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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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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내전

1. 개요2. 경제적 원인3. 지역주의4. 정치-종파갈등5. 외교적 원인

1. 개요

시리아 내전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된 것이므로 모든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시리아 내외부의 복잡한 정치/외교/종교적 갈등을 누르며 유지된 수십년간의 독재가 사실은 경제성장과 풍작으로 불만을 달래며 유지된 것인데[1], 기후변화로 인해 십여년간 흉작이 들어 더 이상 달랠 길이 없어지고, 아랍의 봄이라는 외부적 사태에 의해 불만이 폭발해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2. 경제적 원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원래 안과의사였고, 후계자 대상이 아니었던데다 성격도 온화하였고 바트당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취임한 2000년대 이후로는 대외적으로 경제를 개방하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으며 취임 연설에서는 민주화를 언급하기도 해 이를 성급하게 받아들인 시리아 지식인 100여명이 시국선언을 할 정도였다. 아버지인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

하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아 걸프전쟁 때에는 서방측 동맹에 참여하기도 했던 노련한 정치꾼인 하페즈 알 아사드와는 달리, 경험이 부족한 바샤르 알 아사드는 9.11 테러 사건으로 촉발된 중동 정세에서 미국 편을 들지 못했고, 이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부시 정권 내내 테러지원국의 혐의를 받으며 경제 제재를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하여 100만명에 달하는 이라크 출신 난민들이 시리아 내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으나, 이들에게는 일자리가 별로 없었고 싼 임금으로 시리아 국민의 일자리를 잠식하기도 하여 내부적인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또 서방국가의 경제 재제로 인해 대외적인 수출입에서 제한을 받는 바람에 모처럼 도입하기 시작한 자유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몇년간에 걸친 흉작이었다. 이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파산하고 도시 저임금 노동자가 된데다가, 농산물 값이 올라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일각에서는 이 기후 변화로 인한 흉작이 사실은 가장 큰 원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당장 수백만을 먹여살릴 식량과 일자리가 한순간에 없어져 버리니 가만히 앉아 굶어 죽기보다 총을 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 만화로 보는 기후 변화가 시리아 사태에 끼친 영향[아카이브]

3. 지역주의

시리아는 원래 지역 이름이었을 뿐 독자적인 국가가 된 것은 1946년 독립 이후였다. 오스만 시대부터 시리아 지역은 다마스쿠스 알레포 두 도시를 중심으로 따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이 두 지역은 지금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바트당이 정권을 잡아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프랑스 식민지 시절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하던 지주들의 땅이 모조리 몰수되었으며 특히 피해를 크게 본 것이 알레포 지역의 지주들이었다. 특히나 다마스쿠스가 수도였고 다마스쿠스가 사회주의 정책을 입안한 만큼 단순한 지역 차이는 증오를 내포한 지역주의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변수가 존재했다. 다마스쿠스 지방의 유력자들은 어쨌든 정권 핵심부에 들러붙는 방법을 택한 반면 알레포 지역은 그렇지 않았고 무슬림형제단이 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했다. 바트당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지역감정은 개인간의 원한까지 더해 더욱 공고화되었으며,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이 사다트 대통령 암살에 성공한 것에 자극받아 시도한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 암살이 미수로 그치면서 근거지인 하마 지역에서 진압 전투가 벌어졌다. ( 하마 학살 참조)

가족의 죽음은 반드시 복수한다는 아랍 정서가 사라지지 않은 시리아 아랍인 특성상 이 원한은 뿌리깊은 지역주의가 되었으며, 한때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역이 공고한 반군 거점[2]인 것은 이 지역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4. 정치-종파갈등

시리아는 대외적으로는 아랍 사회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바트당이 지배하는 국가이며, 이에 따라 종파, 민족, 종교적인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권과 군부의 핵심은 오직 알라위파, 아사드 가문이 아니면 절대로 오를 수 없다는 이중적인 사회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본디 알라위파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아랍 세계에서 차별받고 천대받는 족속이었으며, 교육을 받지 못해 교양이 부족했고 하급 공무원이나 가정부를 하는 것이 고작인 계층이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를 비롯한 알라위파가 군부에 많았던 것도 남들이 기피하는 직업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취업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이후, 레바논의 이슬람 성직자들에게 알라위파를 시아파 무슬림으로 인정하게 하는 교리해석(파트와)를 발표하도록 노력한 것도 바로 이단에서 주류 무슬림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토지 몰수로 인해 몰락해버린 알레포 지역의 구 지주세력들은 물론,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무슬림에게 알라위파는 아무리 노력해도 천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알라위파가 정권의 핵심을 차지하고,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싹싹 긁어모아 자신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정권의 핵심이 될 수 없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염증과 함께 알라위파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하페즈 대통령도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국민들 대다수를 철저하게 감시하는 정보감시체계를 구축했고, 밀고제를 도입하여 사회분위기를 경직시켜 정권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없도록 했다. 이것이 악순환이 되어 왔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취임 이후로는 이러한 감시 체계를 느슨하게 하고, 바샤르 스스로도 전향적인 정책을 추진해 왔으므로 집권 11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의식은 많이 희석되었으나, 정부와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케케묵은 이 정치-종파적 관점이 부활하여 국민들의 증오를 부채질하는 요소가 되었다. FSA(자유 시리아군)이 일시적으로 알라위파 지역인 라타키아, 타르투스를 점령했을 때 알라위파에 대한 학살이 벌어진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바샤르 알 아사드는 내전이 벌어지면서 한때 은퇴시켰던 정보기관 과격파들을 도로 채용해버렸다(...)

5. 외교적 원인

시리아는 아랍 세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시아파가 정권을 잡은 나라였으며,[3] 아랍 사회로부터 적대시되는 이란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창구 역할을 해 왔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이란을 직접적으로 도왔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모순과 낮은 공업수준으로[4] 인한 경제적 위기를 이란과의 교역과 차관으로 해결해 왔다.

이란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걸프지역 국가들은 시리아를 좋게 보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을 자처한다. 또한 둘다 신정일치의 종교국가이며, 페르시안 걸프의 명칭과 영유권을 놓고 군사적 충돌을 반복해 왔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의 국가는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과 함께 이라크에게 막대한 물자 지원을 하여 사실상 이란과의 대리 전쟁을 수행하게 만든 배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집트가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대 이스라엘 전선에서 빠져나가고[5], 이라크는 아라비아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위력을 통한 채무 변제를 노리려다가 오히려 미국의 개입이 일어난 걸프 전쟁을 통해 완전히 주저앉았다. 또 시리아는 비록 정권의 수뇌부는 시아파로 분류되는 알라위파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아랍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종교 민족에 구애받지 않는 세속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었다. 또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대응을 천명하는 아랍세계의 전략적 우군이었기 때문에 걸프지역 국가들은 시리아를 겉으로는 배척하지 않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취임 이후 특히 터키와 카타르는 시리아에 대한 경제협력을 강화해 왔으며 카타르는 차관을 제공하고 서방의 경제 재제를 겪는 시리아를 위해 자국 명의로 항공기를 구매하여 아사드 대통령의 전용기로 대여해줄 만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받은 시리아 국내의 불안한 분위기( 아랍의 봄)에 더하여 서방국가의 무력개입을 암시하는 외교적 질타, 그리고 이에 더해 그간 시리아에 내재되어 있던 실업 문제, 경기 침체로 인한 흉흉한 민심이 뿌리깊은 알라위파에 대한 증오와 알레포-다마스커스간의 지역 갈등, 무슬림 형제단의 봉기와 같은 것이 연쇄적으로 작용하면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었다.

이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에르도안 총리는 시리아에 우호적이었던 태도를 180도 바꾸어 시리아 정부를 악마로 비난하고, 아사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으며 시리아 반정부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앞서 든 대로 걸프지역 국가들, 그리고 이슬람주의자인 에르도안 총리의 터키는 시아파 세력이 수뇌부를 차지하는 시리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사담 후세인 사망 후 시아파 국가로 돌아선 이라크에 의해 더욱 증폭된 이란의 전략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시리아 국민 다수인 수니파가 정권을 잡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레바논을 두고 이어지는 영향력 싸움에서, 사우디 국적을 가지고 사우디에서 성공한 레바논 총리 하피크 라리리가 시리아의 레바논에 대한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독자적인 외교를 하려던 것에 대하여 의문의 폭발 사고로 암살당했던 것을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음모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레바논에서의 영향력 증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아사드 정권이 무너져야만 했다.

민주화 시위 초반 아사드 대통령은 개헌논의까지 언급하며 시위대들을 달래려고 노력했지만 카타르는 아랍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자국 방송사인 알 자지라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흑색선전에 돌입했으며, 이로 인해 모스크바 지국장 등이 자국 방침에 분노하며 사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레바논 등지에서 대량으로 무기가 시리아 국내로 반입되기 시작했다. 알 자지라와 서구 언론은 시리아 정부군이 민중 대학살을 개시했다고 주장하며 무력개입을 요청했고 시리아 정부는 해명을 계속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어 관공서가 습격당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 교전이 발생하여 시민이 사망하는 등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내전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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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를 보아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풍요로운 경제성장으로 달래며 군사정권이 유지되어왔다.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적 충격이 오자 오자 박정희 정권은 부마항쟁으로 대규모 반발에 직면하게 되고 김재규가 아니었다면 부마항쟁이 정권을 끝냈을 것이다. [2] 단, 4년간의 반군의 알레포 점령 동안에도 알레포 서부 지역은 정부군 거점이었다. [3] 이란 아제르바이잔은 아랍 국가가 아니고, 이라크는 소수파인 수니가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후세인의 축출 이후 다수인 시아파 정권이 들어섰고, 바레인도 시아가 다수이나 수니가 정권을 잡고 있다. 특히 바레인은 서방과 다른 걸프 연안의 수니 왕정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단시일에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다. [4] 사실 낮은 공업수준은 시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중동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5] 하지만 이것은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의 운명을 종결짓고 만다.