 레반트 진출 저지를 위해 ISIL도 간접적으로 도와줬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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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 시리아 반군 지지
시리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던 내전 극초반부터 반정부 그룹들을 지지하고 훈련과 장비 제공 등의 후원을 해왔다. 시리아 남부 다라 주의 유목민 집단과 밀접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라 여기까지는 좋았다. 이라크 내전이 격화되면서 이라크에서 넘어온 ISIL이 활개를 치면서 최우선 목표가 테러리즘 격퇴로 바뀌게 된다. 무아트 알 카사스베 대위가 ISIL과 교전하다 붙잡혀 공개 분살이라는 참혹한 방식으로 전사하고, 2011년부터 후원하던 시리아 남부 반군들도 아사드 정권의 공세에 정권 교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패망하는 등 시리아 정세는 요르단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남부 알 탄프에 요르단이 후원하고 있는 소규모 반군만큼은 그나마 세를 유지하고 있다.[48]
5. 연도별 주요 대치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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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 시리아 정부군 20만명 vs 시리아 반군 수천명, 반정부 시위 시작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시리아에서도 민주화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충돌이 발생했고, 반정부 시위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 시리아 반군 대다수는 시리아군을 탈영한 전직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며, 무기 부족과 조직화 부족으로 비효율적이었다. 정부군 또한 내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압도적인 병력 규모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반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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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 시리아 정부군 20만명 vs 시리아 반군 1만명, 전국적인 내전으로 확산
반정부 시위가 무장 투쟁으로 전환되면서 FSA[49]와 같은 반군 단체가 형성되었다. 주요 도시인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등에서 정부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반군의 세력은 점차 조직화되었고, 전국적인 규모로 확장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카타르 등 외국 정부의 무기 지원과 훈련이 반군에게 제공되면서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정부군은 반군의 주요 지역을 타격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 작전을 벌였다. 이란과 러시아는 무기 지원과 군사 훈련을 통해 시리아 정부군의 전투력을 강화했으며, 헤즈볼라도 지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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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 시리아 정부군 vs 시리아 반군 5만명(FSA, 알누스라 전선 등 다양한 반군 세력), 화학 무기 사용 및 국제적 개입 논의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과 강력한 진압에 대응하여 반군이 강력히 저항하며 전투가 격화되었다. ISIS, 알누스라 전선과 같은 급진적인 이슬람 단체들이 반군 측에 합류하면서 반군은 자유시리아군(FSA) 외에도 알누스라 전선, ISIS, 이슬람 군(Ahrar al-Sham) 등 여러 다른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들로 나뉘게 되었으며, 일부는 서로 충돌하거나 협력하면서 점점 더 많은 세력으로 커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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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 시리아 정부군 vs 반군 / 시리아 정부군 vs ISIS / 반군 vs ISIS[50] / ISIS vs YPG, ISIS의 급부상과 쿠르드 민병대(YPG) 결성
반군은 ISIS의 급격한 세력 확대와 함께 규모가 10만 명에 달했고 더 많은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이 시기 ISIS는 반군의 일부분으로 활동했지만, 나중에는 독립적인 세력으로 탈피하여 다른 반군과 충돌하기도 했다.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반군에게 비살상무기와 군사 훈련을 지원했고,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는 무기를 지원했다. 이란과 헤즈볼라의 병력이 정부군 편에 추가로 참전했고, 러시아는 공습을 통해 정부군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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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 시리아 정부군 vs 반군 / 시리아 정부군 vs ISIS / 반군 vs ISIS / ISIS vs YPG, 러시아의 직접 군사 개입
러시아와 이란이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시작하면서 반군의 세력은 크게 축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여전히 북서부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다. ISIS는 2015년에 가장 세력이 강했으나, 미국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점차 약화되었다. 정부군은 러시아의 공습지원 덕분에 반군과 ISIS에 대한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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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 시리아 정부군 vs 반군 / 시리아 정부군 vs ISIS / 반군 vs ISIS / ISIS vs YPG, 알레포 전투에서 정부군 승리
시리아 정부군은 알레포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 반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ISIS와의 전투도 계속되었다. 정부군은 여전히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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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 시리아 정부군 vs 반군 / 시리아 정부군 vs ISIS / 반군 vs ISIS / ISIS vs YPG, ISIS의 약화
ISIS가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정부군과 반군 간의 전투로 재점화되었다. 미국은 쿠르드 민병대(YPG)와 협력하여 ISIS와의 전투에 집중했고, ISIS는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에서 세력을 잃어가며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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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 시리아 정부군 vs 반군 / 반군 vs 쿠르드 민병대(YPG)[51], 동구타 탈환 및 반군 후퇴
시리아 정부는 반군의 마지막 거점인 동구타 지역을 공격해 탈환하면서 승리를 선언했다. 쿠르드 민병대(YPG)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북부 지역을 통제했고,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는 반군과 갈등을 빚었다. 이 시기에 시리아 정부와 YPG는 사실상 충돌을 피하고 묵인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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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52] : 반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 튀르키예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튀르키예의 시리아 북동부 쿠르드족 침공
튀르키예는 쿠르드 민병대를 억제하기 위해 시리아 북부를 침공했다. 반군과 YPG는 지역 통제를 놓고 충돌했으며, 시리아 정부는 반군 진압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정부와 YPG는 여전히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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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 반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 튀르키예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이들립 휴전
시리아 정부는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아 반군 점령 지역을 계속해서 탈환했다. 쿠르드 민병대는 튀르키예의 압박을 받으며 반군과의 대치 상황이 지속되었다. 정부는 여전히 YPG와 묵인 관계를 유지하며 반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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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 반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 튀르키예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정체기[53]
시리아 정부는 대부분의 반군 점령지를 장악하면서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쿠르드 민병대와 반군 간의 대치도 계속되었다. 쿠르드 민병대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북부에서 자치권을 지키려 했으며, 시리아 정부는 반군의 마지막 저항을 무너뜨리는 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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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 반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 튀르키예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정체기
시리아 정부는 반군의 소수 거점들을 정리하면서 사실상 내전 종결을 선언했으나, 북부 지역에서는 반군과 YPG 간의 대립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반군은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으며 YPG와 충돌을 이어갔고, 시리아 정부는 이들을 묵인하는 형태로 북부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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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 반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 튀르키예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정체기
시리아 정부는 내전을 종식시켰다고 선언했지만, 북부의 일부 반군 잔여 세력이 저항을 계속했다.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는 반군과 YPG 간의 충돌도 계속되었으며, 시리아 정부는 이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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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 반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 튀르키예군 vs 쿠르드 민병대(YPG), 정체기
시리아 정부가 대부분의 지역을 통제하지만, 여전히 북서부 일부 지역에서 반군이 활동 중이다. 반군과 YPG 간의 갈등도 북부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다.
6. 경과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내전/경과 문서 참고하십시오.7. 오해하기 쉬운 개념들
시리아 내전은 다양한 세력들과 외부 국가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충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개념들이 많다.-
대표적인 오해 1 :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과 반군의 단순한 구도다.
시리아 내전은 아사드 정부군과 반군의 이념적 충돌이라기보다, 여러 이슬람주의 세력, 민주주의 세력, 민족주의 세력 등이 얽혀 있는 복잡한 갈등이다. 각 세력은 전략적으로 협력하거나 적대 관계를 형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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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오해 2 : 시리아 내전의 주요 원인은 종교적 충돌이다.
시리아 내전은 종교적 갈등이 아니라 아사드 정권의 억압적 통치와 사회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시리아 반군 대다수가 수니파 국민이고, 시리아 정부군 지휘관 대부분이 알라위파 국민이긴 하지만, 시리아 정부군 일반병사 다수는 수니파 국민, 시아파, 기독교, 알라위파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고, 시리아 반군 내에도 수니파 국민 외에 시아파, 기독교, 알라위파 등 다양한 종교적,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시리아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수니파 다수와 달리, 인구의 약 10%에 불과한 알라위파가 정권과 군대, 경제적 기회를 독점하고 있었다. 두 집단의 갈등은 오랜 기간 축적되어 왔고, 결국 충돌로 이어지는 것은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종교적 갈등이라고 보기보다는, 소수인 알라위파가 정권과 군대를 장악한 상태에서 종교가 다른 다수 세력인 수니파에게 권력을 나눠주지 않고 오히려 억압하며 큰 불만을 초래한 것이 갈등의 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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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오해 3 : 튀르키예는 쿠르드 민족 전체에 대해 민족적 적대감을 가진다.
튀르키예는 쿠르드 민족에 대하여 민족적 적대감을 가지는게 아니라 이미 PKK가 튀르키예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YPG가 시리아 북부 내에서 거대한 자치구역 '로자바'를 형성한 후 점차 튀르키예 국경 방향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으니 YPG와 PKK의 연계는 필연적이며 따라서 YPG의 시리아 북부활동에서의 활동이 자국에 대한 위협이라는 입장이다. 일단 YPG와 PKK가 연계하게 되면 시리아 북부에서 튀르키예 남부지역까지 쿠르드족의 거대한 자치구역이 형성 및 확대될 것이고, 이후 쿠르드족은 분리주의를 선언하여 튀르키예의 영토상실과 주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튀르키예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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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오해 4 : 수니파는 모두 아사드 정권에 반대한다.
아사드 정권은 알라위파 소수에 기반하지만, 일부 수니파들은 정부군에 남아 있거나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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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오해 5 : 쿠르드 민병대(YPG)와 시리아 정부는 적대 관계이다.
시리아 내전 발발 전까지는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고 아랍화 정책을 강요하며 억누른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 초기부터 2017년까지 시리아 정부군은 반군에 집중하느라 쿠르드족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2018년부터 2022년까지 YPG와 시리아 정부군은 상대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상호 관용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 시기에는 반군과 YPG가 주로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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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오해 6 : 시리아 내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ISIS다.
시리아 내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과 ISIS는 서로 다른 세력이다. ISIS는 이슬람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 독립적인 다국적 테러 조직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칼리프국 수립을 선포하고 영토를 통제하려 했다. 반면, 시리아 내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알카에다 계열 조직인 알누스라 전선(후에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으로 개명) 등 여러 단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ISIS와는 다른 조직적, 이념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ISIS와 알누스라 전선 같은 시리아 내 다른 극단주의 단체들은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경쟁하거나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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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오해 7 : 알라위파[54]는 시아파다.
알라위파는 시아파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시아파의 한 분파로 분류되지만, 시아파 내에서도 독특하고 이질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 시아파의 주류와는 차이가 크다.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들조차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해하였으나 나중에는 이들이 수니파 뿐만 아니라 시아파와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투르코폴로 써먹었다고 한다. 다만, 알라위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종파가 시아파의 일부로 인정받는 것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알라위파는 시아파를 중요한 동맹으로 여기며,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란과의 관계를 통해 시아파 신앙의 상징을 어느 정도 존중해 왔다. 이란은 시리아의 알라위파 정권을 지지하며 물질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 지원을 통해 알라위파는 시리아 내전에서 반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시아파가 아니지만 시아파에 대해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종교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입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내전/오해 문서 참고하십시오.
8. 시리아 내전의 독특한 특징
8.1. 선전의 미디어화
기존의 전쟁이나 내전은 대중 언론에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통제된 내용만을 공보실을 통하여 내보내었으나, 시리아 내전은 정부군과 반군 모두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텔레그램과 같은 SNS 미디어를 강하게 활용하며 전쟁 영상을 매일같이 찍어서 공개하고, 그 수단도 드론, 스마트폰 등 매우 다양하다. 시리아 정부를 편드는 언론 매체와 반군을 편드는 언론 매체가 제각기 기사를 내보내며 정보를 공개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 아닌가 할 지경이다. 사실 이건 시리아 내전만의 특징이 아니고, 시리아 내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에 발생하는 전쟁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이는 민주화 운동 시기부터 내전 초기까지의 기간 동안 아랍 왕정국가 언론 및 반러 서방 언론을 이용해 아사드 독재정권에 학살당하는 무고한 시리아 시민들, 반군은 위대한 민주화 투사들 식의 이미지 메이킹을 국제 사회에 일방적으로 어필[55]하는데 성공한 반군 측의 사례에서 기반한다. 특히 시리아 정권의 하야를 원하는 카타르 정부의 입김이 강한 알 자지라는 고의적으로 시리아 국내의 시위를 선동하는 데에 앞장 섰으며, CNN이나 AP통신 등의 서구 언론도 독재자 아사드가 얼마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는지,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지만[56] 중점적으로 부각해서 내보냈다. 이로 인하여 시리아 반군 내부의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친정부 인사에 대한 학살은 철저하게 숨겨졌으며, 자신을 이미지 메이킹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사태 초기 인터넷 블로그 'A Gay Girl In Damascus'를 통해 시리아 정부의 민주화 시위 탄압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다가 보안군에 끌려간 것으로 알려진 레즈비언 블로거가 사실은 미국인 유부남이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
시리아 정부측이 전례 없을 정도로 SNS에 정보를 공개하고, 아사드 대통령부터가 서구권 미디어와 한 달에 한 번쯤 될 만큼 자주 인터뷰[57][58]를 하는 것도 이러한 이미지 전쟁을 의식해서이며, 특히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아랍어를 쓰지 않고 유창한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백인 신사로써의 단정한 모습으로 서구권 독자들에게 직접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반군을 조롱하는 코믹한 밈(Meme)을 만들어내며 아사드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정권 하의 생활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또 이슬람 극단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보장해준다거나 다문화 공존, 소수 종파에 대한 관용과 생활 보장이 어느 정도인지, 또 반군의 이미지 메이킹의 실체를 분석 보도하는 등 상당히 입체적으로 미디어 작전을 펼치고 있다.
언론을 통한 선전 활동에서 선두에 서있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미녀 종군기자 샐리 파델(Sally Fadel)의 모습. 기독교도이다. 정부군 측에서는 샐리 파델의 공식 페이스북까지 만들어놓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선 부대를 취재하러 다니는 모습도 인터넷에 자주 올라오는데, 러시아군 참전 탓인지 현장 사진은 러시아 쪽 트위터에 주로 사진이 올라온다. 공식 페이스북에는 셀카가 대부분.
반군측은 주로 아사드 정권의 공습에 의해 어린 아이와 여성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어가는지, 그리고 반군 내부에서 화이트 헬멧(White Helmet) 등의 소방 조직이 얼마나 사람들을 열심히 구하고 화재를 진압하는지에 대해 중점을 둔다. 쿠르드족은 소셜 페미니즘에 의거한 양성평등, 세속주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가장 깨끗하고 이상적인 조직임을 홍보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어두운 면도 크며, 모든 진영이 자기에 맞게 왜곡 보도를 하거나 연출을 한다. 가령 반군의 민간인 학살을 강조하며 옛날 사진을 최신 기사에 돌려 썼다가 들통 나는 경우가 정부나 친정부 언론사에서 간혹 등장하고, 숫자가 적긴 하지만 엄연히 세속 민주주의자가 존재함에도 알 카에다밖에 없다고 과장 왜곡을 한다. 반군은 알레포 내부에서 정부군 공습으로 병원이 전멸하였고 의약품이 하나도 없으며 시민들이 자기를 지지한다고 주장하지만, 동부 도심지에 진입한 정부군에 의해 자기에게 충성하지 않는 시민들에게는 정수장을 차단해서 물을 끊어버리고 의약품을 반군용으로 숨겨둔 곳이 들통나거나, 사우디의 설비 지원으로 이뤄진 비밀 병원이 나타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 서로 자기들의 전과를 부풀리기 때문에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갖게 되기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어느 한쪽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듣기보다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고, 속단하기보다는 며칠 정도 여유를 두었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양측 주장을 교차검증하여 그때 사태를 파악하는 신중한 태도가 관찰자들에게 요구되고 있다.
또 시리아 내전을 다룬 외신 보도, 그리고 영미권 언론을 인용
8.2. 기묘한 내전 경제
시리아는 2011년 시리아 민주화 운동 때부터 서방 국가와 튀르키예, 아랍 연맹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받아 수출입이 완전히 봉쇄되었으며, 정부 수입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석유 수출도 함께 봉쇄 당했다. 이로 인해 정부의 정상적인 예산 집행은 매우 참담한 수준까지 추락했으며, 거액의 전쟁 자금을 댈 수가 없어져 정부가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또한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지고 공장과 주택이 파괴되면서 민간 경제도 괴멸되었고, 행정력이 작동하여 세금을 걷기도 어려워졌다. 이렇게 되자 결국 정부는 군대에 월급을 주지 못하게 되었고[60], 2013년부터는 군대가 지역 행정을 보조하고 직접 세금을 걷어 군 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각지에 퍼진 친정부 민병대와 군부대는 이렇게 지역 행정에 깊숙히 관여하며 직접 세금을 징수하고 치안을 담당하며 각 부대의 운영비로 사용한다.반군도 처음에는 튀르키예, 카타르, 사우디, 요르단 등의 광범위한 자금 지원을 받았으나, 점차 카타르와 사우디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를 집중 지원하고 그 액수도 거금을 소모하는 군대를 유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지자,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며 세금을 징수하고 군 자금으로 사용한다.
또한 공식 무역이 제재당했을 뿐 그를 대체하는 광범위한 밀무역은 시리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밀무역에 각 지역에 주둔한 반군-정부군/친정부 민병대들이 개입한다. 정부군 정예 민병대인 사막의 매 여단의 사령관 모하메드 자베르 예비역 대령처럼 90년대부터 해외 밀무역에 도가 튼 사람도 있고, 최소 단위 부대라도 각 도로마다 검문소를 설치하고 물자 당 얼마 식으로 기준을 정해서 통행료를 받는다. UN 구호 단체도 여기에서는 절대 예외가 될 수 없고, 이 과정에서 상당량의 구호 물자가 지역 세력의 손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압류당한 구호 물자는 필요에 따라 거래되며 양측의 군자금원이 된다. 여기서 일부 자금들이 정부까지 올라가 시리아 정부가 적으나마 예산을 집행하며 정부 구실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비결이 되고 있다.
밀무역은 정부-반군 사이에도 이루어진다. 장기간에 걸쳐 포위된 반군 지역이 생존할 수 있는 원인은 첫째로 정부군의 병력이 부족하여 피해를 입을 듯한 작전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지만, 거기에 정부군 검문소에서 반군 지역으로 물자가 들어가는 것을 묵인하며 막대한 뇌물을 뜯어낸다. 이것이 정부군 부대의 생존 방법이기 때문에, 반군을 격퇴하느니 포위를 유지하면서 뇌물을 받아 챙기는 것이 이득이 되니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무기와 석유도 밀거래의 대상이다. 발전소나 가스 유전, 상수원이나 논밭 같은 지역에서 나오는 물자는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므로 IS가 장악한 발전소에 정부 인원들이 가서 근무하고, IS가 생산한 석유를 중간 상인을 통해 반군과 정부군에 판매하거나, 정부군 장교들이 무기를 반군이나 IS에 판매하고 대금을 받는 등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유착이나 동맹 관계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세력들간에 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상호 적대 관계이면서도 생존을 위해 중간 상인들을 통해 알면서도 묵인하고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시리아 정부가 IS와 동맹 관계이며 자유의 투사들을 압박하는 악마와 악마의 야합'이라는 식으로 왜곡 보도로 몰아가는 언론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반군과 정부군이 동맹이라는 식으로도 얼마든지 몰아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암묵적 묵인 하의 경제 행위는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생존과 지속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시리아 같이 전 국토가 황폐화+수백 만의 인구가 난민으로 유출되거나 정부군과 반군, IS와의 충돌로 죽어나간 상황에서 7년 반 넘게 비교적 정상적인 국가 체제를 유지하며 장기간의 전면전을 치르는 데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전문가들에게 기적이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
9. 시리아 내전 분석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내전/분석 문서 참고하십시오.- 전술적 특색, 끝나지 않는 내전의 이유로 시리아 정부군의 문제점, 반군 세력의 문제점, 전쟁을 끝내기 위한 양 측의 노력 관점에서 분석한다.
- 서방국가들의 주도로 무력 개입을 못했던 이유로 국제 정치적 역학 관계, 인식의 변화 특히 온건 반군은 없다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
그 외 트럼프의 당선이 미칠 영향과 튀르키예의 변칙적 행보가 미칠 영향을 분석한다.
아 글쎄, 그러니까 세속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비근본주의·비종파주의 성향의 '온건' 반군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만 뽑아서 말해보라니까요!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제임스 '짐' 자트라스(James 'jim' Jatras) (전직 외교관), 토론 중에
알레포에서 반군이 은닉한 물자를 찾은 시리아군.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제임스 '짐' 자트라스(James 'jim' Jatras) (전직 외교관), 토론 중에
10. 관련 문서
[1]
빨간색은 시리아 정부의 관할 지역으로 내전 초기에 비하면 점점 확장되고 건재해진 상황이다. 북서쪽 흰색은 시리아 구국정부 레반트 구역, 동쪽 노란색은 로자바(쿠르드족) 점령 지대다. 북쪽의 연두색은 시리아 임시정부+국경에 인접한
튀르키예 군이 협력 중인 지역, 검은색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최남단 민트색은
미국이 지원하는 시리아 자유군이다. 근래 상황을 간추리면 사실상 튀르키예군이 개입하고 동쪽의 로자바에서 미군이 많이 철수하면서 대리전 양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아래 상세 내용들에 나오듯
민주주의가 목표였던 반군은 변색되며 약해지고 갈수록 기존의 정부군이 우세, 다른
내전 지대들 사이에도 정치, 민족, 종교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목차 5의 지도를 보면
러시아도 국경지대에 압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A]
2015년부터 참전.
[A]
[멸망]
2016년 멸망.
[5]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2017~19년을 기점으로 공세로 인해 거의 완전히 세를 잃고 멸망한 상황이다. 잔당들이 시리아 정부와 로자바가 통제하는 지역에서 습격과 암살, 테러를 자행하는 등 근절되지는 않았다.
[A]
2018년 중단
[7]
외교적 지지와 더불어 용병과 무기지원.
[8]
무기 지원.
[9]
외교 부분 및 무기 지원.
[10]
디젤 연료 제공.
[11]
시리아에게 무기를 제공.
[12]
석유 및 물자 지원.
[A]
2018년 중단.
[B]
2017년 중단.
[A]
[16]
2013년 한정.
[B]
[B]
[MSD]
시리아 민주 의회 공동의장
[MSD]
[21]
시리아 내 쿠르드족이 처음 들어온 것은 10세기지만, 그 당시에는 소규모 공동체로만 존재했다.
[22]
당시 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고, 이집트와의 통합을 통해 여러 혜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3]
아랍 연방의 권력은 대부분 이집트에 집중되었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경제적 차이가 심했는데 시리아 사람들은 이집트로부터의 경제적 혜택을 느끼지 못했다. 이집트 군은 시리아를 통제하려 했고, 시리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시리아와 이집트는 너무나도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동화될 수 없었다.
[24]
1961년 9월 하페즈 알 아사드 주도하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아랍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5]
대부분 수니파 시리아 국민이며 알라위파인 바샤르와 같은 이슬람이지만 종파가 다를 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도 크게 다르다. 이들은 경제보다 시리아의 민주주의화에 더 관심이 많음
[26]
박정희와 비슷
[27]
대부분 수니파 시리아 국민이며 알라위파인 바샤르와 같은 이슬람이지만 종파가 다를 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도 크게 다르다. 다만 이들은 민주화 운동보다는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추구
[28]
다만, 시리아 서부의 해안 도시(예: 라타키아, 타르투스)에 거주하는 수니파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더 나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해안 도시는 주요 항구와 연계되어 경제 활동이 활발한 지역으로, 이 곳에는 중산층 이상의 수니파 계층이 형성되어 있다. 서부 도시에 거주하는 수니파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 반군이 활동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리아 전역에는 더 많은 수니파 국민들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많은 수니파는 여전히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불이익을 경험하고 있다.
[29]
2013년 7월 29일 FSA의 중심지였던 홈스의 알 칼리예 지구가 함락되자 수세에 몰린 반정부군은 쿠르드족에게 협상을 주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30]
튀르키예의 입장에서, 시리아 북부에서 쿠르드족의 세력 확대는 자국 남부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반군이 쿠르드족을 견제하는 것은 튀르키예의 안보와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31]
이라크 위치상 동쪽은 이란에 막혀있고, 남쪽은 사우디에 막혀있으며 페르시아만 바스라 항구는 이라크군, 연합군 그리고 주변 국가들이 밀착 감시하는 곳이라서 ISIS나 외국인 전투원들이 활동하기 어렵다. 시리아 서부 해안도시도 시리아 정부군이 통제하고 있어 외국인 전투원들이 이곳으로 시리아 내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리아 내전 당시 튀르키예가 난민들을 받기 위해 인도적인 차원에서 국경을 개방하였고 대규모 난민이 튀르키예-시리아 국경을 오가는 과정에서 외국인 용병이 튀르키예에 입국하거나 시리아 국경 또는 이라크 국경을 넘는 것이 쉬웠다. 또한 튀르키예와 시리아 국경은 길이가 워낙 길어서 통제하기 어렵다.
[32]
ISIS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침공했으나 이라크 정부군과 민병대, 그리고 국제 연합군의 저항으로 인해 바그다드를 장악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애초 계획이었던 이라크 전체를 먼저 장악하려는 계획을 수정하고 시리아로 진출한다.
[33]
미국 정보당국 관계자에 의하면 IS가 해외에서 끌어들이는 조직원들의 수는 매월 1,000명에 이른다. 미국 특수전부대 사령관 조셉 보텔 장군도 시리아 내전이 3년을 넘어가면서 현재는 약 90개국에서 약 2만 명의 외국인 전사들이 시리아와 이라크로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34]
나중에 미국을 포함한 국제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직을 강화하고 ISIS로부터 유전지대를 탈환해 나가기 시작한다. 2024년 기준, 시리아 유전지대는 쿠르드족인 시리아민주군(SDF) 통제 하에 있다. 이 지역 알오마르 유전과 같은 주요 유전지대는 SDF가 장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얻는 석유 수익은 SDF의 군사 및 행정 운영에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 되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이 유전지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이며, 이로 인해 석유 수익의 상당 부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리아 정부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35]
야지디는 시리아 정부군이 아닌 쿠르드족에 협력하여 ISIS와 싸웠다.
[36]
주요 지휘관은 대부분 알라위파지만 일반 병사는 다양한 종파 출신이 섞여 있으며 경제적 이유, 반군에 가담하지 않고 정부에 충성하는 이유로 정부군에 남는 수니파 병사들이 많다.
[37]
대부분 수니파 국민
[38]
반군 vs 쿠르드족 구도 이후에는 쿠르드족이 시리아 북부에서 자치세력 형성하는 것을 묵인하는 기묘한 관계로 변함.
[39]
그러나 반군 내 극단주의 세력과 온건 세력이 혼재하여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고, 이는 훗날 서방의 지원이 테러리스트로 흘러들어갈 우려를 낳으며 서방 세계가 반군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는 계기가 된다.
[40]
역사적으로 시리아 북부는 쿠르드족의 전통적인 밀집구역이다.
[41]
시리아 북부에 있는 쿠르드족은 자꾸 튀르키예 남부 쪽과 연계하여 새로운 자치국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이는 튀르키예 영토 상실과 튀르키예 내 분열을 초래하므로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을 견제한다.
[42]
튀르키예는 시리아 반군과 같은 수니파이기도 하고, 시리아 내 민주주의를 지지하기도 하고, 시리아 북부~튀르키예 남부 국경 근처에서 자꾸 세력을 확장하는 쿠르드족이 눈엣가시인데, 시리아 전체는 아랍화로 뭉쳐야 하며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의 자치구역 설정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시리아 반군과 이해관계가 맞기도 하고, 때 마침 반군이 정부군에 밀려 쿠르드족 근거지인 시리아 북부에서 충돌하고 있기도 하고
[43]
튀르키예군이 수십만명인데 수만명의 YPG를 상대로 이것밖에 안보냈어? 할 수 있는데 튀르키예군은 고성능 군사장비를 이용해 폭격 위주의 작전을 펼쳤고, 실질적으로 YPG와 전투를 벌이는 것은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는 반쿠르드족 성향의 시리아 반군 세력이었다.
[44]
시리아 내 모든 국민은 아랍화가 되어야 하며,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구역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리아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연일 패배하면서 세력이 시리아 북부로 밀려났고, 이 곳은 쿠르드족의 주거지이기에 충돌하게 되었다.
[45]
시리아
카톨릭 등의 친서방 기독교계 소수가 반군에 의해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가 되느니 아사드 정권이 존속하는 게 낫다는 이유로 대체로 아사드를 지지한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내전 초반 반군을
유럽연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입장이었다.
#,
## 이후 각종 악재가 겹치자 최종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 아사드 정권 자체에 대해서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정권은
1차 리비아 내전에 선제적으로 개입한 전임자
사르코지의 정책을 이어 아사드 축출을 적극 지지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마크롱 정부로 넘어오고 나서는 사실상 주도적인 역할은 하고 있지 않는 상태. 프랑스의 입장 변화는
아랍의 봄 당시 발생한 대규모 혼란에 책임을 지겠다며 자국에 난민을 대거 받아들였는데 아랍계 난민이 저지른
파리 테러 등으로 자국 내 여론이 급속히 악화된 탓도 있다. 이후로도 인권 유린 문제로 시리아 정부 구성원들에게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하는 등 여전히 시리아와 적대적이다.
#
[46]
영국 내에서도 후자인 테러리즘 대책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당적 합의가 이뤄졌지만 좌파에
반전주의자인
제레미 코빈 등의 인사들은 시리아 ISIL 공습에 반대하는 등 진통이 있었다.
[47]
카타르는
무슬림 형제단 계열 무장 조직들을,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이쉬 알 이슬람 등의 와하브주의 파벌을 지원하는 등 그들끼리도 입장 차이가 어느 정도 있었다. 동부 구타를 거점으로 시리아 전국에 영향력을 끼치던 자이쉬 알 이슬람이 격퇴당 하고 잔당들은 튀르키예 지원 자유 시리아군으로 가버린 이후로는 사우디의 관심과 원조가 크게 줄어든 상태.
[48]
무슬림 형제단에 적대적인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 카타르와 함께 아랍 왕정 중에서는 유화적인 입장이라 무슬림 형제단 계열 반군들이 요르단의 후원을 받았다.
[49]
전직 시리아 군인들과 시리아 정부에 반대하는 민간인들이 모여 조직한 무장 단체로 대부분 시리아 내 수니파 국민들로 구성
[50]
세력이 커지면서 자기들끼리 분열하여 싸우기 시작
[51]
시리아 북부 ISIS세력이 소멸하면서 자연스럽게 북부 지역에서 시리아 반군과 YPG 대립 구도가 형성됨
[52]
2019년 이후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간의 충돌보다는 반군과 쿠르드 민병대(YPG) 간의 충돌이 주로 보인다. 시리아 반군이 시리아 정부군에 연일 패배하여 시리아 북부 쪽으로 밀려났는데, 이 곳이 하필 쿠르드족 근거지이다.
[53]
전쟁의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여러 세력이 영향력을 유지하며 충돌 가능성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소강기로 보기 어렵다.
[54]
시리아 정부
[55]
이는 내전 초창기인 2011년~2012년에 두드러졌다. 이 시기의 외신 보도의 영향으로 이미 민주화 문제는 수 년 전에 물 건너가고, 이슬람
수니파/
시아파 종파간 대립과
이슬람 극단주의 vs
세속주의, 국제 사회의 대리전 양상으로 변한 지 오래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서조차 시리아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 중에선 아사드와 시리아 정부='절대악 독재자', 반군='독재자에게 잔혹하게 학살 당하다 못해 정부군에게 처절하게 저항하는 정의로운 민주 투사들' 식의 단순한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무위키(당시
엔하위키)의 당시 논조도 다르지 않았다.
[56]
잔혹한 시위 진압이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명백히 실존하는 아사드 정부의 실책이었지만, 소위 민주주의 반군 식으로 묘사되는 반군 내에서도
사우디나 아랍 왕정 국가에서 지원 받는
이슬람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 조직들 상당수가 포진해 있었고, 반 정부 시위의 참가를 중립적인 일반 시민들에게 강요한다던지, 반군도 정부군 못지 않게 인권 탄압,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거의 묘사하지 않는 편파적 기사를 보도하였다.
[57]
당장
유튜브에서도 영어 검색 한 번으로 아사드 대통령의 전쟁에 관한 서구 언론과의 수많은 인터뷰를 볼 수 있다. 댓글창에는 서방 주류 언론의 반군 위주 편향 보도를 까고 아사드를 옹호하는 서구 국가 유튜버들의 댓글이 많은 점도 재미있다.
[58]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러시아어로 검색해보더라도 러시아가 중동에서 극단주의를 제압한다는
국뽕 유튜버들과 괜히 러시아 경제도 어려운데 쓸데없이 돈 낭비한다는 의견 등 호불호가 갈린다. 마치
중국 네티즌들이
북한
김정은을 '중국에 빈대 붙는 식충이'라고 놀리는 것처럼 아사드를 비하하는 의견도 있다.
[59]
대한민국 언론에서 비영미권, 특히 러시아·아랍·쿠르드 등 제2, 제3세계 외신을 인용하는 일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다.
[60]
2017년 시점에선 소액의 월급이나마 지급되고 있다. 대략 14,000시리아 파운드, 한화로 약 3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